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소년을 반드시 사형하라

(AP)

소년 하나가 매트리스에 앉아 달력을 든 채 다소 익살스러워 보이는 표정을 짓고 있다.

달력을 자세히 뜯어보니, 1947년 5월이며 9일 자에 동그라미로 표시가 된 것을 알 수 있다.

1947년 5월 9일.

무슨 날이기에 D-DAY 체크가 된 것일까?

이날은 바로, 사진 속 소년의 전기의자형이 집행되는 날이다.

그리고, 이 사진엔 생각지도 못한 비밀이 숨겨져 있다.

1944년 11월 8일 자정 무렵, 미국 남부 루이지애나주의 소도시 세인트 마틴빌.

마을의 약사였던 53세의 독신 남성 앤드루 토마스가 자신의 집 차고와 현관 계단 사이에서 38구경으로 5발의 총탄을 맞고 살해당한다.

몸싸움의 흔적과 함께 좌측 옆구리 부위 및 등 부위에 각각 2발을, 그리고 우측 눈 부위에 1발을 관통당한 상태였다. 외출해 저녁 식사 후 집으로 돌아오던 중 공격당한 것으로 보였으며, 주머니 안의 내용물이 비워져 있는 상태라 강도의 소행으로 여겨졌다.

토마스는 세인트 마틴빌 중심가에 자리한 약국을 운영해 오던 지역의 유명 인사였다. 그의 두 형제는 각각 세인트 마틴빌의 경찰서장과 교구 행정 기구의 핵심직을 맡고 있었다.

이에 세인트 마틴빌의 법 집행 기관인 보안관 측은 느닷없이 지역사회에 들이닥친 혼란을 종식시키고자 수사에 임하나.. (당시 루이지애나주의 관행은, 살인사건의 수사 주도권을 교구 단위인 보안관 측이 수행하는 것이었음. 규모나 수사력도 보안관 사무소가 경찰보다 앞서고 있었음. 또한 당시 시대상은 보안관이 최고 형사사법 책임자라는 인식)

유의미한 소득이라곤, 지역의 철로길 주변에서 주민들에 의해 총집과 함께 38구경 권총이 발견된 것뿐이었다. 해당 총은 증거물로 넘겨졌으며 범행에 사용된 것으로 강력 추정됐다.

신문 지면상에 보상금이 걸린 사건 관련 정보 제공 요청들이 실리고 수사 압박이 가해진 상황에서, 수개월이 지나도록 뚜렷한 용의자 선별에도 실패하면서 궁지에 몰리게 된다.

이에 보안관 측은 범인이 이미 자신들의 관할을 벗어나 다른 지역으로 도주했을 가능성을 염두, 인접한 지역의 경찰들에 세인트 마틴빌 출신의 수상쩍은 인물을 포착시 체포해달라는 협조 요청을 구하기에 이른다.

한편, 속절없이 시간이 흘러..

사건으로부터 9개월이 지난 1945년 8월 3일 저녁.

포트아서 기차역 부근에서 지역 경찰서장과 그의 부하들이 마약 밀매 용의자가 나타나리란 수사에 따라 잠복을 하던 때였다.

현장 근처에서 한 흑인 소년이 어슬렁거리던 것을 수상하게 여긴 경찰서장 측이 공범이라 여겨 소년에게 다가갔고, 이에 깜짝 놀라 숨으려던 행위를 하는 소년을 보고서 확신에 차 체포를 하기에 이른다.

그렇게 현장에서 체포돼 경찰서로 끌려가 심문이 이어졌고, 소년은 계속해서 심하게 말을 더듬으며 긴장된 모습을 보였다.

심문 결과..

소년은 포트아서 지역 주민이 아닌 세인트 마틴빌 출신으로, 소지품 검사 결과 검은 지갑 하나가 나왔는데, 이 지갑은 바로 살해당한 토마스의 지갑이었다. (포트아서는 텍사스주의 대표적인 정유 산업 도시로, 세인트 마틴빌에서 200km가량 떨어진 인접 도시)

어찌하여 토마스의 지갑인지 알았느냐면..

지갑 안에서 토마스의 신분증이 나왔기 때문이다.

이에 포트아서 경찰은 소년을 마약 밀매 공범에서 토마스 총격 살인 사건의 용의자로 전환하며 추궁을 시작했고, 소년은 얼마 지나지 않아 빠르게 범죄 사실 일체를 자백하기에 이르렀다.

"1944년 11월 8일 저녁 11시 30분쯤 그 사람 집에 갔습니다. 그 사람이 돌아올 때까지 차고 뒤에서 30분 정도 숨어 있었습니다. 그 사람이 도착하고서 다섯 번 쐈습니다. 제가 기억하는 건 그게 전부입니다."

소년은, 토마스의 밑에서 허드렛일을 해온 적이 있던 16세의 윌리 프랜시스였다.

소년 윌리 프랜시스는 1929년 1월 12일 루이지애나 세인트 마틴빌에서 태어났다.

독실한 가톨릭 집안(지역색에 따라)의 13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으며, 다복한 집안의 막내답게 순진하고 장난꾸러기스러운 일면이 있었다.

당시 미국엔 짐크로 법이 살아 숨 쉬던, 엄연히 인종별 구분이 존재하던 시기였다. 물론, 교육 및 경제적 기회에서의 불이익도 컸다.

미국 남부에 위치한 세인트 마틴빌은 그 정도가 심하면 심했지 결코 적진 않은 곳이었다. 지역 신문에선 대놓고 흑인을 경멸하는 표현을 사용함은 물론이요 백인과 흑인의 소식을 별도의 지면에 배치할 정도로 인종적 위계 강화에 한몫했다.

즉 시대상과 사회상, 그리고 남부의 루이지애나라는 지역 특색(당시 급속도로 진행된 경제 악화로 인해 더더욱 흑인 주민들의 처지가 열악해짐)이 지배하던 무렵이었다.

윌리의 아버지는 사탕수수 공장에서 일하며 일주일에 9달러를 벌었고, 흑인 구역의 작은 주택에서 어머니는 가정을 꾸리며 자식들을 하나둘 출가시킬 수 있었다.

이런 어려운 가정 환경 속에서도 윌리는 구김 없이 자라며 학교와 병행해 마을 곳곳에서 허드렛일을 맡아 스스로 돈을 벌기도 했다.

윌리는 주변에서 평판이 좋은 아이였다. 순종적이고 말썽을 일으킨 적도 없어 일을 맡기던 매장 직원들로부터 신임이 있었다. 지역 중심가에 위치한 토마스의 약국에서도 청소일을 맡곤 했었다.

지역 사회의 주민들은 윌리가 심한 말더듬증 증상이 있으며 나이에 비해 어리숙하고 다소 떨어지는 것처럼 보였다고 전한다. 그래서 때때로 상황 자체나 심각성을 정확히 인지하지 못하는 것처럼도 보였다고.

그래도 한결같은 증언은, 윌리가 '무해하고 착한 소년'이었다는 것이다.

1945년 8월 3일 저녁.

윌리는 포트아서에 살던 누이의 집을 방문한 자리에서, 저녁 식사 전 산책을 할 요량으로 기차역 부근을 거닐고 있었다.

바로 그때..

다부진 체격의 성인 남성들이 험상궂은 표정을 띠고는 자신을 향해 달려오다시피하자, 윌리는 겁에 질려 몸을 숨기려고 했다.

그렇게 포트아서 경찰에게 체포된 윌리는 마약 밀매 공범 혐의에 이어 토마스 살인 사건의 혐의를 받으며 심문을 받기에 이른다.

이 과정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당사자들만이 알 것이다.

윌리는 심문이 시작됨과 거의 동시에 자백문을 작성하고 그곳에 서명하는 처지가 된다.

첫 번째 자백문의 요지는 다음과 같았다.

"저 윌리 프랜시스는 16살이며 세인트 마틴빌에서 훔친 오기세씨(주: 지역의 부보안관)의 38구경 총으로 1944년 11월 9일 또는 그즈음 앤드루 토마스를 살해했습니다. 그리고는 4달러가 들어있던 그의 지갑을 훔쳐 달아났습니다. 함께 훔친 시계는 루이지애나 뉴이베리아에서 팔았습니다. 총은 버렸습니다. 저는 자백을 강요받지 않았습니다."

한편..

윌리는 다음날 세인트 마틴빌의 보안관 측으로 전달됐고, 이후 구금 과정에서 다음과 같이 조금 수정된 버전의 자백문을 작성한다.

"네, 맞습니다. 저 윌리 프랜시스는 1944년 11월 8일에 앤드루 토마스를 살해했다고 자백합니다. 저녁 11시 30분쯤 그 사람 집에 갔습니다.. 그 사람이 돌아올 때까지 차고 뒤에서 30분 정도 숨어 있었습니다. 그 사람이 도착하고서 다섯 번 쐈습니다. 제가 기억하는 건 그게 전부입니다."

이례적인 일이었다.

심문과 동시에 자신의 죄를 모두 고하며 빠르게 자백문까지 작성하는 일 말이다.

게다가..

포트아서에서의 자백문과 세인트 마틴빌에서의 자백문 간에 디테일한 차이가 존재하는 것은, 수사 편의에 의해 윌리가 그에 맞는 자백문을 새로이 작성한 것이라는 의혹이 가능했다.

실지로..

포트아서에서의 심문에서는 11월 9일에 토마스를 살해하고서 범행 무기인 총기를 단순히 버렸다고만 진술했으나, 이후 세인트 마틴빌로 이송돼 심문이 가해지자 11월 8일 저녁 11시 30분-자정이라는 정확한 범행 시기(당시 토마스의 이웃들이 증언했던 시간대)와 더불어 이후 구술에선 총기를 문제의 철로 근처에 버렸다고 장소를 명확하게 언급했다.

또, 포트아서에서의 첫 심문에서 총기를 도난당한 세인트 마틴빌의 부보안관 이름을 오기세(본래는 어거스트 퓨젤리에)라고 작성하는 부분까지.

10대 소년, 그리고 흑인.

과연 경찰이 비강압적이고 적법절차에 맞는 프로세스로 일을 진행시킨 것인지 의구심이 갈만했다.

의구심은 이 밖에도 다수 존재했으며, 그 정도 또한 심각했다.

사건의 결정적 단서인 38구경 총기. 이 총기는 세인트 마틴빌 지역의 부보안관 어거스트 퓨젤리에가 소지하던 스미스앤웨슨 38구경 총기로 여겨졌다. 해당 총기는 사건 2개월 전 당사자로부터 분실 신고가 있었다고 한다. 차량 안에 두었던 것을 누군가가 훔쳐 갔다는 것. 다만, 도난 무렵 작성했을 서면상의 기록은 공개된 바가 없으며 상급자에게 보고했다는 그의 진술만이 남아있다.

결론적으로, 토마스 살인 사건 현장에서 발견된 탄환이 문제의 부보안관이 분실한 총기에서 발사된 것인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현장에서의 탄환이 부보안관이 소지했던 총기에서 발사가 가능한지 여부도 조사되지 않았으며, 총기 및 탄환 자체도 분석을 위해 FBI로 범죄 연구소로 이송 중 분실 처리됐다고 주장된다.

윌리가 뉴이베리아에 팔았다는 시계의 경우 이후 수사에서 한 보석상이 지목됐고, 보석상 주인은 사건 즈음 시계 매입건이 장부엔 기록돼 있으나 윌리를 본 적은 없다고 진술했지만 이후 증언을 요청받지 않는다. 그리고 문제의 시계는 끝내 발견되지 않았다.

사건 당시 총격음을 듣고서 창문 밖을 내다봤던 토마스의 이웃은, 토마스의 집 앞 차도에 불 켜진 차량이 서 있었노라 진술했다. 그리고 해당 차량은 다음 날 아침엔 현장에 존재하지 않았다고 한다. 윌리는 차량 운전은커녕 가난한 집안 환경으로 인해 승용차를 처음 타 본 게 체포되던 순간에서나였다.

토마스는 총 5발을 피격당했다. 38구경은 6발들이다. 가까운 거리에서 발사됐음을 감안하더라도, 분명 이전에 총기를 사용해 본 적이 있으며 심지어 제법 숙달된 사수였음을 암시하는 부분이다. 게다가, 각기 다른 부위에 5발이나 발사한 것은 범인이 단순 강도라기보다는 평소 토마스에게 원한이 있던 것으로 해석의 여지가 있다.

무엇보다도..

포트아서에서 체포된 윌리로부터 토마스의 지갑과 신분증이 나왔다고 주장됐으나..

이 문제의 지갑과 신분증은 증거물로 공개되지 않는다.

사실..

실지로 윌리가 토마스의 신분증이 든 지갑을 훔쳤대도 그것을 9개월여 동안 소지하고 다닐 것이라는 추론엔 어폐가 있는 게 분명하다.

윌리는 1945년 8월 체포된 이래 1달 가까이 공소 제기도 없는 상태에서 구금됐다.

그렇게 9월 5일에서야 정식 기소가 이뤄진 데다 다음날 법원 측의 피고인 국선 변호인 선임이 진행됐고, 재판이 6일 남은 시점에서 이 변호인단은 이의 제기도 없이 손 놓다시피 하고 있었다.

한편, 재판부가 처음 소집한 배심원 40명은 모두 백인이었고 이후 선발된 12명 배심원 역시 전원 백인이었다. 보안관 측이나 검찰 측이 제시한 물적 증거나 기록물은 전무했으며, 재판 관련 서류 보존조차 엉망으로 진행됐다.

검찰 측의 입장은 다음과 같았다.

"윌리 프랜시스가 2차례에 걸쳐 자백을 했으며, 범행에 사용된 총기와 세인트 마틴빌 부보안관이 도난당했다고 진술한 총기가 같은 38구경이고, 윌리 프랜시스는 앤드루 토마스를 아주 잘 알고 있었다."

헌데..

재판 내내 법적 물증이나 부합하는 증언도 없는 가운데서 윌리의 변호인단은 어떠한 이의 제기나 피고인의 법적 권리를 행사하지 않았으며, 12명의 배심원은 별다른 논쟁도 없이 15분 만에 유죄 평결을 내렸다.

그렇게..

윌리는 사형을 선고받고서는 교정시설로 이감돼 전기의자형을 기다리는 신세가 된다.

8개월 후인 1946년 5월 3일.

17살인 윌리는 끝내 제대로 된 수사 프로세스나 법적 권리 행사 없이 전기의자에 앉게 된다.

이날 오전, 전기의자의 스위치가 올려지며 섬뜩한 전기가 윌리의 전신을 휘감는다. 윌리의 목이 부풀어 올랐고 온몸이 경련에 발작적으로 꿈틀거리며 전기의자와 함께 요동쳤다.

헌데, 이상했다.

1분이 다 되도록 윌리는 고통스러워하기만 할 뿐 비명을 내지르면서도 살아있었다.

집행장의 사람들 모두는 이변이 발생했음을 깨달았다. 곧이어 윌리가 '나 안 죽었어요!'라고 소리 지르자 마침내 전기의자의 스위치를 내리기에 이른다.

전기의자 사형 집행 실패. 루이지애나 역사에서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당시의 상황을 윌리는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포스터씨가(주: 사형집행인 중 하나) 기분 좋게 '굿바이, 윌리'라고 말했어요. 저도 작별 인사를 하고 싶었지만 너무 무서워서 손만 꼭 쥐고 있었죠.

전기의자에서의 느낌을 가장 잘 표현하자면, '콰직!'이나 '지익!'같은 소리였어요. 수백수천 개의 바늘과 핀이 제 온몸을 찌르는 것 같았고 다리는 누군가 면도날로 베는 듯했어요.

양옆의 제 팔이 튀고 있는 걸 느꼈고 온몸이 마구 뜰썩거렸어요. 떨림을 멈출 수가 없었죠. 잠시 의자가 뒤로 넘어갈 거라는 생각이 들다가, 어느 순간 괜찮아지더라고요. 전 제가 죽었다고 생각했었어요.

그런데 그들이 또다시 전기를 흘려보냈어요. 똑같은 느낌이 온몸을 휩쓸었죠. 누군가가 전류를 더 보내라고 소리치는 게 들렸어요. 그러자 다른 누군가가 전부를 다 쏟고 있는 거라고 외쳤죠.

그들에게 멈추라고 고함쳤던 것 같아요. 사람들이 제가 꺼버리라고 했다더군요. 실제로 전기를 끄기만을 간절히 바랐어요."

그리하여..

윌리는 전기의자에서 내려져 참관 중이던 검시관에 의해 진찰을 받았고, 사형집행인 중 하나였던 포스터는 다음과 같이 외쳤다.

"이번엔 놓쳤다만, 다음 주에는 쇠몽둥이를 써서라도 널 끝장내주마!"

전지의자형 직후 감방 안에서 행운의 십자가 제스처를 취해 보이는 윌리

당시 루이지애나주는 이동식 전기의자 제도를 운영하고 있었다.

교정국 직원과 교도소 수감 중인 전기기술자가 협력해 점검 및 트럭으로 각 관할 지역으로 운반과 더불어 현지 감옥에서의 설치를 담당했는데, 이 담당관들의 이전 배선 설치 혹은 점검 과정에서 누락 상황이 발생했던 것.

결국, 이전에 22번에 걸쳐 문제없이 정상 작동됐던 전기의자는 작동 상 결함으로 인해 윌리에게 강력한 전류 충격만을 준 채로 집행이 끝나게 된다.

수리를 마치고서 일주일 후에 다시금 윌리를 사형 집행하기로 결정하고선 말이다.

다시 수감 시설로 이송된 윌리.

헌데..

전기의자의 수리가 진행되는 동안 변화가 생겼다.

'전기의자형에서 살아남은 소년'이라는 '소재'는 대중의 관심과 흥미를 자아내기에 충만했고, 그러한 소비는 차츰 윌리에게 씌워진 혐의에 대한 의심과 더불어 사면 청원의 여론을 끌어냈던 것.

이러한 가운데..

기존 국선 변호인단의 행태에 절망한 윌리의 아버지는 주변 지인들 및 지역의 가톨릭 신부 등을 통해 변호사를 물색하기 시작했다.

물론, 1940년대 남부 시골에서 흑인이 솜씨 좋은 변호사를 구하기란 하늘의 달을 따는 만큼이나 쉽지가 않았다.

허나, 윌리의 아버지는 자신의 아들을 반드시 살리고자 지역 '명망가' 출신의 젊은 백인 변호사 베르트랑 드 블랑 사무실을 방문한다.

참으로, 기묘한 만남이었다.

그러니까..

블랑의 집안은 당시 일반적으로 명망 있다고 표현되던 집안이었는데, 그의 할아버지인 알시비아드 드 블랑 대령은 '흰 동백꽃 기사단'의 설립자였던 것이다.

이 기사단은 루이지애나주에서 결성된 비밀결사 형태의 조직으로, 인종 융합에 반대하는 백인 우월주의 사상의 집단이었다. 비록 해당 조직이 악명 높던 KKK단과의 연관성을 전면 부인하며 일체 폭력성을 띄지는 않았으나, 구성원 전체가 일반적으로 사회 고위층이라는 사실로 인해 그 위험성은 여전했다.

그렇게..

흰 동백꽃 기사단 창립자의 손자에게 찾아와 부당한 법적 처벌에 대해 호소하며 아들의 변호를 맡아줄 것을 호소하는 윌리의 아버지.

윌리의 아버지는 아들에게 벌어진 일들을 전하며, 비싼 수임료를 감당할 수 없지만 밑에서 잡무를 해서라도 보수를 지불할겠다며 간청한다.

한편, 처음 정중하게 부탁을 거절한 블랑은 윌리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수록 마음이 흔들려갔다.

그건 윌리가 받았던 부당한 수사 절차와 법적 서비스 때문 만은 아니었다. 주 정부가 직무를 소홀히 해 발생한 상황에서 윌리가 살아있는 상태로 죽음과 마주하는 고통을 겪게 해놓고는, 한 사람을 2번이나 전기의자에 앉히려는 것은 비인도적이라 변호사로서 여긴 행태에 대해 변호사로서 납득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블랑은 윌리의 아버지로부터 수확한 채소를 받는 것을 조건으로 윌리의 목숨을 구하기 위한 법적 투쟁에 돌입한다.

블랑은 루이지애나 주법상의 이중 처벌 문제를 파고들며 미국 수정 헌법 제8조인 '잔인하고 비정상적인 형벌'의 금지 조항을 내세우며 호소했다.

그리고 윌리와의 면담을 통해 체포 전후의 상황과 사건 기록을 수집하는 과정에서 블랑은 경악하고 만다. 윌리가 너무도 주먹구구식인 수사 프로세스에 희생됐으며, 동시에 심문에서부터 재판에까지 그 어떤 법적 권리도 받지 못했다는 사실에 말이다.

블랑은 발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안타깝게도 이미 유죄가 확정됐으며 당장 사형 재집행일을 코앞에 두고 있기에, 먼저 블랑은 주지사 및 사면위원회 앞으로 '전기의자 집행이 명백하게 실패로 끝났으니 최소한 재집행을 멈추고서 형을 감형해달라'는 식의 호소를 했다. 체포 과정에서부터 재판에까지의 문제를 제기해 그 결과를 뒤집기란 현실적으로 무리임을 알았기에 취한 전략이었다.

허나, 여기서 '단순히 기계적 오류로 인한 미집행으로 봐야 한다'라는 대답이 돌아올 뿐이었다.

상황이 이렇자, 블랑은 루이지애나주 최고법원에 중지 가처분 및 항소 절차를 밟기 시작한다. '2번째 전기의자 집행은 수정 헌법 제5조 이중위험금지(동일한 죄로 2번 기소당하거나 생명과 신체에 대한 위협을 재차 받지 않아야 한다는 법리)에 위배되고 수정 헌법 제8조에서도 위반 사안이다'라는 주장과 함께 말이다.

허나, 여기서도 주 최고법원 측은 현행 주법상 문제가 될 소지가 없다는 응답과 함께 기각한다.

이제..

블랑의 남은 희망은 연방대법원 상고뿐이었다.

하나 다행인 점은, 블랑이 연방대법원 앞으로까지 이의를 제기하는 1년 동안 사형 재집행이 중단됐다는 것이겠다. 이 기간 동안 전국 단위로 윌리에 대한 관심이 쏟아졌고, 대중은 이제 흑인 소년을 석방시키거나 최소한 종신형으로 감형하라는 여론을 지지하기 시작했다.

한편..

연방대법원에선 블랑이 제기한 수정 헌법 조항에 대해 '기술적 또는 기계적 결함이 존재했던 것이지 고의적으로 윌리를 고통스럽게 만드려는 의도가 없었다. 따라서 의도적인 잔혹성이 아니므로 조항 위반으로 해석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재집행은 새로운 재판 과정이 아니기에 이중 처벌에도 해당하지 않는다.'라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하여, 합헌&위헌에 대한 최초 대법관 표결 여론은 7대 2로 갈릴 정도로 압도적이었다.

허나, 점차적으로 다음과 같은 의견이 힘을 받기 시작했다.

"도대체 잔혹하고 비정상적이며 위헌적인 처벌이란 무엇인가? 고의적이고 의도적으로 전류를 몇 번이고 재차 흘려보내야만 그런 것인가? 만약 5번의 재시도가 잔혹하고 비정상적이며 위헌적인 처벌이라 치자. 그럼 2번, 3번, 4번, 5번 사이의 경계를 각각 구분하는 게 가능한 것인가?"

그렇게..

윌리의 운명이 달린 연방대법원 대법관 표결이 실시됐다.

그 결과..

5대 4로 전기의자형 재집행이 합헌이라는 표결이 나왔다.

윌리의 18번째 생일 다음 날 나온 결과였다.

법리적으론 합헌에 표를 던졌으나 도덕적으론 윌리를 구제하고팠던 한 대법관이 루이지애나 주지사에게 종신형으로 감형해달라는 설득을 펼치나 무위로 돌아갔다.

한편, 대법원에서까지 기각되며 현실적으로 결론이 지어졌음에도 블랑은 포기하지 않았다.

블랑은 이제 재판 자체에 처음부터 문제가(빈약한 법적 증거 및 윌리의 혐의에 반대되는 진술을 한 증언자들의 존재 등) 있었다며 재심을 청구하고자 했다. 이번에야말로 윌리에게 제대로 된 법적 변론의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며 말이다.

허나..

이미 새로운 사형 집행일이 확정됐으며 그같은 블랑의 요구안이 수용되기엔 현실적인 어려움이 뒤따랐다.

무엇보다도..

1년 넘도록 육체적으로나 심적으로 상상 이상의 고초와 버거움에 시달리던 윌리 본인이, 모든 것을 포기하고서 사형대에 오르겠노라 마음을 굳혀버렸다. 윌리가 오히려 블랑을 설득할 정도였다. 여기엔, 그간 눈에 띄게 병약해진 어머니를 더는 두고 볼 수 없다는 윌리의 의지가 강력하제 작용하기도 했다.

결국..

사형 집행 직전까지도 윌리를 설득하던 블랑 역시 최후엔 윌리의 의지를 존중하기로 한다.

감방 벽면에 윌리 본인이 쓴 '물론 나는 살인자가 아니다' 문구가 적혀 있다

1947년 5월 9일, 세인트 마틴빌 교도소.

이날 오전, 윌리는 1년 전 앉았던 그 의자에 다시금 몸을 자리한다.

윌리는 언론사에 보내는 마지막 편지에 다음과 같은 작별 인사를 전했다.

"모두에게 진심 어린 작별을 고합니다. 그 누구도 이런 끔찍한 최후를 맞이하지 않기를."

또, 집행 직전 기자들을 향해 이런 말을 남기기도 했다고 한다.

"사내답게 죽겠습니다."

이날 오전..

윌리는 1년 전 앉았던 그 의자에 다시금 몸을 자리했고, 이번엔 기계적 결함 없이 빠르게 집행이 완료됐다.

향년 18세로 흑인 소년 윌리는 그렇게 세상을 떠났다.

블랑은 다음과 같은 소희을 남겼다.

"우리가 패소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번 패소가 전부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법의 한계를 확인한 동시에 미국 사법 체계가 보다 유연해질 수 있다는 가능성 또한 엿봤으니까요."

이후 지역 유지 가문 출신의 백인 변호사가 남부 시골의 흑인 소년을 구제하려 했다는 사실이 언론 등지에 의해 조명되면서 블랑의 명성이 드높아진다.

한편, 블랑은 좌절을 딛고서 지역의 변호사로 활발히 활동하며 실력과 소신으로 이력을 쌓아갔다고 전해진다.

(AP)

소년 하나가 매트리스에 앉아 달력을 든 채 다소 익살스러워 보이는 표정을 짓고 있다.

달력을 자세히 뜯어보니, 1947년 5월이며 9일 자에 동그라미로 표시가 된 것을 알 수 있다.

1947년 5월 9일.

무슨 날이기에 D-DAY 체크가 된 것일까?

이날은 바로, 사진 속 소년의 전기의자형이 집행되는 날이다.

그리고, 이 사진엔 생각지도 못한 비밀이 숨겨져 있다.

체크된 D-DAY는, 바로 소년의 2번째 전기의자형 집행 날이다.

그리고, 이 사진엔 생각지도 못한 비밀이 숨겨져 있었다.

소년에게 벌어졌었던 기구한 일들에 대한.

참조

<The Execution of Willie Francis: Race, Murder, and the Search for Justice in the American South> Gilbert King
<When Willie Francis Died: The "Disturbing" Story Behind One of the Eighth Amendment's Most Enduring Standards of Risk> Deborah W Denno

-끝-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