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대생, 실종, 그리고 억만장자

* 본 글은 단순히 범죄사건과 관련한 호기심을 충족시키고자 오락적 목적을 추구하는 것이 아닌, 사건의 악랄한 범행성을 알림과 동시에 범죄의 연보年譜를 통한 교육에 그 목적을 두고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린 슐츠 (AP)

시간이 모든 것을 지운다고 하지만, 어떤 기억은 지워지지 않고서 화석처럼 박제되곤 한다.

1971년 12월 10일의 미국 버몬트주 미들버리도 바로 그런 박제가 남아있다.

미국 북동부 버몬트 주의 작은 대학 도시 미들버리.

이곳에 위치한 명문 리버럴 아츠 칼리지인 미들버리 대학 캠퍼스에선 크리스마스를 앞둔 설렘과 동시에 기말고사의 긴장감이 감돌고 있었다.

미들버리 대학 1학년이었던 린 슐츠 역시 오후 1시에 있을 영문 희곡 시험을 준비하던 참이었다.

아니, 준비했어야 됐었다.

오후 1시, 기말고사가 예정돼 있었다.

점심 무렵인 오후 12시 45분경.

린의 기숙사 방으로 동기인 친구가 찾아온다. 함께 시험을 치르러 갈 예정이었기 때문이다.

린은 자기가 가장 좋아하는 펜을 찾는 중이라며 뭉그적거리고 있었다.

약 10분 후, 친구가 그녀의 방을 내다보자 그곳엔 아무도 없었다. 친구는 그녀가 시험을 보러 강의실로 갔을 것이라 여겨 자신도 그곳으로 향한다.

헌데..

강의실에 도착한 친구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곳에 린은 없었다.

린은 수업에 한 번도 빠진 적이 없었고 보통 앞자리에서 집중해 강의를 듣던 학생이었다.

린은 아직 시험이 마무리 단계이던 오후 2시 15분경, 캠퍼스 바깥의 시내버스 정류장 근처에서 목격된다.

그곳은, 지역의 건강식품점이 위치한 곳이기도 했다.

건강식품점, 뉴욕, 사라진 여대생..

모든 비극은 가장 평범한 순간에 싹트는 법이다.

여느 날과 같은 그때, 엄청난 우연의 소용돌이가 그곳에서 휘몰아치고 있었다.

60년대 무렵의 미들버리 대학 캠퍼스 전경 (Riley Board)

키 160에 몸무게 50의 자그마한 체구와 짙은 금발의 벽안. 독립적이고 자립심이 강하며 외향적인 데다 사람들과 쉬이 어울리는 성격. 무엇보다도, 삶에 대한 뜨거운 열정과 타고난 호기심을 품고서 태어난 듯한 아이.

이것이 린의 가족들이 전하는 그녀의 모습이었다.

린은 코네티컷주 교외 지역인 심스버리에서 자라났다. 그녀는 이 자연친화적인 곳에서 성장기 동안을 평화롭게 보내왔다. 모험과 일탈이라고 해봐야, 부모님 몰래 친구들과 거리의 로프 그네를 타다 저수지 물로 몸을 던지는 게 전부였다.

린은 또한 머리가 영특했다. PSAT에서 만점을 받으며 전국 장학 프로그램에서 상위권 리스트에 이름을 올려놓을 정도였다.

그녀는 차량으로 3-4시간 거리인 버몬트주 내 미들버리 대학에 합격했다. 이곳은 뉴잉글랜드 지역의 명문 사립 학교로, 이른바 리틀 아이비 중 하나로 꼽히는 곳이었다.

그렇게 린은 아름다운 자연 경관 속에 오아시스처럼 우뚝 솟아나 있는 이곳 미들버리 대학으로 다른 500명의 신입생들과 함께 인생에 펼쳐진 첫 모험 길로 나선다.

대학에서 기숙사 생활을 하게 된 린은 매주마다 가족들과의 전화 통화와 더불어 편지를 주고받곤 했다.

또, 대학 생활에도 처음부터 잘 적응해 나갔다. 평소 자연에 친숙하며 하이킹을 즐겨왔던 그녀는 대학 아웃도어 클럽에 가입하며 주 전역을 돌아다니다시피 했으며, 학교 내에 새로 생긴 교육 예술 강좌를 통해 목각 수업에서 두각을 드러내기도 했다.

물론, 원체 영특한 머리를 지니고 있었기에 다른 수업 과정에서도 금방 적응한 그녀였다.

헌데, 어쩌면 너무도 빨리 적응을 마치며 새로운 삶의 리듬감에 금방 익숙해진 탓이었을까.

그녀는 이내 대학 수업에 환멸을 느껴버리고는 곧잘 친구들에게 이렇게 푸념을 늘어놓곤 했다.

"수업 진짜 지루해. 강의 듣는 거 시간 낭비 같아. 그냥 혼자 책을 읽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어. 그게 더 많이 배우는 것 같아. 모르겠어. 행복하지도 않고 학교가 좋아지지도 않아. 학기 끝날 때쯤 여기를 떠나버리면 어떨까."

린은 첫 학기가 끝나갈 무렵이자 추수감사절 무렵인 11월 중순경 집을 방문한 자리에서 가족들에게 이같은 심정을 털어놓을 정도였다.

그렇다고 그녀가 학업에 손을 놓아버린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한 번도 수업에 빠지지 않았을뿐더러 성적 관리에도 신경 쓰고 있었다. 비록, 고등학교 수재 시절의 학업 기록만큼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어쩌면, 린은 성인을 맞이하며 자라온 곳을 떠나 새로운 환경에 당도했건만 자신이 그때까지와의 유사한 환경 속에서 비슷한 행위를 하고 있다는 생각을 했던 것이 아닐까?

어쩌면, 자연에서 모험심을 키워오며 자란 그녀에게 있어 그때껏 공상했던 대학 생활은 현실의 그것과 불협화음을 이루고 있었을지 모르겠다.

그래도 린은 다음 학기 수업을 등록하기로 결정하며 곧 있을 시험을 준비한다. 12월 들어선 크리스마스 연휴 간 고향집에서 보낼 나날에 들떠선 가족들과 기분 좋게 통화를 하기도 했다.

12월 8일 수요일 있었던 엄마와의 통화에서 그것을 알 수 있었고, 반면 알 수 없었던 것은 이게 모녀의 마지막 대화였다는 것이겠다.

1971년 12월 10일 금요일.

린은 오후 1시에 있을 영문 희곡 시험을 준비하던 참이었다.

아니, 준비했어야 됐었다.

이날 아침 린의 대학 친구 몇몇에 따르면, 그녀는 뭔가에 몰두해 있거나 다소 음울해 보였으며 뉴욕행 버스표를 살 계획이라는 말을 했단다. 훗날 린의 은행 계좌를 확인해 보니 30달러가 인출돼 있었다.

시험 30분 전인 점심 12시 30분경.

린은 기숙사에서 1km 넘게 떨어진 캠퍼스 밖에서 목격된다.

그녀를 목격한 같은 대학 학생에 의하면, 그녀는 미들버리 시내의 건강식품점 바로 앞에서 말린 자두를 먹고 있었단다. 해당 건강식품점은 버몬트 지역 교통국 버스 터미널과 같은 건물에 있었고, 린을 목격한 이 학생은 함께 캠퍼스까지 걸어 돌아왔다고.

여기서 린은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방금 막 뉴욕행 버스를 놓쳐버렸어."

이날 시험 10분 전인 점심 12시 50분경까지 자신의 기숙사 방에서 목격됐던 린.

허나..

이후 시험을 불참한 그녀는 오후 2시 15분경 또다시 시내버스 정류장 근처에서 목격된다.

이번에는 건강식품점 건너편에서였다.

그리고..

그녀는 사라졌다.

반세기가 지난 지금까지도.

한편..

이날 우연찮게도 그녀가 직접 방문까지 했었던 문제의 건강식품점은..

바로, 훗날 악명을 떨치게 되는 한 억만장자의 가게였었다.

린이 시험에 불참하고서 홀연히 자취를 감춘 그날.

린의 룸메이트는 기숙사로 돌아와 다음날인 12월 11일 토요일 아침까지도 그녀를 보지 못한다. 겨울 방학을 위해 집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던 룸메이트는, 그저 린이 자신보다 한발 먼저 고향으로 향한 것이라 여긴다.

당시는 70년대였다.

대학생이 하루이틀 자취를 감추는 것에 대해 지금과 같은 인식이 아니었다.

린이 실종된 것이라 여겨진 것은 12월 13일 월요일 아침에서였다. 이날 대학 친구 중 누군가가 캠퍼스 보안팀에 실종 사실을 알렸고, 같은 고등학교를 나와 대학까지 함께 다니던 고향 지역의 친구가 이같은 사실을 심스버리 공동체에 전파한다.

그렇게..

린의 가족이 그녀의 실종 사실을 인지한 것은, 실종 당일로부터 4일 후인 12월 14일 화요일이었다.

당시는 70년대였다.

미국을 비롯한 서구권에선 젊은 층을 중심으로 발생했던 히피 문화가 마지막 불꽃을 피우던 시기였다. 개방과 자유가 신념화되던 무렵이었다.

어느 날 갑자기 대학생이 자취를 감춘다면, 히치하이킹을 해서 어디론가 여행을 떠난 것이라 여기는게 보다 그럴듯한 설명으로 보이던 때였다.

허나, 린의 부모는 처음부터 린이 범죄에 휘말린 것이라 확신했다.

12월 15일 수요일, 린의 부모가 대학 측에 연락을 취했고 거기서 학생처장으로부터 금요일과 화요일 시험 모두에 불참했다는 사실을 확인받는다.

린의 부모는 곧장 미들버리 지역 경찰에 연락해 실종 신고를 접수한다.

그렇게..

사건 5일 후에야 경찰에 의해 린에 대한 실종 수사가 시작된다.

(Lynne Kathryn Schulze)

수사 결과는 린의 부모의 생각에 더욱 확신을 심어줬다.

린의 기숙사 방에선 그녀의 소지품 거의 모두가 그대로 방치돼 있었다. 부모가 줬던 25달러 수표, 현금과 동전 총 7달러, 지갑, 대학 학생증, 운전면허증, 그리고 모든 옷가지와 더불어 침낭도 그대로였다.

그녀와 함께 사라진 소지품은 스키 재킷, 스웨터, 청바지, 하이킹용 부츠, 배낭이 전부였다.

또한, 그녀의 은행 계좌에는 잔액인 185달러가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녀는 자발적으로 모습을 감췄던 것일까?

아니면, 예기치 못하게 무언가로부터 연루되고 말았던 것일까?

린의 부모는 한 달간 미들버리 지역을 수차례 방문하며 딸의 행방을 쫓는다. 그저, 딸아이가 잠시 호승심에 어디론가 훌쩍 떠났던 것이기를 기원하면서.

허나..

린의 실종일은 계속해서 늘어만 갔다.

가족들의 연례행사와도 같았던 부모님의 결혼 기념일도, 린 자신의 19번째 생일인 2월 9일까지도 그녀의 행방은 묘연할 뿐이었다.

실종 한 달째부터는 언론 보도를 통해 적극적으로 대중의 도움을 구하기까지 했으나 소용이 없었다.

너무도 이상했다.

미들버리 지역은 인구수가 1만을 넘긴 적이 없는 데다 다운타운을 중심으로 인구가 밀집된 형국인지라 그처럼 누군가가 감쪽같이 사라지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다.

또 언론을 통해서도 기사가 나가면서 지역의 모든 이들이 린의 실종을 알 정도였음에도 유의미한 목격담도 나오질 않는다.

딱 하나의 제보를 제외하고는.

린의 부모에 의하면, 린은 독립심과 자립심이 강했고 고등학교 시절엔 웨이트리스로 일하며 그 일을 좋아했다고 한다.

또, 원체 사람들과 잘 어울리고 금방 호감을 사는 성격이었기에 어딘가에서 일하며 지내고 있을 가능성도 있으리라 여겼다.

한편..

몇몇 다른 주에서의 목격담들을 확인하나 모두 무위로 끝난 시점에서, 경찰은 믿을 만한 사람으로부터의 제보를 접수한다.

그 사람이란, 바로 버몬트주의 신문 기자였던 셀린 슬레이터였다.

1월 17일 월요일, 린의 실종으로부터 거진 한 달이던 무렵.

셀린은 언제나처럼 월요일 혼밥 관습에 따라 자신이 가장 애정하던 식당 중 하나인 록워즈로 향했다.

이곳은 미들버리 지역 시내에 위치한 곳이었으며, 여기서 그녀는 인상에 남는 젊은 여성 하나를 목격한다.

이 금발의 젊은 여성은 거의 땅에 닿을 듯한 드레스 위로 스웨터 하나만을 입고 있었으며, 그래서인지 가늘게 떨며 팔로 몸을 감싼 채였다. 또 얼굴은 창백했고 머리는 자다 일어났는지 부스스해 보였다.

셀린은 그녀가 아마도 공동체 생활을 영위하는 히피일 것이라 판단했다.

한편..

식사를 하는 동안 내내 그녀에게로 시선이 갔기에, 셀린은 조심스레 그녀에게 다가가 괜찮냐며 혹시 외투가 필요하냐고 물었다.

이에 젊은 여성은 감정 없는 무미건조한 톤으로 집에 외투가 있으며 날이 생각보다 따뜻하다며 일축한다.

그렇게 짧은 에피소드가 끝나고서..

6일 후인 1월 21일 금요일.

린의 실종에 대한 기사가 지역 언론을 통해 처음으로 전파되기 시작한다.

그리고, 셀린은 해당 기사에서 신문 속 린의 얼굴이 바로 그 식당에서의 젊은 여성과 흡사하다고 느낀다.

허나, 그녀는 신문 기자였다.

거의 모든 실종 사건들에서 대부분의 목격담은 단순한 오인이나 착각으로 끝나고 말기에 자신의 경험 역시 그럴 것이라 회의적이 될 수밖에 없었다.

헌데, 도무지 식당에서의 만남이 마음에 남아 떠나가질 않았다.

결국 그녀는 관련한 글을 작성하나..

끝내 기사로 내보내지 않고서 휴지통행으로 보내나..

도저히 그냥 지나칠 수만은 없다는 생각과 더불어 훗날 양심의 가책으로 괴로우리란 생각에 마침내 자신의 목격담을 대학 당국에 신고한다.

한편..

버몬트주 경찰은 해당 목격담을 신뢰할 만하다고 여겨 본격적인 추적을 시작했고..

마침내 미들버리 지역에서 차로 2시간 거리인 버몬트 그린즈버러 지역에서 문제의 젊은 여성을 찾아낸다.

그녀는 린이 아니었다.

그녀는 가출해 스스로 공동체 생활을 하며 히피적 삶을 선택했던 젊은이였다.

그렇게..

린의 실종에 대한 단서가 완전히 끊기면서..

세월만 속절없이 흐르며 40년이 흘러버린 2011년.

린의 가족은 언론과의 인터뷰를 통해 다음과 같은 입장을 내놓는다.

"우리는 린의 유해를 찾거나, 아니면 적어도 죽음에 대한 어떤 확인이라도 얻기를 희망합니다. 우리 가족은 린이 살아있다고 믿지 않습니다. 실종 직후 살해당했거나 사고로 사망했다고 의심합니다.

린을 아는 사람이라면, 린이 누구에게도 연락하지 않은 채 사라지는 게 결코 성격적으로 부합하지 않음을 압니다. 우리는 린이 미들버리나 혹은 근처 지역에 거주하던 한 무리의 사람들을 알게 됐고, 그 과정에서 발생한 린의 죽음에 대해 그들이 알 수도 있으리라 추측합니다. 린은 유쾌하고 모험심이 강하고 두려움이 없으며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는 것을 좋아했는데, 그러한 점이 죽음으로 이어졌을 수도 있다고 보는 거죠."

또, 미들버리 지역 경찰서장은 다음과 같이 인터뷰했다.

"우리는 이러한 미제 사건을 그냥 덮어두지 않습니다. 린이 사망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하고서 살인 사건으로 수사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아주 오래도록 이 사건을 수사해 왔으며, 앞으로도 계속해서 그럴 것입니다."

한편..

다음해인 2012년..

미들버리 경찰은 익명의 한 정보원으로부터 결코 웃어넘길 수 없는 제보를 받게 된다.

린이 마지막으로 목격됐던, 린이 말린 자두를 구매했던, 대학 캠퍼스 근방 시내의 건강식품점의..

당시 소유주가 바로, 로버트 더스트였다는 것.

(AP)

로버트 더스트가 누구인가?

1943년 미국 뉴욕 태생의 그는 뉴욕시에서 가장 오래되고 부유한 상업용 부동산 제국 중 하나로 꼽히던 더스트 그룹의 상속자였다. 이 그룹은 과거 포브스에서 80억 달러에 달하는 가치가 매겨진 바도 있었다.

바로 이런 가문에서 4형제 중 장남이었던 로버트.

허나, 그의 유년 시절은 결코 행복하다고 할 수 없었다.

그가 일곱 살이던 무렵, 그의 모친이 집 지붕에서 뛰어내려 목숨을 끊었다.

열 살 무렵엔 부친에 의해 정신과의로부터 상담을 받기도 한다. 바로 아래 동생인 더글러스와 치열하게 형제 싸움을 이어갔기 때문. 여기서 그는 인격 붕괴 혹은 조현병의 가능성을 진단받는다.

학창 시절 내내 로버트는 외톨이였다고 전해진다. 고등학교 졸업 앨범에는 사진 하나만이 덩그러니 남아있을 정도. 이후 펜실베이니아에서 경제학 학위를 취득한 그는 캘리포니아로 건너가 그곳에서 박사 과정을 등록한다.

바로 이 무렵 그는 라스베이거스 지역 유력 마피아(카지노 도박의 선구자였던)의 딸인 수잔 버먼을 알게 된다. 그리고 훗날 둘은 오래도록 우정을 유지한다.

26세 무렵엔 UCLA를 그만두고서 뉴욕으로 귀향한다.

그리고 그로부터 2년 후인 1971년, 미들버리 지역에 All Good Things라는 건강식품점의 소유주이자 운영자가 된다.

바로 이즈음, 가문 소유의 건물에 세 들어 살던 19세 치위생사 캐슬린을 만나 두 번의 데이트에 이어 동거까지 하게 된다. (로버트가 가게를 차리고서 뉴욕을 방문했을 때 처음으로 만나게 됐으며, 이후 로버트가 미들버리로 이사 와 함께 살자고 요청)

로버트 스스로 이 시기를 아주 행복하게 그리고 있다.

부친의 밑에서 이른바 상속 수업을 받는 것에 전혀 흥미를 느끼지 못했었는데(당시 로버트와 캐슬린 모두 히피 주의였음), 평소 마음에 품고 있던 건강식품점을 마침내 인수함과 동시에 사랑에 빠지게 된 것이니까.

허나..

그런 그의 꿈도 무색하게 1972년 12월에 건강식품점을 내놓기에 이른다. 상점가 운영을 원치 않았던 부친이 끈덕지게 설득을 한 결과였다.

그렇게 1973년, 로버트는 캐슬린과 뉴욕 맨해튼으로 돌아와 결혼식을 올렸으며 이후 부친과 동생인 더글러스와 함께 부동산 사업에 매진한다.

로버트와 캐슬린 (AP)

로버트는 주변인들로부터 소박하고 검소한 생활을 이어가며 아내에게 자상하고 사랑이 넘치는 남편이라는 평을 받는다.

헌데..

1980년을 기점으로 이러한 외부의 평가에 급격한 변화가 생긴다.

로버트는 캐슬린을 통제했고 볼륜을 저질렀으며 급기야 폭력을 행사하기까지 했다. 이로 인한 신체적 학대로 캐슬린은 병원에 입원까지 하며, 가까운 지인들에게 자신에게 변고가 생길 경우를 상정하기도 했다고.

이렇듯 부부관계가 파국에 이르면서 캐슬린은 이혼 전문 변호사를 고용했으며 25만 달러라는 소박한 위자료만을 요구한다.

그러던 1982년 1월 31일.

캐슬린은 친구들과의 모임에서 어쩐지 괴로워 보이고 초췌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평소와는 분명 달랐다.

그리고..

로버트로부터 온 전화를 받더니 크게 동요하고는 얼마 지나지 않아 집으로 돌아갔다고.

다음 날.

그녀는 친구와의 점심 약속에 나타나지 않는다.

그리고 그녀의 친구는 그녀를 다시는 볼 수 없었다.

캐슬린이 실종되자 경찰은 수사를 진행했고, 로버트는 실종 당일 밤 전화 통화가 마지막이었다고 진술한다.

로버트를 용의선상에 올렸던 수사관들이 그를 심문하나 확실한 물적 증거가 나타나지 않았다. 캐슬린의 여동생과 친구가 부부의 뉴욕 펜트하우스 아파트 쓰레기통에서 그녀의 소지품을 회수한 게 그나마 가장 강력한 정황 증거였다.

한편, 로버트의 오랜 친구이자 절친이었던 수잔(라스베이거스 지역 유력 마피아의 딸이었던)은 모든 언론의 인터뷰에서 그를 대변해 변호를 이어 나갔다. 그녀는 공개적으로 캐슬린 실종 당시 로버트의 알리바이를 증언하고 나서기도 했다.

그렇게..

세간의 떠들썩함 가운데에서 로버트는 마침내 수사선상에서 벗어날 수 있었고, 실종으로부터 수년 후엔 경찰이 더는 살인 사건이 아닌 실종 사건으로 분류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사건으로부터 8년 후엔, 로버트가 배우자 유기를 이유로 이혼을 한다.

로버트와 수잔 (Dave Berman)

2000년 크리스마스이브.

로버트의 오랜 친구였던 수잔이 로스앤젤레스 베벌리힐스 자택에서 9mm 총에 맞아 숨진 채 발견된다. 총상은, 전형적인 처형 스타일을 따르고 있었다.

참으로..

시기가 묘했다.

수잔이 살해되기 몇 주 전, 뉴욕주 경찰은 캐슬린의 실종에 대한 수사 재개를 공개적으로 밝혔고 이에 그녀의 친구들은 수잔에게 면담을 요청했었다고 전해진다. 웨스트체스터 지방 검찰청 또한 말이다.

한편, 그 몇 달 전에는 수잔이 '재정적 간청'에 따라 로버트로부터 25,000달러짜리 수표 두 장을 받기도 했다.

또, 로버트는 수잔의 시신이 발견되기 전날 밤 샌프란시스코에서 뉴욕으로 향하는 비행기를 탑승했다.

이후 그는 텍사스의 아름다운 해변 휴양지 갤버스턴에서 은거 생활을 시작한다. 어느 정도였느냐 하면, 외부에 모습을 드러내야 할 때는 여장을 할 정도였다. 그는 그렇게 농아 여성으로 위장한 채 경찰의 조사를 피할 수 있었다.

허나..

2001년 10월 9일, 갤버스턴 지역 하구에 71세 노인의 절단된 시신 부위가 발견되면서 이웃이었던 로버트가 살인 혐의로 체포된다.

여기서 그는 25만 달러의 보석금을 지불하고서 석방된 후 소환에 불응하는 소위 보석금 점프를 행위를 저지르며 체포 영장이 발부되기에 이른다.

잠시간 행방이 묘연했던 그가 다시금 모습을 드러낸 것은 11월 30일이었다.

그는 펜실베이니아 베슬리헴의 한 슈퍼마켓에서 여장을 한 채 반창고, 신문, 그리고 치킨 샐러드 샌드위치를 훔치다 적발된다. 그가 렌트한 차량 안에는 현금 4만 달러 정도가 있었으며 총기도 두 점이 있었다. (이 과정에서 어릴 적부터 사이가 좋지 않았던 바로 아래 동생 더글러스를 스토킹하고 있었음)

그렇게..

텍사스로 송환된 로버트는 2003년 71세 노인 살인 혐의로 재판을 받게 된다.

위는 갤버스턴 만에서 발견된 절단된 시신, 아래는 갤버스턴 경찰에 체포된 직후의 로버트 (Galveston Police Dept)

로버트의 혐의는 강력했다.

차량 안에서 피해자의 운전면허증이 발견된 것이다.

하나 더 특기할 것은, 차량 내비게이션에 찍힌 곳이 바로 캐슬린이 마지막으로 목격됐던 곳에 거주하던 그녀의 친구네 집 주소였다는 것이겠다.

결론적으로..

로버트의 변호인 측은 피해자가 먼저 권총을 휘두르며 싸움이 시작된 끝에 우발적으로 발생한 사고였다는 주장을 내세웠고, 그렇게 배심원단으로부터 계획 살인 혐의에 대해선 무죄 판결을 받으며 5년 형을 선고받는다.

이후 재판 과정 동안의 2년간 복역을 인정받은 데다 가석방까지 이뤄지며 그는 3년 만에 출소하게 된다.

그리고..

그로부터 약 10년 후인 2015년..

놀라운 일이 벌어지게 된다.

(HBO)

여기서부터는 워낙 세간의 화제였기도 하고, 또 인터넷상에서 널리 전파된 이야기이기도 하다.

아마 해당 부분을 읽고서는, '아, 이게 그 사람 이야기였어?'라고 놀랄 것이다.

2015년, 미국의 HBO에선 다큐멘터리 시리즈 <더 징크스: 로버트 더스트의 삶과 죽음>이라는 작품이 방영된다.

로버트의 잠재적 범죄 혐의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는 이 다큐에선 새로운 유력 증거가 공개된다.

수잔 살해 당시, 베벌리힐스 경찰 앞으로 그녀의 집 주소를 가리킴과 동시에 '시신'이라는 단어가 적힌 익명의 편지가 보내진 적이 있다. 헌데 특이하게도 주소가 'Beverley'로 잘못 표기됐었다.

(Sareb Kaufman)

한편, 다큐 촬영 과정에서 수잔의 의붓아들이 한 장의 편지를 공개하는데..

그 편지는 로버트가 1999년경 수잔에게 보낸 편지였다.

그리고 놀랍게도(?) 편지엔 동일한 'Beverley' 오타가 발견됐다.

이에 제작진은 이를 로스앤젤레스 지역 지방 검사청으로 전달한다.

허나, 결정적인 증거는 따로 있었다.

로버트는 오만하고 거만하게도 해당 다큐에 출연해 태연하게 인터뷰를 이어갔다.

이윽고 휴식 시간에, 그는 화장실에서 착용한 마이크가 켜진 지도 모르고서 혼잣말을 내뱉는다.

"바로 그거야. 잡았구나! ..네 말이 맞아, 물론이지. 하지만 나머지는 상상도 못 할 거다. ..집 안에 뭐가 있는지는 난 몰라.. 오, 난 이걸 원해.. 정말 엉망이구만.. 그가 옳았어. 내가 틀렸지. 그 질문은 좀 어렵네.. 내가 대체 뭘 한 거지? 다 죽여버렸지, 당연히."

해당 다큐의 마지막 회 방송 전날.

FBI는 로버트를 수잔의 1급 살인 혐의로 체포한다.

그가 머물던 루이지애나주의 메리어트 호텔방에선 가짜 신분증, 수만 달러어치의 현금다발, 여권 및 실제 신분증, 38구경 리볼버, 루이지애나와 쿠바의 지도, 그리고 그 자신의 피부 톤과 일치하는 라텍스 안면 마스크가 발견된다.

또 친구로부터 10만 달러가 넘는 현금을 배송받은 데다 한 달 간 30만 달러 이상의 현금을 인출한 것도 밝혀졌다.

쿠바는 미국과 범죄인 인도 조약을 맺지 않고 있다는 점을 비추어, 이는 명백한 국외 도피 시도였다.

(California Department of Corrections and Rehabilitation)

그렇게 과거의 사례를 교훈 삼아 보석이 거부된 이후 로스앤젤레스로의 송환과 더불어 그곳에서 로버트 변호인단과의 지리한 재판 과정이 이어졌고..

마침내 6년 후인 2021년 9월, 1급 살인 혐의에 대해 최종 유죄 판결이 내려지면서 78세인 그는 종신형을 선고받는다.

헌데..

로버트는 고작 3개월여를 복역하고서..

2022년 1월, 코로나 감염에 의해 사망한다.

여기까지가, 사라진 여대생 린과 그녀가 마지막으로 목격된 행적지의 소유주였던 로버트의 이야기다.

2012년에 미들버리 경찰은 익명의 한 정보원으로부터 문제의 건강식품점 소유주가 당시 로버트였다는 첩보를 받으며 사건 연관성을 조사하기에 이른다.

세간에 자신의 아내까지 포함해 총 3명을 살해한 것으로 여겨지는 로버트.

28세 무렵, 건강식품점을 한창 운영하던 시기.

그가 미들버리 지역에 주거하며 머물던 시기.

고향인 뉴욕에 연고를 두던 로버트. (린은 실종 당일 뉴욕행 버스를 타려고 했었다는 다수 증언이 있음)

린이 마지막으로 목격되던 순간 그녀가 먹고 있던 건강식품점의 자두.

과연, 로버트는 린의 실종과 어떤 연관이 있는 것일까?

1972년 당시의 해당 건강식품점 (Middlebury Police)

자세히 한 번 파고들어가 보자.

린은 1971년 12월 10일 실종됐다.

로버트는 1971년 건강식품점 All Good Things의 소유주이자 운영자가 된다.

캐슬린에 따르면, 1971년 가을경 로버트가 뉴욕을 방문했을 때 그와 처음 만났다고 한다. 이 만남에서 로버트는 자신이 건강식품점을 소유하고 있다고 말했단다.

단 두 번의 데이트에서 로버트는 캐슬린에게 자신이 거주하고 있는 곳으로 건너와 함께 살자고 요청했다. 그리고 이에 캐슬린은 1972년 1월부터 미들버리에 합류하게 된다.

그렇게 1972년 12월에 건강식품점을 팔며 뉴욕으로 돌아가 결혼식을 올렸다.

캐슬린의 과거 다이어리에 적힌 것에 따르면 1971년 가을경 이미 로버트가 건강식품점을 소유하고 있다고 했으며, 로버트는 캐슬린을 만난 이후 그녀의 지지를 받아 건강식품점을 소유했다는 상반된 이야기를 했다.

이는 아주 중요한 부분이다.

로버트가 린의 실종 이전에 이미 미들버리 지역에 적을 두고 있었는지, 아니면 실종 이후 캐슬린과 함께 미들버리에 거주하며 건강식품점을 소유하기 시작했는지가 갈리기 때문에 말이다.

미들버리 대학 지면 광고에 실린 해당 건강식품점 (The Middlebury Campus)

과거의 기록을 살펴보자.

1971년 내내 문제의 건강식품점은 'OM Natural Health Food'라는 가게명으로 지면에 광고가 실렸었다.

린의 실종 전후인 12월 9일과 다음 해 1월 28일에도 해당 가게명이 사용되고 있다.

그러다 1972년 2월부터는 'All Good Things, 이전 가게명은 OM Natural Health Food'라며 소개되고 있다.

그렇다면, 로버트의 말대로 1972년 1월경 캐슬린과 함께 미들버리로 건너와 그 직후 건강식품점을 인수했던 것일까?

허면, 캐슬린의 다이어리 기록은 부정확한 기억에 의한 산실인 것일까?

한편..

문제의 건강식품점 이전 소유자의 말에 따르면, 약 8개월 동안 현금을 받고서 가게를 잠시 팔았다가 이후 돌려받았다고 한다.

물론, 이럴 경우 린이 실종되던 무렵 로버트의 건강식품점 소유와는 무관하겠으나..

로버트가 이미 1971년 가을 이전부터 뉴욕이 아닌 미들버리가 속한 버몬트 지역에 머물고 있었던 것은 변치 않는 사실이다.

2015년 다큐를 통해 로버트가 스스로 죄를 고하는 사건과 함께 미국 전역이 들끓으면서..

미들버리 경찰은 마치 폭탄선언과도 같은 기자회견을 열고는 린의 실종 사건에 있어서 로버트가 용의자는 아니어도 아주 흥미로운 인물이 될 수 있다며 공개적으로 발언한다.

허나, 이미 1년 전..

미들버리 경찰은 과거 젊은 시절 로버트의 행방을 추적하며 과거 그가 미들버리 지역에서 머물렀던 부동산을 수색했었으나 성과는 없었다.

분명, 로버트는 아주 위험한 인물로 3건의 살인에 연관됐다고 여겨진다.

하지만 그의 청년 시절 일탈이나 범죄행위에 대해서는 정보가 없다.

어쩌면..

로버트의 초기 범죄 피해자 리스트에 린의 이름이 올라와 있을는지도 모를 일이다.

어쩌면..

그저 로버트라는 손쉬운 귀책 사유를 들이밀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는 린 외에도 1997년 샌프란시스코에서 실종된 크리스틴과 캘리포니아에서 실종된 카렌과도 연결 지어지고 있음)

한편, 미들버리 경찰은 2015년 로버트의 사건 연관성에 대한 기자회견을 터뜨린 이래 아무런 답 없이 10년의 세월을 보내고 있는 상태다.

이제 모든 것은 추측의 영역에 자리하고 있다.

결코 끝나지 않은 이야기, 그리고 현재진행형의 비극.

결국 린의 부모님은 딸의 생사를 알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고, 남겨진 나머지 가족들은 여전히 지워지지 않는 물음표를 안고서 살아가고 있다.

그렇게 린 슐츠라는 이름은 50년이 지난 지금도 그해 겨울처럼 서늘한 자국을 남기고 있다.

고등학교 졸업 앨범에서의 린. "미래를 향하고, 과거를 기억하되, 오늘을 위해 살아가자"라는 그녀의 말을 볼 수 있다 (Simsbury High School)

참조

<Addison Independent/48 years later, Lynne Schulze’s sisters are still searching> John Flowers
<Addison Independent/Lynne Schulze classmate surfaces in Bristol> John Flowers
<CBS News/Durst "very interesting" to Vt. police investigating woman's 1971 disappearance>
<Murder, She Told> The Disappearance of Lynne Schulze
<People/Robert Durst Linked to Disappearance of Vermont College Student> Steve Helling
<People/Is Robert Durst Connected to These 3 Missing Women?> Steve Helling
<The New York Times/A Two-Decade Spiral Into Suspicion; Long After Wife Disappears, Heir Vanishes After Texas Murder> Charles V. Bagli & Kevin Flynn

-끝-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