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를 내리게 하는 법을 알았던 남자

(George Catlin)

"이거 언제까지 하나요?"

"비 올 때까지!"

예로부터 신화나 역사의 야사에서는 하늘에서 비를 내리게 하는 인물이 등장하곤 한다.

헌데, 1900년대 미국의 실제 역사에서도 그러한 기적을 일으키는 남자가 있었다.

이 남자의 이름은, 찰스 하트필드였다.

1890년 워싱턴 시애틀 (University of Washington)

1880년대부터 1890년대에 이르기까지, 미국 중서부 지역에선 '레인 메이커'가 일대 유행이었다.

레인 메이커란, 유독가스나 화학 물질을 공기 중에 퍼뜨려 비를 불러일으킨다는 사람을 일컫는 말이었다.

이들은 예로부터 존재했던, 전쟁 직후 시신의 유독가스나 무기의 화약물질이 비를 야기한다는 오래된 미신을 맹신했다. 그리하여, 화학 물질들을 혼합해 만든 저마다의 레시피를 토대로 사람들에게 돈을 대가로 비를 내려주겠다고 홍보했다.

1903년 워싱턴 벨뷰 (University of Washington)

당시 미국은 급격한 산업화 바람으로 인해 공업 생산액이 농업 생산액을 앞지르던 시기였다. 그럼에도 농업과 축산업 종사자들의 비율은 여전히 사회 전반에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때문에 이들 노동자들에게는 무엇보다도 가뭄이 가장 두려운 존재였다. 그렇기에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레인메이커들에게 의존하는 일이 종종 있어왔다.

하지만, 화학물질을 뿌려 비를 내리게 한다는 인공강우 기술은 당시엔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 분야 선진국인 중국의 경우 40년간의 연구를 거쳐 1990년대에야 비로소 개발이 이뤄졌다. 그 방법이란, 고사포나 미사일 또는 항공기를 이용해 구름 입자를 자극하는 화학물질을 구름 속에다 뿌리는 것이다.

그럼에도 1890년대 미국은 가뭄 여부가 생계에 큰 영향을 끼치던 시대였기에 레인메이커들이 성행했다.

찰스 하트필드는 이런 레인메이커가 가장 성행하던 캘리포니아 지역에서 성장기를 보냈다.

이 무렵 20대였던 하트필드는 재봉틀 영업 직종의 감독관 업무를 맡고 있었다.

하트필드의 월 급여는 125달러였다. 당시 인건비 가치를 지금으로 환산하면 약 30배가 차이 나므로, 그는 소위 잘나가는 직장인이었다.

하지만 성장기에서의 영향 때문인지, 그가 진정으로 관심을 갖는건 레인메이커에 대한 거였다. 특히나 가뭄으로 인해 발생하는 사회적 기근 문제가 그를 붙들고 있었다.

(San Diego History Center) 

그렇게 여가시간 틈틈이 자신만의 레인 메이크 레시피를 개발하던 하트필드는,1902년 마침내 자신만의 비밀 레시피를 완성한다.

그것은 23가지의 화학물질을 혼합한 것으로, 구름을 끌어들여 비를 유도하는 방식이었다.

2년에 걸쳐 레시피를 실전에서 테스트한 하트필드는 1904년부턴 본격적인 레인메이커의 삶에 들어선다.

그는 농부 및 낙농업자들을 타깃으로 신문 지면에 광고를 실으며 본격적인 홍보캠페인을 시작했고, 성공 여부에 따른 후불제 방식을 원칙으로 했기에 반응은 점차 뜨거워졌다.

(City of San Diego)

레인메이커 사업은 성공적이었다.

하트필드는 강수량과 조건에 따라 주로 3시간에서 5일 내로 기한을 정했고, 기한 내에 비가 내리면 50달러에서 100달러에 이르는 성공보수를 받았다.

그렇게 사업 1년 만에 추종자들이 생겨나는가 하면 지역 신문들에도 소개되면서 그의 명성은 날이 갈수록 높아졌다. 1000 달러의 성공보수를 제시하는 사람도 생겨날 정도였으며, 사업가나 상업 단체로부터는 4,000달러의 보수를 받을 정도였다.

그로부터 10년간, 중서부 전역으로 하트필드의 명성이 퍼지면서 명실상부 최고의 레인메이커로 불리기에 이른다.

(Library of Congress)

그리고 1915년 1월, 캘리포니아 샌디에이고에서 파나마 캘리포니아 박람회가 열린다.

해당 박람회는 파나마 운하의 개통을 기념함과 동시에 미국 최초의 항구를 홍보하고자 2년간 진행되는 국제 박람회였다. 인구수가 37,000명에 불과하던 샌디에이고로서는, 야심 차게 준비한 만큼 반드시 성공시켜야 할 국제 행사였다.

헌데, 문제가 발생했다.

평년에 비해 강수량은 좋았지만, 박람회 기간 동안의 물 비축과 공급에 있어서 물 부족 우려가 예상됐던 것이다.

처음부터 다른 도시의 반대 속에서 박람회 개최를 밀어붙였었기에, 이러한 우려를 불식시키고자 샌디에이고 시 의회는 하트필드와 접촉한다.

1915년 12월, 샌디에이고 시 의회는 하트필드와 계약을 맺는다.

대표적인 물 공급지이자 저장고이며 수원지였던 모레나 저수지에 비를 내리게 해, 1916년 12월 20일 이전에 저수지 일대를 채운다는 계약이었다.

성공할 경우에만 보수가 지급되며, 보수는 무려 1만 달러에 달했다.

(The San Diego Union-Tribune)

1916년 1월 1일, 작업에 착수한 하트필드는 언제나처럼 자신의 형제들과 저수지 근처에 탑을 세우기 시작했다.

그리곤 탑을 통해 하트필드표 레시피를 공중으로 흩뿌렸다.

과연, 하트필드는 모레나 저수지를 채울 수 있었을까?

1897년 설계과정에서부터, 결코 채워지지 않도록 과잉 건설이 이뤄진 모레나 저수지를 말이다.

(San Diego History Center)

1월 5일, 비가 내렸다.

평년에 비해 많은 강수량이었다.

1월 10일엔 거의 24시간 내내 비가 내렸다.

그리고, 이후 일주일간 우천이 이어졌다.

이번엔 하트필드와 비를 멈추게 하는 계약을 맺어야 하는 게 아니냐는 농담이 나올 정도였다.

(San Diego History Center)

그로부터 다시 일주일.

폭우가 계속해서 이어졌다.

날이 갈수록 거세져만 갔다.

이러한 기록적인 우천은 1월 말까지 계속됐다.

시간당 700mm 폭우로 인해 저수지들은 범람하고 댐들은 붕괴됐다. 모레나조차도 범람 직전의 위기까지 갔다.

사방으로 침수가 발생하면서 추산 피해액은 300만 달러를 넘어섰다.

또한, 공식 집계상 20명이 넘는 사람이 사망했으며, 비공식적으론 사망자의 수가 50을 넘을 것으로 추정됐다.

이로 인해 지역 주민들의 분노가 위협으로 발전하면서 하트필드는 샌디에이고에서 도망치듯 벗어나야 했다.

한편, 하트필드는 모레노를 가득 채웠으니 약속대로 1만 달러를 지불하라고 샌디에이고시 의회에 요구한다.

허나, 시 의회 측은 먼저 비로 인해 발생한 재산손괴를 보상하라며 거부한다. 비를 내리도록 한 주체가 하트필드라면, 그로 인한 피해 역시 하트필드의 책임이라는 논지였다.

하트필드와 샌디에이고시 의회 간의 공방은 이후 22년간이나 이어진다.

그렇게 1938년, 법원 판결에서야 결말이 지어진다.

내용 자체도 황당하지만, 당시 제대로 된 서면계약서 없이 진행된 일이었기에 법적공방마저 치열했다.

그렇게, 결국은 비를 내리게 하는 주체가 인간이 아닌 신의 영역이라는 판결이 내려지면서, 하트필드는 성공보수를 받지 못하게 된다.

(City of San Diego)

샌디에이고 사태 이후 파트필드는 쿠바와 온두라스에까지 진출했으며, 그의 가장 큰 성공보수 액수는 캐나다에서의 25,000달러이다.

이러한 레인메이커 일은 1930년대 대공황이 시작되기 전까지 지속됐으며, 그의 주장에 따르면 500회 이상 비를 내리게 했다고 한다.

허나, 회의론자들은 하트필드를 레인메이커가 아닌 노련한 기상학자로 추정한다.

하트필드가 평소 기상학과 강우량 통계에 대한 공부를 중시했으며, 우기가 돌아올 시점의 지역을 대상으로 이른바 기우제를 지냈다는 것.

즉 그가 화학물질 혼합물 레시피를 탑에서 뿌리는 것은 어디까지나 퍼포먼스였으며, 사실 그의 진정한 능력은 '기상예보'였다는 것이다.

한편, 하트필드가 자신의 레시피를 무덤까지 가져가면서 '하트필드표 비밀의 레시피'는 영원히 미스터리로 남게 됐다.

참조

<JSTOR Daily/When San Diego Hired a Rainmaker a Century Ago, It Poured> Christopher Klein

<Snopes/Did San Diego Hire a 'Rainmaker' to End a Drought in 1916?> David Emery

<The Journal of San Diego History/Hatfield the Rainmaker> Thomas W. Patterson

-끝-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