영국 여왕의 침실에 침입했었던 사람
1982년 7월 9일 금요일 오전 7시 15분경.
영국 국왕 일가가 거처하는 런던의 버킹엄 궁전.
그중에서도 여왕이던 엘리자베스 2세(당시 56세)의 침실.
마이클 페이건은 바로 그날 그곳에 있었다.
'싱글룸에 더블 침대군.'
페이건은 침대 가까이로 걸어가 커튼을 열어젖혔다. 여왕은 리버티 프린트 무늬가 새겨진 무릎 기장의 잠옷을 입은 채 꿈나라 중이었다.
그렇게 페이건은 영국 군주의 발치에서 한동안 기립해 있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낯선 인기척에 여왕이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여왕의 시야에 포착된 건, 처음 보는 맨발의 남자가 자신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장면이었다.
비현실을 뛰어넘어 초현실적인 상황에 느닷없이 놓여진 여왕은 당연히 넋이 나갈 수밖에 없었다.
어찌나 당황스럽고 얼이 빠졌는지, 오히려 그 자태가 극히 차분하고 우아해 보일 정도였다.
여왕이 입을 뗐다.
"당신 누구죠? 여기서 뭐 하고 있는 거예요?"
영국 역사에 길이 남을 런던의 여름이었다.
1982년 여름, 영국 런던.
34세의 마이클 페이건은 아내와의 사이에서 4명의 자녀를 둔 아버지이자 주택 도장업자였다.
헌데, 이 무렵 그의 삶은 무너지고 있었다. 일자리에서 실직당한 후 그는 삶 전체를 알코올과 '마술버섯'에 의탁하고 있었다.
급기야 견디다 못한 아내가 네 아이를 데리고 집을 나갔으며, 페이건은 보다 깊은 절망감으로 스스로 발걸음하기에 이르렀다.
그렇게 수개월간을 소위 쩔어 지내던 페이건.
하루 중 반 이상을 온전치 못하던 정신상태에 빠져있던 그가, 영국의 상징인 버킹엄 궁전과 여왕에게 집착을 하기 시작한다. 궁전에 들어가고 싶고 또 여왕과 만나고 싶었다.
왜인진 자세히 설명할 순 없으나, 두 존재에 대한 급격한 애정이 피어났으며 그러한 애정은 애착과 애증 또한 불러일으켰다.
6월 7일 밤 11시 30분경.
이러한 집착은 과도한 마술버섯의 섭취와 맞물려 페이건을 버킹엄 궁전 울타리로 인도했다.
스웨터에 청바지 차림이었던 페이건은, 신발과 양말을 벗어젖히고는 벽을 타기 시작했다.
그렇게..
역사적인 담치기가 시작되고..
철망을 넘어 무려 4m 꼭대기까지 기어 올라간 페이건은 평평한 지붕으로 놓여진 배수관을 타고서 마침내 열려있던 3층 창문을 통해 입궁하기에 이른다.
물론..
입궁 과정이 그저 무난하기만 했던 건 아니다.
아니..
하나 빼고는 무난했다.
페이건이 입궁을 시도하던 3층 창문은 151호실의 창문이었고, 그곳엔 왕실의 메이드 중 하나였던 사라 카터 양이 독서 중이었다는 것.
그렇게 창문 바깥으로 보이는 괴한을 목도한 사라는 경기를 일으키며 방에서 뛰쳐나와선 다른 두 메이드들에게 이같은 사실을 알린다.
이에 놀란 두 메이드가 사라와 함께 151호실을 방문했으나..
그곳엔 아무도 없었다.
사라 양도 마술버섯의 영향 아래 놓여있던 것일까?
아니다.
사실..
페이건은 사라에게 들킨 걸 개의치 않아 하고는 그대로 151호실을 지나쳐 복도로 뚜벅뚜벅 걸어 나가고 있었다.
'어.. 나 왜 안잡히지..?'
의아한 감정에 사로잡히면서도 페이건은 계속해서 복도를 따라 걸어 나갔다.
곧이어 '마크 필립스('여왕의 딸 앤과 결혼한 전직 올림픽 승마 금메달리스트)라고 이름이 새겨진 문이 나왔다.
'부부 침실인가 보지? 자고 있을 테니 방해하지 말아야겠군.'
이어 페이건이 당도한 곳은 108호실이었다.
이곳은 당시 결혼 직후 첫째 아들 윌리엄 왕자를 잉태 중이었던 왕세자비 다이애나 앞으로 국민들이 보낸 갖가지 출산 기원 선물이 보관되던 곳이었다.
물론..
이를 알리 만무했던 페이건.
허나, 열어젖힌 방문 너머로 금은보화가 쌓여있는 것을 본 그는 그대로 그곳에 눌러앉기로 한다. 그렇게 방을 뒤적거리다 캐비넷에서 캘리포니아산 와인 1병을 포착한 페이건은 태연히 자리 잡고선 홀짝이기 시작한다.
'에라, 여기서 마시고 있다 보면 누군가가 와서 보고는 체포되겠지, 뭐.'
그무렵..
반대편에선 사라를 포함한 메이드 셋이 경보를 울렸고, 상황을 전파받은 제프리 브레이스웨이트 경사가 이들과 함께 문제의 괴한을 목격했다던 사라의 방으로 향했다.
허나..
그곳엔 아무도 없었다.
이 무렵..
괴한은 태평하게 와인을 홀짝이다 이제는 왕궁 탐험에 나섰다.
다이애나 왕세자비의 방을 지나 거실이라 여겨지던 곳에서 '왕좌'가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기분 좋게 취한 페이건은 그대로 왕자에 드러눕듯이 몸을 내던졌다.
'우와! 이거 엄청나게 푹신하잖아!'
페이건은 웃음을 터뜨리고는 테이블에 양발을 올리고선 주변의 예술품들을 관람했다.
'이거 좋네. 그림들 좀 보고있으면 누가 오겠지.'
헌데..
아까부터 그 '누군가'가 도통 올 기미가 없었다.
사실..
보안요원들은 메이드인 사라가 헛것을 본 거라고 여기고 있었다.
그렇게 몰려오는 취기와 피곤함에 못 견딘 페이건은 집에 가고 싶어 스스로 궁을 빠져나가기로 결심, 한참을 돌아다닌 끝에 뒷마당으로 나가는 문을 찾아 높디높은 담벼락을 기기 시작한다.
'아오! 들어오는 것보다 나가는 게 더 힘드네!'
무사히 왕궁 탐방을 마치고서 귀환한 페이건.
허나, 그의 기행은 이게 끝이 아니었다.
그로부터 며칠 후, 아내를 찾아 나서겠다며 훔친 차량을 몰다가 체포되며 3주 후 보석으로 풀려나는 신세가 된다.
풀려나 자유의 몸이 됐으니, 술이 빠질 수가 있나. 그는 밤새 위스키를 들이킨다. 10잔까지는 셌는데 그다음부터는 모르겠다.
그렇게..
어둠이 가시고 아직 아침 해가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새벽녘, 페이건은 결심한다.
'좋아! 궁에 가볼까나.'
새벽 6시 45분경.
지난번 왕좌로의 길을 인도했던 그 배수관을 통해 지붕에 도달한 맨발의 페이건.
이번엔 색다름을 추구하고자 다른 창문을 통해 입궁한다.
그렇게 들어선 1층 방은, 영국 왕실의 우표 컬렉션이 보관 중이던 방이었다.
고가의 수집품을 잠시간 탐닉하던 페이건은 사방의 출입문이 모두 잠겨있기에, 하릴없이 다시금 창문을 통해 빠져나온 뒤 현관 본관 지점 구석의 배수관을 오르기 시작한다.
이번에 들어선 곳은 메이드장이드장 피터 애쉬모어의 사무실 창문이었다.
한편..
복도를 제집처럼 기웃거리며 지나가던 페이건이 식료품 저장실 부근에서 한 메이드에게 포착된다.
허나, 너무도 태연한 모습에 메이드는 그가 침입자라는 생각은 하지 못하고서 그저 직원 중 하나이겠거니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이 무렵 페이건이 궁을 활보하는 동안 경보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고, 명화들을 따라 걷던 페이건의 앞에 대기실이 나타난다.
대기실에 들어선 페이건의 눈에 유리 재떨이가 들어왔다.
그 순간, 아니, 어쩌면 그 이전부터였을지 모를 편집망상적 애증으로의 애착이 그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이 재떨이를 부숴서 조각낸 다음, 그걸로 여왕 앞에서 내 손목을 그어야겠다.'
1982년 7월 9일 금요일 오전 7시 15분경.
영국 국왕 일가가 거처하는 런던의 버킹엄 궁전.
그중에서도 여왕이던 엘리자베스 2세(당시 56세)의 침실.
마이클 페이건은 바로 그날 그곳에 있었다.
'싱글룸에 더블 침대군.'
페이건은 침대 가까이로 걸어가 커튼을 열어젖혔다. 여왕은 리버티 프린트 무늬가 새겨진 무릎 기장의 잠옷을 입은 채 꿈나라 중이었다.
그렇게 페이건은 영국 군주의 발치에서 한동안 기립해 있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낯선 인기척에 여왕이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여왕의 시야에 포착된 건, 처음 보는 맨발의 남자가 자신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장면이었다.
비현실을 뛰어넘어 초현실적인 상황에 느닷없이 놓여진 여왕은 당연히 넋이 나갈 수밖에 없었다.
어찌나 당황스럽고 얼이 빠졌는지, 오히려 그 자태가 극히 차분하고 우아해 보일 정도였다.
여왕이 입을 뗐다.
"당신 누구죠? 여기서 뭐 하고 있는 거예요?"
페이건은 물끄러미 여왕을 쳐다볼 뿐이었다.
여왕은 침대 옆에 위치한 비상벨을 눌렀다. 하지만 작동이 제대로 안 되는지 아니면 직원들이 자리를 비워 신경을 쓰지 못하고 있는지 누구도 오질 않았다.
여왕은 침대 옆 탁자 위로 놓인 전화기를 들어 두 차례나 경비요원을 호출했으나 딜레이가 있었다.
마침내 침대에서 일어난 여왕이 페이건에게 말했다.
"잠시만 기다리세요. 내가 가서 누군가를 좀 불러와야겠군요."
여왕은 맨발로 맨발의 페이건을 지나쳐 방을 나갔다.
어찌 보면..
아니, 멀리서 보나 가까이서 보나 한편의 희극이었다.
사실, 이 무렵 경비요원과 메이드들의 출퇴근 및 교대 시간이 맞물리며 혼란스러운 와중이었으며..
상주 중이던 직원 및 메이드들은 평소 일과대로 왕실의 개들을 야외에서 훈련시키고 있었으며, 여왕의 숙면을 방해하지 않고자 다른 방들에선 문을 닫은 채 청소 중이었다.
하여, 비상벨이 연결된 여왕의 방 바깥 복도와 식료품 저장실까지의 공간은 우연찮고 기막히게도 공백지가 됐던 것.
한편..
마침 개 훈련에서 복귀한 여왕의 풋맨 폴 와이브루가 여왕과 마주쳤고, 그렇게 폴이 개를 여왕에게 맡기고는 침실에 홀로 남겨진 페이건에게 다가선다.
"여왕과 이야기하고 싶어요. 여왕께 할 말이 있단 말이에요."
"그래요. 알겠어요. 하지만 먼저 여왕께서 제대로 옷을 갖추도록 해주세요."
"긴급한 일이라고요."
"그렇군요. 이봐요, 뭐라도 한잔 하실래요?"
"..좋죠. 스카치 한 잔 주세요."
그렇게 폴은 페이건을 다독이며 식료품 저장실로 데리고 가 술과 담배를 제공하고는, 경찰이 도착해 인계할 때까지 스무스하게 방에 가두는 데에 성공한다.
한여름 밤의 꿈에서 깨어나는 순간이었다.
이렇게..
자칫 역사적 대형 사고로 이어질 뻔한 해당 가택침입 사건은 인명피해 없이 마무리 지어진다.
이후 페이건의 행위는 형사재판보다는 민사재판에 해당한다는 판단하에 기소 후 재판대에 세워졌으며, 여왕의 침실에 무단 침입한 혐의는 기소되지 않고서 와인 절도 혐의로만 기소가 이뤄진다.
그리고 배심원들은 14분 만에 만장일치로 정신과 평가를 위해 무죄를 선고하며 최종적으로 기소는 기각 처리된다.
그렇게 페이건은 정신병원에서 3개월을 보내고서 1983년 1월 21일 집으로 귀환됐다.
해당 사건을 통해 궁전 보안 프로토콜의 총체적인 문제가 노출됐고, 이에 영국 내무장관이었던 윌리엄 화이트로가 사의를 표명했으나 여왕이 받아들이지 않으며 무산된다.
이후 총리였던 마거릿 대처가 궁을 방문해 사과하며, 대대적인 순찰 강화 및 주변 방어 시설물의 업그레이드와 같은 보안 시스템의 변화가 이뤄진다.
한편..
훗날 페이건은 언론을 통해 자신이 왜 그런 짓을 했는지 아직도 모르겠다며, 사건 5개월여 전부터 적정량 이상의 마술버섯을 해오던 차에 발작적으로 머릿속에서 궁에 침입하자는 결심이 떠올랐다고 설명한다.
사건 이후에도 페이건은 경찰관 폭행이나 반나신 노출로 기소되는가 하면, 1997년엔 가족과 함께 헤로인 공급 공모 혐의로 기소되면서 4년간 수감되기도 한다.
현재 80을 바라보는 페이건은 한때 심장마비와 코로나로 인해 사경을 헤매기도 했지만, 여전히 런던에서 거주하며 이따금 언론과 인터뷰를 하곤 한다.
최근엔 넷플릭스의 인기 드라마 <더 크라운>에서 해당 사건을 에피소드로 다룬 것을 계기로 언론과 인터뷰를 나눴으며, 여기서 다음과 같은 감상평을 남기기도 한다.
"드라마 속 연출은 현실과 달라요. 여왕은 저와 대화를 채 나누기도 전에 방에서 나갔으니까요. 여왕에게 담배를 요청한 적도 없고요. 그리고 저를 연기한 배우보다 제가 더 잘생겼죠. 저는 여전히 여왕이 bee's knees(최고를 의미하는 속어)라고 생각해요. 그녀가 100살까지 살기를 바랍니다."
"다시 여왕의 침실에 침입할 계획은 없나요?"
"요즘은 보안이 강화된 것 같더군요."
에필로그
: JFK 암살 사건과 로널드 레이건 암살 미수 사건을 거치며 미국 비밀경호국의 시스템 체계가 자리 잡았듯이, 해당 사건 이후 영국의 버킹엄 궁전 역시 보안 프로토콜 및 경비 시스템에 많은 변화가 이뤄진다.
또한, 2007년경 버킹엄 궁전이 중대 조직범죄 및 형사법에 따라 지정 장소화되면서 궁의 무단 침입은 더는 민사가 아닌 형사 범죄로 다뤄지게 됐다.
영국의 군주였던 엘리자베스 2세는 2022년 9월 8일 향년 96세로 70년 간의 재위를 끝으로 타계한다.
참조
<The Guardian/From the archive, 24 September 1982: Buckingham Palace intruder cleared of burglary> Nick Davies
<The Guardian/The Crown, magic mushrooms and the truth behind Michael Fagan's palace break-in>
<The New York Times/Text of Scotland Yard's Report On July 9 Intrusion into Buckingham Palace
<The Washington Post/Fact-checking ‘The Crown’: What the man who broke into the Queen’s bedroom really wanted> Michael S. Rosenwald
<Town & Country/Who Is Michael Fagan, the Man Who Broke Into Queen Elizabeth's Bedroom?> Lauren Hubba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