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범죄 역사에 짙은 흉터로 남은 사건


본 글은, 영국 런던의 유명 공원지에서 벌어졌던 한 살인 사건에 관한 글입니다. 범인은 두 살 아이와 함께 산책 중이던 여성을 칼로 49차례나 공격했고, 아이는 엄마 시신에 매달려 울고 있는 채로 발견됐습니다. 그리고 해당 사건은 영국 범죄 역사에 짙디짙은 흉터를 남기게 됩니다. 어째서였을까요?


* 본 글은 단순히 범죄사건과 관련한 호기심을 충족시키고자 오락적 목적을 추구하는 것이 아닌, 사건의 악랄한 범행성을 알림과 동시에 범죄의 연보年譜를 통한 교육에 그 목적을 두고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1992년 7월 15일, 영국 런던 남서부의 윔블던 커먼.

런던 최대 규모에 달하는 개방형 자연 보호 구역인 이곳에서..

그것도 대낮에..

영국 범죄 역사에 짙은 흉터로 새겨질 사건이 발생한다.

레이첼 니켈과 그녀의 아들 알렉스 (Netflix)

지역 주민들이 평화로운 산책을 즐기는 대낮의 공원지.

이날 23세의 레이첼 니켈은 두 살배기 아들 알렉스와 함께 산책을 즐기고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한 괴한으로부터 공격을 받는다.

레이첼은 성폭행을 당했으며 49차례 칼에 찔려 그 자리에서 사망했다.

그녀의 아들 알렉스 또한 현장에서..

어머니의 시신에 매달린 채 발견됐다.

범행 장소는 폐쇄된 방과 같은 실내가 아니라 대낮의 공원이었다.

피해자의 곁에는 어린 아들이 있었다.

그렇기에 해당 사건은 영국 사회에 즉각적인 충격을 던졌다. 범행의 잔혹성 때문만이 아니라, 아주 평범한 산책의 문맥 안으로 극단적 폭력이 들어왔기 때문이다.

여기서 잠시..

해당 사건에서 다음의 '49회의 자상'에 대한 언급은 단순히 독자에게 충격을 주기 장치 따위가 아니다.

범죄학적 및 법의학적 맥락에서 이런 반복적 공격은 범행의 성격을 파악하는 데 중요한 정보다. 공격이 단순 제압이나 순간적인 위협 수준에서 끝난 것이 아니라, 강한 성적 공격성과 반복적 폭력으로 이어졌음을 보여주고 시사하기 때문이다.

사건 직후의 수사에서 관건으로 떠오른 것도 바로 여기에 있었다.

사건 현장에서 수색 작업 중인 경찰. 현장에서 시신 발견 당시 두 살배기 알렉스는 '엄마, 일어나'라며 울고 있었다고 (PA)

레이첼 니켈 살해 사건은 그저 단독으로 발생한 기이한 사건이 아니었다.

이 사건 전후로 런던 남동부에서는 여성을 대상으로 한 성폭력 사건들이 이어지고 있었고 그중 일부는 칼, 야외 또는 반야외 공간, 아이를 동반한 여성, 과잉 폭력이라는 구조적 특징을 공유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경찰은 한동안 이러한 연결을 제대로 잇지 못했다.

물론, 사건 직후 수사는 대대적으로 시작됐다.

평화와 여가의 상징인 윔블던 커먼에서 그것도 대낮에 젊은 여성이 살해됐고, 유일한 목격자는 말을 온전히 구사하기도 어려운 어린아이였다.

또 사건의 잔혹성을 떠나 수사기관 입장에서 매우 어려운 사건이었다.

명백한 범행은 있었으나 즉각적으로 범인을 가리킬 물증은 부족했다.

현장에 남은 아주 작은 생물학적 흔적이 있었지만, 1992년 당시의 과학수사 기술은 그것을 오늘날처럼 곧바로 DNA 프로필로 변환할 만큼 충분하지가 않았다.

비록 영국이 DNA 수사의 시초이며 세계 최초로 1988년 DNA 증거를 통한 첫 유죄 판결이 있었으나, 세계 최초로 국가 DNA 데이터베이스인 NDNAD가 설립된 시기는 1995년이다.

하여, 사건 초기에는 결정적 물증이 부족했고 훗날 DNA 재감정으로 이어질 흔적들도 당시 기술로는 즉각적인 범인 특정에 이를 수가 없었다.

수사관들은 수많은 사람을 조사했다.

1992년 8월에는 사건과 관련해 14명이 체포됐지만 모두 풀려났다. 이후에도 수사는 계속됐으나 경찰은 500명 넘는 용의자를 검토하고 32명을 체포했다가 종국엔 모두 석방했다.

그렇게..

결정적인 용의자가 잡히지 않다가 수사는 서서히 한 남성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용의자는 콜린 스태그였다.

수사기관이 콜린 스태그라는 이름에 이르게 된 과정은, 물증이 사람을 가리킨 경우는 아니었다고 설명할 수 있겠다.

현장 주변에서는 범행 전후로 검은 가방을 든 백인 남성을 봤다는 목격들이 있었고, 어린 알렉스 역시 검은 가방을 든 남자가 어머니를 공격했다는 취지의 말을 했다.

하지만 이런 목격 정보는 그 범위가 충분히 넓었으며, 그것만으로 특정한 한 사람을 용의선상에 올리기 어려웠다.

그런 상황에서 경찰의 시선은 윔블던 커먼 인근 로햄프턴에 살던 스태그에게 향하기 시작했다. 그는 실직 상태였고, 윔블던 커먼에서 개를 산책시키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말하자면..

그는 사건 현장과 완전히 무관한 먼 곳의 인물이 아니었다.

허나 그를 범인으로 연결할 직접 물증이 당장 존재했던 것도 아니었다.

이렇듯 법의학적 증거가 없는 상태에서도 경찰은 어떤 경위로 인해 스태그가 범인이라고 확신하게 된다.

범인 몽타주와 콜린 스태그 (PA)

이무렵 경찰은 법의학적 증거가 부족한 상황에서 범죄심리 프로파일링에 기대기 시작했다.

프로파일러 폴 브리튼은 범인이 20대 또는 30대 남성일 가능성, 혼자 살 가능성, 고립된 취미를 가졌을 가능성, 윔블던 커먼 근처에 살 가능성 등을 제시했다. 또 범인이 오컬트, 칼, 성적 가학 판타지에 관심을 가졌을 것이라는 유형적 판단도 함께 제시했다.

콜린 스태그는 바로 이러한 틀에 들어맞는 사람이었다.

그는 사회적으로 고립돼 보였고, 윔블던 커먼을 오갔으며, 일부 성적 또는 기이한 관심사로 해석될 만한 자료도 존재했다.

그러나 그가 범인이라는 물적 증거가 없었던 경찰은 마침내 다음과 같이 수사 방향을 비틀기 시작한다.

"스태그가 범인이라는 것을 어떻게 끌어낼 것인가?"

그렇게..

수사기관은 이른바 '허니트랩' 방식의 비밀 작전에 착수한다.

먼저, 여성 경찰관 하나가 '리지 제임스'라는 가명으로 스태그에게 접근했다.

그녀는 편지를 주고받으며 스태그의 성적 환상과 심리적 반응을 끌어내려 했다. 궁극적으로는 그가 레이첼 니켈 살인을 암시하거나 고백하게 만드는 것이 목표였다.

허나 그는 끝내 살인을 인정하지 않았다.

리지 제임스의 트랩에 따라 자극적인 판타지에 장단을 맞춰주면서도 레이첼 니켈 살해 사건에 대해서는 결백을 주장했다.

한편..

그럼에도 경찰은 그를 체포했다.

1992년 9월 18일, 콜린 스태그는 레이첼 니켈 살해 혐의로 체포됐으며 이듬해인 1993년 8월엔 정식으로 기소가 이뤄졌다.

여기서 잠시..

프로파일링은 범인을 찾아내는 마법 따위가 아니다.

수사 실무에서 프로파일은 가능한 범인 유형을 좁히고, 질문의 방향을 정하고, 현장 행동의 의미를 해석하는 보조 도구에 가깝다.

중요한 건..

어떤 분야에서든 그러하듯, 보조 도구가 중심축이 될 때 문제가 발생한다는 것이겠다.

해당 사건처럼 물증이 약한 사건에서 프로파일이 먼저 만들어지고, 이후 수사가 그 프로파일에 맞는 사람을 찾는 방식으로 진행되면 수사 자체가 위태로워질 수 있다.

그때부터 수사는 '증거가 사람을 가리키는가'가 아니라 '사람이 프로파일에 얼마나 들어맞는가'를 따지게 되기 때문.

결론적으로..

경찰은 스태그를 향해 증거를 쌓은 것이 아니라, 그를 중심에 놓고서 자백을 끌어내려 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수사는 제대로 된 방향을 잃어버릴 수밖에 없었다.

무죄 평결 이후 언론 앞에서 성명을 발표하는 스태그 (PA)

1994년 9월.

재판 결과, 올드베일리의 오그널 판사는 언더커버 작전에서 얻은 증거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또한 검찰이 더는 증거를 제출하지 않으면서 스태그에게 무죄 평결이 내려졌다.

더불어, 오그널 판사는 문제의 허니트랩 작전을 '극도로 기만적인 행위'라며 비판했다.

그리고..

법정에서 무죄로 풀려났다고 해서 스태그의 삶이 곧바로 원래 자리로 돌아간 것은 아니었다.

아니, 아마 평생 원래 자리로 돌아갈 수 없었을 것이다.

언론과 대중 일부는 여전히 그를 의심했다. 법원은 그를 무죄로 놓아주었지만 세상은 그를 완전히 놓아주지 않았다. 현대판 주홍글씨에서 벗어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니까.

한편..

심각한 문제는 또 있었다.

경찰이 스태그에게 집중하는 동안 진짜 범인은 여전히 밖을 활보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1992년 전후, 런던 남동부에서는 이미 다른 수사가 한창 진행 중이었다.

그건 바로, 그린 체인 워크(총길이 82km의 대형 산책로) 일대에서 벌어진 일련의 강간 및 강간미수 사건들이었다.

1989년 8월 한 여성이 자신의 집 침실에서 성폭행을 당했고, 범인이 칼을 사용해 피해자를 제압했으며, 현장에선 DNA 샘플이 확보됐다.

한편, 같은 해 9월 또는 10월경 로버트 내퍼라는 남성이 자신의 어머니에게 플럼스테드 커먼(런던 남동부 공공 도시 공원)에서 여성을 강간했다고 고백하면서 그의 어머니가 이를 경찰에 신고했다.

허나..

당시 수사에선 이를 제대로 붙들지 못했다.

경찰은 플럼스테드 커먼에서의 강간 사건 기록을찾지 못했고, 내퍼의 어머니가 경찰에 전화했다는 기록도 발견되지 않았다고 한다.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실지로 1989년 8월 10일, 플럼스테드 커먼이 아닌 인접한 윈스 커먼 부근 주택에서 한 여성이 침실 안에서 성폭행당한 사건이 있었다. 범인은 칼을 사용했고, DNA 샘플도 확보됐다.

그러나 경찰은 '플럼스테드 커먼에서 발생한 사건'을 찾지 못했고, 훗날에는 내퍼의 어머니가 경찰에 전화했다는 기록 자체도 발견할 수 없었다고 전했다.

1992년 3월에는 또 다른 강간미수 사건들이 발생했다.

3월 10일, 한 여성이 뒤에서 공격당했고 범인은 다시 칼을 사용했다. DNA 샘플이 확보됐다.

3월 18일에는 엘섬의 킹스 존 워크(런던 남동부의 역사가 깃든 유명 산책로)에서 또 다른 강간미수 사건이 벌어졌다. 이때도 범인은 칼을 사용했고, 피해자의 옷에서 DNA 프로필이 확보됐다.

1992년 5월에는 두 살 아이를 유모차에 태우고 산책하던 22세 여성이 공격당했다.

그녀는 폭행당했고, 이 사건에서도 DNA 프로필이 확보됐다. 해당 사건은 특히 레이첼 니켈 살해 사건과 중요한 비교 지점을 갖는다. 피해자가 아이와 함께 있었고, 야외 보행 공간에서 공격당했다는 점이 말이다.

그럼에도..

동시기의 해당 사건들은 레이첼 니켈 살해 사건과 즉각적으로 결부되지 않는다.

사건들은 하나의 패턴으로 묶이질 못했다.

여기까지 정리해보자면..

레이첼 니켈은 1992년 7월 윔블던 커먼에서 살해됐다.

그보다 앞서 런던 남동부에서는 공원 및 산책로들에서 칼을 사용한 성폭력 사건들이 이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중에는 아이를 동반한 여성이 야외에서 공격당한 사건도 있었다.

그 가운데 로버트 내퍼(자신의 어머니에게 죄를 고백했다던)라는 이름이 용의선상으로 떠오를 수 있는 기회가 분명 있었다.

허나 경찰은 그 이름을 끝내 붙들지 않았다.

대신, 콜린 스태그라는 남자를 주목했다.

그리고 그 사이..

내퍼는 또 다른 범죄로 향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다음 범죄는 1993년 11월에 발생했다.

피해자는 서맨사 비셋과 그녀의 네 살배기 딸 재즈민 비셋이었다.

두 사람은 런던 남동부 플럼스테드에 있는 자신들의 집에서 살해됐다.

사건은..

극도로 폭력적이고 잔혹했으며 칼이 사용됐다.

피해자는 여성과 어린아이, 범행에는 칼이 사용, 그리고 런던 남동부라는 지리적 프로파일링 범위까지.

이미 해당 지역에서는 그린 체인 워크 일대를 비롯한 성폭력 사건들이 이어지고 있었고, 그중에는 아이를 동반한 여성이 공격당한 사건도 있었다.

즉, 사건들은 서로 완전히 다른 세계에서 따로 발생한 범죄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당시 경찰 조직은 이 조각들을 하나의 그림으로 빠르게 맞춰나가지 못했다.

서맨사 비셋과 그녀의 네 살배기 딸 재즈민 비셋 (BBC)

1994년 5월.

비셋 모녀 살해 사건 현장에서 확보된 지문이 결정적인 단서가 된다.

수사관들은 재즈민(딸)의 시신 근처에서 발견된 지문을 통해 로버트 내퍼를 용의자로 특정했고, 1994년 5월 27일 내퍼는 비셋 모녀 살해 혐의로 체포된다.

그리고 바로 이때, 또 하나의 중요한 사실이 드러난다.

구금된 내퍼에게서 DNA 샘플을 채취하자..

그가 그린 체인 강간 사건들의 범인이라는 점이 확인된 것.

말하자면..

경찰은 이제 알게 된 것이다.

로버트 내퍼가 비셋 모녀 사건의 용의자였고, 동시에 그린 체인 워크 일대 성폭력 사건들의 범인이었음을.

게다가..

그의 집을 수색하자 두 켤레의 신발과 여러 물건이 압수됐고, 붉은색 금속 공구함 안에서는 런던 A-Z 지도책이 발견됐다. 지도책에는 손글씨 메모와 여러 점과 십자 표시 등이 있었으며, 그중 상당수가 그린 체인 워크 안팎의 장소에 찍혀 있었다.

분명 단순한 우연으로 보기 어려운 자료였다.

그린 체인 강간 사건들. 비셋 모녀 살해 사건. 그리고 로버트 내퍼.

이 세 요소는 이제 확실히 하나의 축으로 연결되고 있었다.

허나..

레이첼 니켈 살해 사건은 여전히 그 축 바깥에 놓여 있었다.

여기서 잠시..

수사에서 가장 위험한 순간 중 하나가 무엇일까?

가장 위험한 건 '증거가 없는 순간'이 아니다.

오히려 증거가 있는데도, 그것을 기존의 판단 구조 안으로 집어넣지 못하는 순간이다.

내퍼의 경우가 그랬다.

1989년에는 어머니의 신고가 있었다. 1992년에는 그린 체인 강간 사건 피해자들의 진술과 DNA 샘플이 있었다. 1994년에는 비셋 모녀 사건 현장의 지문과 내퍼의 DNA가 있었다. 그리고 그의 집에서는 지도와 표시된 장소들이 발견됐다.

그럼에도, 해당 정보들은 레이첼 니켈 살해 사건과 즉각 결부되지 못했다.

왜냐하면, 수사가 이미 다른 방향으로 기울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콜린 스태그로 말이다.

압수 수색 당시 내퍼의 붉은색 금속 공구함 (PA)

1994년 7월 7일, 내퍼는 그린 체인 강간 사건과 관련해 두 건의 강간 및 두 건의 강간미수 혐의로 기소됐다.

또 1995년 10월 9일에는 올드베일리에서 비셋 모녀의 죽음, 한 건의 강간, 두 건의 강간미수와 관련해 유죄 판결을 받았다. 다만 비셋 모녀 살해 사건에서의 법적 결론은 살인이 아닌, 정신적 책임능력 감경을 전제로 한 manslaughter였다. manslaughter는, 살해 행위는 인정되지만 정신질환 등으로 인해 살인의 법적 책임이 감경된 형태에 가깝다.

그는 브로드무어 보안병원에 무기한 수용됐다.

그리고 이제 경찰은 알고 있었다.

내퍼는 런던 남동부에서 이어진 성폭력 사건들의 범인이었고, 비셋 모녀를 죽인 사람이었다.

그런데도 레이첼 니켈 살해 사건은 여전히 콜린 스태그의 그림자에 묶여 있었다.

1994년 9월 14일, 스태그가 무죄를 선고받은 뒤에도 당시 메트로폴리탄 경찰청장 폴 콘던은 기자들에게 경찰이 레이첼 니켈 살해 사건과 관련해 다른 특정 용의자를 쫓고 있지 않다고 말했다.

그 말은 사실상 이런 의미로 들릴 수가 있었다.

법원은 스태그를 풀어주었지만, 경찰은 여전히 그를 놓지 않았다는 것으로 말이다.

그럼에도, 경찰 내부에서는 다른 목소리도 있었다.

비셋 모녀 살해 사건을 이끌던 수사 책임자는 레이첼 니켈 살해 사건 수사팀 앞으로 두 사건 사이의 뚜렷한 유사성을 알렸다.

그 결과, 1995년 12월 20일.

브로드무어에 수용 중이던 내퍼는 레이첼 니켈 살해 사건과 관련해 조사를 받는다. 여기서 그는 현장인 윔블던 커먼 근처에 간 적도 없다고 부인했다.

당시에는 마땅한 증거가 없었기에 결국 경찰은 추가적인 조처를 하지 않았다.

그렇게 여기서 사건은 다시 멈춘다.

내퍼라는 이름이 마침내 레이첼 니켈 살해 사건 앞에 당도했으나..

그를 붙잡아 둘 과학적 증거가 없었다.

그 사이 콜린 스태그는 세상 속에서 계속 의심받는 남자로 남았고, 레이첼 니켈의 가족은 범인이 누구인지 알지 못한 채 그저 시간을 견뎌야만 했다.

그리고..

사건은 다음 국면으로 넘어간다.

수사의 방향을 바꾼 것은 더 이상 프로파일링도, 유도신문도, 언론의 압박도 아니었다.

그건 바로, 오래된 증거였다.

1992년의 현장에서 채취됐지만, 당시에는 말을 하지 못했던 아주 작은 흔적.

그것이 시간이 지난 뒤 마침내 입을 열기 시작했다.

범인 몽타주와 로버트 내퍼 (PA)

사건은 그대로 오래 멈춰 있었다.

그리고 시간이 흐른 뒤..

사건을 다시 움직인 것은 새로운 목격자도 새로운 자백도 아니었다.

그것은 바로, 1992년 윔블던 커먼의 현장에서 이미 채취돼 있던 흔적이었다.

당시 레이첼의 시신에서는 테이프를 이용한 채취, 즉 tapings가 이뤄졌었다. 목적은 범행 과정에서 가해자로부터 옮겨졌을 가능성이 있는 섬유나 미세 흔적을 확보하기 위해서였다.

허나, 1992년의 과학수사는 아직 그 흔적을 충분히 말하게 만들지 못했다.

2001년.

메트로폴리탄 경찰의 살인사건 재검토 그룹이 레이첼 니켈 살해 사건을 다시 검토했고, 이 과정에서 DNA 감식과 관련한 가능성이 확인된다.

그해 12월, 레이첼의 몸에서 채취됐던 테이프 샘플들은 Forensic Science Service(법과학 감정기관)로 보내져 재검사됐다. 허나, 이 검사에서는 긍정적인 결과가 나오지 않았다. 심지어 레이첼 본인의 DNA조차 검출되지 않았다.

해를 넘겨 2002년 1월.

수사기관은 독립적인 법과학 평가를 받기로 결정한다.

그렇게 샘플들은 독립 법과학 회사의 실험실로 보내졌다. 첫 단계의 검사는 가해자로부터 레이첼에게 옮겨졌을 수 있는 섬유 흔적을 찾는 데 집중됐다.

결과는 음성이었다.

그해 7월.

DNA 기술의 발전 가능성이 다시 고려됐고, 테이프 샘플들은 이번에는 DNA 프로필을 얻기 위한 목적으로 재검사가 이뤄졌다.

그리고 2004년 9월.

처음으로 남성 DNA가 존재한다는 징후가 확인된다.

다만, 아직 법정에서 증거로 제출할 수 있을 만큼의 수준은 아니었다.

여기서 잠시..

'과학수사의 발전'이라는 발자취를 따라가다 보면..

많은 경우, 증거는 처음부터 '거기'에 있고는 한다.

결국 문제는 당대의 기술이 그것을 읽을 수 있었느냐였다.

레이첼 니켈 살해 사건도 그랬다.

1992년의 현장에는 미세한 흔적이 남아 있었다. 다만 당시 기술로는 읽을 수 없었고, 시간이 흐른 뒤에야 분석 기술이 그 흔적을 증거의 언어로 바꾸기 시작했다.

그렇게..

경찰이 처음부터 갖고 있었지만 10년 넘게 제대로 읽지 못했던 증거..

그 중거가 2006년 2월, 마침내 법정에서 사용할 수 있는 수준의 DNA 프로필 확보로 보답한다.

그리고 그 DNA는 로버트 내퍼를 가리켰다.

2006년 6월, 내퍼는 브로드무어에서 레이첼 니켈 살해 사건과 관련해 다시금 조사를 받는다. (내퍼는 당시 이미 비셋 모녀 살해 사건으로 브로드무어에 수용 중이었음)

그는 질문에 답하지 않았으며 준비된 진술서를 통해 다시 한번 사건 관련성을 부인할 뿐이었다.

허나, 이번에는 1995년과 달랐다.

그때는 내퍼가 윔블던 커먼 근처에도 간 적 없다고 부인하면 수사기관도 더 나아갈 과학적 근거가 부족했다.

이제는 달랐다.

오래된 샘플이 그의 이름을 가리키고 있었으니까.

그렇게 2007년 12월 7일, 내퍼는 레이첼 니켈 살해 혐의로 소환된다.

그리고 2008년 12월, 올드베일리 법정에서 사건은 마침내 결론을 맞는다.

내퍼는 레이첼 니켈을 살해한 행위와 관련해, 정신적 책임능력 감경을 전제로 한 manslaughter를 인정한다. diminished responsibility(피고인의 정신적 기능 문제를 들어 온전한 형사상 책임이 아닌 한정책임능력을 변호하는 것)를 근거로 manslaughter에 대해 유죄를 인정한 것이다.

여기서 다시 한번 정확히 짚어둘 필요가 있다.

이번에도 내퍼가 인정한 것은 살인이 아니었다. 그러니까, 법률상의 살인 말이다.

그는 살인 혐의 자체에 대해서는 부인했고, diminished responsibility를 통한 manslaughter를 인정했다.

이는 '죽이지 않았다'도 '실수로 죽였다'의 의미도 아니다. 법적으로는 살해 행위가 인정되지만, 당시 피고인의 정신 상태가 살인에 대한 완전한 책임을 묻기 어렵게 만드는 요소였다고 받아들여진 것이다.

법정에서는 두 명의 정신과 의사가 범행 당시 내퍼가 아스퍼거 증후군과 편집성 조현병을 겪고 있었다는 데 동의했다. 브로드무어의 정신과 의사 역시 그가 심각한 정신질환 상태였고, 치료 없이 다시 성범죄를 저지를 위험이 높다고 진술했다.

(단, 이 진단명들을 범죄의 원인처럼 읽어서는 안 됨. 법정에서 문제 된 것은 특정 진단명이 아니라, 범행 당시 그의 정신 상태가 살인의 법적 책임을 감경할 정도였는가였음. 내퍼의 반복적 성폭력과 살해 행위를 특정 정신질환 하나로 환원하는 것은 부정확함)

판사는 내퍼에게 브로드무어 고도보안 병원에 무기한 수용될 것이라고 밝혔다. 그리고 그를 가리켜 '어떤 관점에서 보더라도 매우 위험한 사람'이라고 평가했다.

1995년 당시의 내퍼 (Mark St George)

1992년 윔블던 커먼에서 레이첼을 살해한 사람은 누구였는가.

그 질문에 대해, 법은 16년이 지나서야 한 이름을 제시했다.

로버트 내퍼.

그러나 그 이름이 법정에 도착하기까지..

너무 많은 시간이 흘렀고, 너무 많은 사람이 망가져 있었다.

그리고 어린 알렉스는, 어머니가 살해되는 순간을 목격한 아이로 성장해야 했다.

로버트 내퍼.

그는 2008년이 되어서야 레이첼 니켈 살해 사건의 법정 위에 선다.

허나, 대다수의 살인마들이 그러하듯..

그는 어느 순간 갑자기 나타난 범인이 아니었다. 그 역시 훨씬 오래전부터 자신의 삶과 행동 안에 여러 위험 신호를 내포하던 자였다.

폭력적인 가정, 어린 시절의 보호 실패, 정신과 치료, 사회적 고립, 성적 피해 경험, 스토킹, 여성에 대한 반복적 공격, 그리고 칼을 이용한 통제.

로버트 내퍼라는 인간을 이해하려면 이러한 조각들을 하나씩 훑어야만 한다.

물론, 이러한 것들은 그의 범죄를 이해하기 위한 작업이지 그의 범죄를 변명하기 위한 작업이 아니다.

또한, 그가 놓여졌던 환경과 배경 요소 자체가 살인마를 형성하는 것이라는 잘못된 귀납 또한 명심해야 할 것이고 말이다.

내퍼의 유년 시절 (Robert Napper)

로버트 클라이브 내퍼는 1966년 2월 런던 남동부에서 태어나 플럼스테드 일대에서 성장했다.

그의 어린 시절은 안정과는 분명 거리가 멀었다.

내퍼는 생애 첫 10년 동안 아버지 브라이언이 어머니 폴린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장면을 목격하며 자랐다.

부모가 이혼한 뒤에는 네 자녀 모두 위탁보호를 거쳤고 정신과 치료를 받았다. 그중 내퍼는 특히 장기간 치료를 받은 것으로 전해지는데, 모즐리 병원에서 6년 동안이나 치료를 받았다고 한다.

그러니까..

내퍼는 운전강사였던 아버지 브라이언과 어머니 폴린 사이에서 태어난 첫아들이었고, 어머니가 그가 열 살 무렵 이혼을 청구할 때까지 폭력적인 가정 안에서 성장했다. 부모의 결별 이후 어머니의 건강은 악화됐고 자녀들은 위탁가정을 거쳤다. 내퍼는 학교를 빠지고 절도를 저지르는 등 초기 비행도 보였다.

내퍼의 어린 시절은 단순히 불우하다고 표현하기엔 너무 느슨하다.

그는 가정폭력의 목격, 가족 해체, 보호체계 이탈, 정신과 치료, 학교 부적응이 겹친 발달환경을 거쳤다.

물론..

범죄학적으로 이런 요소들이 한 사람의 미래를 결정짓지는 않는다.

허나, 분명 위험요인으로는 읽힌다.

특히 그것들이 반복되고, 그 사람을 바로 붙잡아줄 보호요인이 약하며, 이후의 행동이 성적 공격성과 폭력으로 기울기 시작할 때는 더욱 그렇겠다.

한편..

더 큰 균열은 사춘기 무렵 발생했다.

내퍼는 열두 살 무렵 가족 지인에게 성폭력 피해를 당했다고 전해진다. 이후 그는 내향적이고, 강박적으로 정돈에 집착하며, 은둔적인 성향을 보였다고 한다. 그의 어머니의 말에 따르면, 방에서 거의 나오지 않았고 형제들을 괴롭히거나 여동생을 훔쳐보는 행동을 보였다고도 한다.

여기서도 선을 정확히 그어야 한다.

성적 가학성을 보였던 살인마들 가운데 유년기 또는 사춘기 무렵 성적 피해를 겪었다는 배경이 심상치 않게 등장하곤 한다.

허나, 성적 피해 경험이 성범죄의 원인으로 결부될 수는 없다. 학대받은 아이가 훗날 학대자가 된다는 식의 '도식'은 틀렸다.

대부분의 학대 피해자는 타인을 해치지 않는다. 대부분의 정신질환자 역시 폭력 범죄자가 아니다. 이러한 요소들을 단순히 단독으로 놓고서 독단적으로 해석하는 방식은 범죄학에서 분명하게 부정하고 있다.

그럼에도..

내퍼의 경우 해당 정보가 중요한 이유는 피해 경험 자체 때문만이 아니라 그 후 나타난 행동 때문이다.

은둔, 강박적 정돈, 대인관계 실패, 형제에 대한 괴롭힘, 여성의 사적 공간을 훔쳐보는 행동.

물론 이런 것들은 그 자체로 살인마의 징후라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훗날 그가 보인 스토킹, 관음, 피해자 관찰, 침입, 통제형 성폭력과 나란히 놓으면 의미가 달라진다.

내퍼의 위험성은 어느 날 갑자기 완성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고립과 판타지, 성적 침해와 성적 공격성, 피해 경험과 가해 행동 사이의 어두운 간극에서 조금씩 형태를 얻어나간 것이었다.

여기서 잠시..

범죄자를 다룰 때 가장 덧붙이기 쉬운 설명은 다음의 둘 중 하나다.

하나는 '괴물이었다'는 설명.

다른 하나는 '불우한 환경으로 인해 그렇게 됐다'는 설명.

둘 다 편하지만 둘 다 충분하지는 않다.

'괴물'이라는 말은 분석을 멈추게 하고 '불우한 성장사'라는 말은 책임의 윤곽을 흐리게 만들 수가 있다.

로버트 내퍼를 다룰 때 필요한 것은 그사이의 정확한 지점이겠다.

내퍼에게는 분명 심각한 취약성이 존재했다.

가정폭력, 위탁보호, 성적 피해, 정신과 치료, 사회적 고립.

그러나 그 취약성이 자동으로 범죄자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범죄자가 된 것은 이후 그가 선택하고 반복한 행동으로 말미암은 것이었다.

그러니까, 여성을 표적으로 삼는 것, 사적인 공간을 훔쳐보는 것, 피해자를 따라가거나 찾아내는 것, 칼을 들고 통제하는 것, 성폭력과 물리적 폭력을 결합하는 것.

이러한 반복이 내퍼라는 범죄자의 핵심이다.

1986년.

내퍼는 기록상 처음으로 범죄 이력을 남긴다.

그는 공기총 소지로 벌금과 조건부 석방 처분을 받았는데, 이때만 해도 이후의 참상을 예고하는 결정적 사건으로 보이지가 않는다. 허나 돌이켜보면, 이 초기 기록은 내퍼의 삶에서 무기와 범죄가 처음으로 문서 위에 올라온 순간이었다.

이후 그는 집을 떠나 플럼스테드의 작은 방에서 홀로 살기 시작했다.

그는 학교를 나온 뒤 육체노동직을 전전했고, 스물한 살 무렵 플럼스테드의 침대 딸린 방으로 독립했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바로 그 무렵, 그린 체인 일대에서 '공격들'이 시작됐다.

범죄학적으로, 이 시기의 내퍼를 분석하는 데에 있어 '주거 형태'도 중요한 요소에 해당한다.

그는 런던 남동부의 특정 지역인 플럼스테드 안에 있었다. 그리고 사건들이 벌어졌던 공원과 산책로, 주택가와 후미진 길, 피해자가 일상적으로 이동하는 경로가 그의 행동권과 겹쳐졌다.

그는 지역의 지형을 잘 파악하고 있었다. 어느 길이 한적한지, 어디에서 접근할 수 있는지, 어떤 공간이 피해자를 고립시키는지 알고서 움직인 것이다.

1989년.

내퍼는 더 직접적인 방식으로 경찰 기록 앞에 놓인다.

그는 자신의 어머니에게 플럼스테드 커먼에서 여성을 강간했다고 고백한다.

어머니 폴린은 이를 경찰에 신고했다.

허나 경찰은 어머니 폴린의 신고 전화에 대해 정확한 기록이 없다고 전하며..

따라서 해당 전화가 어떤 경찰관에게 접수됐는지, 어느 번호로 걸려 왔는지, 어떻게 처리됐는지는 확인되지가 않는다. 결과적으로 내퍼는 이 고백과 관련해 조사받지 않았다.

경찰은 '플럼스테드 커먼에서 발생한 강간'을 찾지 못했다고 설명한다. 허나 실지론 인접 지역의 주택에서 여성이 칼을 든 침입자에게 성폭행당한 사건이 있었고, 피해자의 집은 플럼스테드 커먼과 가까웠다.

1992년으로 오면 내퍼의 행동은 보다 선명한 패턴을 띠기 시작한다.

이 무렵 내퍼는 '엿보는 사람'에서 스토커, 강간범, 그리고 연쇄 살인범으로 진행해 갔다.

물론, 해당 표현은 법적 사실보다는 범죄심리적 해석에 더욱 가깝겠다. 허나 내퍼의 행적을 보면, 적어도 그의 범죄가 단발적 충동으로만 설명되기 어렵다는 점은 분명하다.

그린 체인 워크 일대에서는 여성들을 상대로 한 성폭력 사건들이 이어지고 있었다.

내퍼의 범죄는 초기 외설적 노출에서 시작해, 훗날 유모차를 밀고 가던 여성을 흉기로 위협한 뒤 성폭행하는 수준으로 상승했다. 그리고 피해자군 중 일부는 어린아이를 동반한 젊은 여성들이었다.

이것은 범죄학에 있어서 그저 우연한 세부 사항으로 치부할 수는 없다.

아이의 존재는 분명 정상적인 사람에게 있어 범죄에 대한 보다 강한 억제요인으로 작용한다.

허나, 내퍼에게는 그렇지가 않았다.

그는 아이가 현장에 있거나 피해자와 함께 있는 상황에서도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말인즉슨..

아이가 있는 상황은 필연적으로 피해자의 저항 가능성을 낮추고 공포와 무력감을 극대화하는 조건이었을 수 있다. 하여, 내퍼는 아이를 동반한 여성을 더 순응적일 수 있는 대상으로 보았을 가능성이 있다. 좀 더 추정적인 범죄심리 분석으로 들어가자면, 젊은 어머니를 향한 성적 및 가학적 적대감이 겹쳤을 가능성 또한 존재했을지 모르고 말이다.

물론, 해당 해석을 사실처럼 단정할 수는 없겠다.

한편, 범죄학적으로 볼 때 내퍼의 범죄에서 반복되는 핵심이 분명 존재한다.

피해자는 여성, 공간은 일상적 보행로 또는 주거지, 도구는 칼, 행위는 성폭력과 신체 폭력의 결합, 그리고 특정 사건에서는 아이의 존재조차 범행을 막지 못함.

이것은 단순히 폭력성이나 가학성만으론 해석되지 않는다.

이는 통제형 성폭력이다.

피해자를 제압하고, 침묵시키고, 공포 속에 묶어두는 방식의 범죄 말이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것들이 내퍼에게 있어 자신의 범죄 판타지를 충족시키는 요소였던 셈이다.

1992년 5월, 그린 체인 워크 일대에서 두 살 아이를 유모차에 태우고 가던 22세 여성이 공격당했다.

그리고 두 달 뒤, 레이첼 니켈은 윔블던 커먼에서 두 살 아들 알렉스와 함께 걷다가 공격당한다.

젊은 여성, 어린아이의 동행, 야외 보행 공간, 폭력적 제압이라는 구조의 결합이었다.

이때의 내퍼는 이제 더 이상 단순한 성범죄자가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성적 폭력을 살해로 밀어붙일 수 있는 사람이었다.

여기서 내퍼의 정신질환 문제를 따져볼 필요가 있겠다.

독자 여러분이 내내 읽으면서 분개했을 법정에서의 변호 부분을 말이다.

2008년 법정에서 내퍼는 diminished responsibility, 즉 정신적 책임능력 감경을 근거로 manslaughter를 인정했다.

법정에선 두 명의 정신과 의사가 범행 당시 내퍼가 아스퍼거 증후군과 편집성 조현병을 겪고 있었다는 데 동의했다고 전해진다. 또 브로드무어의 정신과 의사는 내퍼가 심각한 정신질환 상태였고, 치료 없이 다시 성범죄를 저지를 위험이 높다고도 진술했다.

내퍼는 망상적 사고도 지니고 있었다고 전해진다. 그는 자신이 건드릴 수 없는 존재라고 믿었고, 텔레파시로 생각을 전달할 수 있다고 믿었으며, 현실과 맞지 않는 여러 허황된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고도 한다.

담당 정신과 의사는 그의 사고 과정이 비합리적이었고, 윔블던 커먼 범행 당시 스스로를 언터쳐블한 존재처럼 느꼈을 것이라 진술했다.

그리고..

강조했듯이, 해당 대목은 아주 조심해서 논지를 파악할 필요가 있다.

편집성 조현병은 현실 판단, 망상, 사고 과정에 영향을 줄 수 있다. 자폐 스펙트럼은 사회적 상호작용과 감각 및 인지 방식에 영향을 줄 수 있다.

허나, 그것이 곧 성폭력이나 살인의 원인이라는 뜻은 아니다.

특히, 자폐 스펙트럼을 범죄성과 연결하는 방식은 부정확하고 위험하다.

내퍼의 진단명은 법정에서 살인과 manslaughter를 가르는 책임능력 판단의 핵심 요소였다.

하지만 그의 범죄적 인간상을 설명하는 핵심은 진단명 하나가 아니다.

핵심은 반복된 행동이다.

여성 표적화, 스토킹, 무기 준비, 칼을 통한 통제, 사적인 공간 침입, 공공 산책로에서의 기습, 성폭력과 살해의 결합, 그리고 범행 뒤에도 이어진 반복성.

정신질환은 법적 책임능력을 감경하는 요소로 받아들여졌지만, 내퍼가 남긴 행동 패턴은 그 자체로 명확한 위험 신호이자 의도성이 내포된 선행 행위이기도 했다.

2008년 법정에서, 검찰은 내퍼가 취약한 젊은 여성들을 스토킹하거나 찾아내 성폭행하려는 성향을 가졌으며 피해자를 위협하거나 통제하기 위해 칼로 무장했다고 설명했다.

이 설명이 내퍼의 범죄성을 압축한다.

그는 무작위로 폭발한 사람이 아니었다. 먼저 피해자를 물색하고서 접근한 뒤, 무기를 준비해 통제와 성폭력으로 나아갔다.

이것은 충동 범죄의 외피를 쓰고 있지만, 그 안에는 분명 반복된 선행 행동이 있다.

그가 비이성적 망상 속에 있었을 수도 있다. 허나 동시에 피해자를 찾아내고, 따라가고, 무기를 사용해 제압하는 구체적 행동을 반복했다.

정신질환과 범죄의 계획성은 반드시 서로 배제되지만은 않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내퍼는 충동과 망상만으로 움직인 사람이 아니었다.

2008년 12월.

올드베일리 법정에서 레이첼 니켈 살해 사건은 마침내 법적 결론을 맞는다.

내퍼는 레이첼 니켈을 살해한 행위와 관련해 diminished responsibility, 즉 정신적 책임능력 감경을 근거로 한 manslaughter를 인정했다.

법정에서는 그의 정신 상태가 핵심 쟁점으로 떠올랐다.

두 명의 정신과 의사는 범행 당시 내퍼가 아스퍼거 증후군과 편집성 조현병을 겪고 있었다는 데 동의했다. 브로드무어의 정신과 의사는 그가 심각한 정신질환 상태였고, 치료 없이 다시 성범죄를 저지를 위험이 높다고 진술했다.

우리가 당연히 느낄 법한 분노와 별개로, 법정의 언어는 감정의 언어가 아니다.

해당 재판에서 살인과 manslaughter의 구분은 '잔혹했는가'의 문제가 아니라, 법적으로 피고인의 정신 상태와 책임능력을 어떻게 판단할 것인가의 문제였다.

내퍼의 범행이 덜 잔혹해서 manslaughter가 된 것이 아니다. 그의 정신질환이 법률상 책임능력 판단에 영향을 미쳤기 때문에 manslaughter가 된 것이다.

물론, 정신질환은 범죄의 면허가 아니다. 또 자폐 스펙트럼은 폭력성의 원인이 아니다. 조현병이 곧 살인으로 이어지는 것도 아니다.

대부분의 정신질환자는 타인을 해치지 않는다.

그러므로 내퍼 사건에서 병명을 소비하는 방식은 조심스러워야 한다.

내퍼의 진단명은 법정에서 살인과 manslaughter를 가르는 핵심 요소였지만, 그의 범죄적 인간상을 설명하는 전부는 아니었다.

그는 '정신질환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범죄를 저지른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정신질환을 가진 동시에, 반복적으로 피해자를 찾아내고 공격한 성폭력 범죄자이자 살인자였던 것이다.

재판 당시 판사는 내퍼에게 브로드무어 고도보안 병원에 무기한 수용될 것이라고 밝혔다.

그리고 현재까지 공개 보도 기준으로, 60대가 된 내퍼는 여전히 영국 브로드무어 고도보안 정신병원에 수용 중인 것으로 전해진다.

억울하게 범인으로 몰렸었던 콜린 스태그.

그는 14개월간 구금 상태로 재판을 기다린 끝에 무죄 평결을 받을 수 있었다.

허나, 이미 언론은 그를 범인처럼 보도했고 대중이 이를 받아들였으므로 현대판 주홍글씨가 씌워진 후였다.

2008년에서야 내퍼가 진범이었음이 드러나면서 메트로폴리탄 경찰은 스태그에게 공개적으로 사과했다. 14개월간의 구금 기간에 대해 100만 파운드의 손해배상을 청구했던 스태그는 경찰을 상대로 승소하며 약 70만 파운드를 보상받았다.

다만, 당시 수사를 이끌었던 수석 형사 키스 페더는 스태그의 무죄 평결 이후에도 그가 범인이라는 자신의 견해를 공개적으로 굽히지 않았다. 2001년 ITV 다큐멘터리에서도 같은 취지의 주장을 이어갔고 말이다.

훗날, 스태그는 소설가 및 언론인과 각각 공동집필을 통해 사건에 대한 이야기를 담은 책을 출간한다.

한스컴 가족 사진 (Time)

그리고 알렉스 한스컴.

그는 사건 당시 두 살이었다.

산책 도중 어머니 레이첼 니켈을 끔찍한 방식으로 잃게 된 아이.

어머니가 살해당한 현장. 사람들이 반복해서 묻는 기억. 너무 어려서 온전히 설명할 수도 거부할 수도 없었던 순간.

사건 이후 아버지 앙드레 한스컴은 언론의 관심을 피해 알렉스를 프랑스 농촌으로 데려갔고, 나중에는 스페인으로 이주한 것으로 전해진다.

2017년, 알렉스는 살해된 어머니에 대한 슬픔과 트라우마 극복에 대한 회고록을 출간한다.

알렉스 한스컴의 최근 모습 (Netflix)

2010년, 잉글랜드와 웨일스의 경찰 민원 및 위법행위 조사를 감독하던 독립기구 IPCC는..

사건 당시 경찰의 잘못된 결정과 오판들로 인해 내퍼가 저지른 범죄의 피해자들을 끝내 구할 수 없었다고 시사하는 보고서를 발표한다.

본문에서 언급한 것들 외에도..

당시 형사들은 현장을 목격한 목격자들이 범인에 대한 신장 묘사를 제각각 진술했음에도, 한 목격자의 5피트 7인치 정도로 보였다는 정보에만 한정하며 6피트 이상의 신장인 용의자들은 모두 용의선상에서 제외하는 잘못을 저질렀다.

심지어, 한 피해자가 처음에는 범인의 키를 약 6피트 3인치로 추정했음에도 용의자 신장의 상한을 6피트로 설정했다. 그 결과 6피트를 넘는 내퍼는 그린 체인 강간 사건 수사에서 배제됐다.

한편..

당시 수사에 참여했던 핵심 인원들 모두가 은퇴했고 수사의 중심에 있던 주요 고위 형사가 사망하면서..

끝내 어떤 이들에게도 징계 조처가 내려지지 않는다.

결국..

레이첼 니켈 살해 사건은 진범이 늦게 밝혀진 사건이면서, 동시에 잘못된 확신이 얼마나 많은 사람의 삶을 훼손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 사건이었다.

내퍼는 브로드무어에 남았고, 스태그는 뒤늦게 결백을 인정받았으며, 알렉스와 앙드레 한스컴은 사랑하는 이를 떠나보낸 채 사건 이후의 삶을 계속 살아가야 했다.

법정의 결론은 하나였지만, 그 사건이 남긴 피해는 하나로 끝나지 않은 것이다.

(PA)

참조

<BBC News/Killer who slipped through the net> Sarah White
<BBC News/Police errors led to Rachel Nickell killing>
<BBC News/Rachel Nickell’s son Alex Hanscombe on trauma and recovery>
<Independent Police Complaints Commission / André Hanscombe Complaint: Commissioner’s Report> Rachel Cerfontyne
<The Guardian/Inside the mind of Robert Napper> Laurence Alison, Marie Eyre
<The Guardian/Nickell case: Missed clues that allowed Napper to kill again> Sandra Laville
<The Guardian/Rachel Nickell killing: Serial rapist Robert Napper pleads guilty> Sandra Laville, Haroon Siddique, Jenny Percival, James Sturcke
<The Times/Inside the mind of Robert Napper> Sean O’Neill, Adam Fresco

-끝-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