컴퓨터 모니터로 16세기 사람과 대화를 나눈 사건
본 글은, 1984년경 잉글랜드 체스터 남서쪽의 시골 마을 체셔에서 한 그룹이 8비트 컴퓨터를 통해 16세기 과거의 인물과 대화를 나눴다는 사건입니다. 이들은 수개월에 걸쳐 지속적인 교류를 이어갔으며, 해당 이야기는 영국 내에서 적지 않은 파장을 일으키기도 했습니다. 과연, 그들은 정말로 시공을 초월했던 것일까요?
'시공간을 넘어서는 무언가'
오래 전부터 폭넓게 애용되던 클리셰이자 소재거리이다.
헌데, 실지로 시간대를 넘어 과거의 인물과 미래의 인물이 각자 현재 시간대에서 소통하고 대화를 했었다면?
믿을 수 없고, 믿을 수 없는 만큼이나 낭만적인 이 이야기는 1984년 늦가을에 시작됐다고 한다.
잉글랜드 체스터 남서쪽으로 수 km 떨어진 곳 체셔. 웨일스 국경과 맞닿은 이곳 평야로는 도들스턴이라는 오래된 마을이 존재한다.
이 마을 키너튼 로드에는 메도우 코티지라는 명칭의, 겉보기엔 그저 평범하고 낡은 18세기 가옥이 있었다.
그리고 1984년, 집주인 켄 웹스터는 인근 하워든 고등학교의 경제학 교사였다.
그는 여자 친구인 데비와 함께 이 낡은 집을 수리하며 살고 있었다. 6개월에 걸친 대대적인 개조 공사로 집안은 시멘트 먼지로 뒤덮인 채였고, 그들은 먼지와 피로 속에서 겨우 일상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해 11월, 켄의 친구 니콜라가 잠시 얹혀살기 위해 찾아왔다. 그녀는 밴드 활동을 꿈꾸는 활기찬 여성이었다.
그렇게 세 사람이 모인 이 작고 낡은 집에서..
그해 늦가을, 누구도 예상치 못한 기이한 현상이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이변의 시작을 알린 건, 바로 '여섯 발가락의 발자국'이었다.
부엌과 욕실 사이의 벽, 바닥에서 천장까지 비스듬하게 찍힌 먼지투성이의 발자국들이 발견됐다. 발자국은 켄이나 데비의 발보다는 분명 작았으나, 또 아이의 것이라기엔 기묘한 부분이 있었다. 데비는 그 발자국에서 여섯 개의 발가락을 보았노라 주장했다.
처음엔 그저 사소한 장난질인 것만 같았다.
그들은 페인트로 발자국을 지웠다. 하지만 다음 날 아침, 발자국은 다시 나타났다. 이번에는 위치가 조금 바뀐 채였다. 마치, 누군가 밤새 벽을 타고 걸어 다닌 것처럼.
그다음은 물건들이었다.
어느 날 아침, 부엌 바닥에 고양이 사료 캔 10여 개가 약 1.2m 높이의 정교한 피라미드 형태로 쌓여 있었다.
또 다음 날에는 2리터짜리 레모네이드 병 두 개 위에 마른 고양이 사료 봉지, 그 위에 키친타월이 아슬아슬하게 균형을 잡고선 탑처럼 쌓여 있었다.
켄은 처음엔 친구 존의 장난이라고 의심했다.
존은 종종 그들의 집에 드나들며 기타를 치던 유유자적하던 친구였다.
허나, 존이 다녀가지 않은 날에도 이런 기현상은 계속됐다. 신문지 조각이 허공에서 흩날리거나, 묵직한 가구가 혼자 움직이는 일도 빈번해졌다.
더불어, 집안에는 설명할 수 없는 냉기와 누군가 지켜보는 듯한 시선이 감돌기 시작했다.
집주인 켄은 동거인이자 작가 지망생인 니콜라를 위해 근무하던 학교에서 BBC 마이크로 컴퓨터를 빌려왔다.
이는 당시 영국의 범국민 컴퓨터 교육 확산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개발 및 보급이 이뤄지던 최신 8비트 기기로, 'EDWORD'라는 워드 프로세서 칩이 내장돼 있었다.
그렇게 그들은 부엌 식탁 위에다 컴퓨터를 설치했다.
12월의 어느 일요일 저녁, 켄과 데비 그리고 니콜라가 외출 뒤 돌아왔을 때였다.
컴퓨터는 켜져 있었다. 켄은 무심코 저장된 파일 목록을 확인했다. 니콜라가 이전에 작업한 파일들 외에, 'KDN'이라는 낯선 파일명이 생성돼 있었다. Ken, Deb, Nic 3인의 이니셜을 딴 것으로 추정됐다.
파일을 열자, 모니터 녹색 화면 위로 기이한 시(Poem)가 나타났다.
True A re The NIGHTmares Of a person that FEArs
두려워하는 자의 악몽은 진실이 될지니
Safe A re the BODIES Of the Silent World
침묵의 세계의 육체들은 안전하다
Turn Pretty FLOWER tuRn TOWARDS The SUN
예쁜 꽃아 태양을 향해 고개를 돌려라
For Yo u S Hall Grow aNd SOW
너는 자라나고 씨를 뿌릴 것이니
But T he FLOWer Reaches too high and witHERS in The Burning Light
그러나 꽃은 너무 높이 뻗어 타오르는 빛 속에서 시들어 버리네
GET OUT YOUR BRICKS
너희의 벽돌을 꺼내라
PuSsy Cat PUSSY Cat Went TO LonDOn TO Seek Fame aNd FORTUNE
고양아, 고양이는, 명예와 부를 찾아 런던으로 갔지
Faith Must NOT Be LOst
믿음을 잃어서는 안 된다
For This Shall Be youR REDEEMER.
이것이 너희의 구원자가 되리라
대소문자가 뒤섞인 기괴한 문장들의 고전적 시조.
켄은 등골이 서늘해졌다.
누가 이 시를 썼을까? 집에 침입자가 있었나? 아니면 니콜라의 짓궂은 장난?
그해 크리스마스가 지나고서 1985년 2월 초.
켄은 다시금 컴퓨터를 빌려왔다. 이번에는 존을 비롯한 밴드 활동 친구들과 음악 계약서를 작성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일요일 저녁, 그들이 집을 비운 사이 컴퓨터는 또다시 켜져 있었다.
이번에는 'REATE'라는 파일이 생성돼 있었다. 당시 워드 프로세서 메뉴의 'CREATE'에서 C를 누르면 파일 생성 모드로 들어가는데, 나머지 글자인 REATE가 파일명이 된 것으로 추정됐다.
파일 안에는 켄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꿀 메시지가 들어 있었다.
I WRYTE ON BEHAL THE OF MANYE
나는 많은 이들을 대신하여 쓰노라
WOT STRANGE WORDES THOU SPEKE, ALTHOUGH, I MUSTE CONFESS THAT I HATH ALSO BEENE ILL SCHOOLED.
그대들은 참으로 기이한 말을 쓰는구려, 허나 내 배움 또한 얕은 탓이라 해두겠소.
SOMETYMES METHINKS ALTERACIONS ARE SOMEWOT BARFUL, FOR THEY BREAKE MANYE A SLEPES IN MYNE BED.
때때로 나는 집을 고치는 일이 참으로 고약하다 여겨지오, 내 침상에서의 단잠을 수없이 깨우니 말이오.
THOU ART GOODLY MAN WHO HATH FANCIFUL WOMAN WHO DWEL IN MYNE HOME
그대는 나의 집에 머무는, 화려한 여자를 둔 선량한 남자로다
I HATH NO WANT TO AFFREY, FOR ONLIE SYTH MYNE HALF WYTED ANTIC HAS RIPPED ATTWAIN MYNE BOUND HATH I BEENE WRETHED A-NYTE.
그대들을 놀라게 할 마음은 없소, 허나 나의 반편이 같은 짓거리가 나의 굴레를 찢어놓은 뒤로 나는 밤마다 비통함에 잠겨 있다오. (주: 호기심과 치기로 인해 비일상을 마주하게 됐다는)
I HATH SEENE MANYE ALTERACIONS (LASTLY CHARGE HOUSE AND THOU HOME),
나는 수많은 변화를 지켜보았소. (최근에는 Charge House였다가 이제는 자네의 집이 된 것까지),)
’TIS A FITTING PLACE, WITH LYTES WHICHE DEVYLL MAKETH, AND COSTLY THYNGS, THAT ONLIE MYNE FRIEND, EDMUND GREY CAN AFFORE, OR THE KING HIMSELVE.
이곳은 악마가 빚어낸 빛(주: 전등)과, 오직 나의 벗 에드먼드 그레이나 국왕 폐하만이 감당할 수 있을 값비싼 물건들이 가득하니, 참으로 그대들에게 어울리는 장소구려.
’TWAS A GREATE CRYME TO HATH BRIBED MYNE HOUSE
나의 집을 앗아간 것은 큰 죄악이오.
L W.
이번에도..
고어(Archaic English)체로 쓰여진 고전적 시조였다.
켄은 혼란에 빠졌다.
도대체, 누가, 이런 16세기 영어를 흉내 내가며 장난질을 치는 걸까?
진짜 유령이라도 집에 있는 건가?
메시지 작성자는 켄이 자신의 집을 훔쳤다고 비난하면서도, 동시에 켄을 선량한 사람이라 칭하며 대화의 의도를 내보이고 있었다.
또, 그는 켄의 집에 있는 전등을 빗대어 악마가 만든 빛이라고 표현하고 있었다.
가만, 혹시 이 '악마가 만든 빛'이란 게 시적 표현이 아니라 당사자의 관찰과 상식에 입각한 것이라면?
켄은 근무하던 학교의 동료이자 국어(English) 교사인 피터 트린더에게 문제의 메시지를 보여줬다. 피터는 옥스퍼드 출신의 지식인으로, 열린 마음 또한 지닌 사람이었다.
피터는 메시지에 사용된 'Wrethed(괴롭혀진, 비참해진)', 'Charge House(학교, 배움터)' 같은 단어들이 실지 존재하는 고어이거나 사전엔 없는 독특한 단어임에 주목했다. 그는 만약 이게 조작이라면, 아주 공들인 장난일 것이라며 흥미를 내보였다.
한편..
켄과 데비, 그리고 여기에 합세한 친구 존은 답장을 보내기로 결정한다. (존은 기타와 친구들과 어울려 다니기를 즐기며 본업에 게으른 사람이었는데, 그의 본업은 변호사였음)
피터와 존은 LW의 말투와 단어 사용을 미루어, 그가 17세기 셰익스피어 시대 직후의 사람 같다는 추측을 내놨다.
하여 나름의 추리와 추적을 진행하던 그들은 1985년 2월 9일, 컴퓨터에 다음과 같은 질문(타이핑)을 남긴다.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치세에서.
친애하는 LW님께. 보내주신 전갈에 감사드립니다.
당신의 평온을 깨뜨려 죄송합니다. 저희가 어떻게 하기를 원하시는지요? 당신은 1620년 무렵, 이 터에 있던 집에 사셨을까요? 혹시 저희가 사는 이 시대에 대해 더 이야기해 드리길 원하시나요?
어찌하여 시를 남기셨는지요? 에드워드 그레이는 누구입니까? 그가 에저튼 가문과 혈연관계가 있는지요? 당신께서는 가족이 있으십니까? 그곳의 국왕은 제임스입니까, 아니면 찰스 스튜어트입니까? 'Charge House'란 대체 무엇입니까? 당신이 살아계실 때도 이 마을은 '도들스턴'이라 불렸습니까? 그리고 당시에는 몇 가구나 살고 있었나요?
보내주신 말씀들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저희를 두렵게 하지 않으려 배려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켄, 데비, 그리고 존 올림
그리고..
이날 오후, 답장이 온다.
(해당 메시지는 확인 직후 사라져 버려 3인방의 기억을 토대로 재구성된 것임)
‘Twas an honeste farme of oke and stone
참나무와 돌로 지은 참으로 번듯한 농가였소
It is helpful that you should telle me about thy time
그대의 세상에 대해 내게 이야기해 준다면 도움이 되겠구려
Dost thou hath (?) horse
그대에겐 말(馬)이 있소?
Edmund Grey, brother of John Grey lives at Kinertone Hall(?)
에드먼드 그레이는 존 그레이의 형제인데, 키너튼 홀에 살고 있다오
Thy Kyng, of cors, is Henry VIII who is six and fortie
국왕께선, 너무도 당연하지만, 헨리 8세이시며 올해로 마흔여섯이 되셨소.
I ne woot of Kyng James
나는 제임스 왕이라는 자는 도통 알지 못하오 (주: 'ne woot'은 '전혀 모른다'는 의미를 지닌 아주 오래된 고어)
Myne charge house is a place of loore (schoolyng(?))
나의 '차지 하우스'는 지식(배움(?))을 닦는 곳이라오
LW 28 March anno 1521 (?)
1521년 3월 28일 LW
실로..
놀랄만한 상황이었다.
그리고 실망 또한 뒤따랐다.
1521년에 헨리 8세는 46세가 아니었다. 그는 1491년생이므로 1521년에는 30세여야 했다.
또 메시지에는 현대적 표현법인 '(?)'가 포함돼 있었다. 더불어, 서명 전 날짜 표기 또한 말이다.
켄은 이 모든 게 누군가의 장난질이라 강하게 의심을 품게 됐다. 허나, 강력한 용의자 중 하나였던 존은 현장에 없었다. 현장의 컴퓨터에선 데비가 발견한 뒤 켄이 그 내용을 전화로 존에게 전달했으며 존은 그걸 메모했다.
그렇다면 데비가 용의선상에 오를 수 있겠으나, 그녀는 계속해서 완강하게 혐의를 부인했으며 동시에 그녀가 그런 고어체 시조를 작성하기에도 무리가 따랐다.
또한..
옥스퍼드 출신의 피터는 해당 메시지도 확인한 뒤 여전히 언어적 일관성에 주목했다.
그렇게 켄은 반신반의하면서도 이 미스터리한 존재와 대화를 이어가기로 한다.
2월 16일, 켄이 다시 컴퓨터를 가져왔을 때, 화면을 가득 채운 장문의 메시지가 도착해 있었다. 'L W'는 자신의 정체를 더 구체적으로 드러냈다. (가독성을 위해 원문과 달리 임의로 쉼표를 추가)
나의 선량한 벗이여, 내 꼭 해야 할 말이 있소. 어찌 된 영문인지 내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 너무도 많구려.
내 생각엔, 만일 그대가 어이하여 내 집에 머무는 것인지 말해주지 않는다면 내 정신이 나간 것과 진배없으니 그대를 더 도울 길이 없소. 내게는 이제 찾을 친척도 없다오. 나의 아내는 비참하게도 역병에 걸렸고 주님께서 그녀의 영혼과 뱃속의 아들을 데려가셨지 (1517년의 일이라오).
내 농장은 보잘것없으나 꽤 괜찮은 땅을 끼고 있고, 붉은 돌로 된 기초와 잘 다져진 흙바닥 위엔 깨끗한 골풀이 깔려 있소. 이번 계절엔 할 일이 많소. 내 술(에일)을 빚기 위해 보리를 파종해야 하오. 이것이 내 생업이자, 내가 자부하건대 으뜸으로 치는 기술이라오.
또한 낸트위치에 사는 내 막역한 지기, 리처드 위셜에게 가봐야 하오. 그의 농장은 4년마다 휴경을 할 정도로 거대하다오. 그가 참으로 부럽소. 가진 것이 많은 친구지. 허나 무엇보다 나를 즐겁게 하는 건 그의 치즈라오. 맛의 즐거움이나 소화의 편안함에 있어 그 무엇과도 비견할 수가 없지.
낸트위치 시장에도 들를 참이오. 십자가가 있는 체스터 시장만큼 크진 않지만 나름의 재미가 있거든. 이번엔 신발을 얻으러 체스터에 가야 하오. 재단사인 내 좋은 친구 토마스 앨더세이가 가끔 만들어준다오.
나도 신발을 만들 줄 알지만, 지금 내 돼지 중 잡을 준비가 된 놈이 하나도 없소. 한 마리를 도축하지 않는 이상 (가죽을 얻기엔) 비용이 너무 많이 드니 말이오.
그대는 체스터라는 고장을 아시오? 워터 게이트는 많은 상인이 오가는 곳이지. 항구가 줄어들고 있어 안타깝소. 내 기억엔 거대한 배들이 오갔는데, 조류가 바뀔 때마다 배들이 작아지는구려. 허나 체스터 항구는 리버풀의 그것보다는 여전히 거대하다오.
나는 종종 체스터의 동쪽 성벽인 카우 레인에 간다오. 십자가 쪽보다는 덜 지루한 곳이지. 내 닭이나 돼지가 이 불쌍한 몸을 걸어 넘어뜨리지만 않는다면 말이오.
듣자 하니 그대가 하워든(Hawarden)의 교사라지? 그건 '하오딘(Haordine)'을 말하는 것이오? 그대는 여전히 1년에 20파운드라는 막대한 돈을 벌고 있소?
내 썩 좋아하지 않는 학장 헨리 만이 떠오르는구려. 물고기처럼 생긴 위인이지. "어떤 아이든 공정한 기회를 준 뒤에도 배움에 천성적으로 싫증을 낸다면, 꿀벌의 꿀을 축내는 수벌처럼 되지 않도록 다른 곳으로 내쫓아야 한다." (그가 했던 말이오)
아니, 나는 성일(Holy Day)에는 즐겁게 놀 수가 없소. 목숨이 두렵기 때문이오. 내 친구 하나는 성일에 피리를 불다가 나무 형틀에 귀가 못 박힌 적이 있다오.
그대가 도들스턴(Dodleston)이라 말할 때, 내 생각엔 더들스턴(Dudleston)을 뜻하는 것 같소. 나의 여왕은, 두말할 것도 없이 캐서린 파 전하시오.
루카스
그는 자신의 이름을 루카스라고 밝혔다.
그는 보리를 심어 맥주를 만드는 것이 직업이며, 난트위치 시장에서 가축을 사고판다고도 했다. 또 체스터 항구가 점점 쇠퇴하고 있음을 한탄했다.
특히, 메시지의 마지막 부분에서 그는 자신의 여왕이 '캐서린 파(Katherine Parr)'라고 밝혔다.
이것은 결정적인 단서였다.
캐서린 파는 헨리 8세의 여섯 번째이자 마지막 부인으로, 1543년에 결혼했다.
그렇다면 루카스가 이전에 보내온 메시지에서 쓴 '1521'이라는 연도는 무엇이었을까? 단순한 오타였을까, 아니면 우리가 모르는 다른 시간 계산법일까? 1521년에 헨리 8세가 46세였다는 루카스의 말은 무엇이었을까? 헨리 8세가 46세이던 시기는 1537년이어야 하는데 말이다.
이렇듯 시간적 모순은 여전히 풀리지 않은 상태였다.
허나, '붉은 돌로 된 기초'라는 대목은 켄을 전율케 했다.
켄들이 살던 메도우 코티지의 정원에는 수리 공사 중에 파낸 붉은 사암 블록들이 뒹굴고 있었기 때문이다. 루카스는 자신이 살던 집의 기초를 묘사한 것인데, 그것이 현재 켄의 집 마당에 있는 돌과 일치한 것이다.
2월 18일.
켄과 루카스의 대화는 계속해서 이어졌다.
켄이 루카스에게 보내는 메시지로 'LUK1'이라는 파일명을 만들면 루카스는 'KEN1'이라는 식으로 답 파일을 남기는 식이었다.
나의 선량한 벗이여, 내 그대에게 묻노니, 어이하여 내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질문들을 그토록 많이 퍼붓는 것이오?
나는 혼란스럽소. 이 글 쓰는 기물(Scrit devise)은 참으로 경이로운 물건이나, 내 생각엔 다소 불친절하고 내게 낯선 물건인 듯하오. (주: 루카스는 컴퓨터나 키보드를 '글 쓰는 기계'로 인식, 다루기 어렵다고 불평 중)
허나, 내 그대가 그대의 상자에서 빛을 만들어내는 것을 보았으니, 참으로 재주가 비상한 사람이구려. (주: 상자는 컴퓨터 모니터를, 빛은 화면의 빛을 의미)
그래, 나는 브리스토(주: 현 브리스톨)를 알고 있소. 내 친척들이 브라이드워터와 톤 강가에 있는 탄툰(주: 현 톤턴)에서 지내오다 즐거움을 찾아 떠나왔지.
나는 에일 하우스(주: 술집)에 있는 것을 좋아한다오. 그래, 가끔은 올드포드에서 다리를 건너기도 하지.
그대들의 왁자지껄한 놀이판은 나를 즐겁게 하오. 허나 때로는 다소 시끄럽기도 하구려.
그대의 여인에게 내 피리를 더 연주해 달라 전해주겠소? 내 생각엔 참으로 더할 나위 없는 소리더이다.
그대는 하오딘(주: 하워든)에 있는 배움터(Charge House)까지 어찌 다니시오?
내 서둘러야겠소. 내 라임 하운드(주: 사냥개)들이 풀려나서 내 닭들을 괴롭히고 있으니 말이오.
루카스 웨인먼
루카스의 관점에서 상황은 이러했다.
그의 집 굴뚝 부분에 어느 날 갑자기 빛나는 상자(컴퓨터 모니터)가 나타났다. 그 상자에는 글자가 나타났다 사라졌다. 루카스는 켄과 데비가 자신의 집에 나타난 '유령' 혹은 '악마'라고 생각했다. 켄과 데비는 이상한 옷을 입고서 '악마의 빛(전등)'을 사용하며 이해할 수 없는 말을 썼으니까.
반대로 켄들의 관점에서는 루카스가 유령이었다.
두 사람은 같은 장소(메도우 코티지)에 있지만 다른 시간대(1985년/1500년대)에 존재하며, 컴퓨터라는 매개체를 통해 서로의 글을 보고 있는 것이었다.
그렇게 20세기 사람과 16세기 사람 간의 펜팔이 이어져 갔다.
서로가 제법 친숙해지고 정이 들었는지, 루카스는 주방 도구들을 움직여놓는 폴터가이스트 장난을 치거나 유머러스한 찬양문을 보내오기도 했다.
물론, 현대적 영어를 독해하는 데에 많은 수고가 든다는 불평도 해왔지만. (루카스는 자동차나 비행기와 같은 현대 문물을 두고서 호랑이 수레나 말 없는 수레 또는 기이한 새라는 표현을 함, 또 광택이 도는 잡지 종이를 비단 같은 나무라고도 표현)
그리고 루카스와 켄들은 마침내 사적인 이야기를 나눌만큼 친분이 쌓이게 된다.
내가 대학에 가기 전 나를 가르쳐주신 참으로 고귀한 분과 지내던 시절이었소. 그분은 책을 몇 권 구해오라며 나를 브리스톨로 보내셨지.
긴 여정 끝에 친구의 집에 도착했소. 가는 길은 이렇소. 템플 게이트를 지나 템플 스트리트로 들어서서, 왼쪽으로 돌아 세인트 토마스로, 다시 세인트 토마스를 지나 세인트 레너드 게이트로 가면 오른쪽 가운데 오두막이라오.
나는 안으로 들어와 지친 몸을 쉬고 낮잠을 청하라는 권유를 받았소.
헌데 4시간쯤 지났을까, 누군가 내 소매를 잡아끌어 지하실로 데려가더니 관리가 무슨 영문인지 모를 이유로 이 불쌍한 나를 찾고 있다 하더이다.
그때 그들 중 하나가 내 친구의 아내를 욕보이는 소리가 들려 더는 참을 수가 없었소. 그래서 그 더러운 놈에게 그 부인을 가만두라 소리쳤으나 듣지 않더군. 하여 내가 그를 세게 내리쳤고 그자가 쓰러졌소.
그 후 그들은 나를 수레 위 철창에 가두고는 지하 감옥에 처넣었소. 그들은 나를 재판관에게 끌고 가기 전에 이 불쌍한 몸을 고문하더이다. 재판관은 내가 소매치기 잡범이라 우겨댔지.
바로 그 순간, 내 "형제(주: 친구)"가 말을 타고 달려와서는 "여기 네놈이 찾는 새가 있다!"라고 외치며 크고 무거운 새를 던져버리고는, 나를 말 위로 끌어 올려 도망쳤다오.
켄은 루카스가 말한 브리스톨에 대한 이야기를 떠올리며 직접 이곳을 방문했다.
그리고 놀랍게도, 16세기의 지도와 루카스의 설명은 서로 정확히 일치했다. 특히 세인트 레너드 게이트는 켄도 알지 못했던 옛 지명이었다. 일련의 사태를 단순한 호작질로 보기엔 너무나 정교했기에 켄의 믿음은 한층 더 굳어졌다.
한편..
이러한 펜팔 가운데 루카스는 자신의 배움터가 옥스퍼드의 브레이즈노즈 대학이었노라 언급한다. 이에 옥스퍼드 출신인 피터는 그곳 대학 도서관에 연락해 1500년대의 학적부를 조사한다.
허나, 루카스가 밝혔던 루카스 웨인먼이라는 이름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이에, 루카스는 존 또는 톰을 넣어보라는 대답을 보내온다. 그리하면 자신의 진짜 이름을 알게 될 것이라며.
그렇게 기록물을 뒤진 끝에, 토마스 하워든이라는 이름을 도출한다.
켄들은 전율할 수밖에 없었다. 이 토마스 하워든은 1534년 입학했다가 이후 제적당한 인물이었으며, 하워든이라는 성씨는 켄과 피터가 근무하는 학교가 위치한 마을의 이름이자 피터가 거주하던 곳과 동명이었던 것.
결론적으로..
루카스 웨인먼은 가명이었으며, 루카스의 진짜 정체는 16세기의 지식인이자 종교적 연유로 추방당해 시골로 숨어든 토마스일 가능성이 높았다.
1985년 봄이었다.
도들스턴의 메도우 코티지는 이제 완연한 16세기와 20세기를 잇는 웜홀의 입구였다. 이곳에 거주하는 켄들은 400년 전의 남자, 루카스와 착실히 우정을 쌓아가고 있었다.
그렇게 시간대를 초월한 기묘한 동거 서로가 적응해 갈 무렵..
미래의 컴퓨터 화면과 소통하던 루카스는 악마와 빛을 이용해 대화한다며 지역 보안관에게까지 의심을 사게 된다. 홀로 아무도 없는 방에서 허공에 대고 혼잣말을 하거나 이상한 빛을 보는 모습으로 인해 주변인 또는 하인으로부터의 밀고가 있었다고 추정됐다.
이렇듯 루카스는 이른바 마녀로 몰려 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되고 만다.
여기서 켄들은 보안관과 직접 화면을 통해 각고의 설득을 펼친 끝에 루카스는 풀려나게 된다. (이 과정에서 루카스의 친구로부터 도움을 받음, 보안관이 직접 루카스의 집에서 미래와의 대화라는 것을 인지)
허나, 풀려난 루카스는 이후 가택 연금과 함께 왕의 법정 앞에서 판결을 기다리는 몸이 된다. 보안관의 권한이 제한적이었던 것이다.
한편..
위기에 처한 루카스와 열심히 대화를 나누던 켄들은 뜻밖의 존재에 대해 듣게 된다.
내 동료 피터여... 어찌해야 한단 말이오. 절망적인 사형 선고를 앞두고 그대의 손조차 잡을 수 없구려. 선량한 피터에게 작별을 고하기 전에 그대의 말을 듣고 싶소. 우리의 옥스퍼드여 영원하라. (주: 둘은 옥스퍼드 동문)
그대는 그대의 시간이 1985년이라 했소. 나는 그대들도 빛의 상자를 가져다준 그대들의 친구처럼 2109년에서 온 줄 알았소. 그렇지 않소?
그대들의 친구?
2109년?
혼란에 빠진 켄은 고심 끝에 컴퓨터 화면에 대고 '2109 나와라'라고 타이핑 한다.
그리고 약 1시간 후..
켄, 뎁, 피터.
유감스럽게도 너희에게 줄 수 있는 선택지는 단 두 가지뿐이다.
너희가 처한 곤경을 운율 없는(주: 비유가 배제된 직설적인) 방식으로 설명 듣는 것이다. 그리하면 너희는 즉각 모든 것을 이해하겠지만, 그 대가로 결코 일어나서는 안 될 일(주: 인과율의 붕괴)이 발생하게 될 것이다.
아니면, 너희 세 사람에게는 역사의 판도를 뒤바꿀 거대한 목적이 있음을 이해하려 노력하는 것이다. 우리, 2109는, 너희의 사고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쳐서는 안 된다. 다만 너희가 스스로의 운명을 개척할 여지를 남겨둘 수 있도록 일종의 지침만을 제공할 뿐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말은 단 하나. 우리 모두는 동일한 신(God)의 일부라는 사실뿐이다. 그 존재가 그(He)이든, 아니면 그것(It)이든 간에 말이다.
참, 기가 막히는 일이었다.
그들은 스스로를 '2109'라고 칭했다.
그들은 켄들뿐만 아니라 16세기의 루카스까지 동시에 감시하고 통제하고 있었다.
어쩌면, 이 시간대를 뛰어넘어 발생한 불가사의한 교신은 모두 2109의 작업이었을지 모를 일이었다.
한편, 그들이 보내온 메시지는 내용도 기묘했고 문구 자체도 그러했다.
신을 들먹이며 얼핏 미래의 초월적 존재인 양 훈계조로 지시 내리듯 메시지를 보내왔는데, 반면 철자법은 곳곳에서 다음과 같은 오류들이 보였다.
CHOISES -> CHOICES 철자 오류
SHALL ... CHANGES -> SHALL ... CHANGE 동사원형 오류
WHAT EVER -> WHATEVER 띄어쓰기
LIFE TIME -> LIFETIME 띄어쓰기
또, 독특한 특징도 포착됐다. 켄들에게 곤경에 처했다고 설명하는 문장에서 PREDICAMENT라는 단어를 사용했는데, 이는 일상 회화와는 분명 다른 단어 선택이었다. 보통 회화에 사용되는 프라블럼, 트러블, 딜레마 대신 해당 단어를 사용한 것은 우리로 따지면 '문제' 대신 '곤궁'이나 '궁지'라는 단어를 채택했다고 보면 되겠다.
'운율 없는'이라는 표현 역시 일반적인 Unrhymed 단어 대신 NON-RHYME이라는 비표준어를 사용했다.
1)과 2)의 시작 문장도 각각 THAT YOU와 TRY TO로 병렬 구조가 파괴된 상태다. 영어 문법에서 리스트를 나열할 때는 보통 형태가 통일되는 게 기본인 데 말이다.
게다가 목적어들도 자연스럽지 않게 사용됐으며, 메시지 전체가 마치 현대 영어에 익숙하지 않거나 혹은 일종의 흉내를 내는 것처럼 보였다.
켄들은 2109에게 루카스를 돕기 위한 구제책을 구하고자 한다.
허나, 그들은 마치 자신들의 직접적인 개입이 금지라도 돼 있는 양 힌트랍시고 늘상 낭만주의 시와 같은 뜬구름 잡는 소리만을 읊어댔다.
그렇게..
그러한 뜬구름 잡는 소리들 가운데 어느 시에서 힌트를 파악한 켄들. 마침내 루카스 시대 권력자 주교의 과거 반역 혐의 정보를 손에 넣으면서, 루카에게 해당 정보 교환을 통해 보안관과 딜을 시도하라고 조언한다. 보안관이 그것으로 공을 얻는 동시에 왕으로부터 각별한 신임을 얻을 수 있도록 말이다.
이에 루카스도 기뻐하며 희망을 품는 듯 보였으나..
그다음날 온 메시지에 의하면, 루카스는 보안관과 대화도 나눌 수가 없었으며 당장 다음날 국왕의 법정에 끌려간다고 토로한다. 이미 사건은 일개 보안관이 어찌할 도리가 없는 지경에까지 다다랐던 것이다.
루카스는 비참한 상황을 있는 그대로 전해오는 한편, 켄들을 향한 부탁의 말을 첨언하기도 한다.
그 부탁이란, 일련의 이야기를 책으로 써서 듣고 배울 준비가 된 사람들이 위대한 지식을 찾을 수 있도록 깨달음의 계기를 부여하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운명의 날..
루카스의 마지막 말이 켄들의 컴퓨터로 전달된다.
NON PROGREDI EST REGREDI AD MOMENTO MORI DEUS VOBISCUM LUKAS
나아가지 않는 것은 퇴보하는 것이다 죽음의 순간에 신이 그대들과 함께하기를 루카스
이어..
켄의 집안 부엌 바닥에 분필로 루카스가 죽음을 맞이했다는 라틴어 문구가 나타난다.
루카스의 죽음으로부터 1달여 후..
루카스가..
부활했다!
정확히는, 사형 선고가 연기되며 형 집행이 미뤄진 것이었다.
이전에 몇 차례 켄들과 빛의 상자(컴퓨터)를 통해 대화를 나눈 바 있던 루카스의 친우가 전해온 소식에 따르면, 보안관이 이 빛의 상자를 계속 이용하고자 루카스를 감옥에 구금한 상태라는 것.
정리하자면, 과거의 빛의 상자와 현재의 컴퓨터 간에 상호 소통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루카스가 생존한 상태여야 하며 같은 공간대인 그의 집에서만 송수신이 가능하다는 의미였다.
분명 루카수는 사형을 선고받아 죽는 날을 코앞에 두고 있었다. 헌데, 그를 체포한 보안관은 빛의 상자를 알게 되면서 욕심을 품게 된다.
1500년대 체셔주 지방의 보안관은 행정, 사법, 형 집행의 최고 실권자다. 왕의 법정인 런던의 중앙 법정에서 판결이 내려졌으나, 그 집행 시기와 방법 및 구금 장소를 결정하는 실무 권한은 일차적으로 보안관에게 있는 것이었다.
허면, 보안관은 추가적인 조사를 핑계로 형 집행을 미루는 것도 가능했을 터이다.
여하튼지건, 탐욕에 사로잡힌 보안관은 교활한 꾀를 내며 자신의 허영심을 충족하고자 빛의 상자로 미래의 정보와 같은 것을 손에 넣고자 한다.
한편..
루카스와 빛의 상자의 운명이 보안관의 손에 달려있는 형국이 되자..
켄의 연인이었던 데비는 블러핑과 함께 협박을 해보자고 제안한다. 그리고 켄은 그 말을 따랐다.
그대는 그가 타락한 영혼 없이 죽기를 바란다고 했다. 그라는 게 루카스를 뜻하는가? 그는 죽지 않았는가? 우리는 그가 죽었다고 들었다. 우리는 루카스가 살아 있다는 것을 알면 기뻐할 것이다. 진실로 그대는 고귀함이 부족하지 않으니, 우리 시대에 고귀함이란 용서하고 이해하는 것이다. 그대는 루카스가 선량한 사람이며 죽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가? 우리는 악마가 아니지만 힘을 가지고 있다. 루카스는 죽어서는 안 되며 석방되어 그의 집과 캐서린(주: 루카스가 각별히 생각하던 하녀)에게 돌아가야 한다. 그러면 우리는 친구로서 그대와 이야기를 나눌 것이다. 만약 루카스가 그대의 손에 죽는다면 우리 또한 그대의 영혼이 어떻게 될는지 두려워지기 때문이다.
효과가 있었다. 보안관은 다음과 같은 답신을 보내왔다.
만약 그대가 힘을 사용하지 않겠다고 맹세한다면, 나는 모래시계가 한 번 돌 동안(주: 한 시간 안에) 루카스를 데려오겠소. 용서를 구하오. 나는 그에게 해를 끼칠 의도가 없었소. 그대들이 내 친구이기에 이 일을 하겠소.
그렇게..
두세 시간의 시간이 흐르고서..
다음과 같은 메시지가 도착한다.
나의 세 진실한 친구들이여 나는 너무나 눈물이 흐르오. 적어도 잠시나마 내 친구들과 다시 함께할 수 있는 자유를 얻었으니 말이오. 그대들을 내 가슴에 안을 수 없고 오직 빛을 통해 그대들에 대한 사랑을 적어야만 하는 것이 원통하오. 그대들의 시간이 내게 열린 이후로 나는 그대들을 내 가족처럼 알고 지냈소. 그전에는 수년의 변화 속에서도 이렇게 진실한 우정을 알지 못했소. 우리는 서로 너무나 자주 혼란스러웠지만... ...하지만 나는 그대들의 위안을 얻기 위해 그대들의 말이 필요하오. 내일 그대들과 이야기하기 위해 나는 쉬어야겠소. 그러지 않으면 내 좋은 친구들에게 이치에 맞는 말을 할 수 없을 테니. 내게는 울 시간이 필요하오. 루카스
루카스의 생환 소식에 켄들은 벅차오르는 기쁨을 주체할 수 없었고..
그렇게 켄들은 자정이 다 가는 야밤에 지역 패스트푸드로 향했다고 한다.
이 패스트푸드점은 아이러니하게도 루카스가 불과 조금 전까지 갇혀 있던 악취 나는 지하 감옥 구덩이 근방이었다.
허나..
기쁨도 잠시..
7월경, 루카스는 지역의 그로브너라는 자가 자신의 집이 포함된 땅을 노리고는 괴롭힌다고 하소연해 온다.
이 리처드 그로브너라는 자는 지역의 유력한 지주로, 루카스가 감옥에 갇혀 있던 무렵 보안관으로부터 좋은 땅이 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는 흑심을 품은 것. 그리고 그러한 흑심은 루카스가 생환한 뒤에도 변치 않았다.
이에 대해 켄들은 이렇다할 조언을 해줄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이미 루카스가 살던 시대의 정보를 조사하던 중 해당 토지가 1919년까지 쭉 그로브너 가문의 영지였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 즉, 역사적으로 루카스가 땅을 빼앗기는 것은 기정사실이었던 셈이다.
한편..
루카스를 자택 구금하고 있던 보안관에게 있어서 상황은 아주 복잡하고 꼬여있었다.
아무리 자신이 지역의 권력가라고는 하지만 왕의 법정에서 내려진 선고는 왕명이다. 당초 계획으론 형 집행 연기와 더불어 빛의 상자를 통해 미래의 정보를 수집하려고 했었으나, 영혼을 타락시키겠다는 켄들의 무시무시한 협박에 굴복하며 루카스를 감시 체제하에 두게 됐다.
여기에 자신이 소개했던 땅을 지역 유력 지주가 탐내고 있으나 루카스가 버젓이 그곳에서 기거하고 있다.
그리고..
하나 괜찮은 플랜이 있었다. 이 지주로 하여금 루카스의 땅을 차지하게 만든다면? 그러면 자신은 당초 계획대로 든든한 정치적 뒷배를 얻게 되고, 빛의 상자도 남게 되며, 눈에 가시 같은 존재인 루카스도 멀리 쫓아낼 수 있는 것.
물론, 이는 엄격히 따져볼 때 왕명을 거역하는 것이나, 당시 열악한 감옥 위생 상태에서 죄수가 죽어 나가는 건 비일비재한 일인 데다 이런 변방 지역까지 왕의 사람이 굳이 시신을 확인하러 올리도 만무했다. 게다가 지주와 함께 공범이 되는 것이니 비밀이 새어 나갈 우려도 없었다. 또, 루카스를 해치지는 않는 것이니 켄들에 의해 자신의 영혼이 타락할 일도 없고 말이다. (해당 대목은 원문에선 직접적으로 명시하지 않은, 추정에 불과)
그렇게..
켄들은 행여나 루카스에게 잘못된 조언이라도 하다가 그가 보안관이나 지주에 의해 불상사라도 당할까 봐 역사의 흐름을 거스르지 않기로 한다.
다음 달인 7월경.
루카스는 땅을 팔 수밖에 없게 됐다며 두 달 안에 인수가 완료되리란 소식을 전해온다.
이어 8월경엔, 자신의 형제가 거주하는 브리스톨 지역으로 떠날 채비를 마친다.
한편..
루카스와 켄들은 이제 이별의 시간을 준비한다.
이들은 그간의 시간대를 넘나들었던 통신은, '메도우 코티지 장소+그곳에서의 루카스의 존재'의 결합이 필수적임을 알았기 때문.
루카스는 이전과 달리 자신의 감정이 듬뿍 담긴 마지막 메시지를 보내온다.
나의 진실한 동료들이여
나는 이것이 나의 도들스턴 사람들을 위해 최선임을 아오. 그들이 내가 머무는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이오. 그로브너는 내가 안 나가면 그들이 내 낡은 농장을 태워버릴 것이라고 했소. 우리 마을 전체가 나를 경멸한다고 하오... 적어도 그로브너는 그리 말하오.
모든 것이 변할 것이고, 켄과 피터 그대들처럼 내 뒤를 이어 진실한 사람들이 나타날 것임을 아는 것은 좋은 일이오. 하지만 400년은 인류에게 많은 일이 일어나기에 참으로 긴 시간이구려.
사람들이 끔찍한 방식을 통해서만 정의를 배워야 한다는 것은 슬픈 일이오. 연민과 사랑 속에서 진실을 찾는 대신 말이오...
중략
슬퍼하지 말아야 함을 알지만, 종이에 내 슬픔을 다 쏟아낼 수가 없구려. 하지만 알아주시오. 내가 울고 있으며, 내 정신이 혼미하고 손에 힘이 없음을.
나는 체스터 항구에서 바지선을 타고 브리스톨로 갈 것이오. 그리고 거기서 말을 한 필 살 것이오. 내 늙은 말은 바지선에 타려 하지 않기 때문이오. 녀석은 불을 무서워하듯 물을 끔찍이 두려워하오. 그 녀석을 위해서도 눈물이 나오오.
나는 그곳 브레이즈노즈에 머물 것이오.
나는 내 형제들과 하녀, 그리고 서로에 대한 우리의 사랑에 관하여 책을 쓸 것이오.
언젠가 그대들 모두 옥스퍼드의 강가에 있는 내 식탁에 앉아 와인과 고기를 나누게 될 것이오. 그곳에서 우리는 서로의 책을 읽고 기뻐하며, 진실과 선량한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옥스퍼드가 영원토록 변해가는 모습을 함께 지켜볼 것이오.
그대들의 시간에서 나의 책은 오래된 것이겠지만, 나는 그것이 쓰여질 때까지는 나의 신에게로 가지 않을 것이오. 그때 우리는 진정으로 서로를 껴안게 될 것이오.
그대들 모두에게 나의 사랑을 전하오. 옥스퍼드에서 그대들을 기다리겠소.
이 메시지의 마지막에서 루카스는 자신의 실명을 밝혔다.
그의 이름은, 토마스 하든이었다.
일전에 켄들의 조사에서처럼, 루카스의 진짜 정체는 16세기의 지식인이자 종교적 연유로 추방당해 시골로 숨어든 토마스 하든이었던 것이다.
한편..
루카스와의 작별 이후 이번엔 2109로부터 메시지가 도착한다.
이것이, 지난 수개월간 시간대를 초월해 꿈결 같은 나날을 보내왔던 켄들의 마지막 체험이었다.
켄, 뎁, 피터.
두려워하는 자들의 악몽은 현실이 된다. 너희가 두려워하는 것은, 너희가 허락한다면 너희의 현실이 될 것이다. 너희 자신을 믿어라.
침묵하는 세계의 육체들은 안전하다. 너희 종족이 우리 세계를 침범하지 못하는 한 우리는 안전하다.
돌아라 예쁜 꽃아 태양을 향해 돌아라. 너는 자라나고 씨를 뿌릴 테니. 허나 꽃은 너무 높이 뻗어 타오르는 빛 속에서 시들어 버린다.
지식은 너희의 진보가 되겠지만 너희 종족은 손가락을 데게 될(주: 큰 화를 입을) 위기에 가까워지고 있다. ...간접적으로 너희가 이것을 막을 수도 있다!
벽돌을 꺼내라. 지을 준비를 하라 (책을 써라!).
고양아, 고양이는, 명성과 부를 찾아 런던으로 갔지. 고양이는 여왕을 보러 갔지만 대신 의자 밑의 작은 생쥐를 겁주었지. 궁극적으로 런던은 중요한 장소가 될 것이다. 너희의 주된 목표를 고수하라. 그것이 아무리 어려워 보일지라도 상관없다. 기만적인 매력을 가진 그 작은 생쥐에게 현혹되지 마라.
신념을 잃어서는 안 된다...! 너희 모두는 서로의 신념에 의지하고 있다.
올 사람이 한 명 더 있다. 그가 우리가 필요로 하는 도움이 될 것이다. 그가 오면 너희는 알게 될 것이다. 토마스는 결국 그의 책을 썼고 그 직후 곧 죽었다. 그는 그것을 안전한 장소에 두었으니 그것을 찾는 데 너무 오랜 세월이 걸리지는 않을 것이다. 비록 그가 옥스퍼드에서 만난 친구의 도움을 받아 라틴어로 썼지만 말이다. 비문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나는 언젠가 내 동료들이 이 책을 찾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것을 쓴다. 그때가 되면 우리의 땅(주: 세계)들이 그리 멀지 않게 되기를."
우리는 이제 끝내겠다. 너희는 할 일이 많다!! 답장을 쓸 필요는 없다. 우리는 떠날 것이니.
너희의 협조에 감사한다.
2109
종합하자면..
켄 일행과 루카스의 시간을 초월한 대화는 2109가 제공한 것이었다.
그리고 2109는 양쪽의 대화를 모니터링하며 때로는 개입하고 때로는 차단을 해왔다. 폴터가이스트와 같은 현상도 이들의 주의를 끌기 위한 현상으로 추측됐다.
2109는 역사의 판도를 뒤바꿀 거대한 목적에서 켄들에게 접근한 것으로 사료된다. 그렇게 양쪽의 상호작용을 부추겼으며, 궁극적인 목적은 양쪽 모두 일련의 사건을 책으로 쓰게 하려는 것이었다.
말인즉슨, 켄 일행과 루카스는 2109에게 있어서 일종의 실험실 관찰 대상과도 같았던 것 같다. 그리고 동시에 중요한 시간 실험이기도 했고 말이다.
과연..
2109의 정체는 무엇이었을까?
2109년 미래의 연구자?
시공간을 뛰어넘는 어떤 초월적 존재?
혹은, 지구가 아닌 외계의 지적 문명체?
켄 웹스터는 루카스와 2109의 말을 따라, 그가 겪었던 일련의 사건을 <The Vertical Plane>이라는 제목의 책에 담아 1989년 출간을 했다.
해당 제목은 직역하면 '수직 평면'으로, 이는 켄들이 거주했던 문제의 메도우 코디지를 둘러싼 시공간의 교차점을 은유한 것이었다.
참..
흥미롭고 즐거운 이야기임에 틀림없다.
더군다나, 해당 이야기가 출판된 해는 80년대 말이다.
당시는 각종 미스터리와 오컬트 또는 신비술이 마지막 전성기를 막 구사하던 시기이며 그러한 소재들이 일반 대중에 제법 진지하게 받아들여지던 시기이다. 게다가, 영국의 범국민 컴퓨터 교육 확산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8비트 컴퓨터가 보급되던 시기이기도 했으니 그때의 사람들이 해당 이야기를 처음 접했을 때 얼마나 재미있어했을까?
특히나, 시공간을 초월해 과거의 사람과 연락을 주고받는다는 소재는 세기말 무렵에야 영화 <사랑의 편지>와 <프리퀀시>를 통해 비로소 클리셰의 분야로 들어갔던 것임을 감안하면 말이다. (원조 원류로는 60년대 최고 인기 TV 시리즈 환상특급의 한 에피소드가 있지만)
여하튼지건..
켄과 루카스의 진한 우정을 그린 해당 이야기는 '도들스턴 메시지'라는 명칭으로 30년 넘은 지금도 영미권에선 제법 마니아가 있는 올드스쿨 미스터리 컨텐츠다.
미스터리 분야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우리 모두에 해당하겠다), 분명 '잘 읽었다'하고 넘어갈 이야기이다. 게다가, <다 빈치 코드>처럼 '책 속의 이야기는 실화 기반'이라는 장치까지 더해져 있으니 말이다.
허나, 이 절묘한 선을 넘어가는 순간 평가는 매몰차게 바뀌는 법이다.
판타지를 현실 세계와 같은 '수직 평면' 상에 세워선 안 되는 게 철칙 아닌가.
켄은 자신의 이야기를 사건이 벌어지고 있었다던 1985년에 최초 주장했다.
그는 영국 런던에 본부가 있던, 당시 해당 분야에선 꽤나 권위가 있던 심령연구학회 SPR에 보고를 하며 그곳의 조사관이 파견을 나와 현장 검증을 시도하기까지 했다.
여기서 조사관이 직접 준비한 컴퓨터를 설치하고서 현장을 봉쇄한 뒤 실험을 진행했다.
결과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이에 조사관은 '주장에 대한 증거가 없으며 켄 웹스터의 조작 가능성이 높아 보임'이라는 잠정 결론을 내린다.
한편, 켄은 서적을 통해 이후 2109가 SPR의 오만함이 싫어서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는 메시지를 보내왔다고 적는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다음 해인 1986년, 켄은 북웨일즈 지역 UFO 연구 단체의 설립자이자 UFO 애호가였던 게리 로우와 접촉한다. 2109가 문제 해결을 위한 사람으로 소개했기 때문.
이 만남에서 게리는 자신 또한 2109와 독자적인 채널로 소통하고 있었음을 암시해 왔다고.
또 1987년엔, 독일의 물리학자가 켄에게 연락을 취해와 자신 역시 2019로부터 메시지를 받아왔다며 접촉해 왔단다.
물론, 게리의 주장이 어느 정도 신빙성이 있는지는 미지수이며..
이 독일 물리학자의 정체는 에른스트 센코프스키임을 감안해야 한다. 이 사람은 70년대 무렵 모든 전자 장치를 통해 영혼과 교신이 가능하다는 주장을 펼친 해당 분야의 선구자이다. 물리학 박사 학위를 취득한 이후 교수로 재직했으나, 주요 활동은 초심리학 중 시공간을 넘어선 텔레파시와 같은 분야의 연구였다.
그리고 1989년..
데비와 헤어진 켄은 홀로 저술에 집중하며 마침내 문제의 서적을 출간, 그와 동시에 마니악 사이에서 제법 입소문을 타며 컬트적 존재가 됐다.
켄은 2109의 정체를 시간 관리국 또는 역사 수정주의자로 의심했다.
하여..
2109가 루카스와 자신들을 연결시키고 일련의 이야기를 책을 쓰게 한 것이 모두 먼 미래(2109년?)에 해당 책을 발견함으로써 어떠한 프로젝트를 시작하는, 그런 일종의 인과관계 고리의 완성을 목적으로 했노라 추정했다.
그리고 결국 문제는, 그의 주장이 이론적으로 얼마나 현실성있느냐겠다. (어디까지나 그가 해당 이야기를 실화라고 진지하게 주장하는 것과 더불어 그것을 증빙할 물리적 증거가 없으므로)
사실..
켄 웹스터의 이야기는 아주 간소하게 추려진 버전으로 지금껏 인터넷상에 퍼져왔다.
그저, 1500년대의 인물인 루카스(토마스 하든)와 컴퓨터를 통해 대화를 나눴다는 큰 줄기만으로 말이다.
허나, 지금 여러분이 여기까지 읽은 내용은 국내는 당연하고 해외 인터넷상에서도 다뤄지거나 포함된 내용이 아니다.
게다가, 실지 서적 원본 속에 포함된 다른 많은 내용도 여기서 전하지 않았다.
그건, 분량 문제이기도 하지만..
지금의 현대인 시점에선 너무도 터무니없는 전개인지라 온전한 감상을 방해하리란 우려에서였다.
원본 서적에선 보다 기괴한 일들이 매일같이 벌어졌다.
당시 유행하던 공포 영화들과 마찬가지로 켄의 집 안에선 한기가 서리고 시도 때도 없이 폴터가이스트 현상이 출몰했으며, 2109와 적대하는 존재인 One이 출현해 메시지를 보내온다거나, 루카스 앞에 정체불명의 존재가 나타나선 마치 미래에서 온 시간 여행자와 같은 연출(초록색으로 빛나는)을 뽐내고는 2109에겐 영혼이 없으므로 믿지 말라고 조언했다든지, 켄의 연인이었던 데비가 꿈에서 유체 이탈을 해서는 루카스를 만났고 루카스 역시 꿈속에서 데비를 만났다는 류의 일들이 발생했다는 것이다.
여담으로, 2109에게 가장 큰 소수가 무엇인지 그리고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에 대한 해답이 무엇인지를 묻자 2109는 영혼을 잃을 각오가 있다면 대답해주겠노라 답해왔다고.
알다시피..
비범한 주장에는 비범한 증거가 필요한 법이다.
켄이 내세운 증거라고는, 피터(옥스퍼드 출신 직장 동료인 )와 함께 대학 도서관에서 학적부를 조사한 끝에 토마스 하든이라는 이름을 찾아냈다는 것이 전부다.
허나, 이건 그저 루카스를 사전에 토마스 하든이라는 인물을 모델로 삼아 이야기를 구성했다는 방증 역시 가능해지는 부분이다.
자..
그럼 이야기의 현실성은 배제하고서, 켄의 주장에서 과연 학문적인 오류가 없는지를 확인해 보자.
켄들과 루카스 그리고 2109의 소통 창구는 BBC 마이크로 컴퓨터였다. 당시 켄들이 사용하던 컴퓨터는 모뎀이 연결되지 않은 채였으며, 따라서 모니터 화면에 텍스트를 출력하기 위해서 필요한 입력 소스는 오로지 키보드였다.
2109의 주장(또는 켄의 주장)에 따르면, 2109가 어떤 에너지 형태로 컴퓨터의 회로에 간섭해 글자를 쓰고 출력하도록 했다고 한다.
얼핏 듣기엔 그럴듯해 보인다. 허나, 그건 분명 SF 소설 또는 영화적 연출에 절여진 시선에서만 한정되는 것이다.
컴퓨터는 0과 1의 디지털 신호로 작동한다. 외부의 전자기파가 회로에 간섭하면(노이즈), 그것은 의미 있는 문장이 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시스템 다운이나 깨진 문자로 나타나는 것이 일반적이다.
결국에 무작위적인 전자기 간섭으로 그러한 일을 벌였다는 것은 너무도 비효율적이고 비실용적인 선택이며, 무한 원숭이 정리와 같이 원숭이가 타자기를 쳐서 셰익스피어 전집을 완성한다는 부류의 이야기인 것이다.
또, 2109는 자신들이 타키온 우주의 존재라고 소개했다.
이 타키온은 일반 대중에게도 널리 알려진 과학 용어이지만, 엄밀히 따지자면 공상 과학 소재에 더 가깝다.
타키온은 빛보다 빠르게 움직인다는 가설상의 관념적 입자로, 60년대에 논문에서 나온 이래 80년대 SF 소설과 영화 등지에서 시간 여행에 빠지지 않는 단골 소재였다. 현재까지도 이 타키온은 관념 그 자체론 인과율을 위배하기에 존재할 수가 없다는 게 학계의 정설이다.
또한, 2109는 시간 여행을 위해서는 도착지의 질량만큼 출발지의 질량을 가져와야 하는 이른바 등가 교환이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이것은 열역학 법칙이나 에너지 보존 법칙을 그럴듯하게 포장한 것이지만, 시공간 물리학에는 이와 같은 법칙이 존재하지 않는다. 웜홀이나 시공간 왜곡에 대해 그래도 말해보자면 음의 에너지(Negative Energy)나 막대한 중력이 필요한 것이지, 2109처럼 사람이나 물체를 맞교환해야 한다는 조건은 과학이라기보다 오컬트 분야의 인기 요소인 '제물' 개념에 가깝다.
2109가 책을 쓰라고 강요했던 것도 이른바 '결과를 위한 원인'과 같은 인관계를 위해서였다는데, 이는 원인 없이 결과만 존재하는 모순인 Bootstrap Paradox에 해당한다. 그리고 해당 개념은 SF 소설과 영화 등지에서 차용되는 매력적인 소재에 불과하지, 현실 세계에서는 논리적으로 성립되기가 어렵다.
이와 같이, 켄 웹스터의 이야기에는 분명 현실적 오류와 고증의 모순이 존재한다.
따라서 해당 이야기는..
80년대 당시 서구 사회에 돌풍을 일으키던 뉴에이지, 여기에 전성기를 구사하던 미스터리와 신비술 그리고 채널링과 같은 요소들. 이러한 요소들이 적절하게 버무려지고, 또 막 영국 사회적으로 대두되던 8비트 컴퓨터와 같은 전자기기의 도입 현상을 소재로 차용했던..
그러한 과정에서 탄생한 색다른 SF+미스터리 소설로 보는 게 타당할 것이다.
자, 그리고..
기껏 긴 내용을 통해 흥미를 느꼈다가 김이 새버렸다면..
마지막으로, '철저한 학문적 논파를 통한 타파'로나마 다른 종류의 희열을 제공하고자..
루카스가 보내왔다던 '16세기의 지방 특성이 드러나는 영어'에 대한 검증을 소개해 보겠다.
서적에서는 켄의 동료 피터가 메시지에 사용된 'Wrethed(괴롭혀진, 비참해진)', 'Charge House(학교, 배움터)' 같은 단어들이 실지 존재하는 고어이거나 사전엔 없는 독특한 단어라고 언급한다. (이밖에도 Scrit: 글을 쓰다Write, Leems: 빛Lights, Boyste: 상자Box, Agilten: 죄를 짓다Offend)
이 옥스퍼드 출신의 국어 교사 피터는, 루카스의 메시지가 정말 16세기 무렵 해당 지방의 사람이 실제 사용하던 말이었다고 일종의 증명서를 발부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루카스는 14-15세기 중세 영어에서 유래된 16세기 체셔 지방의 방언이라는 것이다.
만약 루카스의 메시지를 조작하려면 최소한 중세 언어학 박사 학위 정도는 보유했어야 한다는 게 피터의 주장이다.
허면, 정말 피터의 말대로였을까?
분명, 시대적 배경에 미루어 켄 웹스터와 같은 사람이 쉽사리 그러한 고어를 재현하기엔 무리가 따를 것이다.
그렇다면 피터는?
피터의 감정이 모두 맞는다면, 피터 역시 이러한 재현은 무리일 것이다.
다만, 피터의 감정이 틀리다면?
사실..
루카스가 보내왔다던 메시지는 자세히 뜯어 보면 일종의 파스티슈로 보인다.
즉, 여러 시대의 양식을 모방해 짜깁기한 작품 말이다.
루카스는 you 단어를 yow와 thou를 혼용하는가 하면, ne와 not을 혼용하기도 했다. 한 화자의 입에서 때로는 현대적으로 세련되고 때로는 지나치게 고풍스러운 단어 선택을 혼합하는 식이었다. yow는 주로 북부 방언이나 스코틀랜드어에서 사용됐으며 thou는 친근한 상대 또는 하대할 때 쓰이던 2인칭 단수였다. 즉, 일관성이 결여됐다는 것이다.
또, 루카스가 사용하던 희귀 단어들 역시 옥스퍼드 영어 사전이나 고전 문학 전공 서적에서 모두 찾아볼 수 있는 수준의 것이었다. 아무리 인터넷 사용에 제한이 있던 80년대 후반이었더라도, 예컨대 피터와 같이 소양 깊은 교사였다면 충분히 작문 가능한 수준이었다.
사건으로부터 10년이 흐른 1996년.
영국 ITV의 미스터리 프로그램 <Out of This World>에서는 켄 웹스터의 이야기를 취재해 방송으로 송출한다.
여기서 켄들의 이야기를 재연 드라마 형식으로 구성한 뒤 전문가들을 초빙해 그러한 주장을 검증했다.
두 명의 언어 전문가는 루카스의 메시지를 분석한 끝에 다음과 같은 요지의 결론을 내렸다.
"이건 16세기 영어가 아닙니다. 20세기의 위조품으로 보여요. 문법이 틀렸어요. 당시엔 인칭에 따른 동사 어미가 엄격했습니다. 'I do', 'Thou dost', 'He doth' 라고 썼어요. 루카스처럼 'I does', 'He dust'와 같이 주어와 동사 짝이 맞지 않는 엉터리 문법은 쓰지 않았습니다. 초기 근대 영어처럼 보이고자 -st나 -th 같이 어미를 아무 단어 뒤에나 갖다 붙인 꼴입니다."
"명사 앞 형용사 빈도를 분석한 결과 켄은 26.6%, 루카스는 26%로 놀랍게도 일치했습니다. 이 수치가 너무도 비슷하다는 점은 의심을 사기에 충분합니다."
이에 대해 피터는, 루카스가 교육받은 사람이었지만 오랫동안 시골에서 살았기에 방언과 잊혀진 문법이 섞인 개인적 언어를 사용한 것일 수 있다는 공허한 반박을 내놨다.
두 가지 가능성뿐이겠다.
메시지가 진짜이거나, 아니면 누군가가 아주 끈질긴 사기극을 밀어붙인 것이거나.
어느 쪽이든, 도들스턴의 메도우 코티지에서는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비록, 그게 현실 속이던 상상 속이 간에.
어쩌면..
루카스가 마지막으로 보내왔다던 메시지이자..
해당 이야기에서 진짜 교훈인 다음의 문구야말로 우리가 끝까지 남겨야 하는 게 아닐까?
NON PROGREDI EST REGREDI 나아가지 않는 것은 퇴보하는 것이다
참조
<The Vertical Plane> Ken Webster
<ITV/Out of This World: The Vertical Plane>
(따로 출처 표기가 없는 이미지는 이상한 옴니버스가 AI를 통해 생성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