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최대 잔혹애정사: 세상이 우리를 갈라놓는다면

(Câmara Municipal de Sintra)

대항해시대의 포문을 열며 식민주의 정책사업으로 바다 건너까지 그 권세를 떨치던 포르투갈 왕국.

1139년 첫 국왕인 아폰수 1세 이래, 1910년까지 무려 771년이나 왕조를 이어온 그의 후손들.

헌데..

이런 왕조의 역사엔 유일무이했던 사후 여왕이 존재한다.

비극으로 점철된 애욕, 그리고 순애 바깥으로 둘린 광기와 비정이 맺어낸 포르투갈 왕국의 단 하나뿐이었던 사후 여왕이.

국왕 아폰수 4세가 통치하던 14세기에 있었던 일이다.

아폰수 4세는 자신의 자식들을 산초 4세(이베리아반도의 카스티야, 레온, 갈리시아를 다스리던)의 손자 손녀와 정략결혼 계약을 맺는다.

하여..

아들 페드루(7)와 산초 4세의 어린 손녀 브랑카가 혼인을 약속하며, 브랑카는 유럽 왕조의 문화에 따라 포르투갈로 넘어와 결혼 적령기까지 양육되기로 한다.

허나, 8년의 세월이 흐르고서 브랑카는 양국 왕실 의사들의 진찰 결과 정신 건강에 문제가 있다는 이유로 혼인은 무효화 된다.

그로부터 1년 후.

페드루(16)와 카스티야 왕국의 거물 귀족 가문 영애인 콘스탄사 마누엘(20) 간의 대리혼이 체결된다.

그리고 4년 후인 1340년, 리스본에서 마침내 페드루의 정략 결혼식이 거행된다.

한편..

콘스탄사는 포르투갈로 넘어올 당시 시녀 하나를 동행시킨다.

콘스탄사의 친척이기도 했던 이 시녀는, 갈리시아 왕국의 저명한 귀족 가문의 영애이자 카스티야 왕가와도 연결돼 궁정에 소속돼 있던 이네스(15)였다. (그녀의 할머니가 산초 4세의 사생아였음)

그리고..

페드루(20)와 이네스는 서로 걷잡을 수 없는 사랑에 젖어 들게 된다.

(Ernesto Ferreira Condeixa)

후계자인 아들이 정실은 뒷전으로 한 채 이네스와 더불어 그녀의 두 남자 형제들과 친해지며 측근으로까지 두자 국왕인 아폰수 4세의 근심은 나날이 깊어져갔다.

갈리시아 내 유력 귀족 가문의 딸이자 카스티야 왕국과도 연결돼 있는 이네스 그리고 이러한 이네스를 징검다리 삼아 타국의 귀족(내전을 피해 망명한 이네스의 남자 형제)이 권력의 핵심에 접근하는 건, 향후 왕조에 대한 위협이자 당장 가뜩이나 좋지 않던 카스티야 왕국과의 관계를 더욱 악화시킬 게 자명했기 때문.

한편, 아폰수 4세는 마땅한 방도 없이 그저 아들의 열망이 잦아들기를 기다리며 전전긍긍하다 급기야 1344년에 이네스를 국경으로 추방하기에 이른다.

그러던 1345년..

콘스탄사가 출산 합병증으로 사망한다.

페드루와의 사이에서 아들 페르난두를 낳고는 보름 만에 벌어진 일이었다. (그 4년 후인 1349년에 사망했다는 이야기도 있음)

아내가 사망하고서 페드루는 아버지의 거듭된 재혼 요구에도 아내(콘스탄사)의 죽음으로 인한 슬픔이 사라지지 않았다는 핑계로 불복하며, 이네스를 불러들여 비밀리에 동거를 시작하는가 하면 그녀의 남자 형제들에게 요직을 선사해 최측근으로 두기까지 한다.

국왕인 아폰수 4세의 불안은 극에 달하게 된다.

설상가상..

페드루는 이네스와의 결혼 허락을 받지 못하자 이에 개의치 않고서 서로 결혼한 것이라 주장하며 그 사이에서 자녀들을 낳기까지 했다.

사실..

당시 유럽 왕실의 잣대에 비추어 볼 때, 측실과의 사이에서 사생아는 그리 드문 게 아니었다. 당장 아폰수 4세의 경우에도 사생아가 있었다.

다만, 이네스의 남자 형제들을 중심으로 카스티야 왕국을 적대시하는 귀족 파벌이 형성되는 게 문제였다. 또, 페드루가 이네스를 정식으로 아내로 들이려 고집하는 것도.

1355년 1월, 국왕인 아폰수 4세가 칼을 빼 들었다.

이대로라면 자신이 죽고 나서 권력 다툼을 위한 내전이 일어나거나 혹은 일련의 사태를 명분 삼아 카스티야 왕국의 침범이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서였다. 이 일련의 사태란, 이네스의 남자형제들의 부추김에 따라 페드루-이네스 세력을 통한 카스티야 왕국 내전 개입의 시도였다.

하여..

아폰수 4세는 페드루의 부재를 틈타 약식 재판을 거쳐 왕실의 고문역인 페루, 알바루, 디오구에게 이네스를 현장에서 처형할 것을 명한다.

(Karl Bryullov)

이 3인에 의해 이네스는 어린 자녀가 바라보는 가운데 목이 베어졌다고 전해진다.

한편..

셈할 도리가 없는 분노에 휩싸인 페드루는..

자신을 지지하던 귀족들과 이네스의 남자 형제들로부터 지원을 받아 아버지를 향해 군대를 일으켜 선봉에 나선다.

그렇게 수개월간 갈등과 대치가 이어지자 여왕인 베아트리즈가 개입해 중재한 끝에 평화 협정이 이뤄진다.

그리고..

평화 협정 직후 적지 않은 나이(66)였던 아폰수 4세가 세상을 떠나게 되면서..

1357년, 페드루는 포르투갈 왕국 여덟 번째 국왕의 자리에 오른다.

(Câmara Municipal de Sintra)

국왕의 자리에 오르며 절대 권력을 손에 넣은 페드루.

그는 이네스와의 결혼 사실을 공식화하며 그 사이에서 태어난 자녀들도 모두 정식 후손으로 선포한다.

이어..

카스티야 왕국으로 도망쳤었던 이네스 처형의 주도자 3인인 페루, 알바루, 디오구를 추적한다.

여기서 프랑스로 도망쳤던 디우구를 제외한 나머지 2인을 생포한 페드루는..

자신이 직접 이들의 심장을 산 채로 찢어발겼다고 전해진다.

다음의 말과 함께.

"무고한 여인을 죽인 자는 심장이 있을 수 없는 법이다!"

(Pierre Charles Comte)

전설에 따르면..

페드루는 사후 대관식을 열어 이네스의 시신을 꺼내어 왕관과 왕복으로 장식한 뒤 왕좌에 앉히고는 왕국 내 모든 귀족에게 그녀의 손등에 키스하는 의식을 진행하도록 지시하며, 생전 그녀가 받지 못했던 충성과 존경을 바치도록 했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이후 영리한 조치들을 통해 왕권을 강화하고 사법 행정을 개혁하는가 하면, 재정적 번영과 더불어 포르투갈의 교회를 사실상 국왕 관할의 국가 교회로 만드는 데에 크게 이바지한다.

한편..

페드루는 두 개의 화려한 무덤을 만들도록 명령하고는 훗날 자신과 이네스가 죽어서도 나란히 있을 수 있도록 지시한다.

이 무덤에는 둘의 생애 기억들이 정교한 조각으로 새겨져 있으며..

페드루가 이네스에게 생전 했던 다음의 맹세가 문구로 남겨져 있다.

"até ao fim do mundo (세상 끝 날까지)"

(Câmara Municipal de Sintra)


참조

<Encyclopedia Britannica/Inês de Castro>
<Encyclopedia Britannica/Peter I>
<Fundação Inês de Castro/Inês de Castro>

-끝-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