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가 자식을 죽였는가: 호주 법 역사에 새겨진 흉터
* 본 글은 단순히 범죄사건과 관련한 호기심을 충족시키고자 오락적 목적을 추구하는 것이 아닌, 사건의 악랄한 범행성을 알림과 동시에 범죄의 연보年譜를 통한 교육에 그 목적을 두고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호주 북부 수천 마일의 평평한 사막 한가운데로 거대하게 솟아나 있는 진홍색 심장 울루루.
1만 년 전부터 원주민들의 성지이자 세계 최대 규모의 단일 암석 바위산 울루루.
1980년 8월 17일..
이날 이곳 울루루 캠핑장에선 사건이 벌어지고 있었다.
호주 법 역사에 결코 아물지 않을 흉터를 남긴..
무엇보다 한 가정에 절대 잊을 수 없는 비극을 초래한..
그런 사건이.
1980년 8월.
마이클 체임벌린(36)과 린디 체임벌린(32) 부부는 각각 7살과 4살 난 아들, 그리고 생후 9-10주 차인 막내딸을 데리고서 가족 휴가 기간 중 울루루 캠핑장을 방문한다.
린디가 10대 시절 방문했었던 기억을 떠올리다 진행된 다소 즉흥적인 계획이었다.
8월 16일, 울루루에 도착한 체임벌린 가족은 캠프를 차리고서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 캠핑을 온 다른 가족들과도 담소를 나누며 주변으로 펼쳐진 신성한 대자연을 마음껏 누렸다.
8월 17일.
지역 탐험과 함께 높이 350m, 둘레 9.4km의 울루루 바위를 오르며(물론 일부 구간까지만) 날을 보낸 가족은, 해가 지자 모닥불 가운데로 공동 바비큐 공간에서 저녁을 요리하고 다른 가족들과 본격적으로 어울린다.
주변 구석으론 음식 냄새에 이끌린 딩고 한둘이 서성이고 있었다. 다가온 딩고에게 마이클이 빵 껍질을 건네 던지기도 했다.
저녁 8시 직전.
막내딸 아자리아를 텐트에서 재운 린디가 다시 모닥불 장소로 돌아온다.
저녁 8시경.
텐트 근처로 있던 린디의 귓가로 아자리아의 울음소리가 스쳐 갔다. 린디는 본능적으로 텐트 쪽으로 향했고, 딩고 하나가 텐트를 떠나는 뒷모습을 순간적으로 캐치한다.
아까 오후 녘 아자리아를 안고서 방문했던 다산 동굴 입구로 마주친 딩고였던 것일까?
린디는 그때 어쩐지 그 딩고가 아자리아를 노려보는 것만 같은 오싹한 기분이 들었었다.
불길한 생각에 덮쳐진 린디는 미친 듯이 텐트로 달려갔고, 텐트 안에는 조금 전 평화롭게 잠들었던 아자리아가 거짓말처럼 사라진 채였다.
비명 섞인 린디의 울부짖음이 모닥불 연기로 뒤범벅된 채 사방으로 흩뿌려졌다.
"딩고가 내 아기를 가져갔어!"
현장을 가장 먼저 조사한 수사관은 경찰인 프랭크 모리스였다.
그는 텐트 바닥에서 혈흔 자국을 발견했고, 텐트 밖으로 딩고의 발자국도 확인한다. 이 발자국은 도롯가까지 이어져 있었으나, 그 이상은 지면 특성상 확인이 불가능했다.
7살 난 첫째 오빠가 아자리아의 빈 요람을 들어 보이며 울음을 터뜨렸다.
"딩고가 우리 애기를 뱃속에 넣어버렸나 봐요!"
이에 캠핑장 일대의 남녀노소 모두가 손전등을 지참하고서 모여들었다.
그렇게, 300여 명에 달하는 인원이 줄을 지은 채로 딩고의 발자국과 아자리아의 흔적들을 찾아 수색에 돌입했다.
한편..
체임벌린 부부는 비탄과 체념에 빠진 듯 넋이 나간 채 수색 대열 바깥에서 덩그러니 남겨져 있었다. 남편인 마이클은 자신을 위로하던 사람에게 이렇게 넋두리했다.
"딸애는 아마 죽었을 거예요."
결론적으로..
이날 사건 직후부터 시작된 대규모 수색 작업의 성과는..
모래 언덕 아래로 이어지던 커다란 딩고의 발자국과 그 발자국의 주인공인 딩고가 무엇인가를 지면에 내려놓은 듯한 움푹 패인 자국이 전부였다.
허나, 캠핑장의 레인저와 원주민이 이런 흔적을 살피고서 딩고의 발자국 추적을 이어가려 했으나 결국 허사로 돌아갔다.
그렇게 아기 아자리아가 실종된 지 며칠이 지나고..
이제 해당 실종은 사건 처리가 되며 정식으로 수사가 시작됐다.
사건을 배정받은 4명의 경찰 수사관이 지역 모텔에서 술잔을 기울이며 의견을 나눴다.
마이클 길로이 경감은 체임벌린 부부의 이야기에 수긍하며 딩고가 아기를 데려갔노라 믿었다.
반면, 존 링컨은 부부의 의견에 극렬히 반대했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입니다! 전례가 있나요? 딩고가 사람을 죽인 적이 있던가요? 이건 부정할 수가 없는 사실입니다. 지금껏 딩고는 사람을 죽인 적이 없어요."
"그렇긴 하지만.. 최근엔 애들 대상으로 딩고 공격이 심심찮게 발생했잖는가."
"근데 딩고가 아기를 물어갔다잖아요! 4-5kg짜리 아기를 입에 물고서 수백m를 이동했다고요? 말도 안 됩니다."
존 링컨은 자신의 의견을 입증하고자 모래 4-5kg이 든 양동이를 들고 와선 1분가량을 버티다 내려놓고는, 이보다도 더 오래 들고 버틸 수 있는 '사람'이 여기 어디에 있겠느냐며 자신했다.
사건으로부터 일주일 후.
울루루 일대에서 기슭 골짜기로 야생화 촬영에 나선 사람이, 동물들이 드나드는 울창한 수풀 길목에서 바위 근처로 널브러져 있던 아기용 옷가지들을 발견한다.
찢겨진 기저귀와 상하의가 합쳐진 점프수트였다.
이번에도 신고를 받고 프랭크 모리스가 출동해 증거를 수거한다.
사건으로부터 11일 후인 8월 28일.
그래엄 찰우드 형사가 마이클 길로이 경감 측으로부터 수사를 인계받는다. 그리고 인계받은 사건 초기 보고서를 곱씹다 무언가 특이한 것을 발견한다.
그건 바로, 사건 이전 아내인 린디가 아자리아를 검진하러 간 곳에서 진료를 실시한 의사의 증언이었다.
"아기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검은 옷으로 입혔더라고요. 아자리아(Azaria)라는 이름도 독특해서 나중에 이름 사전에서 찾아봤습니다. 사전엔 '광야의 제물'을 의미한다고 나와 있더라고요."
사건 보고서에 기록된 특이 사항은 또 있었다.
아자리아의 찢겨진 옷가지들이 발견된 장소가 다름 아닌 사건 당일 낮 부부가 하이킹하던 지점 근처였다는 점, 사건 직전 저녁에 린디를 목격했던 현장의 다른 캠퍼들은 그녀가 품에 하얀 꾸러미를 안고 있어 그저 아기를 안고 있겠거니라고 여겼을 뿐 실지론 아자리아의 모습을 확인한 이가 없다는 점이 그러했다.
이제 사건은..
아자리아의 수색보다는 체임벌린 부부에게 혐의점이 없는지 여부에 초점이 맞춰졌다.
호주 각지에선 딩고를 대상으로 한 일종의 진술 검증 실험이 이어졌다. 발견된 옷가지들의 찢김 흔적이 딩고의 이빨로 인한 것인지 아니면 인간의 도구로 인한 것인지를 파악하고자 고기를 기저귀로 쌓아 제공했고, 실종 현장 부근에서 사살된 딩고들을 해부해 인간의 뼈나 단백질 유무를 조사했다.
물론, 발견된 옷가지들에서 혈액&식물&모발 샘플을 채취해 분석도 진행했다.
한편..
이 무렵, 언론 역시 사건의 노선을 '체임벌린 부부의 소행'으로 정했다.
부부는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라는 '오로지 성경만이 신앙의 신조'임을 표명하는 근본주의 교파의 독실한 신도였으며 남편인 마이클은 목사이기까지 했다.
해당 교파는 당시 미국에선 개신교 형제 교단으로 인정된 지가 얼마 되지 않았으며, 호주에선 일반적으로 그 존재 자체가 분명 이질적이고 낯선 교파였다.
따라서, 종말론을 앞세우는 이단 내지 사이비로 여겨질 여지가 충분했으며 특히나 2년 전인 1978년에 존스타운 집단 자살 사건이 세계적으로 논쟁을 일으켰기에 더욱 경계의 소지가 불러일으켰다.
언론은 바로 이런 점들을 내세우며 체임벌린 부부를 은근하게 몰아가며 사건의 원흉이자 범인으로 지목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에 호도된 대중은 다음과 같이 부부를 성토했다.
"존스타운 집단 자살 사건과 연관이 있는 자들이야!"
"저들 종교에서 행하는 의식의 일환으로 애를 희생물로 바친 거야! 애 이름인 아자리아도 '광야의 제물'이라는 뜻이라고!"
"엄마라는 사람이 애가 사라졌는데도 얼굴이 어쩜 저리 태연하고 침착해? 카메라 의식이나 하고 말이야!"
사건으로부터 2개월여 후인 1980년 10월 1일.
수사를 이끌던 그래엄 찰우드 형사는 체임벌린 부부를 각각 분리한 뒤 몇 시간에 걸친 심문을 진행했다. 심문은 주로 사건 전후 며칠 간의 행적을 진술받는 식이었다.
한편, 텐트 주변에서 문제의 딩고를 목격했었던 린디에게 보다 자세한 기억을 끌어내고자 최면을 제안하자 린디는 다음과 같이 거절한다.
"저희 교회에서 허락하지 않을뿐더러 저 자신도 원치 않아요. 엔돌의 무녀와 사울 이야기 아세요? 사울이 그 일로 하나님께 죽임을 당했잖아요."
(주: 구약 성서에 나오는 이야기. 이스라엘의 사울 왕이 전쟁을 앞두고서 신에게 조언을 구하나 응답이 없자 엔돌의 무녀를 찾아갔고, 거기서 선지자 사무엘로 의심되는 존재로부터 파별을 예언 받는다. 신으로부터 직접 조언을 구하지 않고서 영매를 통했기에 벌을 받은 것이라는 해석의 이야기)
다시 2개월여 후인 1980년 12월 16일.
지역 치안판사이자 검시관인 데니스 배릿이 검시관 조사를 진행한다.
사건 관할인 노던 준주 지역 경찰 및 검찰은 아기 아자리아의 죽음에는 인간이 개입한 것이라는 논지를 펼쳤다.
발견된 옷가지가 딩고에게 끌려가다 벗겨진 게 아닌 사람이 갖다 놓은 모양새이고, 심지어 사람 손을 통해 벗겨진 듯한 흔적도 있으며, 옷에 가해진 데미지 역시 딩고의 이빨에 의한 것이라 볼 수 없다는 주장이었다.
허나, 이들은 린디가 자신의 아이를 살해할 만한 의지나 동기가 있는가에 대해 설득력 있는 입증을 끌어내진 못했다.
그리고..
또다시 2개월여 후인 1981년 2월 20일.
TV 카메라로 생중계되는 대중적 관심 속에서 호주 법원 재판의 결과가 나온다.
치안판사 데니스 배릿은 다음과 같은 요지의 판결을 내렸다.
"방대한 증거를 검토한 끝에, 아자리아는 가족 텐트에서 잠들어 있던 중 야생 딩고의 공격을 받아 사망했다고 결론 내렸습니다. 따라서, 부모 어느 쪽에도 그 죽음에 어떠한 책임도 없다고 판결 내립니다. 다만, 발견된 옷가지 속 증거를 통해 아자리아의 시신은 처음 딩고에게서 이후 신원 미상의 사람의 손에 들어가 미상의 방법으로 처분됐다고 결론지었습니다."
다소 모호한 결말과 함께 체임벌린 부부에게 무죄가 판결됐으나, 지역 경찰 수사팀은 이 '첫 번째 재판'의 결과에 승복하지 않고서 더욱 의욕을 내며 수사에 집중한다.
1981년 9월 19일.
수사팀은 부부의 자택을 5시간 가까이 수색하며 집안의 옷가지와 가위 등에서부터 사건 당시 몰던 차량에 이르기까지 300여 점의 증거물을 압수해 간다.
그래엄 찰우드 형사는 이러한 수사에 대해 영국의 유명 법의학자 제임스 캐머런에게 자문을 구한 결과 아자리아의 발견된 옷가지 분석에서 딩고가 실종에 관여하지 않았다는 분석을 받았다고 부부에게 설명했고, 이게 린디는 다음과 같이 응수한다.
"오, 런던에 딩고 전문가가 있는 줄은 정말 몰랐네요."
(주: 앞서 서술했듯 딩고는 호주의 토착 동물과 다름없음)
1981년 11월.
사건 관할인 노던 준주의 법무장관이 새로운 증거가 발견됐다며 두 번째 검시를 요청한다.
이 증거란, 부부의 차량 분해 과정에서 발견한 대량의 혈흔이었다.
1981년 12월.
새로운 검시관의 주재하에 진행된 검시 과정에서, 생물학자로부터 차량 조수석 아래의 태아 혈액을 검출했다는 증언을 이끌어낸다.
또, 영국의 유명 법의학자 제임스 캐머런운 아자리아의 옷가지에서 발견된 찢김은 딩고의 이빨보다는 가위가 더욱 그럴듯하다고 증언한다.
이에 따라, 이 두 번째 검시는 린디가 아자리아를 텐트에서 데리고 나와 차량 안에서 가위와 같은 날카로운 흉기로 살해했다는 시나리오를 완성시킨다.
1982년 9월 13일.
시신도, 동기도, 목격자도 없으나 새로 발견한 강력한 증거인 다량의 혈액으로 인해 체임벌린 부부는 아자리아 살해 혐의로 기소된 끝에 재판대에 서게 된다. (린디는 임신 중인 상태였음)
그렇게 12명의 배심원(지역 주민 신청자 123명 중에서 선발된)과 법정을 꽉 채운 방청객 속에서 검찰과 피고 측의 치열한 법정 공방이 시작됐다.
검찰 측은 다음과 같은 요지로 포문을 열었다.
"아기 아자리아는 누군가 목을 그으며 아주 짧은 시간 안에 사망했습니다. 검찰은 살해 동기나 이유를 제시하지 않겠습니다. 체임벌린 부인이 이전부터 아이에게 악의를 품었다는 점도 입증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그녀가 주장한 딩고의 공격 이야기는 진실을 가리려는 기상천외한 거짓말이라 단언할 수 있습니다."
첫 법정 증인으로, 사건 당시 현장인 캠핑장에서 체임벌린 부부와 안면을 트고서 친해졌었다는 로우 부부가 소환됐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로우 부부의 증언은 체임벌린 부부 측에 힘을 실어줬다.
"린디가 바비큐 자리에서 떠나있던 시간은 6-10분에 불과했습니다."
"텐트 쪽에서 꽤 심각해 보이는 아기의 울음소리를 확실히 들었습니다. 이 울음소리는 분명 텐트에서 나는 소리였고 갑자기 끊겼습니다."
한편, 당시 사건 현장에 있었던 다른 증인 역시 다음과 같은 증언을 한다.
"체임벌린 부부가 차량의 피를 닦고 있는 걸 본 적이 없습니다. 당시 텐트 주변으로 사람이 많았으므로 그랬다면 분명 누군가가 목격했을 겁니다."
"저도 텐트 바깥으로 낮고 깊은 딩고 울음소리를 들었어요. 그리고 5-10분 정도 후에 체임벌린 부인이 딩고가 아기를 데려갔다고 외치는 것을 들었고요. 이전에 딩고가 제 12살 난 딸아이 팔을 물고서 끌어당기기에 쫓아낸 적도 있습니다."
물론, 체임벌린 부부에게 유리한 증언을 하는 증인만 있던 것은 아니었다. 또 다른 증인은 다음과 같이 증언을 했다.
"사건 직후 몇 분밖에 안 됐을 때입니다. 부부 중 남편 쪽이 딩고가 자기 아기를 데려갔는데 아마 지금쯤 죽었을 거라고 말하더라고요. 또 아내 쪽은 무슨 일이 일어나든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하더군요. 이후 부부가 둘만 숲 쪽으로 15-20분 정도 걸어 들어간 것도 봤습니다."
검찰 측은 체임벌린 부부가 이른바 딩고 소동을 일으킨 뒤 단둘이서 숲 쪽으로 향해 시신을 매장했으며, 실지 살인은 차량 안에서 이뤄졌다고 주장했다.
검찰 측은 차량 조수석에서 발견된 다량의 혈흔이야말로 사건의 절대적인 증거라고 강조했다.
한편, 체임벌린 부부 변호사 측은 해당 혈흔이 과거 부부가 태워 준 적 있던 한 히치하이커의 것이라 반론했다. 당시 이 히치하이커가 출혈 중이었으며, 이를 입증하고자 해당 히치하이커를 증인석에 세운다.
허나, 검찰 측은 전문가들의 분석에 따르면 차량의 혈흔엔 태아의 헤모글로빈이 비정상적으로 높으므로 이는 아기 아자리아의 혈흔이라 반론한다.
그리고, 이후 법의학 전문가들의 잇따른 증언을 통해 점차 재판의 분위기는 한쪽으로 기울기 시작한다.
증언대에 선 생물학자는, 아자리아의 옷가지에 남은 혈흔이 목 부위로 날카로운 도구가 절단하며 아래로 흘러내린 양상이라 증언한다.
다른 법의학자는, 아자리아의 옷가지 훼손 상태가 딩고의 이빨이 아닌 무언가에 절단된 듯한 흔적으로 보인다고 증언한다.
호주 내 최고 섬유 권위자는, 문제의 옷가지를 가위로 자르면 작은 고리 실밥이 생기는데 그러한 실밥이 남편인 마이클의 카메라 가방에서 발견됐다고 증언한다.
또 다른 생물학자는, 차량 계기판 지지대 부근에서 검출된 혈액이 실험 결과 영아의 혈액임이 입증됐다고 증언한다.
런던의 치의학자는, 인간을 공격한 견공 케이스 20여 건을 조사했던 사례를 들며 아자리아의 옷가지에서 딩고 공격과 일치하는 점을 전혀 찾을 수 없었다고 증언한다. 딩고의 공격이 있었다면 대량 출혈이 나타나야 했으며, 딩고의 주둥이로는 아기의 머리를 담을 수가 없다고도 주장했다.
영국의 유명 법의학자 제임스 캐머런은, 아자리아가 도구에 의해 목 주변이 잘려 살해됐다고 주장했다. 그는 UV 촬영 슬라이드를 증거로 제시하며 옷가지에서 혈흔이 묻은 손가락 자국 패턴이 보인다고 설명했다.
한편, 이러한 검찰 측 증인의 증언들에 대해 체임벌린 부부의 변호사 측 역시 즉각적으로 반론을 내놨다.
남편 쪽의 카메라 가방에서 발견된 고리 실밥의 경우, 새 상품 상태에서도 그러한 실밥이 나올 수 있다고 반론했다.
차량에서 발견된 혈흔의 경우, 히치하이커의 출혈일 가능성을 제기하는 동시에 실험에 사용된 검사지가 파기돼고 남아있지 않으므로 실험 결과의 정확도를 단정 지을 수가 없다고 반론했다.
딩고의 주둥이가 아기의 두개골을 덮을 수가 없다는 주장에 대해선, 딩고가 아기 크기의 인형 머리를 완전한 상태로 물고 있는 사진을 제시했다.
영국의 유명 법의학자 제임스 캐머런의 주장에 대해선, 과거 그가 親 검찰 증언을 통해 무고한 피고를 죄인으로 만든 선례들이 있음을 주지시켰다.
마지막으로, 제임스 캐머런이 제시한 '옷가지에서 혈흔이 묻은 손가락 자국 추정 패턴' 슬라이드 사진 옆으로 린디가 집게손가락을 대보았다. 사진 속 손가락 추정 자국의 마디는 4마디로 나뉘어 있었고 린디의 손가락은 3마디였다. 인간의 손가락은 3마디라는 사실을 새삼 깨달을 수 있는 순간이었다.
이어 검찰 측은 린디의 딩고 목격 진술에 대해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딩고에게 물려 핏물이 흐르는 상태에서 흔들려졌다면 텐트 안팎으로 대량의 혈흔 흔적이 남아야 하지 않을까요? 그리고 차량에서 발견된 영아의 혈흔도 해명해 주실까요?"
한편, 린디는 검찰 측의 심문에 다음과 같은 태도를 견지했다.
"그게 어떻게 그리됐는지 제가 추측해서 말하진 않겠습니다."
이어, 변호인 측이 준비한 증인들이 줄지어 증언을 이어갔다. 체임벌린 부부의 성품, 자녀를 잃었을 당시 보이던 슬픔, 지역의 딩고로부터 위협을 받았던 체험담 등을.
또, 핵심 증인으로 나선 전문가들의 증언도 있었다.
법의학 전문가 배리 뵈처는 차량 내부에서 검출된 영아 혈흔에 대해 정면으로 반박하고 나섰다. 실험 방식에서부터 위양성 여지가 있었다며 다음과 같이 힘주어 말했다.
"200번의 나쁜 실험은 1번의 좋은 실험만 못 한 겁니다."
배리 뵈처에 이어 변호인 측이 야심 차게 준비한 딩고 전문가 레스 해리스의 증언도 눈길을 끌었다.
"아기 아자리아만 한 먹이를 노리는 딩고는 먼저 머리 전체를 물어 고정시킵니다. 이어 턱을 완전히 닫아 먹잇감을 즉시 무력화합니다. 사냥 직후 먹잇감의 목을 꺾으려 머리를 흔드는 습성이 있습니다. 일단 사냥이 이뤄지면 먹이를 들고 주변을 어슬렁거리며 머무를 가능성은 현저히 낮습니다. 특히, 야생에서 벌어지는 딩고의 사냥은 피가 거의 튀지 않습니다."
변호인 측의 마지막 증인은 남편인 마이클이었다.
검찰 측은 마지막 심문답게 마이클을 향해 집요한 공격을 이어갔다.
"사건이 벌어지고서 아내분께 사건과 관련한 질문을 특별히 하지도 않았습니다. 수색이 펼쳐지던 때 딸아이를 찾지도 않았죠. 딩고가 데려간 게 아니라 아내가 죽였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 아닙니까?"
"아닙니다."
"사실 딩고 이야기 전부가 허튼소리라는 걸 아시잖습니까."
"아닙니다."
마지막으로, 변호인 측의 최후변론이 시작됐다.
"체임벌린 부인께서 자기 딸을 죽일 이유가 있었습니까? 검찰은 단 하나의 그럴듯한 살해 동기도 제시하지 못했습니다. 검찰은 궁리할 시간이 2년 3개월이나 있었지만 결국 없었던 거죠.
이어, 검찰 측의 최후변론이 이어졌다.
"맞습니다. 살해 동기가 입증되지 않았습니다. 검찰이 요구하는 건, 살인이 실제로 있었다는 점을 인정해 달라는 것입니다. 반대로 생각해 보죠. 딩고의 유죄를 시사하는 증거가 얼마나 부실한지를요. 텐트 주변으로 딩고 털이 있었습니까? 끌고 간 흔적은 있었나요? 캠핑장의 그 많은 사람 중 아기를 물고 가는 딩고를 본 사람이 있나요? 발견된 옷가지도 공격과 이동 거리를 생각할 때 비교적 멀쩡했죠. 이런 증거들로 딩고를 기소한다면 법정의 웃음거리가 될 것입니다."
사건 당시 텐트에서 아기 울음소리를 들은 목격자가 있으며, 체임벌린 부부의 알리바이를 통해 차량에서 아기를 살해하고 이후 다른 장소에 유기를 한다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다.
차량에서 검출됐다는 결정적인 영아 혈흔과 딩고의 특성 역시, 변호인 측 전문가들의 반박을 통해 그 진위가 모호해졌다.
대다수의 법정 기자단은 1차에 이어 부부의 무죄 평결을 예상했다.
한편, 1달 넘게 진행된 재판에서 배심원단은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린다.
"린디에게 살인 유죄. 마이클에게는 사후 방조 유죄."
그렇다.
이미 호주 전역의 여론은 부부의 유죄를 믿어왔다. 또 바라왔다.
그간 언론이 부추기며 확신으로 바뀐 의심, 법정 내내 차분함을 유지하려던 부부에게서 오히려 '대중이 자연스레 떠올리는 태연한 태도의 범인상'을, 그리고 오랫동안 호주인들이 인식해 온 '딩고의 무해함' 등이 혼합된 결과였다.
이러한 무의식적 판단은 배심원단에게도 영향을 끼쳤고..
그렇게..
판사는 린디에게 종신형을, 마이클에겐 집행유예를 선고하며 다음과 같은 말을 남긴다.
"해당 조처는 합당할 뿐만 아니라 정의에도 부합한다고 봅니다."
린디는 교도소 복역을 시작한 지 1개월째에 아이를 출산했다.
딸이었다.
린디는 1983년 잠시간 항소심 보석으로 짧은 자유를 얻으나, 이후 다시 교도소로 보내지며 수감 세월을 보낸다.
한편..
그러는 동안 호주에선 점차 체임벌린 부부에 대한 구명 여론이 형성되며 '프리 린디' 운동이 거세진다.
머리와 가슴이 충분히 차가워질 시간 덕분이었을까?
이제 10만 명의 호주인이 린디의 석방 청원에 서명했으며, 여론 조사에서는 그녀의 유죄를 믿는 비율이 52%로 대폭 감소했다. (이전에는 76.8%였음)
허나..
결론적으로, 이러한 변화된 여론은 린디의 수감 처지에 어떠한 변화도 몰고 올지 못한다.
"딸아이를 마지막으로 눕혔던 날.. 아이는 유아용 점프수트에다 겉으로 옅은 레몬색 테두리의 흰색 니트 재킷을 입고 있었어요."
2차 재판 당시 린디가 증언했던 내용이다.
그리고 발견된 옷가지는 점프수트였다.
해당 사건은 전혀 다른 사건을 통해 극적이고 기막힌 반전이 이뤄진다.
1986년 1월, 영국인 등산객이 사건 현장 일대에서 등산하던 중 그만 추락하며 사망하는 일이 발생한다.
실종으로부터 8일 후 이 남성의 시신이 발견되는데, 그 장소는 딩고의 굴이 산재한 낭떠러지 아래였다.
여기서 남성의 뼛 조각들을 수색하던 경찰은, 세월에 희끗해진 아주 작은 사이즈의 재킷을 발견한다.
잃어버린 아자리아의 그 재킷이었다.
사건 관할인 노던 준주의 수석 장관은 즉각 다음의 명령을 내린다.
"지금 당장 린디 체임벌린의 석방을 명령합니다."
그리고..
1986년 2월 7일.
마침내 린디가 교도소 정문을 걸어 나와 본래 마땅히 누리고있었어 야 할 자유를 그제야 만끽한다.
한편, 석방 이후 새로이 사건에 대한 검시가 재개된다.
1개월간 이어진 검시를 통해 나온 379쪽의 보고서에선 검사 측 핵심 증인이었던 전문가들의 분석 기법을 신랄하게 비판했으며, 당시 캠핑장에서 부부의 상황을 목격하고 있던 증인들이 신빙성 높은 증언을 펼쳤노라 평가했다.
하여..
1988년 9월.
대법원에서 체임벌린 부부에게 내려졌던 모든 유죄 판결을 만장일치로 파기한다.
특히, 과거 재판에서 결정적인 증거 역할을 한 차량 내부의 영아 혈흔 검출이 실은 엎질러진 우유와 차량 제조 과정에서 대시보드 아래에 뿌려진 화학 물질 간의 조합이었다는 보고서가 채택된다.
체임벌린 부부는 승리 연회를 열어 변호인 측, 자신들의 무고함을 주장했던 전문가들, 부부와 마찬가지로 딩고로 인해 딸을 잃은 부부, 그리고 긴 세월 변함없이 지지를 보내왔던 언론인 및 정치인 등을 초청했다.
이 연회에서 변호인은 다음과 같은 연설을 남겼다.
"체임벌린 부부는 정말이지 놀랍습니다. 놀라울 정도로 원망하는 마음에 빠져들지 않았습니다. 또 놀라울 정도로 자기연민에 빠지지도 않았습니다."
2개월여 후.
호주에선 체임벌린 부부의 이야기를 다룬 동명의 소설을 영화화한 가 개봉한다.
메릴 스트립이 린디 역으로 분하며 명연기를 펼친 영화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 후보에 노미네이트되기까지 했다.
시사회에 참석한 린디는 이후 1990년 출간된 자신의 회고록에서 다음과 같은 평을 내린다.
"영화 속 내용은 95%가 일치해요. 그리고 메릴 스트립보다 저를 더 잘 연기할 배우는 없었을 거예요."
한편, 이 회고록의 마지막 장에서 린디는 다음과 같은 뼈 있는 말을 남긴다.
"이제 우리 부부는 기다립니다. 노던 준주가 저희에게 갚아야 할 것을 갚을 때까지."
그리고 1992년.
노던 준주 지방정부는 부당하게 이뤄졌던 린디의 수감에 대해 보상금으로 130만 호주달러를 지급한다.
사건은 모두 끝난 건가?
그렇지 않다.
종교적 의식을 위해 '광야의 제물'이라 이름 지어진 아기를 그 어머니가 살해한 것이라는 누명.
사실은 '하나님의 축복'을 의미하는 이름인 아자리아와 그 아자리아를 어느 날 갑자기 잃게 된 부부의 비극.
그리고, 그날 아자리아에게 진짜로 무슨 일이 있었는가에 대한 정당한 판결까지..
그리고..
이에 대한 답은, 2012년 4번째 사망 검시와 함께 사건으로부터 32년 만에서야 결론이 내려진다.
"충분히 명확하고 설득력 있으며 정확하기에 다른 모든 개연성을 배제하는 증거에 따라, 그날 밤 딩고가 아자리아를 죽였다는 결론을 내립니다."
에필로그
체임벌린 부부는 1991년 이혼한다.
안타깝게도, 이처럼 무고한 사건에 오랜 세월 시달린 부부들 가운데 괴로운 기억으로 인해 서로 떨어져 있는 것이 낫겠다고 여겨 이혼하는 경우가 왕왕 있다.
이후 체임벌린 부부는 각각 새로운 상대와 재혼했다.
마이클은 교육학 학사 학위를 취득해 고등학교에서 영어와 역사를 가르치다 대학의 공동 교수로 연구원 활동을 하던 중 2017년 72세의 나이로 병사했다.
린디는 2010년 아자리아의 사망 30주기를 맞아 아자리아의 사망 증명서 적힌 사인을 딩고에 의한 사망으로 수정해 달라고 호소했고, 2012년 검시관의 최종 보고서를 통해 체임벌린 부부의 소원이 이뤄진다.
"아자리아의 사인에 대한 법적 진실을 얻기 위한 싸움이 너무도 오래 걸렸습니다. 저는 지금, 여러분이 모든 것을 잃었다고 생각될 때조차도 정의는 구현될 수 있다는 사실을 말하고자 여기 있습니다."
- 린디
"이제 사망 증명서의 사인이 '미상'에서 '딩고 공격'으로 바뀌기까지 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일부 호주 사람은 사건에 대해 린디를 탓합니다. 그들은 설령 딩고가 아기를 데려가는 영상을 보여줘도 설득되지 않을 이들입니다. 이미 마음을 정했기 때문이죠. 스스로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은 절대 설득되지가 않는 법입니다."
- 체임벌린 부부의 변호사 스튜어트 티플
참조
<Aussie Animals/“A Dingo Ate My Baby” The Tragic Azaria Chamberlain Case>
<Famous Trials/The Trial of Lindy and Michael Chamberlain ("The Dingo Trial")>
<National Museum of Australia/Azaria Chamberlain inque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