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진 천재 물리학자가 남긴 연금술 기계

"세상에는 여러 수준의 과학자들이 있다. 이류나 삼류들은 최선을 다하지만 결코 커다란 성과를 이루지는 못한다. 다음으론 과학적 진보에 기반이 되는 핵심적인 발견을 이루는 일류들이 있다. 그리고 갈릴레이나 뉴턴과 같은 천재들이 존재한다. 마요라나가 바로 이런 천재 중 하나였다."

- 엔리코 페르미

역사에 자신의 이름을 짧으면서도 굵은 필체로 새겨놓은 이탈리아의 물리학자가 있다.

동료 물리학자들로부터 천재로 칭송받았던 남자.

이 남자를 둘러싼..

그야말로 기상천외하다고밖에는 표현할 방도가 없는..

그런 '전설'이 존재한다.

헌데 안타깝게도, 이 전설은 자국인 이탈리아 외엔 영어권 국가에서조차 제대로 전파가 이뤄지지 않았다.

물론 우리 국내에서는 아예 그 정보가 전무하다시피 하며, 언제나처럼 이상한 옴니버스가 그러한 '국내에 알려지지 않은 미지의 이야기'를 '정확성'에 입각해 상세히 소개하고자 한다. (과거 수년 전 한 차례 해당 이야기를 파트너 업체 정기 연재를 통해 간략히 소개한 바가 있었음)

이야기 시작!

이탈리아 태생의 미국인 물리학자 엔리코 페르미.

그는 양자론, 입자물리학, 핵물리학, 통계역학의 발전에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한 역사적인 물리학자이다. 노벨 물리학상 수상 경력에 원자폭탄의 설계자이기도 했던 그는, 선구안과 후학 양성에서도 능력을 발휘하며 제자 중 노벨상 수상자를 6명이나 배출했을 정도.

이런 페르미가 진정한 천재이자 가르침을 필요로 하지 않는 완성된 학자라고 칭송하며 의견을 따르기도 했던 라이벌이자 협력자였던 남자, 20대에 자신의 이름을 딴 방정식과 개념을 제시하며 오늘날 암흑물질 연구 및 양자 컴퓨팅 분야의 중요한 토대를 제공한 인물, 20대 중반 무렵 중성자의 존재에 대해 최초로 예측한 이론 물리학자.

이 물리학자의 이름은, 에토레 마요라나이다.

(Ettore Majorana)

1906년 이탈리아 시칠리아 카타니아에서 태어난 에토레 마요라나.

명망 있는 가문의 7남매 중 다섯째로 태어난 마요라나는, 다른 형제자매들과 마찬가지로 우수한 두뇌를 가지고서 태어났다. 아니, 가족 중 누구보다도 뛰어났다.

마요라나는 5살 무렵부터 복잡한 계산식을 수행하며 수학 신동이었고, 이후 물리학에도 지대한 관심을 쏟는 가운데 초등학교 졸업 후 4년 만에 고등학교 과정까지를 이수한다. 이탈리아에서 최고 권위를 자랑하는 로마 예수회 학교인 마시밀리아노 마시모 연구소에서 1-2학년 과정을, 로마에서 가장 오래된 중등학교 토르카토 타소 리세움에서 3학년 과정을 말이다.

그리고..

1927년 여름.

사피엔차 대학(교황의 주도로 1303년 로마에 설립된 최고의 지성 교육 및 연구 센터) 공학과인 마요라나와 급우이자 친우였던 에밀리오 세그레가, 물리학으로 함께 전과하자며 끈질기게 설득하는 일이 벌어진다. (세그레는 훗날 반양성자 발견으로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

평소 전과를 고민 중이던 세그레는 이제 막 이론 물리학 정교수로 임명된 26살의 페르미를 만나고서 결심을 굳힌다. 그리하여 평소 공학이 아닌 물리학자의 자질이라고 여겼던 마요라나에게 설득을 시작한 것.

그렇게 그해 가을-겨울, 페르미의 연구소에서 페르미와 마요라나의 만남이 발생한다.

당시 페르미는 훗날 토마스-페르미 모델이라 이름 붙여지는 원자의 통계적 모델을 연구 중이었고, 둘은 해당 항목을 주제로 논의를 나누며 최근 연구 결과를 공유하기까지 한다.

다음 날 아침, 다시 연구소를 찾은 마요라나가 방정식 변환 및 수치 적분표 계산 테이블을 보이며 페르미에게 대조를 요청했고 그 결과 두 사람의 표가 정확히 일치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후 물리학으로 전과한 마요라나는 방사성 핵의 양자 이론에 대한 우수한 논문을 발표하며 2년도 걸리지 않아 우등으로 졸업한다.

실지 마요라나의 방정식 관련 메모

당시 페르미를 중심으로 한 당대 최고의 젊은 물리학 지성들이 그룹을 구성해 연구소에서 협업을 했는데, 마요라나는 대부분 홀로 연구하거나 도서관에서 시간을 보내며 페르미와 직접적인 협업을 하지 않는 유일한 그룹원이었다.

마요라나는 극히 내향적이고 냉담하며 비판적인 데다 동시에 자기 비판적이고 겸손하기까지 한 괴짜였다. 그럼에도 페르미와 대등한 라이벌리를 구축할 정도로 우수했기에, 그룹원들은 별칭으로 페르미를 교황으로 마요라나는 대심문관이라 일컬을 정도였다.

자아비판 성향이었던 마요라나는 고작 9개의 논문만을 발표했다. 이로 인해 중성자의 존재를 최초로 예측하고 올바른 실험 해석을 했음에도, 이를 발표하라고 강력히 조언한 페르미의 말을 무시했다가 이듬해 중성자 존재 증명으로 제임스 채드윅이 노벨상을 수상하는 일도 있었다.

한편..

1934년-1937년 동안 마요라나는 갑자기 집에 틀어박힌 채 은거에 들어간다.

그러던 1937년 4월경 전자와 양전자의 대칭 이론에 대한 논문 발표를 결심한 마요라나는 케임브리지, 예일, 카네기 재단의 제안을 물리치고서 나폴리 대학의 이론 물리학 교수직을 수락한다.

이 무렵, 마요라나는 같은 물리학 연구소 출신이자 동료 교수이며 친우였던 물리학자 안토니오 카렐리에게 반복해서 다음과 같은 모호한 말을 내뱉는다.

"물리학은 잘못된 길을 가고 있어. 우리 모두 잘못된 길을 가고 있는 거야."

1938년 3월 25일, 마요라나는 잠시 나폴리를 떠나 휴식 차 증기선에 탑승해 팔레르모로 여행을 떠난다.

그리고..

은행 계좌에서 모든 돈을 빼내 팔레르모로 향했던 마요라나는, 나폴리로 향하는 배편 티켓을 구매하고는 모습을 감춘다.

그러니까, 허공에서 사라진 것처럼 실종이 된 것이다.

당시 이탈리아의 총리 무솔리니가 수사 지시를 내리고 제보금도 걸렸으나, 3개월 간의 집중 수사에도 불구하고 뚜렷한 목격담 하나 건지지 못하면서 사건은 미제가 돼버렸다.

지금까지도.

마요라나는 그렇게 역사에서 사라져 버렸다.

당시 이탈리아 전역에서 그의 실종이 사람들의 관심사가 됐음에도 발자취를 일절 찾을 수가 없었다.

그저..

증기선에서 바다 한가운데로 투신한 것이라든지, 사람들을 피해 아무도 찾을 수 없는 곳에 은거했다든지, 국외로 떠나 신분을 위장한 채 평범하게 살아가고 있다든지, 노숙자 신세를 자처하며 거리를 배회한다는 말들만 공허히 떠돌 뿐이었다.

이러한 전설 중 가장 드라마틱했던 것이..

바로, '수도원 은거설'이다.

수도원 은거설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마요라나는 기질과 성향 자체가 흔히 표현되는 '고독하고 비사교적인 천재 캐릭터'를 그대로 답습하고 있었다.

그런 그에게 있어 물리학 지식이 인간 세상에서 어떻게 오용되고 있는지, 임박한 세계 대전의 우려 가운데 한층 불거지는 인간 혐오, 뛰어난 물리학자로서 세간의 주목과 자신에게 부여되는 의무들과 책임들은 우울증을 심화시키는 요소들이었다.

그리하여, 마요라나는 인간 사회에서 자발적 은퇴를 결심한다.

어려서부터 가톨릭 신자였던 마요라나가 은거지로 삼은 곳은, 수도원이었다.

실종 며칠 전 한 수도원에 입회 요청을 했다가 반려되기도 했으며, 실종 이후엔 몇몇 수도원을 둘러싸고서 '가장 복잡한 계산도 순식간에 해결하는 수도사가 있다, 위대한 과학자가 머물고 있다, 한 수도원장이 마요라나의 어머니에게 아드님이 행복할 것이므로 찾지 말라는 말을 전했다'라는 풍문이 나돌 정도였다.

마요라나의 공식 전기 작가도 수도원 은거설을 추측한 바가 있다."

그리고..

이러한 수도원 은거설과 관련해 너무도 충격적인 주장을 펼치는 이가 있었다.

이 남자의 이름은, 롤란도 펠리자였다.

2013년 당시의 롤란도 펠리자 (Rino Di Stefano)

롤란도 펠리자는 1938년 이탈리아 롬바르디아의 작은 마을 키아리에서 태어났다.

신발 거래상으로 처음 사업을 시작한 그는, 이후 각 분야의 비즈니스에 뛰어들며 전문 실업가의 인생을 살아온다.

그러던 1976년, 여름.

그는 놀라운 주장을 펼치기 시작한다.

자신이 제작한 작은 크기의 기계를 통해 반물질을 이용한 파괴 무기로 사용하거나, 제로의 비용으로 청정의 무료 에너지를 대량 생산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어디에서나 흔히 볼 수 있는 괴짜 발명가로 보이겠지만..

놀랍게도 그의 주장과 기계의 시연을 통해 자국인 이탈리아 정부는 물론이고 미국, 벨기에에서도 기밀리에 접촉을 갖는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이러한 것을 증빙할 실지 영상과 정부 문서가 버젓이 존재한다는 것.

국가원자력위원회 CNEN 위원장 에지오 클레멘텔 교수의 기계에 대한 보고서

헌데..

펠리자는 기계가 전쟁에 사용될 수 있다는 두려움으로 모든 재정적 제안을 뿌리쳤고, 이로 인해 정규 제조 허가 없이 무기를 제작했다는 혐의로 국제 체포 영장이 발부되면서 1982년 해외로 피신하기에 이른다.

그렇게 10년 넘도록 도피 생활을 한 끝에 이탈리아로 돌아올 수 있었던 펠리자. 그동안에도 기계에 대한 추가적인 연구를 소홀히 하지 않았던 그.

그런 그가 1992년 기계의 2시간 분량 시연 영상을 촬영해 공개했는데, 그 내용이 가히 충격적이었다.

이 영상에서 기계는 '어떤 원소든지 다른 원소로 변형 가능한', 그야말로 꿈의 연금술을 펼치고 있었던 것이다.

펠리자는 이 불가사의한 기계를 자신이 직접 제작한 것은 맞으나, 어디까지나 다른 누군가로부터 고안과 설계를 건네받아 완성시킨 것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그가 설계자를 처음 만난 건..

이탈리아 남부 칼라브리아주에 위치한 도시 세라산브루노, 이 도시의 한 암자에 자리한 수도원에서였다고 한다.

1958년 5월 1일이었다.

20대 초반이었던 펠리자가출장차 해당 도시에 잠시 적을 두는 동안 우연찮게 무언가에 이끌리듯 수도원을 방문했고, 그곳에서 모두가 '교수'라 호칭하는 수도자와 조우하게 된다.

두 남자는 첫 만남에서부터 서로 파장이 딱 들어맞는 듯 급속도로 호감을 가지며 친분을 쌓게 됐고, 펠리자는 이 수도자로부터 매일같이 전에 없는 새로운 물리학의 기준을 사사받기에 이른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수도자가 펠리자에게 마침내 고백을 하는 순간이 온다.

"사실은.. 내가 에토레 마요라나라네."

수도원에서 마요라나와 함께 사진을 찍은 펠리자 (Roland Pelizza)

펠리자는 수도자의 말을 쉬이 믿을 수가 없었다.

마요라나는 자신보다 32살 연상일 터였다. 그것도 살아있는다면 말이다. 헌데, 이 수도자는 전혀 중년으로 보이지가 않았다.

허나, 수도자의 고백이 진실됨을 깨달은 펠리자는 곧 그의 친우이자 정식 제자가 돼 본격적으로 관계를 맺기 시작한다.

이 과정에서, 마요라나는 '절대 진공 상태에서 양전자를 생성하는 기계'의 제작법을 전수한다. 해당 기술은 오로지 민간용으로만 사람들의 공공이익을 위해서만 쓰여야 한다는 조건과 함께.

이 제작법이 처음부터 완벽하지는 않았을지 몰라도, 펠리자가 십수년간 수십차례 수도원을 왕래하고 마요라나와 서신을 주고받는 가운데 점차 틀이 잡혀 나갔다.

그리하여..

1973년, 마침내 소형 기계를 통해 무시무시한 강도의 광선을 방출하는 데에 성공한다. 그리고 이러한 파괴적인 힘을 생산적인 목적으로 전환시키고자 개선한 끝에, 1976년경 해당 힘을 열로 변환시키는 방법을 찾아낸다.

이 '절대 진공 상태에서 양전자를 생성하는 기계'는 그야말로 놀라웠다.

한 손에 잡힐만한 크기에 고작 70와트의 전력만 사용함에도 당시 세상에서 가장 큰 열핵 발전소 하나만큼의 효율성을 가지고 있었다.

이 기계 하나가 엄청난 에너지를 생산해 내고, 재료나 배출물 그리고 관리 비용이 모두 제로인 데다 무공해였다.

한마디로, 인류 역사를 송두리째 바꾸며 문명의 레벨을 수십 단계 앞당길 수 있는 무공해 청정 기기인 셈.

그렇게 1976년 여름에 펠리자는 연이 닿는 지인인 비밀경호국 대령을 시연회에 초대했고, 대령과 함께 동승한 내빈들을 모신 자리에서 자신만만하게 기계의 위용을 드러낸다.

허나..

대령과 내빈들은 이 동화 속 존재와도 같은 열에너지를 군사적 사용 용도로만 바라봤고, 이건 이후 펠리자에게 접근해 온 무리들 모두 그러했다.

펠리자는 이탈리아 정부가 해당 기계를 군사적 목적으로 원한다는 것을 알아채고는 협상을 파기했으며, 이후 벨기에 정부 관리들과 평화적 목적을 위해서만 사용한다는 조건으로 115억 유로에 계약을 진행하나..

벨기에 정부 역시 실은 군사적 무기 활용에 노림수가 있다는 것을 깨닫고는 도중에 협상을 무효화 하기에 이른다.

한편..

이에 대한 보복이었을까?

국제 체포 영장이 발부된 펠리자는 이후 10년 넘도록 조국을 떠나 해외를 도피하는 신세가 되고 만다.

이탈리아, 미국, 벨기에 정부와도 직간접적으로 연루되며 강압적인 협상 요구에 시달렸던 펠리자.

그러함에도 끝끝내 기계의 전체 설계도를 지켜낸 펠리자.

그런 그가 1992년, 이 '절대 진공 상태에서 양전자를 생성하는 기계'의 3단계 레벨 버전 시연 영상을 촬영하고 공개하기에 이른다. (상술했던 기존의 무시무시한 광선을 방출하는 게 1단계, 이 광선을 열에너지로 변환한 게 2단계)

2단계가 모든 발병가들의 최종 워너비인 '자유 에너지'였다면, 3단계는 모든 철학자들의 최종 워너비라 할 수 있는 '연금술'이었다.

3단계는 쉽게 말해, 어떤 요소의 물질을 순식간에 다른 요소의 물질로 변형시키는 방식이었다.

이를 통해, 불과 몇 그램에 불과한 폴리스타이렌 폼 큐브가 순금으로 변환하는 모습이 그대로 촬영됐다.

평범한 큐브가 순금 큐브로 변환하는 시연 장면 (Roland Pelizza)

3단계가 끝이 아니다.

하나가 더 남아 있다.

바로, 4단계.

4단계는, 인류의 최종 워너비라 할 수 있는 '불로'였다.

펠리자는 1976년, 1986년, 1996년마다 마요라나의 70세, 80세, 90세 근황 사진들을 공개해 왔다. 이 밖에도 마요라나의 일상적인 모습이 담긴 사진들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러한 사진 속 마요라나는 실종 무렵이던 30대 초반의 모습에서 아주 아주 서서히 늙어가는 모습이었다.

심지어, 90세 무렵에 촬영된 사진에선 환갑인 펠리자보다 족히 10살은 어려 보이는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렇다.

처음 수도원에서 만났을 무렵부터 본 나이보다 훨씬 어려보이던 마요라나. 90세의 나이에도 그저 중년의 남성 정도로 보이는 마요라나.

4단계의 기초적인 방법이 바로 그걸 가능케 하는 것이었고, 이런 기초적인 방법 역시 펠리자에 의해 기존 1-3단계에서처럼 꾸준한 발전이 이뤄졌을 것으로 기대된다.

허나 애석하게도..

2001년, 95세의 마요라나는 펠리자와 연락을 끊고서 죽음을 맞이하기로 결심한다.

그렇게 수도원은 본인의 유해를 익명의 십자가 아래 묻어달라는 요청을 받아들였고, 교황청인 바티칸은 처음 마요라나의 은거를 받아줬던 것과 마찬가지로 지금까지도 그의 수도원 생활을 비밀에 부치고 있다.

그리고 2022년, 펠리자는 코로나의 여파로 병사하고 만다.

펠리자는 마요라나와 2001년까지도 반세기 가깝도록 서신을 주고받으며 친분을 유지한 사제관계이자 벗이었다.

그리고..

펠리자의 사망 이후, '기계'가 모습을 드러내는 일은 다시는 없었다.

'알려진 바로는' 말이다.

자, 이제는 달콤한 꿈에서 깨어날 시간이다.

'어느 날 갑자기 사라져 행방이 묘연해진 역사적인 천재', '자유 에너지', '연금술', '불로'..

저마다 우리의 호기심과 감수성을 뒤흔들만한 소재들.

이런 소재들이 뒤범벅된 채 하나의 거대한 스토리를 이루고 있는 '마요라나와 펠리자의 기묘한 모험담'..

역사적 사실 일부분에 온갖 환상적인 색채를 덧칠해 한껏 꾸며낸 기담.

마치, 그 유명한 '다빈치 코드'와도 같은.

과연..

이 믿고만 싶은 이야기의 내막엔 무엇이 자리하고 있었을까?

1976년 '1&2단계 기계' 첫 시연회와 이탈리아&미국&벨기에 정부와의 접촉담

1976년 여름, 펠리자는 연줄을 동원해 지인인 비밀경호국 대령을 시연회에 초대했고 대령과 함께 동승한 내빈들을 모신 자리에서 자신만만하게 기계의 위용을 드러냈다고 주장한다.

실지로, 1976년 겨울 이탈리아 정부는 소문의 '펠리자 기계'를 검증하고자 국가원자력위원회 CNEN의 위원장 에지오 클레멘텔 교수에게 실험 수행을 승인한다.

펠리자는 분명 사업 수완이 대단하고 바람을 넣을 줄 아는 사람이었다.

물론, 20세기 무렵엔 정부나 정부 산하 기관을 상대로 기세와 허세로 '전설'을 사실처럼 포장하는 이들이 심심찮게 있어왔다.

1950년대에 미국에선 추락한 UFO와 외계인으로부터 회수한 기계를 통해 석유 및 천연가스를 탐지할 수 있다며 일반 투자자에서부터 백만장자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투자금을 뽑아냈던 2인조가 대표적이겠다. 여담으로, 이후 2인조는 사기죄로 기소됐으며 2인조의 바람 넣기가 굉장했던지라 당시 FBI 요원이 직접 조사 보고서를 남겼을 정도. 한편, 2인조의 사기극이 드러났음에도 1980년대 말 UFO 페스티벌 소재로 악용되고 만다. (자세한 이야기는 구글에 [이상한 옴니버스] 'MRB' FBI의 로스웰 외계인 문서, 그리고 UFO의 소 납치 문서 검색)

다시 돌아와..

펠리자는 자신의 연줄을 총동원해 사방으로 바람을 넣기 시작했고, 그러한 바람의 소재로 사용된 게 바로 '죽음의 광선'이었다.

'죽음의 광선'은 최초 1920-1930년대 무렵 미국에서 이론화된 전설이다.

당시 샌프란시스코의 발명가였던 에드윈 스콧이 상공을 비행하는 비행기를 떨어뜨릴 정도의 파괴력을 지닌 전자기 광선 빔 무기를 개발했다고 주장하며 영국 공군 측에 판매를 시도했었다.

이를 시작으로 각국의 발명가들이 엄청난 에너지양을 가지고 수 km 떨어진 거리의 물체를 파괴하는 이 '죽음의 광선'을 개발했다고 선전했다.

허버트 조지 웰스의 1989년 대표작인 우주 전쟁에서도 화성인이 극악한 레이저 빔을 무기로 사용한다 (Henrique Alvim Corrêa)

물론..

이러한 발명품들은 실지로 입증된 적이 없다.

쉽게 말해, 전 세계가 전장의 무대가 돼버린 냉혹하고 살벌한 사회상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한 '시류에 따른 선전 사기극'이라 보면 되겠다.

이러한 사기극이 종전 후엔 천연 에너지의 중요성이 대두되면서 '자유 에너지'가 그 소재가 된 것.

그렇다.

펠리자 역시 이탈리아 '납의 시대'라 일컬어지는 혼돈의 사회상 속에서 시류를 절묘하게 파고들며 사람들에게 향수와 추억이 있는 죽음의 광선을 선전한 것이다.

당시 이탈리아는 극우&극좌 무장집단, 마피아와 같은 범죄조직 등으로 인한 내부 분열과 사회 혼란이 극에 달하던 시대상이다.

이런 가운데 한 실업가가 '죽음의 광선+자유 에너지' 기계를 자신하며 판촉을 하는 게 이탈리아 정부의 눈에까지 들어왔고, 그렇게 스테인리스 스틸과 알루미늄판을 빔으로 뚫는 시연회가 열린다.

여기서 분석을 맡은 CNEN의 위원장 클레멘텔 교수가 남긴 다음의 내용이 충격적이다.

"빔의 에너지는 펄스 지속 시간을 0.1초로 가정하면 금속 융합의 경우 파워가 1500 KW/cm2에 달하고, 금속 기화의 경우엔 40,000Kw, 전력 밀도는 4000Kw/cm2로 상승한다고 산정이 가능하다. 이 레이저 빔의 에너지와 위력은 현존하는 기술의 한계를 뛰어넘으며 입자 또는 원자 빔의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쉽게 요약하자면, 그 손바닥만 한 크기에 저전력을 이용한 펠리자의 기계로 상술한 에너지 빔을 방출한다는 것은 입력 전력의 수십만 배 이상을 출력하는 것이기에 지금의 현대과학으로도 이론적으로 절대 불가능한 공상과학의 영역이다.

허나..

다음의 당시 촬영된 실지 시연 영상을 확인하면, 그리고 클레멘텔 교수의 보고서를 자세히 꼬집어 보면 말이 달라진다.

먼저, 기계 자체는 사람 몸통만 하다.

보고서에 따르면 빔의 에너지는 15만J-400만J 사이로 추정되며 스테인리스 스틸 144g을 녹이거나 기화시켰다고 설명한다.

1970년대 당시엔 이미 고출력 레이저 및 전자빔, 플라즈마와 같은 다양한 방식으로 금속 절단이 가능했던 시절이다.

1960년대 무렵부터 산업용 레이저의 본격적인 개발과 발전이 있었으며, 1976년 무렵엔 상술한 파괴력(?)의 에너지 빔은 정부나 군대 및 대형 기업 수준도 아니고 개인 연구소 또는 중소 제조업체에서도 실현 가능한 수준이었다. (십수만J의 경우에 한정, 보고서에서 임의로 최대치로 산정한 400만J은 대형 연구소 또는 군사 시설 수준)

헌데, 이러한 추정치를 토대로 임의로 펄스 지속 시간을 산정하면 탈시대급 기술력이 되는 것에 불과하다.

무엇보다도, 클레멘텔 교수의 보고서는 일반적인 연구 보고서와 달리 본문이 1페이지에 불과한 노트 수준에 불과하다. 어떠한 정식 데이터 추출 수치나 입력값도 전무하다.

시연회 장소와 테스트 방식 역시 모두 펠리자가 사전에 준비한 것이며, 정식 데이터값을 제출하거나 증빙시킨 바가 없다.

더욱 놀라운 것은, 영상에서처럼 모든 실험 단계가 펠리자의 손아귀에서 움직였으며 이를 벽 너머로 공증인이라는 사람 몇몇이 지켜봤을 뿐이다. 실지로 보고서를 작성한 클레멘텔 교수는 영상을 감상하고서 총평을 남긴 것에 불과하다.

이탈리아 정부와 펠리자 간의 협상 과정에서 당연히 몇몇 유력 인물들이 관여하게 됐는데, 전직 재무장관 출신으로 당시 유력 정치인이었던 플라미니오 피콜리 의원도 그중 하나였다.

그리고 피콜리 의원은 펠리자를 이렇게 평가했다.

"1977년 2월경 클레멘텔 교수가 몹시 분개하며 씁씁하게 말했습니다. 실험이 제대로 이루어진 게 아니며 우리가 다루고 있는 게 사기성 제안에 대한 것이라면서요."

또, 피콜리 의원은 펠리자가 선불금으로 거액의 돈을 요구해서 당황했다고 증언한다. 허나 이미 그 무렵 펠리자의 허풍을 간파하고 있었고, 클레멘텔 교수가 정식 실험 날짜를 정하려 시도하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또 다른 유력 정치인 로리스 포르투나 의원도 다음과 같이 난색을 표했다.

"실험을 묘사한 것으로 보이는 아주 러프한 예측도를 볼 수 있었습니다. 클레멘텔 교수가 작성했던 보고서도 피콜리 의원으로부터 건네받았고요.

마시모 풀리세(전직 이탈리아 첩보 기관 요원 출신으로 펠리자의 기계 판매를 위한 이탈리아, 미국, 벨기에 정부와의 일종의 협상단 역할을 수행했던)를 만나서 모두가 신뢰할 수 있는 과학자들을 모아서 그 자리에서 실험을 실시하지 않는 이상 협상은 무의미하다고 전했습니다. 이후 실험이 실시되는 일이 없었기에 풀리세에게 우리는 더는 관여되고 싶지 않으니 그만두라고 말했습니다."

국방정보국 소속의 주세페 산토비토 장군도 다음과 같은 증언을 남겼다.

"펠리자가 시연 영상을 보여줬습니다. 하지만 저는 영상 내용이 진짜라는 확신이 없었죠. 이후 과학 연구부 장관으로부터 문제의 기계에 대해 물어왔고, 저는 진짜라는 확신이 없다고 대답했습니다. 저는 장관의 요청에 따라 정부 기관의 사람 몇몇에게 구두로 조사 결과를 전달하라고 지시했고 그 문제가 종결됐다고 여겼습니다."

각종 장관직을 이따라 역임하며 총리직도 수행했었던 유력 오브 유력 정치인이자 이탈리아 정계를 주름잡았었던 줄리오 안드레오티도 이런 증언을 했다.

"과학 연구부 장관이 전해준 것이다. 클레멘텔 교수가 필름 기록물을 봤다고 했다. 나중에 문제의 기계를 직접 조사하고 관찰하고 실험하고 싶다고 요청했으나 기계의 오작동이나 애로 사항이 있었다고 했다. 클레멘텔 교수의 결론은 명확한 연구가 이뤄진 작업이 아니므로 펠리자와 접촉을 이어가는 게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이었다.

한편..

펠리자의 판촉 선전 당시 최측근이었던 풀리세가 다음과 같은 결정적 증언을 남겼다.

"펠리자는 사람들을 속이고 또 계속 속일 겁니다. 그는 끝없이 협상을 진행하기만 합니다. 그리곤 합의에 도달하기 직전 모든 걸 포기하고서 처음부터 다시 반복합니다. 이탈리아 의원들, 미국 정부 특사, 벨기에 정부에게도 똑같은 행동을 취했습니다. 궁지에 몰리게 되면 관계를 끊고서 새로운 관계를 모색하는 거죠. 그와 함께하거나 따르는 자들은 분명 화를 당할 겁니다. 지금까지는 게임이 그에게 유리하게 흘러갔었죠. 그로 인해 그는 자만하게 됐고요. 이제 우리는 접근 방식을 바꿔야 합니다. 그가 두려워하는 방식으로요. 복잡하게 할 필요 없습니다. 법을 적용시키면 됩니다. 펠리자는 감옥에 가는 것만을 두려워하니까요."

이러한 증언 모두, 펠리자의 사기극 시도가 발각되며 촉발된 불법 무기 밀매 재판 과정에서 기록된 증언들이다.

결론적으로..

펠리자의 기계는 흐릿한 필름 기록물 속 시연 장면이 전부이며 일체의 데이터 제공이나 직접적인 조사가 이뤄진 적이 없다.

이제는 제법 대중 사이에서 익숙한 '금전적 이득을 위해 일련의 과대 선전으로 포장하는 사기극'의 전형이라 할 수 있겠다.

여담으로..

펠리자의 1&2단계 기계에서 주장되는 '손바닥만 한 크기로 일상에서 사용되는 저전력만을 가지고서 절대 진공 상태에서 양전자를 생성' 이론은 물리학적으로 결코 성립될 수가 없는 엉터리 공상 중의 엉터리에 불과하다.

지금껏 인류는 절대 진공을 실현시킨 바도 없으며, 인류 지식의 최전선이라 할 수 있는 CERN의 대형 강입자 충돌기로도 반수소 형태의 반물질 원자를 고작 0.1초대 동안 포착했을 뿐이다.

문제의 기계 수준에 도달하려면, 개인용 순간이동 기계가 등장하고 딜레이 없이 즉각적인 신체 변형이 이뤄지는 개인 장치가 가능할 정도의 기술력, 즉 꿈과 희망으로 바라보는 공상 과학 속 문명에서나 가능할 법한 것이다.

그리고 백번 양보해 그렇다 하더라도, 보통 그러한 에너지는 우리 주변의 일반적인 전자 제품보다 수십억 배 이상의 전력을 필요로하기에 '손바닥 크기의 저전력'은 성립 자체가 불가이다. 현실에선 엄연히 중력과 같은 절대적인 법칙이 존재하는 것처럼 말이다.

펠리자의 기계를 재연한 것 (Rino Di Stefano)

1992년 '3단계 기계' 연금술 시연회 영상

3단계, 어떤 요소의 물질을 순식간에 다른 요소의 물질로 변형.

펠리자는 이 3단계를 통해, 불과 몇 그램에 불과한 폴리스타이렌 폼 큐브가 순금으로 변환하는 시연 장면을 공개했다.

무려, 128개에 달하는 큐브를.

판타지 공상 속 연금술이 펼쳐지는 장면에 잠시간 달콤해질 수 있겠으나..

해당 시연 영상엔 분명 현실적 오류들이 존재한다.

영상 속 금으로 변해버린 순금 육면체는, 그 크기로 미루어 분명 최소 60kg이 넘어야 한다. 그리고, 영상에선 0.5평 이하의 공간에 128개(4x8x4)의 순금 큐브가 차곡히 쌓여있다.

즉, 0.5평 이하의 공간에 7-8톤의 무게가 집중되고 있는 것이다.

보통 한국 가정집의 경우 1평당 최대 하중이 1톤을 넘지 못하며, 일반적인 공장 및 창고의 철근 콘크리트 바닥은 1평당 하중 5톤을 넘기지 않고, 중장비 작업용과 같은 특수 목적의 공장에서나 1평당 하중이 10톤을 넘어가는 게 현실이다.

영상 속 펠리자가 사용하는 일반적인 소규모 창고의 바닥이 차곡하게 쌓인 128개의 순금 덩어리를 버틸 리가 만무하다. 이 정도의 하중은 철근 콘크리트 두께가 최소 50cm 이상으로 설계되고 철골 보강 등이 들어간 중공업 공장이나 격납고 등과 같은 특수 시설에서 찾아볼 수가 있다.

오류는 이뿐만이 아니다.

큐브는 처음 크기 그대로 변환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면적이 줄어들었으며, 번쩍이는 플래시와 함께 위에서 마치 양손으로 껍데기를 벗겨내는 듯한 장면이 보인다.

무엇보다도, 50대 중반의 펠리자가 양손의 근력만으로 60kg이 넘는 순금 덩어리를 너무도 가뿐하게 옮기고 있는 장면까지. (물론, 힘든 척 다소 과장된 액션들을 취하곤 있음)

타임스태프 부분을 보면 큐브의 면적이 줄어들었음을 확인할 수 있음 (Roland Pelizza)
양 상단 부분을 집중해서 볼 것 (Roland Pelizza)
(Roland Pelizza)

사실, 속이 가벼운 황동 육면체 또는 도금된 육면체 겉으로 폴리스타이렌 재질의 껍데기를 씌운 상태에서 아주 아주 초보적인 마술 트릭을 사용하는 것만으로 해당 시연 영상이 가능하다.

(Lorenzo Paletti)

펠리자가 공개한 시대별 실종 이후의 마요라나 사진 & '4단계 기계' 불로

펠리자는 마요라나의 다양한 시대별 사진들을 공개해 왔다.

그리고, 그러한 사진 속 마요라나는 50대 후반에서부터 90대에 이르는 연령대일 터인데도 40대 이상으로는 보이질 않을 정도다.

이미 반물질을 자유자재로 놀리는 수준이기에, 반물질 반응을 통한 인체에 에너지 공급 or 소멸 반응에서의 양전자 방출로 노화 세포 타깃 제거 or 상호작용에서 발생하는 양자 효과로 인한 DNA 복구와 같은 탈 인류 기술을 사용했던 것일까?

펠리자가 공개한 마요라나의 사진을 하나하나 살펴보겠다.

(Roland Pelizza)

먼저, 1964년 2월경 수도원에서 은거 중인 마요라나와 함께 찍었다던 사진이다.

시기상, 마요라나는 50대 후반이어야 하며 펠리자는 24세여야 할 터이다. 어째 펠리자는 중년의 나이대로만 보인다지만 넘어가겠다.

사진에서 날씨가 2월인데도 둘은 외투 없이 정장 차림새를 하고 있다. 특히, 마요라나가 착용한 재킷은 1931년 7월 여름경 촬영된 가족사진에서의 그 재킷이다.

1931년 7월에 촬영된 마요라나의 가족 사진. 맨 우측이 마요라나

마요라나가 실종 당시 자신의 애착 여름용 정장 재킷을 챙겨서 30년도 더 뒤의 겨울에도 즐겨 착용했던 것일까?

더욱 놀라운 것은, 1931년 촬영된 사진 속 재킷과 문제의 사진 속 재킷이 완벽히 일치하는 오버레이를 보인다는 것이다.

이렇듯 한 치의 오차도 없다는 것은, 사진이 아날로그 방식으로 재조립해 합성하는 포토몽타주 처리가 됐음을 시사한다.

이제, 50대에서 90대에 이르기까지의 사진 속 마요라나의 모습을 살펴보자.

마요라나는 1906년생이다 (Roland Pelizza)
70살인 1976년에 촬영됐다는 사진 (Roland Pelizza)
80살인 1986년에 촬영됐다는 사진 (Roland Pelizza)
90살인 1996년에 촬영됐다는 사진. 우측이 1938년생인 펠리자 (Roland Pelizza)

위 이미지들이 펠리자가 공개한 마요라나 사진이다.

실종 이후의 사진 속 마요라나 모습이 무언가 이질적인 것은, 단순히 사진 및 인화술의 발달로 인해 보다 입체적인 표현이 노출됐기 때문일까?

얼핏 인상이 비슷해 보이기도 한 두 마요라나..

허나, 분명 사람마다 명백한 차이점을 보인다는 헤어라인과 귀 모양 특성들에서 두 사람이 서로 다른 인물임을 증빙해 준다.

허면..

이 문제의 실종 이후 마요라나는 누구란 말인가?

어쩐지 특정한 짧은 기간 내에 연극 분장이 덧칠해진 채 촬영된 것만 같은 이 사내가 말이다.

이 사내가 스페인의 무명 배우 폴 누비알라와 지독하게 닮은 것은 그저 우연에 불과한 것일까?

폴 누비아의 프로필 사진 (Pol Nubiala)
상단이 진짜 마요라나, 중단이 펠리자 버전의 마요라나, 하단이 폴 누비아. 귀 모양 특성을 유심히 볼 것
펠리자 버전의 마요라나와 폴 누비아 간의 얼굴 상세 대조 (Lorenzo Paletti)

펠리자와 마요라나가 주고받은 서신

마지막으로, 펠리자가 주고받았다던 십수 통의 서신 차례이다.

(해당 링크 에서 펠리자가 공개한 마요라나와의 서신을 모두 볼 수 있음)

이탈리아 파비아 지역의 법의학 부문 필적 전문가인 살라 샹탈 박사는, 편지들을 분석한 결과 마조라나의 손에 의해 쓰여진 게 맞는다는 결론을 내린다.

허나, 반대되는 의견을 제시하는 전문가도 존재한다. 물리학자로 마요라나의 전기 작가이기도 한 에라스모 레카미가 그 주인공이다.

레카미는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필적 전문가의 그 분석에 대해 저는 매우 회의적이군요. 저는 에토레 마요라나가 작성한 문서들을 직접 발견하고 분석한 끝에 그의 필체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이 됐습니다.

그의 필체에 대해 지난 50년 간의 경험이 있습니다. 따라서 이 분야에선 필적 전문가보다 제 눈을 더 신뢰합니다. 필체는 그의 필체에 부합합니다. 정확히는, 일반에 공개됐던 과거 그의 필체들과 너무도 흡사합니다. 하지만 서신 속 내용들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문제의 서신 중에는 과학scienza이라는 단어가 i가 빠진 채 scenza로 표기돼 있습니다. 에토레 마요라나라면 평생 저지르지 않을 실수입니다. 제가 이걸 지적하자 이후 서신엔 i가 제대로 들어간 채로 수정됐더군요.

저는 문제의 서신들이 롤란도 펠리자가 직접 작성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추가로, 물리학자이자 대학교수이기도 한 레카미는 펠리자가 공개한 문서 등지에서 단 하나의 물리학&수학 공식도 찾아볼 수가 없으며 물리학 이론에 대한 오류들도 다수가 존재한다고 꼬집었다. 역사적으로 천재 물리학자였던 마요라나가 직접 사사한 수제자로 보기엔 얼토당토않다는 것.

여담으로..

괴씸하게도, 이러한 서신 중에는 마요라나가 펠리자에게 자신의 이름을 자유롭게 사용해도 된다는 저작권 허용 서신 그리고 유산 대부분을 펠리자 앞으로 남긴다는 서신도 존재한다.

결론적으로..

펠리자의 진짜 능력은, 타인의 필체를 흡사하게 흉내 내는 것과 같은 모사력이었던 셈이다.

또, 타인에게 바람을 넣어 자신을 과대 선전하는 능력도.

여기까지가 펠리자의 민낯이다.

펠리자 측이 주장한, 펠리자가 각종 특허를 보유한 유명한 발명가라는 주장도 과대 포장에 불과하다. 바퀴 달린 욕조, 정형외과용 상체 고정 기구, 합성 직물과 같이 특허청에 특허를 냈지만 누구도 로열티 지급 계약을 맺지 않은 발명품들이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펠리자의 사후 더는 색다르고 흥분되는 마요라나 전설이 주장되지 않고 있는데..

펠리자의 유지를 이어받은 알프레도 라벨리라는 사람이 여전히 활동 중이다.

펠리자 전설을 세간에 퍼뜨린 장본인인 알프레도 라벨리 (Alfredo Ravelli)

라벨리는 펠리자와 동갑으로 친인척 관계이다. 그는 펠리자 생전에서부터 펠리자의 행보를 전기화해 출간물들을 내는 동시에 사후엔 SNS와 유튜브를 통해 펠리자의 증거물(?)들을 공개해 왔다.

물론, 펠리자와 마찬가지로 허세와 거짓이 낀 과대 선전 주장도 함께 말이다.

자..

그렇다면 마지막에 와서도 남는 의문 하나.

도대체, 과연, 실종 당시 '진짜' 마요라나의 행방은 어디로 향하고 있었던 것일까?

당시 마요라나는 삼촌의 무죄를 증명하고자 오랜 시간 법정에서 싸운 끝에 결실을 맺었으나, 해당 사건은 정신적으로 민감한 기질이었던 그에게 있어서 분명 지속적인 영향이 남아 있을 사건이었다. 그리고 직후 1934년엔 평소 애틋했던 관계인 부친이 사망하면서 증상이 본격적으로 심화된다.

그렇게 의사로부터 신경쇠약이라는 진단을 받을 정도였던 마요라나는, 모든 일을 중단하고서 서신 수취도 거부하는가 하면 용모에도 아예 신경을 쓰지 않는 등 우울증 증세를 보였다.

그는 몇개월치 급여를 인출해 여행을 떠난 동안(여행은 우울해하는 펠리자를 위한 주변 지인들의 권유였음) 당시 가장 가까웠던 친우인 카렐리에게 극단적인 선택을 암시하는 서신을 보내기도 했으며, 심지어 가족들 앞으로는 장례식에 대한 지침을 부탁할 정도였다.

그리곤 다음날 바로 카렐리 앞으로 바다가 자신을 거부했으니 내일 호텔로 돌아갈 것이라는 서신을 보내왔다.

이것이 그가 남긴 마지막 흔적이다.

일련의 상황을 종합할 때..

바다에 몸을 던지고자 생각했었던 마요라나가 직후 마음을 다잡은 듯했으나, 우울증 증세의 특징인 돌발성으로 인해 다시금 바다 한가운데와 같이 사후 흔적을 찾기 어려운 공간에서 극단적 선택을 했던 게 아니냐는 것이 현재까지 가장 무게가 실리는 가설이겠다.

마요라나의 행방을 둘러싸고서 워낙 다양한 풍문들이 존재하며..

수도원에서 사망할 때까지 은거했다는 설과 외국으로 이주해 다른 신분으로 삶을 이어갔다는 설이 가장 대표적이다.

펠리자가 자신의 이야기에 차용한 게 바로 이 수도원 은거설이다.

그리고, 외국 이주설의 경우 2008년경 이탈리아의 유명 TV 프로그램에서 다루며 더욱 유명해졌는데..

베네수엘라로 이주한 한 이탈리아인이 그곳에서 친구가 된 남성이 마요라나인 것 같다고 주장한 이야기이다. 해당 프로그램에선 로마 검찰청 소속원을 섭외해 문제의 남성과 마요라나 부친의 얼굴을 상호 비교한 결과, 코 선과 귓바퀴 일부가 흡사해 보이고 전체적인 이목구비의 높이와 너비도 그러하다는 주장을 펼친다.

허나..

이러한 이목구비 높이&너비 비교가 얼마나 효용성 없는 작위적 분석법인지, 또 부친과의 외모 유사도가 결정적인 증거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지금의 우리는 안다.

설상가상으로..

제보자는 이 남성이 평소 사진 찍는 것을 광적으로 기피했기에 더욱 의심했으며 결국 돈을 지불하는 대가로 함께 사진을 찍었다고 설명했는데, 스스로 모습을 감추고 이국에서 새 삶을 시작한 마요라나가 취했을 법한 행동으론 여겨지지 않는다.

1955년 베네수엘라에서 촬영된 사진. 좌측이 제보자. 만약 우측이 마요라나라면 그는 49세여야 한다

'사라져 버린 천재'..

우리가 이 문장에 가슴 두근거리는 연유는 비단 호기심이 동하기 때문만은 아닌..

'그런 천재가 사회에서 다수를 위해 헌신하고 세상을 발전시켰으면 어땠을까'라는 희망을 욕심 하기에서가 아닐까?

그렇기에 우리는 그러한 이들의 이야기에 관심을 보이는 게 아닐까?

어찌됐건..

천재 당사자의 개인적 고뇌와 아픔을 뒷전으로 한 감정일 테지만 말이다.

이제..

영국의 철학자 프랜시스 베이컨의 말로 마무리 짓고자 한다.

마요라나가 역사에 짧게나마 남긴 선명한 발자취가 훗날 있을 물리학의 위대한 발전에 보탬이 되기를 빌면서.

"연금술은 아마도 아들에게 자신의 포도원 어딘가에 금을 묻어두었노라 이야기한 사람에 비유할 수 있을 것이다. 아들은 땅을 파서 금을 발견하지는 못했지만, 포도 뿌리를 덮고 있던 흙무더기를 헤쳐 놓아 풍성한 포도 수확을 거둘 수 있었다. 금을 만들고자 노력했던 사람들은 여러 가지 유용한 발명과 유익한 실험들을 가져다줬다."

1931년경, 어머니와 형제자매들과 함께

참조

<Dizionario biografico degli italiani/MAJORANA, Ettore> Erasmo Recami
<Il caso Majorana Pelizza> Rino Di Stefano
<La scomparsa di Majorana> Leonardo Sciascia
<Majorana's Last Secret: The Machine of Rolando Pelizza>  Lorenzo Paletti

-끝-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