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가족이 진짜 가족 맞을까?

들어가기에 앞서....

* 본 글은 구독자 독점 제공용 글이며 따로 전체 공개용 요약편이 제공되지 않습니다.

(The Return of Martin Guerre/Natalie Zemon Davis)

1560년 초.

그리고 프랑스 남서부의 소촌 아르티가.

이곳에서 벌어진 가족 분쟁은..

훗날 프랑스 전역뿐만 아니라 전세계에서..

역사상 가장 기묘하고도 기구한 법정 싸움 중 하나로 일컬어지게 된다.

우리는 '가족'을 너무나 당연시하곤 한다.

그러니까, 설령 떨어져 지낸 가족이었다고 해도 다시 마주하면 당연히 가족인 것이다.

그러니까, 이건 '관계성'에 대한 것을 말하고자 하는 게 아니다.

만약, 몇 년간 떨어져 지내던 가족이 돌아왔고..

그렇게 또 몇 년간 평상시처럼 지내오다..

어느날 문득, 그게 진짜 내 가족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면?

그게 내 가족 행세를 하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면?

그러니까, 이건 그런 일에 대한 이야기이다.

1527년.

프랑스 바스크 지방의 앙다예에 상시 다게르라는 농민이 있었다. 그는 아내와 어린 아들 마르탱, 그리고 자신의 동생 피에르를 데리고 다른 지역으로 이주했다.

가족이 정착한 곳은 피레네산맥 북쪽 푸아 백작령의 아르티가로, 오늘날 프랑스 남서부 아리에주에 해당하는 농촌 마을이었다.

장남인 마르탱은 1524년이나 1525년 무렵 태어난 것으로 추정된다. 가족이 이주할 당시에는 두 살가량에 불과했으므로, 실질적인 성장기는 아르티가에서 보낸 셈이었다.

아르티가에는 약 60-70가구가 거주했다.

주민들은 밀과 기장 그리고 귀리와 포도를 재배하고 소와 염소, 특히 양을 길렀다. 대장장이와 제분업자, 구두 수선공 같은 장인도 있었지만 생활의 중심은 농업과 목축이었다.

마을에 상주하는 유력 영주는 없었으며 상당수 토지는 농민들이 비교적 자유롭게 소유한 이른바 자유보유지였다. 마을 주민들은 집정관을 뽑아 공동체의 일을 처리했고, 현지에서 해결할 수 없는 법적 분쟁은 말을 타고 몇 시간 떨어진 리외의 왕립법원으로 가져갔다. 리외 판결에 불복할 경우에는 툴루즈 고등법원에 항소할 수 있었다.

정리하자면..

아르티가는 마르탱 게르 가족이 살았던 곳이자 사건의 중심 무대였다.

다게르 가족은 앙다예에서 해오던 기와와 벽돌 제조업을 아르티가에서도 이어갔다. 이후 농지와 포도밭, 가축을 늘리며 소규모 농민 가운데서는 제법 넉넉한 집안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정착 과정에서 바스크계 성씨였던 Daguerre도 현지식으로 짧아졌다.

하여..

상시 다게르는 상시 게르가 됐고, 장남 마르탱 다게르는 마르탱 게르가 됐다.

당시의 '이름'이라는 것은, 오늘날의 주민등록번호처럼 고정된 식별 수단이 아니었다. 같은 사람의 이름도 지역과 언어 또는 기록자에 따라 철자가 달라졌고, 별명이나 출신지 이름이 본명보다 널리 사용되기도 했을 정도.

(Henry de Kock)

1538년 무렵이었다.

마르탱 게르는 동 지역 아르티가의 농가 출신인 베르트랑드 드 롤스와 결혼을 한다.

두 사람은 당시 기준으로도 대단히 어렸다.

기록에 따르면, 신부인 베르트랑드는 결혼 당시 자신이 9세나 10세 정도였으며 신랑 마르탱도 비슷하게 어렸다고 전해진다.

한편, 또 다른 연대 자료에 의하면 마르탱은 약 14세였을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당시의 정확한 출생 기록이 남아 있지 않은 데다, 베르트랑드의 회고와 다른 연대 단서를 맞춰본 현대 연구의 계산도 완전히 일치하지는 않는다. 또, 아무래도 당시 농가 자식에 대한 기록이기도 하고 말이다.

따라서, 두 사람이 정확히 동갑이었다거나 베르트랑드가 확실히 아홉 살이었다고 단정할 수도 없겠다.

분명한 것은..

둘 다 매우 어린 나이에 혼인했다는 사실이다.

둘의 혼인은 당연하게도 개인적인 연애보다 두 집안의 결합에 가까웠다. 당시 게르 가족은 기와 제조와 농업으로 재산을 늘리고 있었고, 롤스 가족도 아르티가에서 제법 기반을 갖춘 집안이었다.

마르탱은 상시 게르의 외아들이자 주요 상속인이었다.

따라서, 두 집안에 있어 이 혼인은 노동력과 토지 및 상속과 가문의 지속을 함께 연결하는 계약이었다.

헌데..

결혼 직후 심각한 문제가 생겼다.

역시 당연하게도, 두 사람은 8년 넘게 부부관계를 맺지 못했다.

동시대 기록에서 신부 베르트랑드는 자신과 마르탱이 주술에 의해 '묶여 있었다'고 표현했다. 가족들은 혼인을 끝낼 수도 있다고 권했지만 베르트랑드는 이를 거부했다.

그녀의 법정 진술에 따르면, 한 노파가 알려준 방법에 따라 네 차례 미사를 드리고서 성체와 특별히 만든 음식을 먹는 의식을 치른 뒤에야 부부관계를 맺을 수 있었다고.

이후..

두 사람 사이에서 아들이 태어났다. 아이에게는 할아버지의 바스크식 이름을 따 '상시'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여기서 잠시..

신랑인 마르탱이 정말로 어떤 마법이나 주술로 '묶여 있었던' 것은 아니겠다.

마르탱의 신체적 문제와 심리적 불안, 두 사람의 어린 나이, 성관계에 대한 불안 및 공포와 가족의 압력 등 여러 가능성을 대신 대입이 가능할 것이다.

여하튼 지건, 오랜 기간 혼인이 성적으로 완성되지 못했으며 당사자들과 당시 공동체는 그 원인을 시대적 배경에 비추어 주술과 종교의 언어로 이해했다는 점뿐이다.

두 사람의 결혼으로부터 약 10년 후인 1548년.

둘 사이에서 아들이 태어난 지 수개월이 지났을 무렵, 마르탱은 아버지의 곡물을 훔친다.

기록에 따르면, 절도 품목은 단지 '약간의 밀'이라고 전해진다.

반면, 또 다른 기록에서는 한 부셸가량의 밀이라고 적고 있다. (부셸은 영미권에서 사용되는 곡식 및 과일 등의 부피 및 무게 단위, 미국식으론 약 27kg, 영국식으론 약 28kg)

다만, 당시 지역 단위와 후대 번역의 차이 때문에 정확한 현대 중량으로 환산하기는 어렵다.

여기서 중요한 건, 한 지붕 아래에서 살던 아들이 아버지의 곡물을 가져간 일을 두고 절도라는 표현이 사용됐다는 점이겠다.

따라서, 해당 사건은 단순한 생계형 절도라기보다는 가문의 재산권을 쥔 아버지와 성인이 된 아들 사이의 권한 다툼을 반영했을 가능성도 시사하겠다.

한편..

사건의 정확한 내막이 무엇이었든 간에, 마르탱은 아버지의 분노와 처벌을 두려워한 나머지 아르티가를 떠나게 된다.

그렇게..

마르탱은 아내와 어린 자식, 부모와 네 명의 여동생까지 모든 것을 내버린 채 지역을 떠난다. 심지어 자신이 물려받게 될 재산까지도 모두 그대로 남겨둔 채 말이다.

그 뒤 무려 8년 동안이나 마르탱의 소식은 들려오지 않았다.

끝내, 그의 부모는 아들이 돌아오는 모습을 보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다.

아버지 상시는 결국 유언을 통해 재산을 마르탱에게 남겼고, 상시의 동생이자 마르탱의 삼촌인 피에르가 부재중인 조카(마르탱)의 재산과 미혼인 여동생들(마르탱의)을 관리하게 됐다.

당시의 지역 문서에 따르면, 이 무렵 피에르는 베르트랑드(마르탱의 아내)의 홀어머니와 재혼한 것으로 보인다.

허면, 피에르는 마르탱의 삼촌이면서 동시에 베르트랑드의 새아버지가 되는 셈이다.

그렇게..

마르탱이 돌아오지 않는 동안 피에르는 게르 집안의 실질적인 가장이 됐으며, 베르트랑드와 그녀의 어린 아들 역시 그의 영향 아래 놓이게 됐다.

한편, 베르트랑드의 처지는 더욱 모호해져만 갔다.

그녀는 남편에게 버림받았지만 미망인은 아니었다.

허나, 마르탱의 사망이 확인되지 않았기 때문에 재혼도 할 수 없었다.

당시의 법률가들은, 남편이 20년 넘게 실종됐다손 치더라도 죽음이 확실히 입증되지 않았다면 아내가 재혼할 수 없는 것이라 봤다.

즉 베르트랑드는 실질적으로는 남편 없는 삶을 보내면서도, 법과 교회 앞에서는 계속해서 마르탱의 아내로 묶여 있는 것이었다.

기록에 따르면, 베르트랑드의 주변인들은 그녀가 마르탱의 부재 기간 동안 정숙하고 명예롭게 생활했노라 평가했다.

그렇게..

결혼으로부터 약 18년 후인 1556년 여름.

뜬금없이..

남편인 마르탱이 돌아왔다.

기록에 따르면..

아르티가 지역 인근 마을의 여관에 한 남성이 머물기 시작했단다.

남성은 자신을 마르탱 게르라고 소개했고, 이러한 이야기는 머지않아 마르탱의 네 여동생 귀에까지 들어간다.

자매들은 즉시 여관으로 찾아가 그를 오빠 마르탱으로 받아들였고, 다시 아르티가로 돌아가서는 베르트랑드를 데려왔다.

한편..

마르탱을 마주하고서 낯설어하던 베르트랑드에게, 마르탱은 수염과 더불어 오랜 여행 때문에 모습이 달라졌을 것이라고 설명한다.

마르탱은 10년도 더 이전 과거의 사건이나 가족에 관한 기억을 이야기했고, 특히 자신이 떠나기 전 궤짝에 넣어뒀던 흰색 쇼스(chausses), 즉 당시 남성이 다리에 입던 의복이 어디에 있는지까지 정확하게 짚어냈다.

더불어, 결혼식과 가족관계뿐 아니라 부부 사이에서만 알 법한 장소와 시각 그리고 당시 오간 대화까지도 언급했다.

이러한 이야기를 들은 베르트랑드는 마침내 그를 돌아온 남편으로 받아들인다.

삼촌인 피에르 역시 처음에는 의심했으나, 마르탱이 함께 겪은 과거의 일을 구체적으로 말하면서 마침내 조카의 귀환을 받아들인다.

마르탱은 자신이 앓고 있던 병으로 인해 여관에 며칠 더 머물렀다고 전해진다.

정확히 어떤 병이었는가는 기록상으로 확실하게 남아 있지 않으나, 다만 한동안 여관에 머물며 베르트랑드와 가족에게서 보살핌을 받은 후에야 마침내 집으로 귀환했다고 전해진다.

그렇게 아르티가로 돌아온 마르탱.

뜻밖의 귀환에 얼떨떨해하던 마을 사람들을 마르탱은 친근하게 이름으로 불렀고, 상대방이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면 과거 함께 겪었던 사건을 꺼내며 당시 어디에 있었고 누가 옆에 있었는지까지를 짚어냈다.

허면..

도대체 그 적지 않은 세월 동안 가출한 마르탱은 어디서 무얼 하고 있었던 것일까?

마르탱은 자신이 프랑스 국왕의 군대에서 복무하고 스페인에서도 머문 뒤에야 이렇게 귀환한 것이라 설명했다.

그의 말대로, 8년 전 마을을 떠난 청년이 군대와 여행을 거치고서 어엿한 성인 남성으로 돌아왔다면 외모가 달라지는 일도 이상하지가 않았다.

이후, 3년여의 세월이 흘러..

마르탱과 베르트랑드는 예전처럼 한집에서 먹고 마시고 잠을 잤으며..

그 사이에서 두 딸이 태어났다.

그리고 한 아이는 어린 나이에 사망했고, 또 다른 딸은 살아남았다.

그렇게 그는 베르트랑드와 아들 상시, 살아남은 딸 베르나르드가 있는 집안에 정착했다. 그동안 곡물과 포도주, 양모를 거래하고 토지를 사고팔거나 임대하며 농민이자 상인으로 활동했다.

한편..

마르탱은 아버지가 남긴 친가의 재산에도 권리를 행사하고자 한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삼촌 피에르와의 갈등이 점차 심화되기에 이른다.

마르탱의 아버지가 사망한 뒤 피에르는 부재 중인 조카의 재산을 관리해 왔다.

한편, 마르탱은 삼촌인 피에르에게 그동안의 관리 내역과 수익을 정산하라고 요구한다.

처음에는 서로 말로 좋게 좋게 해결하려 했으나..

1558년 말 또는 1559년 초, 결국 당싱 아르티가를 행정 및 사법적으로 관할하던 지역인 리외의 법원에다 민사소송이 제기되기에 이른다.

마르탱에게 있어서는 친부가 남긴 유산에 대한 정단한 권리의 행사였다.

반대로..

피에르의 입장에서는, 갑자기 나타난 존재가 가족 재산을 처분하는가 하면 피에르 자신이 유지해 온 가장의 권한까지도 위협하는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피에르의 마음 속 의심이 급기야 확신으로 바뀌면서 사태는 법정 다툼으로까지 발전된 것이다.

돌아온 마르탱은 진짜 마르탱인가.

일부 증인은 12년 전 마을을 떠났던 마르탱이 현재의 피고인보다 키가 크고 말랐으며 피부색도 더 어두웠다고 말했다. 진짜 마르탱은 약간 구부정한 데다 턱이 갈라졌으며 아랫입술과 코의 모양도 달랐다는 증언이 나왔다. 본래 얼굴과 오른쪽 눈썹에 흉터가 있었다는 사람도 있었다.

진짜 마르탱의 신발을 만든 적이 있었다는 구두 수선공은 피고인과의 발 크기가 다르다고 진술했고, 마르탱은 검술과 당시의 격투 운동을 할 줄 알았으나 피고인은 그렇지 못한다는 증언도 제시됐다.

헌데..

반대 증언도 만만치가 않았다.

피고인의 아랫니 두 개가 부러져 있고 이마의 흉터와 손톱의 특징, 오른손의 사마귀, 왼쪽 눈의 붉은 흔적까지 진짜 마르탱의 것과 일치한다는 사람들이 있었던 것.

문제는..

이 특징들이 한 사람이 작성한 일관된 신체 기록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흉터와 치아, 사마귀를 기억한다는 증인이 서로 달랐으며, 일부 특징은 단 한 사람의 오래된 기억에 의존했다.

그러니까, 이러한 증언들은 얼핏 객관적인 증거처럼 보이면서도 실지로는 과거 12년 전의 기억에 기반하고 있었던 것.

한편..

마르탱의 여동생들인 네 자매는 여전히 피고인을 자신들의 형제가 맞노라 단언했다.

이는 분명 시사하는 바가 컸다.

어린 시절부터 한집에서 함께 먹고 자란 자매들이 모두 피고인을 진짜 마르탱으로 인정한다는 사실은..

피에르가 증거로 제시한 '외모 특징의 차이'만큼이나, 아니 오히려 보다 강력한 증거로 보였다.

추가로, 마르탱의 아내인 베르트랑드 역시 피고인을 적극적으로 옹호했다.

기록에 따르면..

베르트랑드는 피고인이 진짜 마르탱이 맞으며, 만약 그가 가짜라면 그건 '마르탱의 피부를 뒤집어쓴 악마'일 것이라고 말할 정도였다. (그러니까, 속임수 따위로 그처럼 진짜 행세를 할 수 있을 정도가 아니라는 의미)

하여 그녀는 피에르가 피고인을 폭행하려 했을 때도 그를 보호했고, 피에르와 자신의 어머니(피에르의 재혼 상대)가 그를 가짜라고 고발하도록 강요한다며 주변에 호소했을 정도였다.

또, 그런 그녀를 집에서 내쫓겠다는 위협이 있었다는 증언도 나왔다.

(Henry de Kock)

그렇다면, 피고인 처지가 된 '돌아온 마르탱'은 진짜 마르탱이 맞는 걸까?

그 판단은 잠시 뒤로 미뤄두겠다.

1559년 늦여름이나 가을.

그러니까, 마르탱이 귀환한 지 3년째이던 해.

아르티가 지역을 지나던 로슈포르 출신의 한 병사가 마르탱을 보고는 뜻밖의 말을 남겼다고 전해진다.

"그 남자는 마르탱 게르가 아니오. 진짜 마르탱은 플랑드르에 있었소. 2년 전인 1557년 생캉탱 전투에서 포탄에 맞아 한쪽 다리를 잃었단 말이오."

병사의 말에 따르면, 진짜 마르탱은 다른 곳에서 살고 있으며 전장에서의 부상으로 인해 나무다리를 사용하고 있다는 것.

허나..

해당 병사가 어떤 경로로 진짜 마르탱을 알았는지, 또 그의 증언이 어느 정도 검증됐는지가 분명치 않았다.

여하튼 지건, 해당 소문이 피에르의 의심을 더욱 강화시킨 계기였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마르탱은 최초의 법원 명령을 받게 된다.

아르티가 인근 라누의 소영주 장 데스코르뇌프가 소유한 농업 건물에 불이 났는데, 데스코르뇌프가 마르탱을 방화범으로 고발한 것이다. 더불어, 마르탱이 진짜 마르탱을 사칭하며 혼인 생활을 빼앗은 사칭자라는 의혹까지 함께 제기하면서 말이다.

그렇게 마르탱은 툴루즈 세네샬 법원의 명령으로 체포돼 툴루즈에 수감된다.

당시 방화 혐의가 어떤 증거에 근거했는지는 불분명하다.

일설에 의하면, 피에르가 신원 사칭 의혹을 아르티가 일대에서 토지를 늘리던 소귀족 데스코르뇌프에게 일러주었을 것이라는 추측도 존재한다.

한편..

마르탱의 방화 혐의는 충분히 입증될 수가 없어 결국 석방 조치가 이뤄졌다.

이때도 아내 베르트랑드는 마르탱의 편이었다.

둘은 이미 3년 넘게 부부로 살았으며 함께 먹고 잠들고 두 아이까지 낳았다.

기록에 따르면, 그녀는 피에르와 자신의 어머니가 남편을 죽이거나 갤리선으로 보낼 요량으로 자신에게 거짓 고발을 강요한다며 항의했다. 또, 툴루즈에 수감된 마르탱에게 돈과 생활용품도 전달했고.

이 무렵..

피에르는 '귀환한 마르탱'의 과거를 추적하기 시작한다.

한 여관 주인은 귀환한 마르탱의 정체를 알아보자 입을 다물어달라는 부탁을 받았으며, 진짜 마르탱은 이미 죽었고 재산을 넘겨받았다는 설명을 들었노라 증언했다.

또, 다른 사람이 그를 '팡세트'라고 부르자 조용히하라는 신호를 보내왔다고 주장했다.

그렇게..

피에르는 마침내 귀환한 마르탱의 본래 이름과 고향을 알아내기에 이른다.

그는 아르노 뒤 틸 또는 사자스 출신의 팡세트라고 불리우던 남자였다. (팡세트는 대략 '배'나 '배불뚝이'에 가까운 뜻으로 해석되지만, 그 별명이 정확히 어떤 외모나 성격적 특징에서 비롯됐는지는 확인되지 않음)

1560년 1월.

그러니까, 마르탱이 증거 불충분으로 툴루즈 감옥에서 풀려나 아르티가로 돌아왔을 때였다.

베르트랑드는 그를 남편처럼 맞이했다. 흰 셔츠를 내어주고 발을 씻겨준 뒤, 그날 밤 같은 침대에서 잠들었다.

헌데..

이튿날 대낮, 피에르가 자신의 딸들과 결혼한 사위들을 이끌고서 들이닥쳤다. 모두 무장한 상태였던 이들은 남성을 붙잡아 리외 법정으로 넘겼다.

문제는, 당시 베르트랑드가 피에르에게 그런 권한을 정식으로 부여했는지가 분명하지 않다는 것.

여하튼 지건..

그렇게 마르탱은 '마르탱 사칭 의혹'으로 재판장에 피고인 신분으로, 그리고 아내 베르트랑드 역시 원고로 재판에 참여하기에 이른다.

그러니까, 재판 기록상 베르트랑드가 '함께 살던 남성이 진짜 남편인 마르탱 게르가 아니라 아르노 뒤 틸'이라고 고발한 것이다.

허나 그녀가 정확히 어느 시점에서 자발적으로 고발에 동의했는지, 어머니와 피에르의 압력에 어느 정도 굴복했는지, 혹은 다른 전략을 가지고서 재판에 참여했는지는 남은 기록만으론 확답을 내놓을 수가 없겠다.

여기서 잠시..

기록에 의하면 베르트랑드가 1559년 1월에 리외 법원에 고소했다고 적혀 있다.

헌데, 현대식 연표에서는 체포와 재판이 1560년 초에 벌어진 것으로 정리된다.

이는 오기라기보다는 당시 프랑스의 연도 계산법과 관련이 있겠다.

1564년 이전 프랑스의 여러 지역에서는 1월 1일이 아니라 부활절을 기준으로 새해를 계산했다. 따라서 오늘날 기준으로는 1560년 1월에 해당하는 날짜가 당시 기록에서는 아직 1559년으로 표기될 수 있었던 것.

하여, 본 글에서도 독자의 혼란을 피하기 위해 현대식 연도인 1560년으로 통일하되 사료에는 1559년으로 기록된 이유를 함께 밝히는 바이다.

자, 이제 장르를 법정물로 변환할 차례겠다.

당시 리외 법원이 풀어야 했던 문제는 단순하면서도 불가능에 가까웠다.

피고인은 누구인가?

마르탱 게르인가, 아니면 아르노 뒤 틸인가.

오늘날이라면 해결이 무척이나 쉬웠을 문제다. 사진과 지문, 행정 기록과 유전자 검사를 비교하면 명명백백하게 답안이 나왔을 테니까.

허나..

16세기의 법원은 그 처지가 분명 달랐다.

이들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곤 피고인의 기억을 시험하고, 얼굴과 신체 특징을 마을 사람들에게 확인하게 하며, 흉터와 치아, 사마귀와 발 크기 따위를 비교하는 것이었다.

필적을 비교하는 방법도 존재했는데, 마르탱과 아르노 모두 과거에 자신의 이름을 서명한 문서가 확인되지 않는 문제가 있었다.

한편..

아르노는 법정에서도 놀라울 만큼 상세한 대답을 내놓았다.

결혼식이 열린 시기와 장소, 장인과 장모, 결혼식을 집전한 성직자, 참석자들의 옷차림, 결혼식 날 밤 신혼부부를 찾아온 사람들, 아들의 출생과 마르탱이 떠난 이유, 과거 길에서 만난 사람들과 나눈 대화, 프랑스와 스페인에서 머물렀다는 장소까지..

법원이 사람을 보내 확인한 일부 내용은 실제 사실과도 일치했다.

또, 아르노는 마르탱의 아내 베르트랑드와의 사적인 기억에도 대답을 내놓았다. 어떤 특정한 일에 대한 장소와 시각 그리고 당시 오간 대화까지 피고인이 베르트랑드의 진술과 틀리지 않게 답했노라 기록된다.

아르노의 방어 논리 역시 치밀했다.

자신은 전쟁과 여행을 거치며 외모가 달라졌을 뿐 마르탱이 맞다, 삼촌 피에르는 8년 동안 관리한 재산과 수익을 돌려주기 싫어 자신을 제거하려 한다, 아내는 피에르의 집에서 거짓 고소를 강요당하고 있었다, 따라서 베르트랑드를 피에르의 영향에서 분리해 자유롭게 진술하게 해야 한다는 것이 그러했다.

한편..

리외 법원은 그의 주장을 그냥 넘기지 않았다.

법원은 베르트랑드를 피에르의 집에서 떼어내 다른 장소에 머물게 했으며, 피고인의 요청에 따라 아르티가와 사자스, 르팽과 인근 지역의 교회에다 모니투아르(monitoire)라는 공고를 내렸다.

모니투아르란, 사건에 관해 아는 사실을 숨길 경우 파문될 수 있음을 경고하고 법정에 나와 증언하도록 요구하는 교회의 종교적 명령이었다.

그 결과..

약 150명이 리외 법정에서 증언을 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여기서도 첨예한 대립이 이어진다.

증인 가운데 30-40명은 피고인이 마르탱이라고 확신했다. 그보다 많은 수는 그가 아르노 뒤 틸이거나 적어도 마르탱은 아니라고 주장했으며, 60명 이상은 두 남성이 너무 닮아 판단할 수 없다고 답했다. 또, 뒤이어 피고인에게 불리한 확정적 증언을 한 수는 45명 이상이었다고도 한다.

문제는..

이러한 증인 집단이 무작위로 뽑힌 것이 아니라, 피고와 원고 양측이 자신에게 유리한 사람을 제시했다는 것. 따라서 친족관계와 재산 분쟁, 마을 안의 인간관계가 증언에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이 존재하겠다.

그럼에도 중요한 사실이 하나 드러났다.

피고인을 마르탱으로 기억한 사람, 아르노로 알아본 사람, 그리고 아무리 보아도 어느 쪽인지 판단하지 못한 사람이 동시에 존재했다는 사실 말이다.

피고인은 진짜 마르탱과 완벽하게 똑같진 않을지언정..

누구나 즉시 알아볼 만큼 다르지도 않았다는 것이다.

한편..

리외 법원은..

최종적으로, 피고인이 아르노 뒤 틸이라고 판단한다.

그렇게 피고인은 남의 이름과 신분을 사용하고, 베르트랑드를 속여 마르탱의 혼인 생활을 차지한 혐의가 인정됐다.

베르트랑드는 공개 사죄와 2천 리브르의 배상을 요구했으나..

국왕 측 검사는 그대로 사형을 구형했다.

그리고 법원은 아르노에게 참수한 뒤 시신을 사분하는 형을 선고했다.

여기서 잠시..

당시 농민 신분이었던 피고인에게 참수가 선고된 것은 다소 기묘한 일이었다.

참수는 일반적으로 교수형보다 신분이 높은 사람에게 적용되는 형벌로 여겨졌다. 따라서, 농민인 피고인에게 참수가 선고된 일을 기묘한 형태의 '귀족 대우'였노라 표현하는 이도 있다. (다만 모든 지역과 사건에 예외 없이 적용된 절대 규칙은 아니었음)

다시 돌아와..

허나, 아르노는 끝내 자백하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자신이 진짜 마르탱 게르이며, 아내와 삼촌의 음모로 죽음을 선고받았노라 주장했다.

그리고 이에 따라..

그는 즉시 랑그도크 일대의 최고 항소 법원이던 툴루즈 고등법원에 항소한다.

자, 과연..

아르노는 유죄가 분명한 사기꾼이었던 것일까, 혹은 자신의 가족과 재산을 되찾으려 했다는 이유로 아내와 삼촌의 거짓 고발을 받아 죽음을 선고받은 피해자일까.

툴루즈의 판사들은 사건을 처음부터 다시 검토했다.

그리고 놀랍게도..

베르트랑드와 아르노를 대면시킨 뒤 재판을 지켜본 판사 상당수가 점차 이런 의심을 품기 시작했다.

"이거.. 피고인이 진짜 마르탱 게르이고 거짓말하는 쪽이 아내랑 삼촌 아니야?"

툴루즈 고등법원 판사들의 판단은 점차 아르노에게 유리한 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한편, 리외 법원에서 유죄를 선고받았음에도 항소심 법정에 선 아르노는 조금도 위축되지 않았다. 베르트랑드와 대면했을 때도 확신에 찬 태도를 보였고, 오히려 베르트랑드가 머뭇거리며 불안해하는 모습을 드러냈다.

기록에 따르면, 당시 재판관 가운데 상당수는 피고인이 진짜 마르탱이며 아내와 삼촌이 재산 때문에 거짓 고발을 꾸몄을 가능성을 의심하기 시작했단다.

법원은 리외에서 조사하지 않았던 증인 25-30명을 추가로 소환했다.

그 가운데 9-10명은 피고인이 마르탱이라 확신했고, 7-8명은 아르노 뒤 틸이라고 주장했다. 나머지는 두 남성의 외모가 너무 닮았고 증거도 충돌해 어느 쪽인지 판단할 수 없노라 답했다.

이렇듯 추가 증언에서도 양측의 주장이 팽팽하게 맞서면서 진실이 명확해지기는커녕 사건은 이전보다 더 혼란스러워졌다.

아르노에게 유리한 증거는 분명 만만치 않았다.

마르탱의 네 자매와 두 명의 매제가 여전히 그를 가족으로 인정했다.

여기서 잠시..

당시 판사들이 판단해야 했던 것은 비단 피고인 한 사람의 유죄 여부만이 아니었다.

만일 그가 진짜 마르탱이라면, 사형을 집행하는 순간 무고한 사람을 죽인 꼴이 된다.

반대로 그를 마르탱으로 인정하면 베르트랑드의 혼인은 유효한 상태로 유지되고, 상시(아들) 및 베르나르드(딸)의 가족관계와 법적 지위도 흔들리지 않는다.

의심이 남는 사건에서 혼인과 그 사이에서 태어난 자녀에게 유리한 사정. 바로 이러한 것이 판단의 균형을 움직일 요인으로 작용하며, 피고인을 진짜 마르탱으로 인정하려던 판사들의 판단에 힘을 실었을 수가 있겠다.

하여..

판사들은 리외 판결을 뒤집고 아르노를 마르탱 게르로 인정하는 방향에 점차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렇게 최종 판결로 향해가던 무렵..

툴루즈 고등법원, 한 남성이 등장한다.

한쪽 다리가 나무로 된 남성이.

그는 스페인에서 돌아왔다며 자신의 이름을 밝힌다.

"저는, 제 이름은, 마르탱 게르입니다!"

그렇다.

툴루즈 고등법원에 나타난 나무다리의 남자는..

자신을 아르티가에서 12년 전 사라졌던 진짜 마르탱이라 주장하는 사람이었다.

여기서 잠시..

일설에 따르면, 마르탱은 스페인으로 건너가 부르고스에서 멘도사 가문을 섬겼다. 당시 멘도사 형제의 행적을 대조한 결과, 마르탱이 스페인군 지휘관 페드로 데 멘도사를 따라 군대에 들어갔을 가능성이 제시된다.

다만, 이 세부 경로 전체가 직접 문서로 확인된 것은 아니다.

허나 마르탱이 스페인으로 건너가 멘도사 가문과 연결됐고, 이후 스페인군 쪽에서 복무했다는 큰 줄기는 동시대 기록들에서 근거한다.

그렇게 가출로부터 약 9년 뒤인 1557년 8월 10일.

프랑스 북부 생캉탱에서 프랑스군과 스페인군이 충돌했다.

마르탱은 프랑스 왕국 출신이었음에도 생캉탱 전투에서는 펠리페 2세의 스페인군 편에서 복무하고 있었다.

그리고 생캉탱 전투에서 다리에 중상을 입은 그는 결국 한쪽 다리를 절단해야 했다.

사실..

당시의 외과수술과 감염 위험을 고려하면 살아남은 것만으로도 운이 좋았던 셈이다.

그는 나무로 만든 의족을 사용하게 됐으며, 멘도사 형제 가운데 한 사람이 펠리페 2세에게 도움을 요청한 결과 성 요한 기사단 소속 시설에서 평생 평신도 수사로 지낼 자리를 얻은 것으로 보인다.

다시 돌아와..

해당 기록이 맞는다면..

그는 왜 12년 만에 고국인 프랑스로 돌아왔을까?

이는 귀환을 결심한 이유가 소상하게 밝혀진 바가 없어 추측의 영역으로 남아 있다.

그가 단순히 종교시설 생활에 싫증을 느꼈을 수도 있고, 프랑스와 스페인 사이에 평화조약이 체결되면서 귀국해도 처벌받지 않으리라 판단했을 수도 있겠다.

혹은, 누군가를 통해 다른 남성이 자신의 이름과 가족 그리고 상속권을 차지하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을 가능성도 있고 말이다.

법원은 '나무다리'의 남성을 즉시 진짜 마르탱으로 인정하지는 않았다.

그 역시 신원을 입증해야 하는 처지였다.

재판관들은 앞서 아르노에게 던졌던 질문을 새로 나타난 남성에게 다시 물었다.

헌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기록에 따르면..

나무다리의 남성은 마르탱의 집안에서 일어났던 과거의 사건들을 아르노만큼 자세히 기억하지 못했다.

더군다나 답변의 수와 구체성에서도 아르노에게 밀리는 모습을 보였다.

물론, 아르노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는 새로 나타난 남성이 피에르가 돈을 주고 고용한 가짜이며, 사건에 관한 정보를 제대로 외우지도 못한 채 법정을 속이러 왔노라 공격했다. 그리고 집안의 과거에 대해 직접 질문하며 상대가 답하지 못하는 모습을 판사들에게 보여주고자 했다.

허면..

이 나무다리의 남성은 정말 피에르 측이 훈련해 내세운 사칭자였을까?

하지만, 또 이렇게도 생각할 수가 있다.

진짜 마르탱은 아르티가를 떠난 뒤 12년 동안 가문의 일상과 단절된 상태였다.

반면 아르노가 사기꾼이었다면, 당연히 마르탱의 과거를 집중적으로 조사했을 것이며 지난 3-4년 동안에도 베르트랑드와 자매들 곁에서 정보들을 흡수했을 것이다.

따라서 아르노에게 있어 '진짜 마르탱의 기억'은 오래전에 경험한 흐릿한 과거가 아니라, 자신의 생명을 걸고 외워야 했던 가장 중요한 지식이었을 것이다.

이것이 어떤 질문에서는 진짜보다 가짜가 더 정확할 수 있었던 이유 아니었을까?

한편..

재판관들은 아르노와 나무다리의 남성을 따로 분리했다.

그러고는 이전 심문에서 한 번도 다루지 않았던 비밀스러운 질문 10-12개를 따로 물었다.

먼저, 나무다리의 남성은 해당 질문에 정확한 답변을 내놓았다. 법원은 답변이 사실과 일치하는지도 별도로 확인했다.

이제 진짜가 가려진 듯 보였다.

헌데..

동일한 질문을 아르노에게 던지자, 그 역시 거의 똑같은 대답을 내놓았다.

법정에 있던 사람들은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급기야 (시대적 배경에 비추어) 아르노가 악령의 도움을 받아 마르탱의 기억을 훔쳤다는 의심까지 제기됐다.

기록에 따르면, 툴루즈 고등법원장 장 드 망상칼이 직접 아르노에게 어떤 악령을 불러 이런 정보를 얻었는지 물었을 정도였단다.

재미있는 점은, 해당 질문에 아르노가 순간 창백해지며 머뭇거렸다는 기록이다.

허나, 아르노는 끝까지 마법 사용을 부인했다.

뭐, '마법'은 당시 시대상으론 끔찍한 중죄에 해당할 수 있었으니까.

한편..

과거 기억을 통한 심문으로도 결론을 내리지 못하자 법원은 최후의 방법을 택한다.

그건 바로..

두 남성을 가족과 주요 증인 앞에 함께 세우고서..

누가 진짜 마르탱인지 직접 고르게 한 것이다.

먼저, 마르탱의 첫째 여동생이 들어왔다. 기록에 따르면, 그녀는 나무다리의 남성을 잠시 살펴본 뒤 자신의 형제라고 인정하며 끌어안았단다.

다른 자매들도 차례로 그를 마르탱으로 지목했다.

이는 분명 의미하는 바가 컸다. 그동안 아르노를 진짜 형제라고 굳게 믿으며 강하게 주장했던 이들 자매들이 한순간에 의견을 뒤집은 것이다.

또, 이전엔 아르노를 마르탱으로 증언했던 다른 사람들 역시 새로 등장한 이 남성을 진짜로 인정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베르트랑드가 법정에 들어섰다.

기록에 따르면..

그녀는 나무다리의 남성을 보자 몸을 떨고 눈물을 흘리며 달려가 안았다고 한다.

이어 베르트랑드는 자신을 변호했다.

그간 자신이 아르노의 거짓말과 치밀한 정보에 속았으며, 마르탱의 여동생들과 삼촌인 피에르가 처음 먼저 그를 받아들였기에 의심을 거둘 수밖에 없다는 해명이었다.

또한, 아르노가 서로 간의 개인적이고 은밀한 기억을 알고 있기에 쉬이 믿었노라 말했다.

아르노가 가짜라는 사실을 의심한 뒤에는 수치심 때문에 죽고 싶을 정도였으며, 명예를 되찾고자 이렇게 고소를 진행한 것이라 주장했다.

헌데..

이 나무다리 남성은 마르탱의 여동생들과 재회했을 때 함께 눈물을 흘렸지만..

정작 마르탱의 아내 베르트랑드에게는 냉정했다.

기록에 따르면, 아내가 남편을 부모나 형제보다도 더 잘 알아야 한다며 집안에 닥친 재앙의 책임이 베르트랑드에게도 있다고 질책했단다.

이에 판사들이 베르트랑드를 변호하며 마르탱의 마음을 누그러뜨리려 했을 정도.

이후 법원은 마르탱의 장기 부재와 스페인군 복무에 책임을 물을 것인지도 검토했지만, 그의 젊은 나이와 그동안 겪은 손실 등을 고려해 기소하지는 않았다.

허면, 법정에서 이 나무다리 남자가 진짜 마르탱임이 증명된 것일까?

허나, 진짜 마르탱이 다리를 잃었다는 소문은 이미 1년 전 아르티가에 전해졌다.

따라서, 누군가 나무다리의 남자를 고용하거나 관련 정보를 이용해 또 다른 가짜를 만들어냈을 가능성이 제로는 아니었다.

실지로, 아르노는 나무다리의 남자가 피에르에게 돈을 받고 훈련받은 사람이라고 공격했다.

한편..

이 나무다리의 남자가 제시된 새로운 비밀 질문에 정확히 답했으며, 삼촌과 여동생들이 둘을 직접 비교한 뒤 그를 가족으로 선택했고, 이전까지 아르노를 지지하던 증인들 역시 판단을 바꿨다.

여담으로..

여기서 아르노의 형제들도 소환됐으나 법정에 나오진 않았다.

그들은 반복된 소환과 처벌의 위협에도 끝내 법정에 나서지 않았다.

형제에게 불리한 증언을 피하고자 했던 의도에서였을까?

1560년 9월 12일.

툴루즈 고등법원은 최종 판결을 내린다.

아르노 뒤 틸은 다른 사람의 이름과 인격을 사칭하고, 거짓 혼인을 통해 베르트랑드와 동거하며 마르탱의 재산을 차지한 혐의로 유죄가 됐다.

툴루즈 고등법원은 기존 리외 법원이 선고한 참수 후 시신 사분형을 파기하고서 새로운 형벌을 선고했다.

그건, 아르노는 아르티가 교회 앞에서 공개 참회한 뒤 마르탱의 집 앞에 설치된 교수대에서 목이 매달리고 시신은 불태워지는 형벌이었다.

그렇게..

그는 겉옷이 벗겨지고 셔츠만 입은 채 맨머리와 맨발로 교회 앞에 무릎을 꿇도록 명령받았다. 목에는 교수형 밧줄이 둘러지고 손에는 불붙인 밀랍초가 쥐어진 채 신과 국왕, 법원, 마르탱과 베르트랑드에게 용서를 구해야 했다.

이후 그는 아르티가의 거리와 교차로를 돌아 마르탱의 집 앞까지 끌려가 교수형으로 죽은 뒤 시신이 소각되는 형이 집행된다.

한편..

아르노와 베르트랑드 사이에서 태어난 딸 베르나르드는 법적으로도 보호받는다.

판결문은 소송비용을 제외한 아르노의 재산을 베르나르드에게 귀속시켰다. 재판부가 베르트랑드의 선의를 인정함으로써, 베르나르드 역시 유효한 혼인에서 태어난 적출자로 보호받은 것이었다.

당시 법률에서는 어머니가 혼인의 무효를 알지 못한 선의의 상태였다면 그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의 신분을 보호할 수 있었기 때문.

또 법원은 진짜 마르탱과 베르트랑드, 피에르를 이 사건의 형사절차에서 제외했다.

(Henry de Kock)

기록에 따르면..

판결문에선 이름과 인격의 사칭, 기만과 간통 외에도 오늘날 강간/신성모독/예속/절도 등으로 번역되는 표현들이 나열된다. 다만 이는 현대 형법의 범죄명과 일대일로 대응하지는 않으며, 법원 등록부의 간략한 죄목과도 표현상 차이가 있겠다.

(16세기의 법률 용어는 오늘날과 범위가 달랐고, 특히 여성의 동의가 사칭으로 인해 얻어진 결과의 경우 성관계를 어떤 범죄로 분류할 것인가도 현대의 법 개념과 같지 않았음)

핵심만 전하자면..

아르노는 마르탱의 이름과 신분을 사칭해 혼인 생활과 재산을 차지했으며, 그 과정에서 베르트랑드와 성관계를 맺은 일로 사형을 선고받았다.

자..

이제..

남은 가려움은 이 사기극의 전모일 것이다.

판결이 내려진 지 나흘 뒤인 9월 16일.

아르노는 처형을 위해 툴루즈에서 아르티가로 이송됐다. 그리고 리외의 판사 앞에서 마침내 자신의 본명을 되찾았다.

아르노는 7-8년 전 피카르디에서 돌아오던 길에 도미니크 푸졸과 피에르 드 길레가 자신을 마르탱으로 착각한 일을 사칭의 출발점으로 설명했다.

이렇듯 마르탱의 가까운 친구들조차 속을 정도로 외모가 닮았다면, 조금만 준비하면 다른 사람들도 속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든 것.

이에..

그는 마르탱의 친구 및 이웃들로부터 가족과 재산, 평소의 언행 등을 조사한 뒤 이를 집요하게 기억한다.

베르트랑드가 자신을 남편으로 받아들인 뒤에는 밤낮으로 나눈 대화를 통해 이전에 들은 정보를 확인하고 더 많은 사실을 배울 수 있었다고도 자백했다.

그렇게 자백 이후, 아르노는 자신의 생전 빚과 받을 돈도 정리했다. 돈뿐 아니라 곡물과 포도주, 기장과 양모에 관한 채무까지도 구체적으로 밝혔다.

그리고는, 딸인 베르나르드 뒤 틸을 자신의 상속인으로 지정했다. 또 동생 장 뒤 틸과 툴루즈의 도미니크 르방데르를 딸의 후견인이자 유언집행자로 삼았다.

마지막 순간에서야..

아르노는 마르탱의 재산이 아니라, 본래 자기 명의로 남아 있던 재산과 채권 및 채무를 정리했다.

한때 훔쳤던 신분을 내려놓고서 자신의 이름으로 딸에게 남길 것을 마련한 셈이었다.

형 집행은 마르탱의 집 앞에서 진행됐다.

아르노는 여러 차례 자신이 사칭을 저질렀음을 인정했고 마르탱과 베르트랑드, 피에르에게 용서를 구했다.

기록에 따르면, 교수대의 사다리 위에서도 자백을 반복하며 신의 자비를 구했다고 한다.

또 다른 기록에 의하면, 아르노가 마지막 순간 마르탱에게 베르트랑드를 가혹하게 대하지 말라고 부탁했다고도 전해진다. 베르트랑드는 명예롭고 정숙한 여성이었으며, 자신이 가짜임을 의심한 뒤에는 용기 있게 행동했노라 변호했다는 것이다.

여하튼 지건..

확실한 것은, 아르노가 세 사람에게 용서를 구하고는 교수형을 당한 뒤 시신이 불태워졌다는 사실이다.

아직도 남은 가려움..

과연..

마르탱의 아내 베르트랑드는 언제부터 무엇을 얼마나 알고 있었던 것일까?

그녀는 아르노와 공모했던 것일까, 혹은 끝까지 속았던 것일까?

집행 당시 아르노는 처형을 불과 몇 시간 앞두고서 자백을 했다. 당시의 종교적 및 법적 환경에서 사형수는 영혼의 구원을 위해 죄를 인정하고 회개해야 한다는 강한 압력을 받았다.

한편, 아르노의 자백을 거짓으로 볼 이유도 없다.

그의 설명은 이미 이전에 확인된 인물과 정보 수집 과정 등과 대체로 들어맞는다.

따라서, 아르노가 사칭을 저질렀다는 사실과 그 구체적인 경위는 강하게 확인되지만..

베르트랑드의 실제 인식과 두 사람의 관계까지 자백으로 사실 관계가 확정됐다고 말할 수는 없겠다.

베르트랑드는 정말 몰랐을까?

여기서, 이른바 '역사학계의 논쟁'이 등장하게 된다.

나탈리 제먼 데이비스 (American Historical Association)

당시 툴루즈 고등법원은 최종적으로 베르트랑드를 처벌하지 않았으며, 그녀 역시 아르노의 간계에 속은 피해자로 인정했다.

헌데..

현대 역사학자 나탈리 제먼 데이비스는 이에 의문을 제기한다.

그녀의 주장은 이렇다.

"아르노와 처음 마주쳤을 때는 베르트랑드 역시 다른 가족들과 함께 속았을 수 있다. 허나, 아르노와 수년간 같은 집에서 살고 성관계를 맺으며 두 아이를 낳은 뒤에도 전혀 다른 사람이라는 사실을 몰랐다고 볼 수 있을까?"

마르탱과 아르노는 얼굴은 닮았지만 키와 체격, 발 크기와 움직임에 차이가 있었다.

아르노의 정체에 관한 소문이 퍼진 뒤에도 베르트랑드는 그를 적극적으로 보호했다.피에르가 고발을 강요한다고 항의했고, 툴루즈 감옥까지 찾아가 돈과 물품을 전달했으며, 석방된 아르노가 돌아오자 발을 씻기고 흰 셔츠를 내어준 뒤 같은 침대에서 잠들었다.

데이비스는 이런 행동이 단순히 끝까지 속은 피해자의 모습만으로는 충분히 설명되지가 않는다고 본다.

또, 그녀는 법정 진술에 대해서도 꼬집는다.

베르트랑드와 아르노는 따로 심문받았음에도 결혼식과 성관계, 오랜 기간의 성적 불능과 그것이 끝난 과정 등 부부만이 알 법한 내용에서 거의 같은 답을 내놓았다.

그러니까..

만약 법정 싸움 당시엔 자신이 아르노에게 속았음을 이미 알고 있었던 베르트랑드가, 아르노의 정체를 정말 폭로하고 싶었다면 진짜 마르탱과 자신만이 아는 새로운 비밀들을 제시하면 그만이었다는 것.

헌데 베르트랑드는 그러지 않았다. 오히려 아르노가 이미 알고 있는 사적인 기억을 말했고, 그의 답변과 자신의 진술이 계속 일치하도록 만들었다.

이는 두 사람이 어느 시점부터 증언의 방향을 맞춘 정황으로 해석될 수가 있다.

또한, 데이비스는 베르트랑드가 처음부터 공모하고 함께 사기 계획을 만들었다고는 여기지 않는다.

처음에는 아르노를 진짜 남편으로 받아들였으나, 함께 사는 동안 다른 사람임을 알아차리고도 새로운 결혼생활을 유지하기로 했을 가능성을 데이비스는 제시한다.

당시 아르노는 집을 나가 종적이 묘연해진 마르탱과는 달리 함께 살 수가 있는 남편이었고, 베르트랑드는 재혼할 수 없는 상태에서 다시금 가족과 혼인 생활을 얻었다.

(서두에서 언급했듯, 당시의 법률가들은 남편이 20년 넘게 실종됐다손 치더라도 죽음이 확실히 입증되지 않았다면 아내가 재혼할 수 없는 것이라 봤음. 즉 베르트랑드는 실질적으로는 남편 없는 삶을 보내면서도, 법과 교회 앞에서는 계속해서 마르탱의 아내로 묶여 있던 것)

게다가 두 사람 사이에서 아이도 태어났다.

따라서, 둘은 서로 평화와 우정 그리고 애정이 있는 관계를 형성했으며..

피에르와 갈등이 시작된 뒤에는 아르노를 법적인 남편으로 인정받기 위해 서로의 증언을 맞췄을 가능성을 제시했다.

말인즉슨, 베르트랑드가 결국 원고가 된 뒤에도 아르노가 법원에서 마르탱으로 인정되도록 돕는 동시에 실패할 경우에도 자신의 명예와 생명을 보호하려는..

이른바 '이중 전략'이라는 꽃놀이패를 사용했다는 것.

이것이 바로 데이비스가 주장하는 이른바 '전략적 공모설'이다.

로버트 핀레이 (Robert Finley)

허나..

여기엔 어디까지나 '재구성'이라는 한계가 존재한다.

두 사람이 사전에 공모를 약속했거나 증언을 맞추는 장면을 직접 기록한 자료는 없다. 다만, 데이비스는 베르트랑드의 행동과 두 사람의 심문 답변이 일치한 점을 간접적인 정황으로 해석할 뿐이다.

무엇보다, 아르노는 마지막 자백에서도 베르트랑드를 공범으로 지목하지 않았다. 사기꾼의 마음속에 들어섰던 최후의 찐사랑 때문이었을까?

역사학자 로버트 핀레이는 데이비스의 해석과 주장을 정면으로 비판했다.

핀레이는 동시대 기록 어디에도 베르트랑드를 공범으로 지목하는 직접 증거가 없으며, 당시 사람들과 법원 역시 그녀를 기본적으로 피해자로 다뤘다고 강조한다.

법원이 베르트랑드의 선의를 받아들여 처벌하지 않은 것도, 결국은 그녀가 속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라는 것.

또, 성관계를 통해 진짜 남편인 마르탱을 구별할 수 있었으리라는 추론도 약하다고 지적했다.

베르트랑드는 결혼 후 8년 넘게 마르탱과 성관계를 맺지 못했고, 관계가 가능해진 뒤에는 곧바로 임신했다. 둘 사이에서 아들이 태어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마르탱은 마을을 떠났고 말이다.

허면, 베르트랑드가 진짜 마르탱과 정상적인 부부관계를 경험한 기간은 매우 짧았을 가능성이 존재한다.

게다가 오랜 세월이 지난 뒤 돌아온 성인 남성의 신체적 차이를 성관계만으로 확실히 알아차렸을 것이라는 주장은, 어디까지나 직관에 의존하는 주장에 불과하다는 게 핀레이의 의견이다.

핀레이는 데이비스가 주장한 재판에서의 이중 전략에 대해서도 역시 부정한다.

베르트랑드가 아르노와 공모했다면, 그를 사형에 처할 수 있는 소송에 직접 원고로 참여한 행동은 지나치게 위험하다. 아르노가 유죄가 되면 연인은 죽고 자신도 간통이나 공모 혐의를 받을 처지에 놓일 수 있으니까.

또 아르노가 마르탱으로 인정되도록 몰래 도우려 했다면, 피고인을 고발하면서 동시에 그 고발이 실패하도록 증언을 조절해야 하는 모순이 생긴다.

즉, 두 사람이 서로 공모에 합의했든 이후 베르트랑드가 모든 사실을 알고서도 모른 채 홀로 공모에 나섰든 구태여 리스크를 짊어지는 행동이었다는 것.

따라서, 핀레이는 이 문제를 당시 당사자가 감수해야 했던 위험과 현실적인 행동 논리에서 해석한다.

글을 읽고 쓰지 못했을 가능성이 큰 농촌 여성이 가족과 판사, 또는 피고인까지 동시에 속이는 복잡하고 복합적인 전략을 사용했다고 보는 것은 과도한 추론이라고.

베르트랑드가 법정에서 불안해하고 진술을 망설였다는 기록은, 처음부터 끝까지 연기에 의했던 것이 아니라 가족의 압력과 남편에 대한 확신 사이에서 두려워했기 때문이라는 설명이 보다 심플하다고 말이다.

한편..

이러한 반론들이 나오면서..

데이비스는 기존 주장을 발표했던 학술지를 통해 재차 반론 입장을 내놓는다.

그녀는 먼저, 베르트랑드를 시대를 앞선 자유주의자나 낭만적인 영웅으로 묘사한 적이 없노라 강조했다.

또한 자신의 가장 강한 근거가 성관계에 대한 현대인의 직관이 아니라, 두 사람이 따로 심문받고도 은밀한 과거에 관해 계속 일치하는 답변을 내놓았다는 점이라고 재차 강조했다.

또 베르트랑드가 끝까지 일관된 공범이었다고는 보지 않았으며, 재판 후반에는 두려움과 죄책감 때문에 협력 의지가 흔들렸을 가능성도 함께 제시했다.

정리하자면..

베르트랑드는 가족의 재산과 혼인에 따른 지위, 성적 명예를 중요하게 여긴 16세기 농촌 여성이었으며, 바로 그 제약 안에서 자신과 자녀에게 유리한 길을 찾으려 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데이비스와 핀레이의 두 해석 중 어느 것이 보다 설득력 있는 주장일까?

먼저, 확실하게 제외할 수 있는 부분이 있다.

베르트랑드가 처음부터 아르노와 함께 마르탱의 삶을 빼앗기로 계획했다는 증거 및 정황 자체가 없다.

왜냐하면..

떠올려보자.

아르노가 처음 나타났을 때 그를 마르탱으로 인정한 사람은, 다름 아닌 마르탱의 여동생들과 삼촌인 피에르였다. 오히려 이를 통해 베르트랑드가 긴가 민가한 상황에서 주변의 여론을 통해 받아들였을 여지를 추측할 수가 있겠다.

헌데, 조금 이상한 점도 분명 존재하기는 하다.

이후 베르트랑드가 3-4년 동안 아무런 의심도 하지 않았으며, 피에르가 강제로 소송에 끌어들일 때까지 완전히 속고만 있었다고 단언할 근거 역시 충분하다고 할 수가 있을까?

그녀는 아르노를 오랫동안 적극적으로 보호했고, 가족의 압력에도 그가 남편이라고 주장했으며, 별도 심문에서 아르노가 답할 수 있는 은밀한 기억만을 제시했다.

허면..

가장 방어력 높은 판단은 다음과 같겠다.

베르트랑드는 처음에는 아르노를 실제 마르탱으로 믿었거나, 적어도 믿고 싶어 했을 가능성이 높다.

함께 사는 동안 정체를 의심하거나 알아차렸을 가능성은 충분하지만, 정확히 언제 무엇을 알았는지는 객관적 사료로는 확인되지가 않는다.

물론, 그녀가 중도에 진실을 알게 됐더라도 그것이 곧 계획된 공동 사기였음을 뜻하지는 않는다.

아르노와의 관계를 유지하려 했다는 가능성과, 끝까지 혼란과 기만 속에 있었다는 가능성이 모두 남아 있다.

데이비스의 주장은, 베르트랑드의 모순된 행동을 연결하는 해석을 제공한다.

핀레이의 주장은, 그 해석이 직접 증거보다 가능성의 연결에 크게 의존한다는 점을 정확히 짚는다.

하여, 베르트랑드를 단순한 피해자로 확정하는 것도..

치밀한 공범으로 확정하는 것도..

현존하는 사료의 범위를 넘어선다고 말할 수 있겠다.

이렇듯..

해당 사건은 역사상 가장 기묘한 가족 분쟁극답게 복잡한 인간 심리와 관계 역학이 서로 뒤엉켜있다.

그리고 빼놓을 수 없는 하나가 있다.

그건 바로, 마르탱을 도덕적 관점에서 그저 순수한 피해자로만 볼 수도 없다는 것이다.

그는 아내와 어린 아들을 남겨둔 채 12년 동안 아무런 소식도 전하지 않았고, 그 결과 베르트랑드는 재혼조차 할 수 없는 상태로 남겨졌다. 그가 그 결과를 얼마나 의식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장기간 가족을 방치한 책임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아르노가 처형된 뒤 마르탱은 법적으로 자신의 이름과 가족, 재산을 되찾았다.

마르탱과 베르트랑드의 관계가 이후 어떠했는지를 보여주는 즉각적인 기록은 없다.

서로를 용서했는지, 불신과 분노 속에서 살았는지, 혹은 현실적인 이유로 혼인 생활을 다시 이어갔는지 확인할 방도가 없다.

한편..

고등법원 판결 약 3년 후인 1563년의 지역 기록에서는, 마르탱과 삼촌인 피에르가 다시금 집안 분쟁 조정에 관여한 모습으로 등장한다.

적어도 마르탱은 마을 안에서 게르 집안의 구성원과 재산권자로 다시 자리를 잡은 것으로 보인다.

보다 후대의 자료에서는, 마르탱과 베르트랑드가 다시 부부관계를 맺었음을 간접적으로 보여준다.

1594년에 작성된 게르 집안의 재산분할 문서에는, 마르탱과 베르트랑드 사이에서 태어난 피에르와 가스파르라는 두 아들이 등장한다.

마르탱의 가출 직전 태어났던 첫아들 상시는 그 이전에 사망했다고 기록된다.

또한, 마르탱에게는 약 1575년경 두 번째 아내에게서 태어난 동명의 아들 피에르가 있었다.

이는 마르탱과 베르트랑드가 적어도 두 아들을 더 낳을 때까지 혼인 생활을 이어갔음을 보여준다. 이후 마르탱은 두 번째 아내와의 사이에서도 아들을 얻었으므로, 베르트랑드는 그 이전 어느 시점에 사망했을 가능성이 높다. 다만 정확한 사망 시점과 재혼 과정은 확인되지 않는다.

물론, 자녀가 태어났다는 사실만으로 두 사람이 정서적으로 화해했다거나 행복하게 살았다고 판단할 수는 없겠다.

아르노의 딸 베르나르드는 어머니 베르트랑드 곁에서 성장한 것으로 보인다.

법원이 아르노의 재산을 베르나르드에게 넘긴 덕분에 마르탱은 자신과 혈연관계가 없는 아이의 지참금을 부담하지 않아도 됐다.

17세기 중반까지 게르(마르탱 가문)와 롤스(베르트랑드 가문) 집안은 아르티가 지역에서 계속 살아갔으며, 서로 대부모가 되고 인접한 토지를 소유하는 관계를 유지했다.

자, 이야기 끝이다.

여담으로..

당연하게도..

이 마르탱 게르의 가출을 둘러싼 요절복통 가족 분쟁 활극은..

이후 소설과 드라마, 영화, 뮤지컬 등의 소재로 차용되며 지금도 꾸준히 전 세계적 대중적 인기를 자랑한다.

한 사람은 무엇으로 증명되는가.

한 사람의 정체성은 어디에 있는가.

태어나면서 얻은 몸과 이름? 자신이 기억하는 과거 어딘가에? 아니면, 가족과 공동체의 인정 속에서? 혹은 그 이름으로 어떤 삶을 살아왔는가에?

어쩌면 해당 사건에서 가장 섬뜩한 부분은..

한 남성이 다른 남성처럼 완벽하게 행동했다는 사실 그 자체 뿐만이 아닐 것이다.

정말 섬뜩한 부분은..

바로, 우리 모두가 한 사람을 알아보는 방식 자체가 생각보다 훨씬 불완전하다는 사실일 것이다.

참조

<Annales du Midi/Les silences des archives, le renom de l’histoire> Natalie Zemon Davis
<Annales du Midi/Questions de langues dans l’affaire Martin Guerre> Jean-François Courouau
<Arrest mémorable du Parlement de Tolose> Jean de Coras
<Histoire admirable d’un faux et supposé mary> Guillaume Le Sueur
<The American Historical Review/The Refashioning of Martin Guerre> Robert Finlay
<The American Historical Review/"On the Lame"> Natalie Zemon Davis
Natalie Zemon Davis

-끝-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