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은 못 말려
* 다음은, 미국 JFK 정권 당시 백악관 대변인이었던 피에르 샐린저의 수필 회고록을 재구성한 것입니다.
"시가. 시가는 내 인생의 일부였죠. 꿈속에도 등장할 정도로요. 비록 세상이 흡연에 반대할지라도, 나는 그것들이 내 일상의 일부라고 느낍니다.
내 시가 경험은 19세가 됐을 때부터였습니다. 당시 제2차 세계 대전 초기였고 나는 미 해군에 입대한 이래 태평양에서 구잠정(대잠수함전에 특화된 소형 쾌속 군함) 함장을 맡고 있었죠.
문제는 내가 너무 어리다는 거였습니다. 나보다 연상인 25명의 수병과 두 장교로 이뤄진 배를 지휘한다.. 심각한 심리적 문제의 야기였죠.
내가 상관이고 권위를 지녔다는 것을 어떻게 주지시켜야 할까?
내 선택은 시가였습니다. 커다란 시가(비록 품질은 별로일지라도)를 물고 있노라면 19살 소년을 진짜 배의 함장처럼 보이게 만들었으니까요.
전쟁이 끝나고서 샌프란시스코로 돌아와서는, 입대 전 잠시간 일했었던 일간지 신문사로 복직했습니다. 물론, 기사를 써 내려가는 동안에도 계속해서 시가를 피워댔죠. 여전히 싸구려에다 냄새도 고약한 브랜드의 시가를요.
그게 어찌나 못마땅했던지, 훌륭한 여성 기자 하나가 동료 직원들로부터 모금한 19달러 32센트를 건네고는 이러더군요.
'여기 기부금이요. 이거 갖다가 좀 좋은 품질의 시가를 사 피세요!'
동료들의 너그러운 기부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당시 구할 수 있는 최고의 시가였던 쿠바산 수입품으로는 갈아타지 못했습니다. 그건 내가 35세가 됐을 무렵에나 가능했어요.
35세 무렵, 나는 떠오르는 젊은 미국 정치인을 위해 일하게 됐습니다. 네, 존 케네디였죠. 그는 쁘띠 업만을 즐겨 피웠고, 나는 그와 함께 일하는 동안 발맞춰서 쿠바산 시가로 업그레이드할 수밖에 없다고 느꼈죠. 이후론 내내 쿠바산 시가를 피웠습니다. (주: 쁘띠 업만은 쿠바 하바나에서 생산되는 세계적 시가 브랜드 H. 업만사의 소형 사이즈 시가)
1961년이었습니다. 케네디를 따라 대변인으로 백악관에 들어가게 된 직후였죠. 일련의 극적인 사건들이 있었습니다. 4월경, 미국은 미국 정부의 도움을 받은 쿠바 망명자들이 쿠바 피델 카스트로 정권을 전복시키려 했던 '피그스만 침공'이라는 처참한 실책을 겪었습니다.
그로부터 몇 달 후, 초저녁에 대통령이 나를 집무실로 불렀습니다. 엄숙한 가운데에서 이렇게 말하더군요.
'피에르, 자네 도움이 좀 필요해.'
'네,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기꺼이 하겠습니다. 무엇이죠, 대통령님?'
'시가.. 시가가 좀 많이 필요해.'
'네, 얼마나 필요하신데요?'
'쁘띠 업만, 1,000개 정도.'
나는 너무 놀랐습니다. 하지만 겉으론 내색하지 않고서 몸만 약간 떨었죠.
'언제 필요하신 거죠, 대통령님?'
'내일 아침까지.'
내가 성공할 수 있을까, 고심하며 사무실을 걸어 나왔습니다. 그래도 나는 확고한 쿠바 시가 애호가였습니다. 아는 가게가 많았죠. 그래서 곧장 저녁 늦게까지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분주히 움직였습니다.
다음 날 아침 8시경. 백악관 사무실로 들어서자 대통령 집무실에서 걸려온 직통 전화가 이미 울려대고 있었습니다. 전화를 받으니 즉시 집무실로 들어오라고 하더군요.
'피에르, 어떻게 됐지?'
문을 들어서자마자 묻더군요. 그래서 아주 잘 됐다고 대답했죠.
왜냐하면, 밤새 1,200개의 쁘띠 업만을 구한 상태였으니까요.
케네디는 미소를 짓고는 책상 서랍을 열었습니다. 그리곤 기다란 서류를 꺼내어선 즉시 서명하기 시작했죠. 그건 '쿠바에 대한 미국의 금수조치(주: 쿠바와의 외교 관계 갈등에 따른 경제 제재 조치)' 서류였습니다. 미국 내 모든 쿠바산 제품을 금지하는 법령이었죠.
케네디가 서류에 서명한 순간부터 쿠바산 시가는 미국에서 불법이 된 겁니다. 서명 직전 공수한 1,200개의 쁘띠 업만을 제외하곤 말이죠."
에필로그
: 정계를 떠난 이후 피에르 샐린저는, 자신이 세계 최고의 쿠바 시가라 생각하는 파르타가스 루시타니아로 갈아탔다고 한다. 시가 애호가라면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참조
<Cigar Aficionado/Great Moments: Kennedy, Cuba and Cigars> Pierre Saling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