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의 암호를 풀어냈던 당대 최고의 석학과 연금술사
본 글은, 신의 암호에 도전했던 16세기 최고의 석학 중 하나인 존 디와 관련한 이야기입니다. 역사상 가장 위대한 천재였던 뉴턴으로부터 약 100년 전 같은 영국에 존재했던 남자, 대영제국의 엘리자베스 1세가 가장 신뢰했던 개인 자문관. 그런 그가 한 연금술사와 손을 잡고서 신과 천사가 사용하는 언어를 밝혀내는 모험 활극! 그리고 납을 황금으로 만드는 연금술까지! 과연, 16세기 말 영국과 유럽 등지에서 펼쳐졌던 해당 소동극의 정체와 진실은?
1582년의 영국 런던 몰트레이크.
템스강에서 밀려온 눅눅한 안개가 노학자의 서재 창틀을 핥고 지나가던 어느 밤이었다.
노학자는 대영제국의 국가 전략 핵심을 담당하는,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이 가장 신뢰하던 개인 자문관이었다. '살아있는 가장 똑똑한 인간'으로 추앙받으며 유럽 전역에서 당대의 석학이자 지성으로 불리었다.
노학자는 우주의 모든 원리를 단 하나의 기호로 압축하며 신이 우주를 창조할 때 사용한 근원적 설계도를 창안했다.
노학자의 지적 인프라가 국가 교육 기관 전체를 압도하고 있었다. 그의 저택 서재로는 옥스퍼드 대학 도서관의 10배에 달하는 장서가 자리하고 있었다.
허나..
자신의 손끝에서 탄생한 '대영제국'이라는 거창한 역사의 이름과 4,000권의 장서도 이 노학자의 공허 앞에서 침묵할 뿐이었다.
유클리드의 기하학은 명쾌했으나 차가웠고 별들의 궤적은 정교했으나 인간의 고독에는 응답하지 않았다.
신은 더 이상 인간의 비루한 언어에 응답하지 않았다.
노학자는 모르고 있었다.
다음날 있을 낯선 이의 방문이 앞으로의 인생을 어느 곳으로 투신시킬지를.
낯선 이가 노학자에게 속삭였다.
"태초의 음성. 천사들의 혀에서 내뱉어지는 말. 아담이 에덴에서 신과 대화할 때 썼던 타락 이전의 언어. 그것을 알려드리지요."
튜더가의 마지막 군주였던 엘리자베스 1세.
그녀가 대관식 날짜를 정할 때 가장 먼저 찾은 사람이 있었으니..
그는 바로, 수학자이자 천문학자였던 존 디였다.
디는 여왕의 절대적인 신임을 받는 자문관이자 첩보원이었으며(여담으로, 그가 썼던 특유의 기호 서명이 훗날 제임스 본드의 '007' 암호명에 영감을 줬다는 매력적인 전설이 존재), 신대륙에 영국의 식민지를 세워 대영제국을 형성할 것을 주창하던 냉철하고 냉혹한 전략가였다.
디는 수학, 천문학, 항해술, 암호학의 살아있는 정점이었으며 그의 저택 서재로는 당대 영국에서 가장 거대한 지식의 성채가 자리하고 있었다.
그는 1564년 저서 <모나스 히에로글리피카>를 통해 우주의 모든 원리를 하나의 기호로 압축하려 시도했다.
기호의 구조는 태양(원), 달(반원), 원소(십자가), 그리고 양자리(불의 상징)를 수직으로 결합한 형태였다. 디는 기호가 단순한 그림이 아닌, 우주의 창조 과정을 담고 있는 '수학적 유전자'라고 믿었다.
그는 이러한 상형문자 모나드가 우주를 창조할 때 신이 사용한 근원적 설계도라고 믿었다.
허나..
30년 가까이 지속해 온 연구에서도 그는 답을 얻을 수가 없었다.
수학과 과학 그리고 기하학이 '행성이 어떻게 움직이는가?'는 말해주지만, '신은 왜 행성을 그렇게 움직이게 했는가?'라는 질문에는 영구히 침묵했기 때문.
디는 신의 의지를 알고 싶었다.
그렇게..
근원적인 답을 구하기 위해서는 결국 인간의 이성을 포기하고서 신과 직접 대화해야 한다고 여긴다.
인간의 언어로는 신의 진리를 온전히 담을 수 없을 터이니 말이다.
그러니까, 성경 속 인간의 타락 이전 우리가 신과 대화할 때 사용하던 '타락 이전의 언어'를 통해서만 우주의 진리에 도달할 수 있다는 생각이었다.
근대 과학의 문을 열어젖히며 이성의 시대를 선포했던 아이작 뉴턴.
그런 뉴턴이 평생을 바쳐 진정으로 알고자 했던 신의 암호.
그러니까..
이 이야기는..
역사상 가장 위대한 천재였던 뉴턴으로부터 약 100년 전 같은 영국에 존재했던..
또 하나의 당대의 지성 존 디의 신의 암호를 향한 추적기이다.
1581년이었다.
존 디는 영국의 두뇌 그 자체라 불릴 법한 지위와 명예를 갖추고 있었다.
디는 여왕인 엘리자베스 1세가 사적으로 가장 신뢰하는 조언자였다. 여왕은 그를 일컬어 '나의 철학자'라 추켜세울 정도였다. 또 그는 영국의 북서항로 개척 및 해상 패권을 이론적으로 뒷받침하는 국가 전략가이기도 했다.
그런 디의 몰트레이크 저택 서재로는 약 4,000권의 장서가 있었다. 당시 옥스퍼드 대학 도서관 장서가 500권 미만이었으니, 사실상 그는 인간 구글이나 진배없었다. (뭐, 당시 영국의 대학 도서관들은 종교개혁 과정에서 대량으로 삭제되긴 했으나)
이 무렵 디는 세상을 '신이 쓴 거대한 암호'라고 여기기 시작한다.
그는 우주의 겉모양(How)은 풀었으나, 그 내면의 의지(Why)를 파악하고자 다음과 같은 구체적인 시도들을 감행한다.
디가 1564년에 창안한 해당 방식은 단순한 기호가 아닌 '수학적 수수께끼 풀이'에 가까웠다. 그는 우주의 모든 구성 원리를 단 하나의 상징으로 압축했다. 점(Point), 선(Line), 원(Circle)이라는 기하학적 최소 단위를 조합해 연금술적 변화와 행성의 움직임을 설명했다.
디는 이러한 기호를 명상과 분석을 통해 인간의 타락한 이성이 정화되면서 신의 지혜에 직접적으로 접속할 수 있노라 믿었다. 허나 20년 가까운 연구에도 신은 응답하지 않았고, 여기서 그는 '직접 대화'라는 극단적인 해답을 원하기에 이른다.
디는 신이 천사를 통해 진리를 전달할 것이라 믿고서 천사의 모습을 비춰줄 '매질(Medium)'로 아즈텍 흑요석 거울을 선택한다. 이 멕시코에서 건너온 검은 유리 거울로 연기처럼 피어오르는 환상을 포착하려 한 것이다.
또한, 고도로 세공된 수정구를 통해 천사의 목소리를 시각화하려 시도했다.
헌데, 디는 이러한 도구와 방식을 통해서 어떠한 해답도 단서도 얻지 못하면서..
1581년 12월, 디는 스스로가 천사를 볼 능력이 없음을 인정하기에 이른다.
그렇게..
디는 영적인 안테나 역할을 해줄 영매를 찾아 나선다.
여기서 고용된 이가 바로 바너버스 사울이었다.
오랜 연구 끝에 자신의 한계에 봉착하며, '인간의 눈으로 볼 수 없는 것을 대신 봐줄 안테나'를 수소문하던 디.
디는 주변 인물들로부터 영적인 투시력을 보유했다고 소문 난 영매 사울을 추천받고는 그를 정중하게 저택으로 초대한다. (피고용인으로)
그렇게 1581년 12월 22일 새벽.
이날 세션에서 기념비적인 결과가 나온다.
디는 자신의 서재에 있는 수정구슬을 사울에게 내밀었다. 사울은 구슬 속에서 눈부신 빛이 일렁인다고 말하며, 이내 어느 영적인 존재를 보는 데에 성공한다.
사울에 따르면, 이 존재는 천사 '아나엘(Anael)'이었다. 고대 신비주의에서 금성을 다스리는 대천사이자 지혜의 수호자로 알려진 아나엘 말이다.
사울은 천사가 디의 기도를 들었으며 그의 연구를 축복하고 곧 비밀의 문을 열어주리라 속삭였다고 전했다.
그리고 디는..
마침내 신의 응답을 들었다고 여기며 이날 자신의 일기에 다음과 같은 라틴어 문구를 적는다.
"Deo sit omnis Laus, Honor, et Gloria"
(신께 모든 찬양과 영광과 존귀가 있을지어다)
세상에 존재하는 그 어떠한 지식으로도 도달할 수 없었던 신의 암호.
스스로에게도 당대 최고의 학자라는 자부심이 있었던 탓일까?
디는 자신이야말로 신의 비밀을 전수받을 적임자라 과신했던 탓인지, 마침내 신과의 직접적인 소통 채널을 열었노라 확신한다.
그렇게 신에게 선택받았다고 전율과 감격에 휩싸인 디..
허나..
이어지는 세션들에서 디는 나날이 실망하기 시작한다.
디는 당대의 석학이자 지성이었다.
따라서, 그가 원했던 것은 누구도 모르는 고차원적인 수학적&우주론적 담론이었다.
반면, 사울이 전해주는 아나엘의 말은 주변 사람을 조심하라는 식의 점쟁이 같은 소리뿐이었다.
그러니까..
대천사의 말을 대신 전해주고 있다는 영매 사울이 무척이나 낮은 지적 수준의 훈계 만을 내놓던 것.
"인내하라!"
"마음을 정결히 하도록!"
"곧 더 큰 지혜를 가진 자가 너를 찾아갈지니!"
그렇게 1582년 1월 동안 수차례의 세션 과정에서 별다른 성과는 없었고..
처음 그 전율의 순간을 잊지 못한 디는 점차 목마름에 갈구하는 신도가 돼 있었다.
그러던 2월.
이제 세션의 분위기는 날이 갈수록 달아올라 갔다.
대천사 아나엘이 어떤 비밀스러워 보이는 책을 손에 들고 나타났다는 사울의 말에 디가 책의 내용을 전해줄 것을 간청했으나..
사울은 이렇게 대답한다.
"천사께서는 경께서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았다며 인내하라고 하십니다. 천사께서 아주 복잡해 보이는 기하학적 문양을 공중에다 그리고 계시네요."
다음날.
달아오를 대로 오른 디.
허나..
그와 반대로, 세션의 시작과 함께 사울은 비명을 지르며 분위기를 냉각시킨다.
"천사가 아닌 흉측하고 거대한 그림자들이 이곳 서재를 구석구석 채우고 있어요! 이것들이 저를 죽이려 하는 것 같아요!"
이렇듯 사울이 갑작스레 발작적인 증세를 보이자..
디는 신의 암호와 접촉하려는 자신들을 악마가 방해하고 나섰다고 믿는다.
2월 말에 들어서면서, 세션의 횟수는 줄어드는 대신 세속적인 위협이 늘어나기 시작한다.
특히, 런던의 누군가가 사악한 영을 부리는 불법적인 강신술 혐의로 사울을 고발하며 그가 곧 웨스트민스터 법정에 소환되리라는 풍문이 나돌았다.
그리고 이 풍문은 사실이었다. 사울이 디의 저택을 드나들며 기묘한 실험을 한다는 소문이 퍼졌던 것이다.
사울은 공포에 질릴 수밖에 없었다.
당시 영국의 서슬 퍼런 마법 금지법으로 인해 영매나 강신술사는 가장 위험한 직업군에 해당했다. 이 마법법에 따라 사울은 최대 사형까지도 가능했다.
한편..
불안해진 건 디 역시 마찬가지였다.
당시 디는 여왕의 총애를 받는 인물인지라 직접적으로 건드리기가 힘들어 하수인 격인 사울이 타깃이 됐겠으나, 디 또한 자신의 '연구'가 이단으로 몰리게 된다면 분명 타격이 있을 터였다.
하여..
디는 극도로 불안에 떠는 사울에게 재판 비용 및 생활비 명목으로 돈을 쥐여주며 천사가 지켜 줄 것이라며 격려한다.
2월 말.
사울은 런던의 웨스트민스터 법정에 선다.
사울은 목숨을 건지기 위해 전략을 취한다.
"저는 영혼을 부리는 마법사 따위가 아닙니다. 제가 보인 것들은 그저 고용인을 기쁘게 하기 위해 단순히 연출을 한 것에 불과합니다."
한편..
3월 6일, 법정으로부터 단순한 사기꾼으로 판결되며 디의 저택으로 귀환한 사울.
그리고, 일련의 세션이 모두 가짜이고 사기였다는 사울의 법정 진술에 대해 어쩔 수 없는 거짓말이었다며 내심 자기합리화를 하고 있던 디.
디는 귀환한 사울을 잡아끌어 서재로 향하고는 그를 수정구 앞에 앉힌다.
그러고는 대천사 아나엘의 진위를 검증해 보일 것을 요구한다.
이에 정작 피의자였던 사울이 되려 넌덜머리를 내며 냉소적으로 선언한다.
빛도, 천사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고.
그렇게 심하게 다툰 직후 사울은 짐을 챙겨 영영 디의 저택을 떠나버렸고..
디는 어찌나 충격과 분노에 빠졌는지 이날 일기에 이렇게 적는다.
"바너버스 사울은 마침내 아무것도 볼 수 없다고 고백해왔다..그는 사악하고 비열한 인간이다."
사울이 떠나고서..
대천사 아나엘이 떠나면서..
디는 지옥 같은 침묵 속에서 사흘을 보낸다.
재판 과정으로 인해 자신의 지적&명예적 피해가 간 것 보다도, 자신의 남은 인생 전부였던 연구가 한순간에 물거품이 됐다는 생각 때문에 말이다.
그리고 나흘째.
사울이 자신을 속였다는 사실보다 이제 천사의 목소리를 들을 통로가 사라졌다는 사실에 더 절망하던 디에게, 그 공백을 메꿔줄 누군가가 예고도 없이 찾아오니..
그는 바로, 에드워드 켈리였다.
1582년 3월 10일 토요일, 오전 11시 15분경.
자신을 에드워드 탈보트라는 가명으로 소개한 켈리가 디와 조우한다.
켈리는 아직 서른도 채 되지 않은 젊은이였는데, 매우 진중한 태도와 절제된 신비로움을 자아내며 귀까지 덮이게 깊이 눌러쓴 검은색 벨벳 모자마저 학문적 경건함으로 보일 정도였다.
그는 디에게 '당신의 수학적 지식과 신비로운 연구에 대해 큰 존경심을 가지고서 방문했다'며 예의를 갖췄다.
희귀한 지식을 찾는 방랑자로 자신을 소개한 켈리에게 매료된 디. 디는 평생 수집한 4,000권의 장서가 있는 서재로 그를 안내했고, 서재 곳곳을 경외 어린 눈빛으로 감상하는 켈리에게 디는 무장 해제되다시피 한다.
그렇게..
대화가 무르익은 가운데 켈리가 뜬금없이 속삭인다.
"얼마 전 우스터셔 노스윅 힐에서 길을 헤매던 중 영적인 이끌림으로 어떤 나무 아래를 파게 됐습니다. 그러자 깊은 곳에서 작은 돌 궤짝과 같은 비밀함이 나오더군요. 거기엔 가루가 들어 있는 두 병의 유리병과 낡은 양피지 필사본이 있었답니다. 아무래도.. 이 양피지 필사본은 고대 성인인 던스턴의 것으로 보이더군요."
켈리는 자신의 가방 속에서 두껍고 둥근 형태의 고대식 유리병 2개와 낡은 양피지 필사본을 꺼내 보였다.
유리병에는 각각 곱디고운 선홍과 우윳빛의 가루가 들어 있었다. 연금술적 전통에 따르면 붉은 가루는 납을 금으로 변환시키는 '현자의 돌' 최종 단계에 해당하는 물질로, 흰 가루는 은을 만드는 물질로 간주됐다.
양피지 필사본에서는 연금술의 비법이 담긴 복잡한 고대 기호와 도표, 그리고 인간의 언어로는 해독하기 어려운 기묘한 문자들로 가득 차 있었다.
고대 성인 던스턴은 10세기 영국의 성인으로 금속 세공의 수호성인이기도 했다.
디는 필사본이 깊이 있는 지식을 담고 있는 것에 점차적으로 감격하나..
가루를 사용한 구체적인 연금술 실험 지침이 암호화돼 있어 읽을 수가 없었다.
한편..
디는 그토록 찾아 헤매던 진리의 문을 맞닥뜨린 듯한 기분에 휩싸임과 동시에 곧바로 벽에 부딪히며 안절부절할 수밖에 없었고..
그런 디에게 켈리가 나긋한 목소리로 제안해 온다.
"본래 이 물건들이 영적인 존재의 인도로 세상에 나왔으니, 그 사용법 또한 그 존재에게 직접 물어봐야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모든 것이 마치 운명처럼 느껴졌다.
디는 홀린 듯 자리에서 일어나 평소 세션에 사용하던 참나무 탁자 위로 깨끗한 하얀 천을 깔았다.
탁자 중앙에는 투명한 수정구슬을, 그리고 그 바로 옆으론 켈리가 가져온 두 병의 유리병(붉은 가루와 흰 가루)과 성 던스턴의 필사본이 펼쳐진 채 놓여졌다.
검은 벨벳 모자를 깊게 눌러쓴 켈리가 수정구 앞으로 자리했다. 디는 그 옆에 깃펜을 들고 앉아선 숨을 죽였다.
디는 약 15분간 신에게 간절한 라틴어 기도를 올렸다. 탁자 위의 보물들에 대한 진실을 갈구하는 기도였다.
이윽고 켈리가 입을 열었다. 낮고 단호한 목소리로.
"수정구 안으로 연기가 피어오릅니다. 연기가 걷히며 사방에서 불꽃이 튀고는 그 중심에서 찬란한 빛이 뿜어져 나오고 있습니다. 황금색 옷을 입고 손에는 빛나는 막대를 든 장엄한 사내가 나타났습니다. 금색과 보라색이 섞인 화려한 옷을 입고서 머리 위로는 불타는 관을 쓰고 있습니다."
이 장엄한 사내의 정체는, 바로 지혜와 빛을 관장하는 대천사 우리엘이었다.
켈리는 우리엘이 손에 쥐고 있던 빛나는 막대로 허공에 어떤 기호를 그리기 시작했다고 전했다.
디는 전율했다.
켈리가 묘사한 그 기호는, 디가 평생을 바쳐 연구한 <모나스 히에로글리피카>의 상징과 놀라울 정도로 흡사했기 때문.
분명..
이전 영매인 사울과는 차원이 다른, 디의 지적 기반을 정확히 타격하는 보고였다.
이어..
켈리는 우리엘이 수정구 속에서 탁자 위에 놓인 성 던스턴의 필사본과 가루를 번갈아 가리켰노라 전했다.
디는 떨리는 목소리로 '이 책과 가루가 신께서 보내신 것이 맞습니까?'라고 물었고, 이에 켈리는 다음과 같이 우리엘의 선언을 전달했다.
"존 디여, 네가 평생을 바쳐 긋고 지웠던 그 기호(모나드)는 하늘의 뜻과 일치한다. 이 책과 가루는 너의 인내에 대한 보상으로 하늘이 예비한 것이니, 아담의 시대부터 보존되어 온 잃어버린 지식의 파편이다."
디는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사울은 이해조차 못 했던 자신의 복잡한 기하학적 이론(모나드)을, 켈리가 천사의 입을 통해 신의 공인으로 바꿔버린 것이다.
한편, 해당 세션에서 또 다른 중요한 목적이었던 질문인 '가루를 어떻게 금으로 바꾸는가?'에 대한 질문에 우리엘(켈리)은 아주 영리한 답을 내놓는다.
"아직 너의 귀는 하늘의 언어를 직접 들을 준비가 되지 않았다. 이 가루는 '신의 언어'를 복원해 정화된 이성을 갖추어야만이 비로소 작동할 것이다. 내가 이 수정구를 통해 보여주는 하늘의 언어를 기록하고 공부하거라."
우리엘의 말인즉슨, 연금술을 통한 물질 변화에 앞서 우선적으로 정신적인 부분을 채우라는 것.
그렇게..
세션이 약 1시간 정도 지속됐을 때, 켈리가 갑자기 온몸을 떨며 '천사가 너무도 눈 부신 빛을 쏘아 보내 몸이 타는 것 같다'라며 고통을 호소했고, 우리엘은 다음 만남을 준비하라는 말을 남기고는 사라졌다.
1582년 3월 10일 벌어진 이 기념비적인 사건에 대해 디는 일기에 이렇게 적는다.
"사울보다 천 배는 뛰어난 자를 만났다. 신께서 나에게 뛰어난 영매를 보내주셨다."
이후 3-4일에 걸쳐 짧은 세션들을 통해 우리엘은 디와 켈리에게 파트너십에 대한 구체적인 규칙을 정해줬다.
디의 역할은, 하늘의 음성을 기록하는 서기였다.
켈리의 역할은, 하늘의 빛을 보는 눈이었다.
그리고 앞으로의 세션을 위해 디가 켈리를 정식으로 고용한다.
3월 26일.
이날 두 번째 메인 세션이 진행된다.
켈리는 수정구에서 대천사 우리엘이 황금 잎사귀로 된 거대한 책을 들고 나타났다고 보고한다.
우리엘이 손에 든 책은 황금으로 만들어졌으며, 그 안에는 인간의 눈으로는 도저히 읽을 수 없는 기이한 문자들이 가득했다고 전한다.
이에 디는 이것이 아담이 타락하기 전 하느님과 대화할 때 썼던 바로 그 '원초적 언어'라고 확신한다. 그는 켈리에게 문자 하나하나를 묘사할 것을 간청한다.
그렇다.
이날 세션의 핵심은 바로 '문자'였다.
그것도, 단순히 이국 또는 고대의 문자가 아닌..
태초에 신과 천사에게 통용되던, 아담이 사용하던 그 언어였다.
켈리는 우리엘이 공중에 글자를 하나씩 띄워 보여준다고 말하며 이를 묘사하기 시작했다. 천사가 글자를 보여주면 켈리가 그것을 종이에 그려나갔다.
신기한 점은 이 문자들이 기존의 라틴어, 그리스어, 히브리어와는 완전히 다른 독창적인 형태를 지니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이날 세션에서 총 21개의 문자가 수신됐다.
더불어, 켈리는 우리엘이 각 문자의 이름과 발음을 하나씩 일러줬다고 전해왔다.
디는 이 기이한 문자들을 보며 드디어 우주의 운영체계를 해독할 수 있는 열쇠를 얻었다며 또다시 전율했다.
신과 천사가 사용하던 천상의 언어..
태초에 아담이 에덴에서 모든 사물의 이름을 지을 때 사용하던 완벽한 언어..
디와 켈리는 우리엘이 전수해 준 이 기본적인 알파벳 21개를 가리켜 천사의 언어 혹은 아담어라고 불렀다.
훗날..
켈리는 우리엘이 해당 알파벳(문자)이 과거 성경 속 예언자 에녹(노아의 홍수 이전 족장)이 천사들과 대화하며 우주의 비밀을 기록할 때 사용하던 이른바 '신의 도구'라고 설명했다며 전해왔고..
그리하여 이 문자들은 '에녹어'라는 명칭으로 역사에 각인이 새겨지게 된다.
문자 수신에 이어 우리엘은 세션을 진행할 때 갖춰야 할 물리적 환경에 대해서도 구체적인 지시를 내린다.
우리엘은 세션을 진행할 탁자(이른바 Holy Table)의 상판에 어떤 문양을 새겨야 하는지, 그리고 그 위로 놓일 신의 인장이 어떤 기하학적 구조를 지녀야 하는지 아주 정밀하게 지시해 왔다.
이 '신의 진리의 인장'은 지름 9인치(약 23cm), 두께 1.125인치의 황색 밀랍 원판이었다. 외곽의 원, 칠각형(Heptagon), 칠각별(Heptagram)이 중첩된 구조로, 각 교차점에는 켈리가 불러준 40개의 알파벳과 숫자 조합이 새겨졌다.
이러한 인장은 디의 서재 중앙에 놓일 성스러운 탁자(Holy Table)의 네 다리 밑과 중앙, 총 5개가 배치돼야 했다.
사울이 '마음을 정결히 하라'는 식의 도덕적 훈계에 그쳤다면..
켈리는 각도, 길이, 글자 배치 등 수학적이고 정교한 설계도를 내놓았다. 대천사가 요구하는 이 물리적 인프라의 정교함은 수학자였던 디에게 신뢰도를 무한대로 높이는 계기가 됐다.
그렇게..
한동안 디와 켈리는 세션을 통해 우리엘과 교감한다.
종종 켈리가 천사의 언어이자 아담어였던 문자를 받아적던 중 글자들이 눈을 찌르는 것 같은 고통을 호소하는가 하면, 너무도 거대한 지식의 무게로 인해 머리가 터질 것 같다며 난색을 표해왔다.
그럴 때마다 디는 고통받는 켈리를 신이 선택한 유일한 도구라고 치켜세우며 달래기를 반복했다.
디와 켈리는 성스러운 고통을 기꺼이 감내하고 인내하기로 마음을 다잡는다.
디와 켈리가 우리엘로부터 전수받았다던 천사의 언어 혹은 아담어..
즉, 훗날 에녹어로 불리우는 해당 문자들(알파벳)의 수신 과정을 자세히 소개해 보겠다.
1582년 3월 말부터 시작된 이 에녹어 받아쓰기 세션 현장은 다음과 같았다.
먼저, 켈리는 에녹어 문자를 '뒤에서부터 거꾸로' 받아 적었다. 그러니까, 백워드로 말이다.
켈리는 우리엘이 해당 언어가 너무도 강력한 신성한 에너지를 담고 있기에, 정방향으로 읽는 순간 의도치 않은 거대한 힘이 방출되며 디와 켈리를 파괴할 것이라고 경고해 왔다.
하여, 둘은 마지막 글자부터 거꾸로 기록해 나가기 시작한다.
여기서 황금 격자판이 등장했다.
켈리는 수정구 속에서 49x49칸으로 이뤄진 거대하고 복잡한 격자판을 봤으며, 우리엘이 칸들 사이를 날아다니며 특정 칸을 가리킨다고 전해왔다.
켈리는 첫 번째 판의 7행 4열은 'Pa', 3행 2열은 'Zir'라고 하는 식으로 좌표를 찍듯 글자를 불러줬다.
디는 이 좌표를 일일이 대조해 가며 격자판을 채워 나갔고, 그러한 과정은 수 시간에 달할 정도였다. 엄청난 중노동에 가까웠으나 디는 밥 먹는 시간도 잊은 채 깃펜을 휘둘렀다.
그렇게..
천사의 언어인 21개의 알파벳이 수신됐다.
이 알파벳들을 발음하며 켈리는 평소 자신의 목소리와는 전혀 다른, 쇳소리가 섞이거나 아주 깊은 저음으로 에녹어 단어들을 뱉어냈다.
세션이 정점에 달할 때..
켈리는 거의 발작에 가까운 상태에 이르렀다. 탁자를 움켜쥐며 머릿속에서 수만 마리의 벌이 쏘아대는 것 같다고 비명을 지르거나, 피가 섞인 눈물이 나올 것 같다며 수정구에서 눈을 떼곤 했다.
한편..
디는 일기에 에녹어의 발음에 대한 감상을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히브리어보다 오래됐고, 그리스어보다 우아하며, 라틴어보다 논리적이다."
훗날 디와 켈리의 세션이 절정에 달하기 시작하면서, 천사들은 기존의 알파벳식의 문자 나열이 아닌 완전한 문장을 내뱉기에 이르렀다.
그건 에녹어 알파벳 수신 및 기록에 대한 마무리가 어느 정도 진행됐을 시기였다.
수정구 안의 천사들을 마주할 때면 언제나 조심스럽고 비굴해 보이기까지 했던 켈리가, 마치 거대한 거인으로 둔갑한 양 쇳소리로 기념비적인 천사어 첫 문장을 수신하기 시작했다.
"Ol sonuf vaoresaji, gohu IAD Balata"
(올 소누프 바오레사지, 고후 이아드 발라타)
이 에녹어를 해석하자면, 바로 다음과 같았다.
"정의로운 신께서 말씀하시길, 너희를 통치하노라."
충격적이게도, 천사어의 첫 문장은 '안녕'이나 '반갑다'는 인사가 아니었다.
첫 문장은 '지배'와 '심판'에 관한 선언이었다.
디는 문장을 받아 적으며 손을 떨 수밖에 없었다. 단순히 지식을 얻는 것이 아니라, 우주의 거대한 위계질서 속으로 강제로 편입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첫 문장에 이어 쏟아져 나온 메시지들은 가히 등골이 오싹할 만큼 묵시록적이었다.
'진노의 궁창 위에 높이 들린 권능으로, 지구의 구석구석을 밟고 서서"라는 식으로 이어지는 메시지는..
천사들이 인간의 수호자가 아니라 인간을 감시하고 심판하는 엄격한 지배자임을 강조했다.
켈리는 천사들이 에녹어에 대해 '이 소리는 죽은 자를 깨우고, 살아있는 자의 영혼을 육체에서 분리할 수 있는 진동을 담고 있다'라며 경고했다고 전했다. 이에 디는 에녹어를 발음하는 것조차 조심스러워하며, 매번 세션 전후로 정화 의식을 치러야만 했다.
에녹어는 무작위적인 소리를 지닌 게 아니었다.
켈리가 뱉은 문장들에는 특유의 운율과 강세가 있었다. 예컨대, 'Z' 발음을 강조하거나 모음을 길게 빼는 방식이 그랬다.
디는 언어학자이기도 했기에, 이 정교한 리듬을 듣고서 인간이 즉석에서 지어낼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라고 확신했다.
이 기념비적인 세션이 있던 날, 디는 일기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서재의 온도가 급격히 떨어졌으며, 켈리의 눈은 초점을 잃고 수정구 안의 빛을 반사하며 기괴하게 빛났다."
다시 과거로 돌아와..
1582년 여름.
이 무렵엔 우리엘을 비롯한 천사들이 단순한 예언성 메시지를 넘어 이 세상을 통치하는 '천상 정부의 조직도'를 하달하기 시작한다.
이것이 바로, <헵타르키아 미스티카(신비한 7인 통치)>이다. 햅타르키아는 그리스어로 7인 통치를 의미한다. 천사들은 이 세상을 7개의 요일과 7개의 구역으로 나누어 관리한다고 설명했다.
구조는 이러했다.
천사들은 요일별 및 시간별로 지구의 특정 구역과 인간의 운명을 다스리는 영적인 왕과 왕자, 장관들의 이름을 알려줬다.
7명의 왕은 각 요일을 주관하며 지상의 큰 사건(전쟁, 질병, 왕조의 몰락 등)을 결정한다.
7명의 왕자는 왕을 보좌하며 구체적인 실무(날씨, 풍요, 인간의 마음 등)를 집행한다.
42명의 장관은 각 왕자 아래 6명씩 배치돼 실제 지상의 현상들을 물리적으로 조절한다.
켈리는 이들 한 명 한 명의 이름, 외모, 성격, 그리고 그들이 부리는 하급 영들의 숫자까지 아주 정밀한 계보도를 읊었다.
켈리는 각 천사에게 명령을 내릴 때 필요한 개인 서명(인장)이 존재한다고 전해왔다. 그는 허공에 천사가 기괴한 문양을 그리고 있다고 말하며 이를 디에게 받아 그리게 했다. 이 인장들은 나중에 디가 천사들을 소환할 때 반드시 필요한 비밀번호 역할을 했다.
한편..
수학자이자 행정가였던 디는 이 완벽한 체계에 역시나 전율했다.
그는 자신이 우주라는 거대한 기계의 이른바 운영 매뉴얼을 손에 넣었노라 믿었다.
또한..
이 헵타르키아를 통해 자신이 현세의 영국 엘리자베스 1세 치하에서 그러하듯, 이 영적인 세상에서 천상의 왕국을 관리하는 일종의 행정관이 됐다는 엄청난 자부심을 갖게 된다.
천상의 관료 조직도를 완성하기까지 비단 순탄하기만 했던 것은 아니다.
완성으로 향하는 길목에서 켈리는 주기적으로 수정구 속 천사들의 비전을 보고 전달하는 안테나 역할에 힘겨워하며 짐을 싸곤 했다. 너무도 성스러운 천사들의 빛으로 인해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는 것.
그때마다 50대 중반의 석학은 20대 후반의 젊은이에게 하소연하며 때로는 무릎을 꿇고서 호소할 정도였다.
하여..
디는 켈리의 연봉을 당시 대학 교수의 연봉보다도 높은 수준으로 책정하기에 이르렀으며, 세션 중간중간 발생하는 켈리의 히스테리를 모두 감수했다.
1583년 초까지 무려 117,649자의 에녹어 문자가 기록됐다. (49x49 격자로 이뤄진 49페이지, 49x49x49=117.649)
그리고..
이제 디와 켈리의 무대는 런던의 작은 서재 몰트레이크를 넘어, 전 유럽을 광기로 몰아넣을 거대한 유랑극으로 확장된다.
이러한 전환점의 중심에는 탐욕과 허영으로 충만한 한 폴란드 귀족이 등장한다.
1583년 3월.
폴란드의 유력 귀족인 알베르투스 라스키가 엘리자베스 1세의 궁정에 나타난다.
그는 시에라츠의 팔라틴이라는 화려한 작위를 지녔으나, 실지론 방탕한 생활로 재산을 탕진하고 도피처를 찾던 야심가였다.
라스키는 연금술을 통해 자신의 빈 금고를 채워줄 마법사를 찾고 있었다.
한편..
1583년 5월 28일.
늘상 장엄하고 위압적이었던 디의 서재 분위기가 완전히 뒤바뀌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전까지 수정구 속에서 나타나던 천사들은 주로 불타는 칼을 들거나 화려한 관을 쓴, 인간이 감히 쳐다보기 힘든 권능적이고 권위적인 존재들이었다.
허나, 이날 수정구 안에는 전혀 다른 존재가 모습을 드러낸다.
바로, 마디미라고 불리는 어린 소녀의 영체였다.
켈리는 수정구를 들여다보다가 평소와 달리 당혹스러운 목소리로 보고해 왔다. 구슬 안에서 나타난 것은 대천사가 아니라, 7세에서 9세 정도로 보이는 아주 영리하고 귀여운 소녀였다.
마디미는 무지갯빛이 감도는 얇은 옷을 입고 있었으며 머리카락은 길게 땋아 내린 모습이었다. 아이는 수정구 안에서 장난스럽게 웃으며 디를 향해 손을 흔들어 보였다.
마디미는 이전의 천사들처럼 장엄한 선언을 하지 않았으며, 어린아이 특유의 천진난만한 말투로 디에게 말을 걸어왔다.
디는 당대 최고의 지성이었기에 논리적인 면모에는 강했을지 모르나 정서적 유대에는 무력했다.
마디미는 디의 학문적 연구보다 그의 사생활에 더 관심을 보였다. '사모님(제인 디)이 지금 우울해하니 가서 위로해 주시는 게 어때요?', '아이들은 잘 자라고 있나요?' 같은 질문을 던져왔다.
언제나 냉엄한 천사들 앞에서 긴장해야만 했던 디는 마디미의 등장에 무장해제가 돼버렸다.
그렇게..
디는 마디미를 영적인 존재를 넘어, 마치 자신의 딸이나 손녀처럼 아끼기 시작했다. 디는 일기에 마디미를 '나의 작고 사랑스러운 친구'라고 표현하며 깊은 애정을 드러냈다.
마디미는 단순히 한 번 나타나고 사라진 존재가 아니었다.
이후 마디미는 디와 켈리가 유럽 대륙을 방랑하는 수년 동안 거의 매일 세션에 등장할 정도였다.
마디미는 에녹어 체계의 복잡한 부분을 설명하기도 하고, 때로는 두 남자의 싸움을 말리기도 하는 등 사실상 '제3의 멤버'로 자리 잡았다.
이 마디미가 훗날 디를 파멸적인 결단으로 이끄는 소식을 전하리라곤 디는 당연히 알 리가 없었다.
다시 돌아와..
폴란드의 유력 귀족 라스키는 유럽 최고의 학자로 명성이 높던 디를 방문했고, 디는 이 화려한 귀족의 방문에 고무됐다.
한편..
켈리는 라스키를 위해 특별한 세션을 준비한다.
그렇게..
수정구 속에 나타난 천사(마디미 등)들은 라스키를 향해 파격적인 예언을 쏟아낸다.
"그대는 폴란드의 왕이 될 것이며, 지상의 모든 왕 중 가장 위대한 자가 될 것이다."
왕이 된다는 말에 눈이 먼 라스키는 디와 켈리를 자신의 영지로 초대하겠다고 약속하며, 그들의 연구비와 여비를 전액 지원하기로 한다.
1583년 9월 21일.
디는 켈리와 함께 가족들을 데리고서 영국을 떠난다. (디는 아내와 어린 자녀들, 켈리는 아내를)
이와 맞물려..
여왕의 총애를 받던 디였으나, 그건 어디까지나 궁정 안에서나 유효한 것이었다. 당시 1580년대 영국은 종교적 광풍과 마녀사냥의 전조가 감돌던 시기. 따라서, 디가 켈리와 매일마다 수정구를 들여다보며 알 수 없는 소리들을 내뱉는다는 소문은 인근 주민들에게 있어 공포 그 자체였다.
하여, 장본인인 디가 영국을 떠나자 그가 도피했다는 식으로 소문이 퍼지면서 평소 디를 시기하거나 못마땅하게 여기던 지역 유력자들 및 흉흉한 소문에 휩싸인 주민들이 주인 없는 마법사의 소굴을 정화의 대상으로 삼은 것.
그들이 떠난 직후, 종교적 광풍과 마녀사냥의 전조에 힘입어 군중이 저택에 돌을 던지다시피 했다.
문제는..
디의 채권자였던 이들이 4,000권의 장서 및 관측 장비 대부분을 조직적으로 처분했던 것. 그리고 여기엔 한때 디와 지식을 나누었던 동료 및 조수들이 횡령을 자행했던 것도 더해졌다.
사실..
디에게 있어서도 이번 여행(?)은 도피성에 가까웠다.
디는 몰트레이크 저택을 유지하고 켈리에게 고액의 연봉을 주느라 이미 영국 내에서는 더 이상 자금을 융통할 곳이 없을 정도였다.
또한 이들의 강신술 실험은 당시 마법 금지법에 저촉될 위험이 컸으며, 런던의 관리들이 이들의 세션에 의구심을 품기 시작했으므로, 디는 자신의 일생일대 연구를 지키고자 영국이라는 법적 테두리를 벗어나야만 했다.
여기서 폴란드 귀족 라스키가 치외법권적 신분과 무제한 지원을 약속했던 것이다.
그렇게..
디는 자신의 생명과도 같았던 도서관이 파괴되는 줄도 모른 채, 켈리가 선언한 '천상의 왕국'을 향해 바다를 건넌다.
이들의 여정은 네덜란드를 거쳐 독일, 그리고 폴란드로 이어졌다.
허나, 현실은 천사들의 예언처럼 화려하지가 않았다.
폴란드에 도착했을 때, 라스키의 재정 상태는 이미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왕이 되게 해주겠다던 천사들의 약속이 지체되면서 라스키는 점점 초조해졌다.
그처럼 자금줄이 말라가면서..
켈리의 시선은 당대 유럽에서 가장 강력하고 신비주의에 미쳐 있던 인물,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루돌프 2세에게로 향한다. 루돌프 2세는 전 유럽에서 연금술과 오컬트에 가장 많은 돈을 쏟아붓는 인물로 유명했기 때문.
그렇게 1584년.
디와 켈리는 연금술과 마법의 수도라 불리는 체코 프라하로 향한다.
당시 루돌프 2세는 복잡한 정치적 암투와 종교 갈등이 가득했던 빈을 떠나, 1583년경 제국의 수도를 프라하로 천도한 상황이었다.
또 연금술과 점성술에 집착하던 루돌프 2세가 이곳 프라하를 전 유럽의 석학, 화가, 연금술사들이 모여드는 지식의 성지로 만들었다.
1584년 8월.
디와 켈리 일행은 드디어 '마법의 수도' 프라하에 입성한다.
말했듯..
당시 프라하는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루돌프 2세가 빈을 버리고 천도한 상태였고, 성 안에는 전 유럽에서 몰려든 연금술사, 점성술사들이 황제의 금고를 노리며 북적대고 있었다. 아, 협잡꾼들도.
한편..
프라하의 시작은 둘의 기대만큼 장밋빛은 아니었다.
디는 '황제는 설교를 원하지 않는다'는 동서고금의 원칙을 망각했던 것 같다.
1584년 9월 3일, 디는 마침내 루돌프 2세와의 단독 접견 기회를 얻는다. 디는 자신의 평생 역작인 에녹어 기록과 천사들의 메시지를 황제에게 전한다.
허나..
루돌프 2세는 디의 장황한 설교에 금방 싫증을 느꼈다.
황제가 원한 것은 복잡한 천사의 언어나 영적인 구원이 아니었다. 그는 당장 자신의 말라가는 국고를 채워줄 실질적인 황금을 원했다.
디는 너무나 학자적이었고, 너무도 진지했다. 첫 접견 이후 황제는 디를 멀리하기 시작하면서 디의 입지는 순식간에 좁아진다.
반면..
켈리는 상황을 빠르게 직시했다.
켈리는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황제처럼 물질적인 결과물을 원하는 사람에게 수정구 속의 환영이나 에녹어 알파벳 따위는 통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켈리는 노선을 갈아탄다. 그는 더는 영매로만 남지 않았다. 그는 스스로를 '현자의 돌을 소유한 연금술 마스터'로 포장하기 시작한다.
그렇게..
켈리는 비장의 무기인 '성 던스턴의 가루'를 꺼내 든다.
그리고 그것이 실제로 납을 금으로 바꿀 수 있는 기적의 연금술 물질이라고 선전하며 프라하 사교계를 흔들어놓는다.
켈리의 가장 소름 끼치는 퍼포먼스는 황제의 신하들과 귀족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벌어졌다. 그는 이른바 투사라고 불리는 연금술 시연을 감행한다.
도가니에 납을 넣고 끓이다가, 자신이 가져온 신비한 붉은 가루를 아주 조금 집어넣는다. 잠시 후, 도가니 안의 납은 찬란한 빛을 내뿜으며 순금으로 변해 있었다.
이는 신비주의에 굶주려 있던 프라하 귀족들에게 신의 기적과도 같았다. 이 시연 한 번으로 켈리의 명성이 프라하 전체를 뒤덮었고, 동시에 황제 루돌프 2세는 켈리에게 완전히 매료된다.
그렇게 두 남자의 권력관계는 엇갈리게 된다.
그러니까, 디와 켈리 말이다.
켈리는 황제로부터 보헤미아의 귀족 작위를 수여받아 '에드워드 켈리 경'이 된다. 그는 프라하 중심가에 화려한 저택을 구입하고 하인들을 거느리며 황제의 측근으로 군림한다.
반면..
한때 켈리의 고용주였던 디는 이제 켈리의 화려한 그림자에 가려진 채 '이상한 노인' 취급을 받는다.
사실..
첫 세션 직후 피고용자였던 디가 이후 서서히 심리적 우위를 다져가며 실질적인 갑을 관계에서 갑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지만.
여하튼지건..
이제 켈리는 완벽하게 디를 밟고 올라선 갑의 위치였고, 디는 그저 일생일대의 연구를 잃지 않고자 그러한 수모를 모두 견뎌낸다.
한편..
프라하의 화려함 속에 정착한 듯 보인 디와 켈리들은, 하지만 금을 무제한으로 생산해 낼 것을 압박하는 황제로 인해 서서히 파멸의 문턱으로 향하게 된다.
1584년 가을, 프라하성에서 성공시킨 투사(연금술 시연)는 켈리에게 영광인 동시에 거대한 족쇄가 됐다. 황제 루돌프 2세는 이제 켈리를 아예 성안에 가둬두다시피 하며 무제한으로 금을 찍어내길 원했으니까.
허나. 켈리는 당황하지 않고서 기가 막힌 방어 기제를 가동한다.
그건 바로, 가루는 유한하지만 비법은 무한합니다요.
켈리는 황제에게 아주 그럴듯한 해명을 내놓는다. 자신이 가진 '성 던스턴의 붉은 가루'는 과거의 성유물인지라 양이 정해져 있으며, 이것을 다 써버리면 더는 금을 만들 수 없다는 논지였다.
그는 황제에게 제안한다. 당장 금 몇 덩이를 만드는 것보다 이 가루 자체를 직접 제조하는 비법을 알아내야 한다고. 그러기 위해선 천사들이 전해주는 에녹어 데이터의 완전한 해독이 먼저라고.
즉, 연금술의 물리적 한계를 정신적&영적 과제로 치환시킨 것. 덕분에 켈리는 다시금 실험실과 수정구 앞에서 몇 달을 벌 수 있는 명분을 얻는다.
1585년.
프라하에서의 압박이 심해지자, 켈리는 잠시 숨을 고르기 위해 디를 설득해 다시 폴란드의 크라쿠프로 향한다. 여전히 왕이 되겠다는 꿈에 부풀어 있던 라스키의 초대를 이용한 거다.
여기서 켈리는 라스키의 마지막 재산까지 소진해 가며 시간을 보낸다.
결국 라스키가 파산하다시피 하며 폴란드 국왕 스테판 바토리마저 이들의 천사 세션에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자, 켈리는 1585년 말 다시 프라하로 복귀한다.
복귀한 켈리는 황제에게 폴란드에서 중요한 연금술적 단서를 찾아왔다고 해명하며 자신의 입지를 재확인한다.
이 시기 켈리가 신용 보증서로 전면에 내세운 건 다름 아닌 디였다.
황제가 켈리를 의심하려 할 때마다, 켈리는 디의 학문적 권위를 앞세웠다. 유럽 최고의 석학인 디가 켈리의 조수 노릇을 하며 에녹어를 받아 적고 있으니, 황제 입장에서도 저 위대한 학자가 저러고 있는 합리적인 이유가 있겠거니 여긴 것.
디는 역시나 켈리가 세션마다 내놓는 계시의 전언을 일일이 기록했다. 더불어 켈리는 실험실에서 연기를 피우며 무언가 시약을 만들어댔고, 디는 그 옆에서 기도를 올리는 기묘하고도 위태로운 동거가 1년 넘게 이어졌다.
1586년 봄.
허나 황제의 인내심에는 단연코 한계가 있는 법.
1586년에 들어서자 루돌프 2세의 인내심은 바닥을 드러내고, 더는 에녹어를 연구해야 한다는 말로는 황제의 탐욕을 막을 수 없게 된 시점.
설상가상..
디와 켈리의 악명이 로마 본토에까지 전해지며 교황의 사절인 필리포 세가가 루돌프 2세를 강하게 압박했다. 마법 행위를 일삼는 둘을 추방하지 않으면 황제 역시 이단으로 간주하겠다는 경고와 함께.
결국 1586년 5월, 루돌프 2세는 마지못해 디와 켈리에게 추방령을 내린다.
한때 황제의 총아였던 둘은 순식간에 떠돌이 신세로 전락해 프라하를 탈출한다. 이때의 공포는 디에게 트라우마가 됐고, 그는 더욱더 켈리의 천사 메시지에 매달리게 된다. 오직 신만이 자신들을 지켜줄 수 있다고 믿었으니까.
이런 둘을 거둬준 건, 보헤미아의 실권자이자 대부호인 빌렘 로좀베르크였다. 그는 황제의 추방령을 교묘히 피해 자신의 영지인 트르제본 성에 이들을 숨겨준다.
로좀베르크 역시 목적은 하나였다. 켈리가 가진 연금술 황금 제조법.
그는 둘에게 성의 방 하나를 통째로 내어주고는 실험에 필요한 모든 막대한 비용을 지원한다. 이곳에서 디와 켈리 가문은 다시금 안정을 찾는 듯 보였다.
트르제본 성에서 켈리는 더 이상 디의 '눈치'를 보지 않았다.
그는 이제 황제와 귀족들이 직접 찾는 인플루언서 연금술사였다. 켈리는 실험실에 틀어박혀 연금술에만 몰두했고, 디가 요청하는 천사 세션을 번거로운 방해물로 여기기 시작했다.
이 시기 디는 처지가 비참할 정도로 켈리에게 매달린다. 켈리가 세션을 거부할 적마다 디는 일기에 켈리가 다시 마음을 돌려 천사의 목소리를 들려주길 간곡히 기도했다고 적을 정도.
그렇게, 디는 심리적으로 완전히 고립된 상태였다. 신과 단절된, 그런.
1587년 초.
켈리는 막다른 길에 몰린다. 로좀베르크는 물론이고 저 멀리 황제 루돌프 2세 역시 '이론은 그만! 진짜 금을 대량으로 내놓을 것'이라며 독촉해 왔다.
따라서..
켈리는 이 상황을 타개할 강력한 충격 요법이 필요했다.
그런 긴장감이 팽팽하던 1587년 4월..
그 기괴한 '아내 공유' 명령이 수정구에서 튀어나오게 된다.
1587년 4월 18일.
보헤미아의 트르제본 성, 연금술 실험과 천사 세션이 한계에 다다랐을 무렵.
켈리는 수정구를 들여다보다가 몸을 떨며 자리에 주저앉는다. 그는 사색이 된 얼굴로 디에게 천사의 새로운 명령을 전한다. 그동안 디를 '사랑스러운 친구'라 부르며 살가웠던 소녀 영체 마디미가 믿을 수 없는 부도덕한 지시를 내린 것이다.
마디미가 내린 명령은 짧고 단호했다. 대천사 우리엘과 상위 천사들의 결정은 이미 내려졌다고.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라."
처음에 디는 이 말을 듣고 재산이나 지식을 나누라는 뜻으로 이해하려 애썼다.
허나..
켈리는 잔인할 정도로 명확하게 쐐기를 박았다.
천사가 말하는 '모든 것'에는 두 사람의 아내까지 포함 있다는 것.
즉, 디와 켈리가 서로의 아내를 교환해 잠자리를 함께하라는..
당시 기독교 사회에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아내 공유 명령이었다.
디는 이 명령을 듣고 말 그대로 무너져 내린다. 그의 일기에는 당시의 처참한 심경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그는 영혼을 칼로 찌르는 것과 같다고 울부짖으면서도 명령을 거부할 수가 없었다.
만약 여기서 천사의 말을 거역한다면, 지난 5년간 자신이 신성시하며 기록해 온 에녹어와 천사들의 모든 메시지가 '악마의 속임수'이거나 '사기'였음을 자인하는 꼴이 되기 때문.
가장 큰 비극은 디의 아내 제인이었다. 소식을 들은 제인은 격렬하게 분노하며 울부짖었다. 그녀는 켈리를 향해 당신은 천사가 아니라 악마의 목소리를 듣는 것이라며 저주를 퍼부었다.
허나, 켈리는 흔들리지 않았다. 오히려 이것은 신의 시험이며, 거부할 경우 우리 모두가 신의 불벼락을 맞을 것이라며 공포 분위기를 조성했다.
결국, 남편의 광기 어린 신념에 평생을 헌신했던 제인은 피눈물을 흘리며 이 끔찍한 제안을 수용하기로 한다.
디는 다음과 같은 문구를 기록으로 남겼다.
"우리는 천사의 명령에 순종하여 기독교적 사랑 안에서 모든 것을 공유하기로 했다."
1587년 5월 22일.
결국 두 남자는 서약서를 작성하기에 이른다. 존 디와 제인 디, 그리고 에드워드 켈리와 그의 아내 조안나 켈리는 '성스러운 결합'을 약속하는 문서에 서명하고 실제로 잠자리를 교환한다.
이 사건 직후, 수정구 속의 천사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침묵에 빠진다.
켈리는 해당 사건을 기점으로 디와의 영매 세션을 사실상 중단해 버린다.
그렇게..
이 기괴한 '성적 의식'은 두 사람의 파트너십에 종결을 고하게 된다.
켈리는 이제 거추장스러운 노학자 디를 버리고 홀로 황제 루돌프 2세의 총애를 독차지하기 위해 프라하로 떠날 준비를 마친다. 반면, 영혼이 파괴된 디는 가족들을 데리고 쓸쓸히 영국으로 돌아갈 준비를 시작한다.
한때 우주의 진리를 함께 탐구하던 동반자들은, 인류 신비주의 역사상 가장 추잡한 얼룩을 남긴 채 각자의 파멸을 향해 흩어지게 된다.
그렇다.
켈리의 목적은, 디가 스스로의 평생의 역작을 부정할 수 없다는 약점을 정확히 파고들어 종교적 신념을 인질로 잡고는 최악의 패륜을 강요한 것이다.
그렇다.
최종적으로 켈리의 목적은, 디가 더는 견디지 못하고서 떠나게 만드는 것에 있었던 것이다.
(디는 이전 두 차례의 결혼에서 얻은 두 아내를 모두 병으로 떠나보냄, 세 번째 아내인 제인은 30살 가까이 연하였음. 켈리는 아내에 대한 애정이 별반 없어 부부 관계는 냉랭했던 반면, 디는 아내와 깊이 사랑하고 있었음)
1587년 5월의 공유로부터 9개월..
디의 아내 제인은 사내아이를 출산한다.
디는 이 아이가 누구의 자식인지에 대해 엄청난 심리적 갈등과 불안을 지니면서도 세례와 함께 자신의 아들로 키우게 된다.
한편..
1589년 11월.
디는 마침내 고향 영국의 몰트레이크 저택으로 돌아온다.
6년 전, 천사들이 약속한 우주의 진리를 찾아 가족을 이끌고 떠났던 당당한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그의 곁에는 지칠 대로 지친 아내 제인과 아이들, 그리고 실패한 마법사라는 꼬리표만이 남아 있었다.
집에 돌아온 디를 맞이한 건 처참한 폐허였다. 앞서 언급했듯, 그가 자리를 비운 사이 그의 장서와 관측 장비 대부분이 그야말로 털리다시피 했기 때문. 그렇게 유럽 최고의 도서관을 자부하던 그의 지식 제국은 그렇게 가루로 사라졌다.
디는 곧장 자신의 유일한 희망이었던 엘리자베스 1세를 찾아간다. 여왕은 예전처럼 그를 친절하게 대했지만, 예전 같은 전폭적인 지원은 없었다. (이후 디의 말년에 즉위한 제임스 1세는, 마녀사냥에 적극적이었기에 디를 처분해야 할 마법사 정도로만 취급함)
시대가 변해 있었다.
이제 세상은 신비주의나 천사의 목소리가 아닌, 경험론과 실용적인 과학의 시대로 넘어가고 있었다. 한때 여왕의 눈과 귀였던 007, 존 디는 이제 궁정의 장식품 같은 '한물간 노학자' 취급을 받게 된다.
디는 가난을 면하고자 끊임없이 관직을 청원했고, 결국 1595년이 되어서야 맨체스터의 그리스도 대학 학장 자리를 얻어 유배와도 같은 길을 떠난다.
맨체스터에서의 생활은 비참했다.
대학의 동료들은 악마를 부리는 마법사가 왔다며 그를 대놓고 멸시했고, 디는 그들과의 소송과 갈등에 시달려야 했다. (교수들은 엄격한 청교도 세력이었으며 디와의 행정 업무 및 대학 자산 관리 등에 대한 법적 시비가 걸림, 디의 마지막 재산은 이 지리한 법정 싸움 과정에서 소진됨)
1605년.
설상가상으로, 맨체스터에 흑사병이 닥치면서 그의 남은 정신적 지주였던 아내 제인이 세상을 떠난다.
켈리의 온갖 무리수와 이어진 방랑의 고통을 묵묵히 견뎌줬던 아내마저 사라지자 디의 세계는 완전히 무너져 내린다. 그는 결국 학장직을 사임하고서 다시 몰트레이크의 빈 서재로 돌아온다.
노년의 디는 지독한 빈곤에 시달린다. 당장 먹을 빵을 사기 위해 그나마 남아 있던 소중한 책들을 한 권씩 중고 시장에 내다 팔 정도였다.
한때 천사들과 대화하며 우주의 비밀을 논하던 위대한 마법사..
그런 디는 이제 동네 사람들에게 점을 쳐주거나 잃어버린 물건을 찾아주며 푼돈을 받는 늙은 점술가로 전락했다.
1608년 12월(혹은 1609년 초).
디는 몰트레이크의 저택 침대 위에서 81세의 나이로 숨을 거둔다. 그가 끝내 애지중지하던 수정구슬과 켈리와 함께 작성했던 누런 양피지 뭉치들이 끝끝내 그의 곁을 차지하고 있었다. (흑사병 당시 상당수의 자녀가 목숨을 잃었으며, 장남은 주치의로 성공하며 해외에 나가 있었고, 끝까지 곁을 지켰던 딸 역시 경제적으로 빈궁했음)
디는 죽는 순간까지도 자신이 천사들과 나누었던 대화가 진실이었다고 믿었을까?
아니면..
켈리라는 난폭한 파도에 휩쓸려 허상을 좇았던 자신의 삶을 후회했을까?
디의 사후..
그가 남긴 방대한 기록들은 누군가의 서랍 속에서 수십 년간 잠들었다가..
훗날, '에녹 마법'이라는 이름으로 부활하며 그를 신비주의의 영원한 전설로 만든다.
자!
존 디가 가족들을 데리고 영국으로 떠난 1589년.
에드워드 켈리는 마침내 거추장스럽게 여기던 노학자의 그림자에서 벗어나 인생의 단독 주연으로 올라선다. 그는 이제 수정구 옆에서 헛소리를 전달하는 영매가 아니라, 전 유럽이 주목하는 황금 제조기이자 마스터 연금술사였다.
1589년에서 1591년 사이.
이 무렵 켈리는 인생 최고의 전성기를 누린다.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루돌프 2세는 켈리에게 기사 작위를 수여했고, 그는 Sir 에드워드 켈리이자 보헤미아의 남작이 됐다.
켈리는 프라하 중심가에 있는 화려한 저택(현재 파우스트의 집으로 알려진 건물)에서 하인들을 거느리며 살았고, 매일 밤 귀족들과 연회를 즐기다시피 했다.
켈리는..
이제 자신이 정말로 신의 선택을 받은 연금술사라고 착각하기 시작했다.
허나, 그는 가장 중요한 사실 하나를 잊고 있었다. 자신의 곁에는 더 이상 이 연출극의 개연성을 부여해줄 존 디라는 방패가 없다는 사실을.
한편..
루돌프 2세는 예술과 과학을 사랑한 군주였지만 동시에 변덕스럽고 잔인한 고용주였다.
황제가 켈리에게 작위와 부를 쏟아부은 이유는 단 하나, 대량의 황금이었다. 켈리가 시연회에서 보여주던 설류 꼬리만 한 금덩어리가 아니라, 국고를 가득 채울 수천 킬로그램의 금이 필요했던 것이다.
황제의 압박이 거세지자 켈리는 다시 특기인 시간 벌기에 들어간다.
'수성(Mercury)의 기운이 좋지 않다', '시약이 아직 숙성되지 않았다'라는 등의 핑계를 댔지만, 더는 곁에서 '천사가 가라사대 조금 더 기다려야 한다더라'며 보증을 서줄 존 디가 없었다.
1591년 5월.
참다못한 루돌프 2세는 켈리를 전격 체포하기에 이른다.
그렇게 켈리는 프라하 근교의 험준한 크리보클라트 성에 갇히는 꼴이 된다.
황제는 켈리를 고문하는 대신 실험 기구들을 감옥으로 넣어주며 협박했다.
"너 금을 만들면 나가는 거고, 못 만들면 영영.. 여기서 죽는 거야."
켈리는 그곳에서 1년 넘게 연금술 실험을 연출하지만..
금은 나오지 않았다.
1592년 10월경, 켈리는 보헤미아의 거물 로좀베르크가 황제에게 청원하며 조건부로 풀려나 그의 영지에 머물게 된다. 그렇게 가택 연금 상태에서 연금술 연구를 지속하나 역시나 금은 나오지 않았다.
1595년, 황제의 궁정 관리와 시비가 붙어 결투 끝에 살해했다는 혐의로 체포되며 이번에는 더 끔찍한 흐네빈 성의 탑에 갇히게 된다.
그러던..
1597년 11월의 어느 차가운 밤..
켈리는 생애 마지막 도박을 준비한다.
그는 침대 시트를 찢어 밧줄을 만든 뒤, 탑의 창문을 통해 성벽 아래로 탈출을 시도한다.
허나, 켈리는 이미 중년의 나이에다 연회로 다져진 비대한 몸을 지닌 채였다. 내려가던 도중 시트가 몸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끊어졌고, 켈리는 수십 미터 아래 바닥으로 추락한다.
이 사고로 그는 다리와 골반이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으스러졌다.
기록에 따르면, 성의 경비병들에 의해 감옥으로 실려 간 켈리는 며칠 동안을 극심한 고통 속에서 신음하다가..
40대 초반의 나이로 비참하게 생을 마감한다.
일설에는 고통을 견디다 못해 황제가 자비의 명목으로 건넨 독약을 마시고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도 전해진다.
당대의 석학을 구렁텅이로 밀어 넣으며 사욕에 겨워하던 연금술사는..
자신의 서재와 실험실에 그저 산더미 같은 빚 서류와 정체불명의 화합물 찌꺼기만을 남긴 채였다.
자!
여기까지 읽으면서..
혹은 읽기 시작했을 때부터..
아마 많은 분께서 '켈리=능수능란한 협잡꾼, 디=사기에 대해 면역이 없는 노학자'로 바라봤을 것이다.
그리고..
그게 맞다.
디와 켈리가 진행한 천사들과의 세션은 엄청난 분량의 에녹어 기록문을 남겼다.
이 신의 암호로 다가갈 수 있는 천사의 언어 에녹어는..
그러나 단순한 재어휘화의 산물에 불과하다.
언어학자들에 의해 이 에녹어는 문법 구조와 통사론이 철저하게 16세기 영어를 따른다고 분석된다. 즉, 영어의 문법적 뼈대는 그대로 둔 채 생소한 어휘들만 그 위로 덮어씌운 정교한 인공 언어에 가깝다는 뜻.
SVO 구조가 일치한다는 말이다. 에녹어의 문장 성분 배열 순서는 영어와 똑같은 '주어-동사-목적어(SVO)' 구조를 지닌다. 고대어나 완전히 이질적인 새로운 언어라면 반드시 내포야 할 고유의 문법적 특성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전치사 활용 부분에 대한 것을 예로 들자면..
영어에서 '응시하다(look at)'처럼 특정 동사와 짝을 이루는 전치사 구조가 에녹어에서도 똑같이 나타난다. 진짜 고대어나 이계의 언어라면 전혀 다른 조어 원리를 지녀야 하는데, 켈리는 단어만 바꾸고 문장의 뼈대(기능어)는 영어식을 그대로 갖다 쓴 것.
관용구의 복제 역시 그렇다. 예컨대, 영어의 관용적 표현이나 전치사 활용 방식이 에녹어에서도 그대로 나타나고 있다. 이건 켈리가 영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는 사람으로서 무의식중에 자신의 언어 습관을 투영했다는 결정적인 증거에 해당하겠다.
음운론적 한계 또한 짚고 넘어갈 항목이다. 세션 중 수정구 속의 천사들이 내뱉는 언어는 모두 켈리의 발성 기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진짜 이계의 언어나 신의 언어라면, 인간의 발성 구조로는 내기 힘든 소리나 독특한 음운 체계가 존재해야 한다. 허나 에녹어는 놀라울 정도로 16세기 영국인이 발음하기 편한 소리들로만 구성돼 있다.
에녹어에는 'th' 발음이나 'w'처럼 영국인에게만 익숙한 발음이 가득하다. 만약 이게 범우주적인 신의 언어라서, 아랍어의 목구멍 깊은 소리나 아프리카 부시먼들의 클릭음(혀 차는 소리) 같은 다양한 소리가 섞여 있다면 이해가 갈 만도 하겠으나, 에녹어는 오직 '16세기 런던 사투리' 범주 안에서만 놀고 있다. 천사가 런던 토박이처럼 말한다는 사실 자체가 신빙성에 대한 역설을 하는 셈.
그러니까, 에녹어에는 영어에 없는 발음이 거의 없다. 켈리가 수정구를 보며 중얼거릴 때, 그는 단 한 번도 자신이 낼 수 없는 소리를 낸 적이 없다.
또한, 단어들의 음절 구조가 영어나 라틴어의 음절 결합 방식과 매우 유사하다. 이건 켈리가 당시 지식인으로서 접했던 라틴어와 모국어인 영어를 적당히 섞어 그럴듯한 소리를 만들어냈음을 시사하겠다.
에녹어에는 영어 화자가 발음하기 힘든 '성문 폐쇄음'이나 '치찰음'의 복잡한 조합이 거의 전무하다. 모든 단어는 16세기 영국인이 거세게 침을 튀기지 않고도 편하게 뱉을 수 있는 음운 구조를 지닌다. 이는 천사가 아니라 켈리의 조음 기관이 이 언어의 생물학적 한계를 결정했음을 방증한다.
켈리의 잔 스킬도 빛을 발한다(?).
켈리는 강력한 주문을 수신할 때면, 메시지를 뒤에서부터 거꾸로 부르며 백워드하곤 했다.
이에 대해 켈리는 천사의 언어가 너무 강력해서 바로 부르면 재앙이 온다는 식으로 설명했는데, 사실 이건 언어학적 실수를 감추기 위한 고도의 수법으로 보는게 옳을 것이다. 문장을 뒤에서부터 부르면 디가 실시간으로 영어 문장 구조와의 유사성을 눈치채기 훨씬 어려울 테니까.
언어학적 부분을 보다 깊이 파고들자면..
에녹어는 굉장히도 영어 중심적 포지션을 취하고 있다. 에녹어에는 영어의 'the'나 'a'에 해당하는 관사가 영어와 거의 흡사한 방식으로 존재한다. 허나 히브리어나 라틴어, 혹은 동양의 언어들만 보더라도 관사의 사용법은 영어와 완전히 차이가 있다. 심지어 많은 고대어에는 명사의 성별(남성형/여성형)에 따른 복잡한 변화가 존재하는데, 에녹어는 이런 복잡함을 쏙 빼놓고서 자기 편한 대로 영어의 문법적 편의성만 그대로 가져온 꼴이다.
어휘의 빈곤도 간단히 예시로 짚어보겠다.
에녹어에서 '하느님'을 뜻하는 'Iad'는 신을 뜻하는 히브리어 'Yah(야)' 또는 신의 권능을 뜻하는 'Yad(야드)'를 교묘히 변형한 것으로 보이며, 문장 내 문법적 위치는 영어의 'God'과 정확히 일치한다. 또한 '움직이다'를 뜻하는 'Zachar'는 영어의 명령어 'Move'와 문법적 기능이 100% 일치하며, 켈리가 평소 신비로워 보인다는 이유로 남발하고 선호하던 자음 'Z'로 시작한다.
가장 큰 맹점?
에녹어의 가장 큰 모순은 초기 기록과 후기 기록의 일관성이 떨어진다는 점이다.
1582년 초기에 나온 에녹어는 훨씬 더 단순하고 반복적 형태를 띠었으나, 시간이 지나고 켈리의 수법이 정교해질수록 단어와 문법이 조금씩 복잡해지며 변모해 간다.
진짜 신의 언어라면 시기에 따라 문법이 업그레이드될 하등의 이유가 없다. 이건 켈리가 세션을 진행해 나가며 점차 자신의 인공어를 다듬어 나갔다는 생생한 흔적에 해당하겠다.
결론적으로..
에녹어는 자연 발생한 언어가 아니라, 영어를 모태로 한 발명된 언어라는 것이 맞겠다.
J.R.R. 톨킨이 만든 요정어와 비슷한 성격이지만, 목적이 문학적 유희가 아닌 타인을 속이기 위한 도구였다는 점에서 명백한 차이가 있고 말이다.
여담으로..
켈리가 에녹어를 수신할 때 사용한 노란색 테이블(황금판)은 사실 훌륭한 난수 생성기였다!
세션 과정에서 켈리는 수많은 글자가 적힌 표(Grid)를 앞에 두고서, 천사가 시키는 대로 특정 좌표의 글자를 읽는 방식을 취했다.
이건 현대의 암호학에서도 쓰이는 표 치환 암호 방식에 해당하겠다.
켈리는 이 표를 이용해 즉흥적으로 말을 지어내야 하는 부담을 줄일 수 있었다. 미리 단어들을 표 안에 적당히 배치해 두고, 세션 중에는 '왼쪽에서 세 번째, 위에서 다섯 번째 글자!'라고 외치기만 하면 됐으니까.
말인즉슨, 켈리는 16세기에 이미 '수동형 텍스트 생성기'를 돌리고 있던 셈이다.
(물론, 당시 디의 서재에 있던 16세기 최고의 암호학 서적인 트리테미우스의 <스테가노그라피아> 사본에서 암호표 작성법을 차용 및 변형했다는 추정이 있음)
추가로..
켈리의 수법들을 깊게 따져 들고 보면..
그의 지식과 수법은 모두 당대의 암호학 관련 서적들 속 기술을 교묘하게 변주한 것에 해당한다.
또한..
에녹어의 시각적 형태는 인간의 뇌가 신비롭다고 느끼는 기하학적 황금비를 교묘하게 따르고 있다. 켈리가 의도했든 아니든, 그는 인간의 무의식이 거부감을 느끼지 않으면서도 경외감을 가질 만한 시각 기호 체계를 창조해 낸 천재적인(?) 디자이너였다고도 볼 수 있는 것.
그러니까, 에녹어는 가공된 신비가 원초적인 진실보다 강력한 시각적 잔상을 남긴 사례이기도 하겠다.
결론적으로, 여타 세기의 사기꾼들이 그러하듯 켈리 역시 자신의 밑천인 아이디어 수급을 위해 결코 게으름을 피우지 않던 것!
서막에서 짧게 언급했듯, 에드워드 켈리가 처음 존 디의 저택 문을 두드렸을 때..
그는 자신을 에드워드 탤벗으로 소개했다.
켈리와 관련해 항상 따라다니는 그럴듯한 풍문 하나가 있다.
그것은 바로, 켈리가 젊은 시절 문서 위조죄로 체포된 전과가 있다는 것. 당시 영국 법은 문서 위조범에게 매우 가혹했다. 켈리는 벌금을 내는 대신 귀 절단형을 선고받았다는 것이다.
이 형벌은 신체를 훼손과 더불어 사회적으로 '이 자는 사기꾼'이라며 낙인을 찍는 역할을 했다.
만약 켈리의 전과가 맞는다면, 그가 평생 긴 머리를 고수하거나 귀를 덮는 검은 벨벳모를 쓰고 다녔던 이유는 멋을 부리거나 어떠한 외향적 연출만을 위해서가 아니었을 것이다. 모자 밑으로 잘려 나가고 흉측하게 남은 귀의 흔적을 숨기고자 했던, 그의 사기 인생이 들통날 수 있는 치명적인 약점을 감추려던 것일 테다.
그는 자신의 이름을 탤벗에서 켈리로 바꾼다. 신분을 세탁한 그가 흘러 들어간 곳은 전설적인 아서 왕의 무덤이 있다고 알려진 글래스턴베리였다.
그는 이곳에서 자신의 인생을 바꿀 '성유물 아이템'을 조작해 낸다. 바로 글래스턴베리 수도원의 폐허에서 성 던스턴의 것이라고 주장하는 '신비한 가루'와 '연금술 양피지'를 발견했다는 시나리오였다. (최초 디에게는 노스윅 힐에 파묻힌 궤짝에서 발견했다고 설명)
이 물건들은 그가 위조범 시절의 실력을 발휘해 직접 제작했거나 어디선가 훔쳐 온 연금술 서적의 일부였을 가능성이 매우 크겠다. 여하튼 지건, 켈리에게 필요했던 건 물건의 진위가 아니라 사람들의 탐욕을 자극할 그럴듯한 스토리였다.
켈리는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순진한 학자(게다가 몹시고 갈구하는 상태의)인 디라면 자신의 위조된 양피지와 기괴한 연금술적 허풍을 철석같이 믿어주리란 사실을.
고문서 위조 전과가 있던 전문가 켈리는 고문서의 서체와 잉크의 질감을 수려하게 흉내 낼 수가 있었다. 그가 내민 성 던스턴의 양피지가 디 같은 고문서 전문가의 눈마저 속일 수 있었던 이유겠다.
더불어, 켈리는 상대방이 흔들릴 때 더 강하게 몰아붙이는 법을 알았다. 디가 의심을 품을 때마다 '천사가 당신의 불신에 분노한다'라며 역정을 낸 것은 전형적인 사기꾼의 가스라이팅 수법에 해당한다.
여기서 잠시..
당대의 특수 기술을 좀 소개하자면..
켈리는 시간의 질감을 입히고자 새 양피지를 약한 산성 용액(식초나 산성 과일즙)에 담갔다가 말리기를 반복했을 것이다. 이 과정에서 양피지는 특유의 누런빛을 띠며 딱딱하게 굳고 가장자리가 자연스럽게 갈라진다.
손때가 탄 느낌을 주기 위해 램프의 그을음과 동물성 기름을 섞어 문지르기도 했을 것이다. 특히나 사람들이 자주 넘겼을 법한 모서리 부분에 집중적으로 배치해 자연스러운 세월의 흔적을 연출했을 것이다.
고문서 특유의 퀴퀴한 냄새를 내기 위해 곰팡이가 핀 지하실이나 습한 가죽 보관소에 며칠간 방치했을 수 있다. 디가 코를 가까이 댔을 때 느껴질 그 역사의 냄새를 위해서 말이다.
또 당시 쓰이던 잉크는 시간이 지나면 검은색에서 갈색으로 변하는데, 켈리는 잉크에 녹슨 철가루를 섞어 의도적으로 갈색빛이 도는 오래된 잉크를 만들어냈을 것이다.
팔림프세스트 수법도 동원됐을 것이다. 아예 가치가 낮은 실제 고문서를 구해서 글자만 긁어낸 뒤, 그 위에 성 던스턴의 비법을 덮어쓰는 식으로 말이다. 양피지 자체는 진짜 고대 유물이니 디가 재질을 검사해도 통과할 수밖에 없었을 것.
어찌하여 성 던스턴이었을까?
성 던스턴은 금세공인의 수호성인이자 연금술적 전설이 깃든 인물이었다. 켈리는 이 전설적인 인물을 끌어들여 자신의 사기극에 역사적&종교적 정당성을 부여할 수가 있었다.
그렇다면 연금술을 가능케 하는 신비한 가루는?
성 던스턴의 가루라던 붉은 가루는 켈리가 주장하는 연금술의 핵심이었다.
아마 이 붉은 가루는 산화수은(Red Mercury Oxide)이 가장 유력한 후보일 것이다. 이 물질은 선명한 붉은색을 띠며, 열을 가하면 산소를 내뿜고 은빛 수은으로 변하는 드라마틱한 연출적 화학 그리고 이러한 컬러 변화는 당시의 사람들에게 있어 마치 물질의 영혼이 바뀌는 과정으로 인식되기 충분했을 것이다.
단순히 산화철(녹)에다 아주 미세한 금가루를 섞어 붉은색으로 만든 것일 수도 있겠다.
여하튼 지건, 켈리는 해당 가루를 '투사(Projection)'라고 불렀는데..
이는 아주 적은 양으로도 거대한 변화를 일으킨다는 심리적 공포와 경외심을 자극하는 용어 설정이었다.
이번엔 그가 실지로 황제 앞에서 시연했다던 연금술(금 생성)을 짚어볼까?
켈리는 현대 화학의 관점에서 보면 아말감법을 아주 잘 이해하고 있었을 것이다.
수은에 금을 녹여 만든 아말감을 사용하면 금이 수은 속에 감춰져 보이지 않는다. 이를 도가니에 넣고 가열하면 수은은 기화해 사라지고 순금만 남게 된다. (켈리의 실험실은 늘상 기묘한 연기와 냄새로 가득했다고 전해지는데, 이러한 산화수은의 수은 증기는 구경꾼들에게 신비로운 현기증을 제공했을 것)
또한, 은에 금을 아주 얇게 입히는 도금 기술 내지는 특정 산성 용액을 사용해 금속의 표면 색상만 바꾸는 기술을 동원해 구경꾼들을 현혹했을 가능성도 있다.
켈리가 사용한 가장 고전적이고 치명적인 도구는 바로 '속이 빈 젓는 막대'라 할 수 있겠다.
트릭의 원리는 간단하다.
철이나 나무로 된 막대의 내부를 비우고서, 그 안에 미세한 금가루를 채운 뒤, 끝을 검은색 밀랍이나 재로 봉인한다. 납이 끓고 있는 도가니를 이 막대로 저으면, 열에 의해 밀랍이 녹으면서 안의 금가루가 자연스레 용액 속으로 섞여 들어간다.
구경꾼들은 막대가 휘저어지는 동안 시커먼 납물이 찬란한 금빛으로 변하는 시각적 기적을 목격하게 된다.
또, 켈리는 이중 바닥 도가니 방식을 사용하기도 했을 것이다. 도가니 바닥에 미리 진짜 금을 깔아두고서, 그 위를 타르나 검은 가루로 덮어 위장한 뒤, 열을 가해 윗부분의 납이 녹으면 자연스럽게 아래의 금과 섞이게 하는 수법이다.
이렇듯..
마술에서 변환 마술의 일종으로 즐겨 사용되던 트릭들을 연금술 연출에 악용하던 이는 비단 켈리뿐만이 아니었다.
켈리가 죽고 난 뒤..
그가 연금술로 창조했다는 금들은 어떻게 됐을까?
놀랍게도, 일부 샘플은 역사 속 과학자들의 손에 넘어가 정밀 분석을 거쳤다고 전해진다.
먼저, 근대 화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로버트 보일의 분석이다.
그는 지독한 연금술 마니아로,켈리가 남긴 흔적을 추적한 끝에 어느 정체불명의 공급자로부터 켈리가 만들었다고 주장되는 황금 샘플 하나를 입수해 직접 실험을 진행했단다.
분석 결과, 일반적인 금보다 밀도가 낮고 가열했을 때 기묘한 불순물이 섞여 나오는 것을 발견한다. 허나 당시 기술로는 성분을 완전히 분해하지 못했고, 따라서 보일은 죽을 때까지 정말 연금술로 만들어진 특수한 금일지도 모른다는 미련을 버리지 못한다.
다음으로, 켈리의 샘플은 아니지만..
20세기에 들어서며 연금술사들이 남긴 샘플들을 현대 과학이 다시 분석하기 시작했는데, 켈리의 방식과 유사한 샘플들에서 발견된 정체는 다음과 같았다.
구리와 금의 합금을 산성 용액에 담그면 표면의 구리만 녹아 나가고 금 성분만 겉에 남게 된 샘플. 겉보기엔 24K 순금처럼 보이지만, 속을 잘라보면 저급한 합금인 상태였다. 켈리가 시연 때 보여준 금들이 대부분 얇은 판이나 작은 조각이었던 이유와도 상충하겠다.
또 금, 은, 구리를 교묘하게 섞어 만든 합금 샘플도 존재한다. 색깔과 무게가 금과 매우 흡사해서 전문가들도 손으로 들어봐서는 알 수 없을 정도. 켈리나 여타 연금술 연출자들은 바로 이러한 합금을 미리 준비해 뒀다가, 도가니 속에서 납이 녹는 순간 아말감 트릭을 통해 바꿔치기했을 가능성이 있다.
"연금술은 아마도 아들에게 자신의 포도원 어딘가에 금을 묻어두었노라 이야기한 사람에 비유할 수 있을 것이다. 아들은 땅을 파서 금을 발견하지는 못했지만, 포도 뿌리를 덮고 있던 흙무더기를 헤쳐 놓아 풍성한 포도 수확을 거둘 수 있었다. 금을 만들고자 노력했던 사람들은 여러 가지 유용한 발명과 유익한 실험들을 가져다줬다."
연금술과 관련해 위와 같이 영국의 철학자 프랜시스 베이컨의 평가가 즐겨 인용되곤 한다.
허나..
당대 최고의 석학이 협잡꾼에 의해 좌충우돌 활극 속으로 빠져든 끝에 남은 것은 그저 도가니 속에서 타고 남은 화학적 찌꺼기에 불과했다.
그렇게..
한 명은 신체적 및 정신적 굶주림 속에서..
다른 한 명은 세속적인 고통 속에서 숨을 거두는 최후를 맞이한다.
오늘도..
템스강에서 밀려온 눅눅한 안개 위로 달은 뜬다.
그리고..
여전히 가짜 황금의 냄새를 맡고 모여드는 이들이 달을 채우고 있다.
참조
<A True & Faithful Relation of What Passed for Many Yeers Between Dr. John Dee and Some Spirits> Meric Casaubon
<Alchemy Tried in the Fire: Starkey, Boyle, and the Fate of Helmontian Chymistry> William R. Newman & Lawrence M. Principe
<Llewellyn/The Final Secrets of Enochian Magick> Donald Michael Kraig
<Skepsis Norge/“Enochian” language: A proof of the existence of angels?> Egil Asprem
Lawrence M. Principe
Donald Laycock
<The Private Diary of Dr. John Dee, and the Catalog of His Library of Manuscripts> John Dee
<The Queen’s Conjurer: The Science and Magic of Dr. John Dee, Adviser to Queen Elizabeth I> Benjamin Woolley
<Theosophical Society in America/The Tongue of Angels> Aaron Leitch
(따로 출처 표기가 없는 이미지는 이상한 옴니버스가 AI를 통해 생성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