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상 가장 극단적인 저장 강박 사례

(AP)

미국 뉴욕 할렘의 128번가와 5번가가 만나는 곳에는 낡은 브라운스톤 주택 한 채가 있었다.

이곳엔 두 형제가 살고 있었으며..

둘은 집 안에다..

무려 100톤이 넘는 각종 물건을 '저장'했다고 한다.

역사상 가장 극단적인 저장 강박증 사례로 꼽히는 콜리어 형제 케이스.

과연, 형제에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분명 자극적이고 흥미롭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해당 사건을 소개하기 이전에..

그러한 것에 대해 최소한의 방지를 위해..

우리는 먼저 반드시 저장 강박증에 대한 개념을 파악할 필요가 있다!

지루하고 따분한 이야기일지라도 말이다!

물건을 버리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물건은 하나둘 늘어나 어느 순간 방을 넘어서까지 점령하고..

이윽고 사람이 지나갈 통로까지 사라진다.

우리는 이런 집을 만드는 사람을 일컬어 흔히 저장 강박증이라고 부른다.

해외에서 호더 증후군이라고도 부르는 이 저장 강박증은..

이제는 언론과 매체 등지에서 비교적 흔하게 등장하며 대중에게도 꽤나 전파가 이뤄진 현상이다.

저장 강박증은 정신의학에서 사용하는 정확한 이름이 따로 있다.

저장장애(Hoarding Disorder)라고 하며, 단순히 물건을 많이 쌓아 두거나 맹목적인 수집을 하는 상태를 의미하진 않는다.

현대 정신의학에서 저장장애의 핵심은, 물건의 실제 가치와 상관없이 버리거나 소유권을 포기하는 데 지속적인 어려움을 겪는 것이다. 물건을 보관해야 한다는 강한 필요성을 느끼고, 버리려고 하면 상당한 고통이 수반된다.

그 결과 물건이 생활 공간을 채우는 것을 넘어서며 일상생활과 사회적 기능, 때로는 화재와 낙상 같은 실제 안전 문제까지 야기한다.

(INS News Agency)

흥미로운 사실은..

의학계에서 해당 현상을 처음부터 하나의 독립된 정신질환으로 인지하던 게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꽤 최근에 이른바 업데이트된 것으로..

1966년, 영국의 의사 던컨 맥밀런(의료계의 선구자 격인 정신의였음)과 패트리샤 쇼는 British Medical Journal에 특이한 노인 환자들을 보고한 것이 공식적인 시초였다.

내용은 자신의 위생과 집의 청결을 거의 방치한 채 불결한 환경에서 고립되어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것이었는데, 오늘날의 저장장애를 그대로 기술한 연구는 아니었으나, 훗날 저장 행동과 심각한 주거 불결을 연구하는 과정에서 반복해서 돌아보게 되는 초기 임상 기록 가운데 하나였다.

그리고 1975년.

가장 오래되고 가장 저명한 의학 저널인 Lancet에 다음의 명칭이 등장한다.

Diogenes syndrome

극단적으로 자기 자신을 방치하며 더러운 집에서 살아가던 고령 환자 30명을 조사한 논문이었는데, 그중 일부는 쓰레기까지 모으고 있는 상태였다.

당시 논문은 이 행동을 syllogomania, 즉 병적인 수집 행동이라는 오래된 표현으로 기록했다.

그래서 오늘날에도 Diogenes syndrome을 호더의 옛 이름처럼 사용하는 경우가 있다.

여담으로..

이 디오게네스는 고대 그리스의 견유학파 철학자였던 시노페의 디오게네스에서 따온 것이다. 전승에 따르면, 디오게네스는 극히 검소한 생활을 지향하며 커다란 항아리에서 생활한 것으로 유명하다.

정확하게는 디오게네스가 추구하던 문명적 생활 규범의 거부를 빗대어, 사회적 관습에서 벗어나 극심하게 불결한 상태로 살아가면서도 그 상태를 별로 수치스러워하지 않는 공통점에 따라 그러한 이름을 붙인 것이다.

다만..

이를 '디오게네스 증후군이 훗날 저장장애로 명칭이 바뀌었다'고 이해하면 곤란하다.

전자는 노년기의 심각한 자기 방임과 주거 불결을 중심으로 발전한 임상 개념이고, 후자는 물건을 버리지 못하는 저장 행동 자체를 체계적으로 연구하면서 별도로 정립된 진단이다.

다시 돌아와..

Diogenes syndrome의 중심은 심각한 자기 방임, 불결한 주거 환경과 사회적 고립이다.

'저장'은 그중 일부에서 나타나는 특징일 뿐이다.

반대로, 현대의 저장장애 환자라고 해서 모두 극단적으로 불결하거나 자기 관리를 포기한 것도 아니다.

그러니까, 두 개념이 겹칠 수는 있으나 같은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저장장애 인식에 대한 본격적인 변화는 1990년대에 시작됐다.

1993년 미국의 심리학자 랜디 프로스트와 레이첼 그로스는 세계 최초의 행동치료 전문 학술지로 유명했던 Behaviour Research and Therapy에 The Hoarding of Possessions라는 논문을 발표했다.

논문에선 병원에 들어온 극단적인 사례 몇 명을 묘사하는 데서 벗어나, 사람이 왜 물건을 버리지 못하는지 체계적으로 측정하고 연구하고 있었다.

1996년 랜디 프로스트와 토마스 하르틀은 한 단계 더 나아갔다.

저장 행동을 단순한 '욕심'이나 '게으름'으로 보지 않고 물건을 분류하고 결정하는 과정의 어려움, 물건과 강하게 연결된 정서적 의미, '이걸 버리면 중요한 정보를 잃는다'거나 '언젠가 반드시 필요할 것이다'와 같은, 물건에 관한 신념과 같은 요소들이 서로 결합하는 인지행동 모델을 제시한 것.

또 2004년 개발된 저장 행동 측정 도구에서는 증상이 크게

버리기 어려움, 과도한 clutter, 지나친 획득

이라는 세 요소로 나뉘는 게 확인됐다.

저장 행동이 드디어 하나의 독립적인 연구 대상이 되기 시작한 것이다.

헌데, 당시 정신의학의 공식 분류는 지금과는 아직 달랐다.

1994년 나온 DSM-IV에서 hoarding은 독립된 질환 취급이 아니었다. 강박성 성격장애의 한 특징으로 들어가 있었고, 극단적인 저장 행동은 강박장애, 즉 OCD에서 나타날 수 있는 증상으로도 여겨졌다.

그래서 심각한 저장 문제를 지닌 사람은 OCD나 강박성 성격장애로 진단되기도 했고, 경우에 따라서는 마땅한 진단 범주에 들어가지 못하기도 했다.

한편..

연구가 쌓일수록 이상한 점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저장 문제를 지닌 사람들은 전형적인 OCD 환자들과 임상 양상이 완전히 같지가 않았다.

치료 반응도 달랐고, 유전/신경 심리/뇌 영상 연구에서도 차이가 보고됐다.

하여. 2000년대에는 학계에서 아예 질문이 바뀌기 시작한다.

"이게 정말 OCD의 한 증상일까?"

"OCD와 관련은 있지만 별개의 증후군은 아닐까?"

2010년에는 데이빗 마탁스 콜스와 랜디 프로스트를 비롯한 연구자들이 저장장애를 DSM의 새로운 독립 진단으로 만들어야 하는지 여부를 본격적으로 검토했다.

여기서 중요한 구분도 생겼다.

OCD 때문에 물건을 버리지 못하는 경우가 실지로 존재한다.

예컨대, 특정 물건을 버리면 누군가에게 재앙이 생길 것이라는 강박적 사고 때문에 버리지 못한다면 그 저장 행동은 OCD 증상의 일부일 수 있다.

반면, 그런 강박적 사고가 없어도 물건 자체를 버리는 것을 견디기 어렵고 집이 물건으로 가득 차 기능을 잃는 사람들이 있었다.

겉으로는 둘 다 '물건을 안 버리는 사람'이나, 그 안에서 작동하는 현상은 같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2013년.

결국 미국정신의학회는 DSM-5에서 Hoarding Disorder를 독립된 정신질환으로 처음 등재했다.

학계가 이 행동을 체계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한 지 약 20년.

또한..

오늘 이야기의 주인공인 콜리어 형제가 죽은 지 무려 66년 뒤의 일이었다.

각설하고..

현재 학계의 질문은 이제 '저장장애라는 병이 정말 존재하는가?'에서 상당히 멀어졌다.

대신..

왜 어떤 사람은 물건과 그렇게 강하게 결합하는가, 의사결정과 주의/기억은 어떤 역할을 하는가, 정서적 애착과 삶의 경험은 어떻게 개입하는가, 왜 기존 OCD 치료로는 충분하지 않았는가, 그리고 어떻게 하면 더 효과적으로 치료할 수 있는가와 같은 질문으로 옮겨가고 있다.

2025년, 최신 과학기술/연구 동향 검토인 state-of-the-science review조차 저장장애의 설명 모델을 하나로 확정하지 않는다.

전통적인 인지행동 모델뿐 아니라 생물심리사회적 모델, 애착 모델 등 여러 틀이 지속해서 검토되고 있으며, 저장장애에 맞춘 심리치료도 효과는 있으나 아직 치료 성과가 만족스러운 수준은 아니라는 평가다.

다시 말해..

명칭과 개념은 상당히 명확해졌지만, 원인을 모두 알아낸 것은 아니다.

자!

이제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시작하겠다.

부디, 저장장애에 대한 기존의 관념이 개선됐기를 바라며.

또, 글을 읽은 후에도 그러기를 바라며.

(AP)

1947년 3월 21일.

미국 뉴욕 할렘의 128번가와 5번가가 만나는 곳에는 낡은 브라운스톤 주택 한 채가 있었다.

주소는 2078 Fifth Avenue.

한때는 제법 번듯했을 집이었으나 당시에는 창문 상당수가 판자와 천, 신문지 등으로 막혀 있었고 외부인이 안을 들여다보기조차 어려웠다.

그곳에는 두 형제가 살고 있었다.

형인 호머 콜리어(Homer Collyer).

그리고 동생 랭글리 콜리어(Langley Collyer).

형제 중 동생인 랭글리 콜리어(Langley Collyer)

이날 뉴욕 경찰 앞으로 그 집 안에 시신이 있다는 익명의 신고가 들어왔다.

헌데..

현장에 도착한 경찰은 곧바로 심각한 문제와 마주했다.

집 안에 들어갈 수가 없었다.

현관과 지하실 쪽이 신문과 상자 또는 각종 물건으로 막혀 있었고, 결국 경찰관 한 명이 사다리를 타고 2층 창문으로 진입해야만 했다.

그리고..

가득한 물건 더미 사이에서 한 남성이 발견된다.

형제 중 형인 호머 콜리어였다.

집에는 분명 두 사람이 살고 있었는데 동생 랭글리가 보이질 않았다.

그는 어디로 간 걸까?

평범한 집이었다면 크게 이상할 일이 아니었을지 모른다.

잠시 외출했거나 다른 어딘가에 머물던 중이었거나 하며 말이다.

허나..

콜리어 형제는 이미 오래전부터 뉴욕에서 이름난 은둔자들이었다.

집 안을 제대로 본 사람은 거의 없었고, 형제는 외부인이 들어오는 것을 극도로 꺼렸다. 더구나 경찰이 마주한 내부는 정상적인 주거 공간이라고 부르기 어려웠다. 아니, 부를 수가 없었다.

신문, 잡지, 상자와 가구, 기계와 자동차 부품, 정체를 알 수 없는 온갖 생활용품이 사람이 걸어 다녀야 할 공간 일체를 차지하고 있었다. 1947년 4월 5일 자 New Yorker에서는 기자들이 현장을 찾았을 당시 경찰이 이미 집 밖으로 약 1만 파운드(약 4.5톤)의 신문과 잡지, 상자, 깡통과 잡동사니를 꺼낸 상태였다고 기록했다.

헌데..

그게 그 집의 최종 총량이 아니었다.

그저, 수색이 한창 진행 중이던 시점까지 나온 양에 불과했다.

물론..

그러는 동안 집 앞으론 구경꾼들로 인산인해가 이뤄졌다.

처음에는 한 은둔자의 죽음이었다. 그러다 시간이 지나면서 사건의 중심은 죽은 호머가 아니라 사라진 랭글리로 옮겨갔다.

경찰은 집 안을 열심히 파헤쳤다. 밖에서도 그를 찾았다. 각 언론도 랭글리의 행방을 쫓았다. 이상한 목격담들까지 쏟아졌고 수색 범위는 여러 주로 점차 확장됐다.

허나, 랭글리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는 형의 장례식에도 오지 않았다.

동생 랭글리의 행방에 대한 이야기 이전에..

시간을 조금 되돌려보겠다.

두 형제는 처음부터 이런 사람들은 아니었다

그러니까 쉬이 머리로 떠올릴법한, '가난한 환경에서 자라 사회와 단절된 사람들'이 아니었던 것이다.

오히려, 아주 정반대에 가까웠다.

아버지 허먼 리빙스턴 콜리어는 뉴욕에서 활동한 의사였다.

1909년 가족은 맨해튼의 머리힐을 떠나 할렘의 2078 Fifth Avenue로 옮겨왔다. 1947년 당시 New Yorker가 직접 기록한 것에 따르면, 가족의 집은 지하실을 둔 3층 건물이었다.

브라운스톤으로 마감 처리, 그리고 높은 현관 계단과 스테인드글라스까지 갖춘 집이었다. 훗날 경찰이 물건을 퍼내야 했던 집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형 호머는 법을 공부했고 실제 변호사로 일했다.

동생 랭글리는 공학과 음악에 관심이 많았고 피아노에도 상당한 애착을 보였다.

헌데, 전승되는 두 사람의 젊은 시절 이야기에는 조금 주의할 부분이 있다.

형 호머는 흔히 '해사법 전문 변호사'로 소개된다.

2007년에 법학자 로버트 자비스가 해당 전승을 따로 추적했는데, 확인되는 실제 경력은 해사법보다 부동산 관련 법률 업무 쪽에 가까웠다.

동생 랭글리의 이력 부문도 비슷하다.

후대 글에서는 컬럼비아대학교 공학 학위까지 취득했다고 단정하는 경우가 많지만, 1947년 컬럼비아 학생신문은 그를 공대의 '졸업생이라고 알려진(alleged graduate)' 인물이라고 표현했다.

그리고 카네기홀.

랭글리는 자신이 카네기홀에서 연주했으며, 뒤이어 당대의 유명 피아니스트 이그나치 얀 파데레프스키가 연주해 더 좋은 평을 받자 음악 경력을 포기했다는 이야기를 기자에게 했었다.

적어도 이 이야기를 랭글리가 직접 했다는 계보는 남아 있다. 허나 현재 확인된 공개 자료상 그의 카네기홀 공연을 독립적으로 입증하는 공연 기록은 찾을 수가 없다.

따라서, '실지로 카네기홀의 피아니스트였다'와 '자신이 카네기홀에서 연주했다고 말했다'는 분명 구분돼야 할 것이다.

결론적으로..

호머의 법률 경력은 별도 법학 연구를 통해 수정됐고, 랭글리의 학위는 당대 컬럼비아 자료부터 확정적이지가 않다. 카네기홀 이야기도 현재 확인되는 사안은 랭글리 본인의 주장뿐이다.

1920년대가 되면서 이들 가족의 형태도 달라졌다.

아버지는 집을 떠났고 1923년 세상을 떠났다. 어머니도 1929년에 사망했다.

그렇게..

넓은 집으로 결혼하지 않은 두 아들만이 남았다.

흔히, 이 무렵을 기점으로 형제가 갑자기 세상과 관계를 끊고서 물건을 모으기 시작한 것처럼 설명되지만 실제 변화는 그보다 느리고 복잡했다.

하나씩 차례로. 외부 세계와 연결된 선이 하나씩 끊겼다. 전화 사용을 중단했고 가스와 전기도 끊겼다. 집에는 부모 세대의 가구와 책, 의료 관련 물품 등 가족의 오래된 물건이 그대로 남았다.

그러므로, 훗날 경찰이 발견한 '모든' 물건을 '거리에서 주워 온 쓰레기'라고 생각하면 곤란하겠다. 콜리어 형제 저택은 이른바 쓰레기장이 되기 전 한 가족이 수십 년을 살아온 집이었다. 그리고 그 가족의 물건 위로 다른 물건이 계속해서 얹혀갔던 게 정확한 설명이겠다.

1930년대 초에는 더 결정적인 변화가 찾아왔다.

호머가 그만 시력을 잃은 것이다.

정확한 의학적 원인과 진행 과정은 후대 자료마다 다소 다르게 전해지지만, 이 시기 이후 호머가 시각 장애와 심각한 신체 문제로 외출하기 어려워지면서 동생 랭글리에게 크게 의존했다는 큰 흐름은 일치한다.

랭글리는 먹을 것과 물을 구해가며 형의 생활을 돌봤다.

그 과정에서 파생된 꽤 유명한 일화가 존재한다.

그건 바로, 호머에게 오렌지를 먹였다는 이야기다.

이는 랭글리 본인이 기자에게 한 설명에서 언급된다.

어떤 때는 호머가 일주일에 오렌지 100개를 먹은 적도 있으며, 그것이 시력 회복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랭글리는 믿었단다.

신문을 버리지 않는 이유도 설명했다.

언젠가 호머의 눈이 다시 보이게 되면, 그동안 읽지 못했던 뉴스를 모두 읽기 위함이었다는 것.

시간은 흘러..

1938년.

두 사람은 본격적으로 뉴욕의 '이상한 형제'가 된다.

컬럼비아대학교가 보관하는 기자 헬렌 워든 어스킨의 기록에는, 그녀가 이 무렵부터 부유하고 은둔적인 콜리어 형제를 이른바 'Mystery Men of Harlem'으로 다루는 일련의 기사를 썼노라 적혀 있다.

말인즉슨..

콜리어 형제는 1947년 경찰이 문을 열면서 처음 발견된 비밀스러운 사람들이 아니었다는 것.

뉴욕은 이미 그 집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세상이 그 집에 관심을 가질수록 형제는 오히려 문을 더 닫아갔다.

세상이 들어오려 할수록 더욱더 말이다.

한편..

기묘한 칩거로 인해 집 안에 숨은 재산이 있다는 소문이 돌면서 사람들이 구경하러 나섰다. 당시 보도를 추적한 후대 자료에 따르면 창문 파손과 침입 문제도 있었다고 전해진다.

아무도 집 안을 제대로 볼 수가 없으니 상상하기 유용한 빈칸이 너무도 많았다.

으레 그렇듯..

동네 아이들 사이에서는 형인 호머와 그 부모의 시신이 집 안에 있다는 이야기까지 떠돌았고, 지하실에는 자동차가 다락에는 보트가 있고, 집 안에는 셀 수 없이 많은 그랜드피아노와 거액의 현금이 있다는 소문도 돌았다.

분명, 전형적인 '수상한 집' 괴담처럼만 들린다.

헌데 기묘한 건..

훗날 이 형제의 집 문이 열린 뒤 일부 소문이 전혀 엉뚱한 이야기는 아니었다는 점이다.

집 지하실에서는 실지로 포드사의 모델 T가 나왔다.

다락에서 나온 보트라는 것은 실은 부서진 카누였고 말이다.

허나, 피아노는 정말 14대나 있었다.

반면..

부모와 호머의 시신이 집 안에 있다는 소문은 사실이 아니었다. 또 집 안의 물건들 자체가 엄청난 보물일 것이라는 기대도 훗날 경매 결과를 보면 상당히 과장된 측면이 있었다.

즉, 콜리어 형제 저택의 전설엔 과장도 있었으나 단순한 거짓말의 집합도 아니었다.

한편, 랭글리는 외부인을 막기 위해 물건을 장애물처럼 배치했다고 직접 설명했다. 집은 점차 물건을 보관하는 곳이면서 동시에 외부인의 이동을 막는 공간이 된 것이다.

가스계량기 제거 동안 경찰과 언쟁하는 호머 콜리어 (New York Daily News)

1939년.

뉴욕의 에너지 회사 콘솔리데이티드 에디슨이 시 집행관의 도움을 받아 집 안으로 들어가고자 했다. 1928년부터 사용되지 않던 가스계량기를 회수하기 위해서였다.

1942년에는 은행의 저당권 문제가 터졌다. 보안관 대리인들과 열쇠공이 잠기고 빗장까지 걸린 현관을 강제로 뚫어야 했다.

이는 1947년 뉴욕시 건물국 수석 검사 존 오코너가 New Yorker에 직접 회고한 바이기도 하다.

오코너의 설명에 따르면, 형제의 집이 실지로 강제 진입된 경우는 1939년과 1942년 두 차례라고 한다.

그리고..

이 대목에서 독자라면 한 가지 의문이 생길 수 있다.

저 정도로 위험한 집이었다면 뉴욕시는 왜 진작 조사하지 않았을까?

실지로 건물국에는 민원이 들어왔다.

문제는, 권한이 있어도 집 안까지 도달하는 과정 그 자체에 있었다.

당시 시 규정상 담당 공무원은 위험한 건물을 조사하기 위해 출입할 권한이 있었지만, 당연하게도 우선 신분증을 보여줄 대면 상대가 있어야 했다. 허나, 콜리어 형제는 초인종이나 노크에 응답하지 않았고 문은 언제나 잠긴 채였다.

잠긴 문을 강제로 넘는 순간부터는 별도의 법적 절차가 필요했다. 게다가 밖에서 보이는 것만으로는 내부가 얼마나 위험한지 확실히 알기도 어려웠다.

오코너는 이런 식의 교착 상태는 좀처럼 보기 어려운 경우였다고 설명했다.

그러니까 시가 위험을 알고도 단순히 방치했다기보다..

집 안을 확인하지 않고서는 실제 위험이 어느 정도인지 파악하기 어려운데, 그 집 안에 들어가는 것 자체가 법적 및 물리적으로 막혀 있었던 셈이다.

1942년, 사진기자를 피해 철제 울타리를 넘는 랭글리 (Langley Collyer)

1942년.

마침내 문이 뚫렸다.

그리고 랭글리는 은행에 6,700달러짜리 수표를 보내 저당 채무를 해결했다.

저당 문제를 오랫동안 방치하던 사람이, 실제 강제 진입이 시작되자 돈을 갚아버린 셈이었다.

그러자..

당연히 동네에선 또 다른 소문이 나돌기 시작했다.

저 집에 정말 큰돈이 있는 거 아니야?

여기서 잠시..

여기까지의 대목을 단순히 형제의 피해망상이라고 처리하는 것은 분명 어폐가 있을 수 있겠다.

당시 언론의 지대한 관심과 구경꾼들의 침입 우려가 실지로 존재했다. 동시에 랭글리는 집을 물건으로 막고 외부인이 통과하기 어려운 구조로 만들어 나갔다.

현실적인 위협이 존재했고, 그 위협에 대한 대응은 점점 더 극단적으로 변했다.

그렇다고 랭글리가 완전히 집 안에서만 산 것도 아니었다. 그는 밤이면 밖으로 나왔고 순찰 경찰과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1946년에는 옆 건물 침입 사건의 증언을 위해 소환장을 받고 법정에도 출두했다. 당시 사진 속 랭글리는 낡은 양복과 오래된 셔츠, 넥타이, 그리고 길게 늘어진 콧수염 때문에 마치 다른 시대에서 온 사람처럼 보인다. 그의 변호사도 랭글리를 1880년대에서 걸어 나온 신사에 비유했을 정도.

그러니까 세상과 완전히 단절된 사람은 아니었다. 밖으로 나갈 수 있었고, 법정에도 나왔으며, 경찰과 대화도 했다. 그러면서 집으로 돌아가면 다시 문을 걸어 잠갔다.

그로부터 몇 달 뒤인 1947년 3월.

경찰이 다시금 형제의 집을 찾아온다.

집 안에 죽은 사람이 있다는 익명의 신고 전화 때문이었다.

그렇다.

이제 다시 이야기의 처음으로 돌아갈 차례다.

1947년 3월 21일.

미국 뉴욕 할렘의 128번가와 5번가가 만나는 곳에는 낡은 브라운스톤 주택 한 채가 있었다.

주소는 2078 Fifth Avenue.

한때는 제법 번듯했을 집이었으나 당시에는 창문 상당수가 판자와 천, 신문지 등으로 막혀 있었고 외부인이 안을 들여다보기조차 어려웠다.

그곳에는 두 형제가 살고 있었다.

형인 호머 콜리어(Homer Collyer).

그리고 동생 랭글리 콜리어(Langley Collyer).

이날, 뉴욕 경찰은 집 안 가득한 물건 더미 사이에서 시신을 발견한다.

형제 중 형인 호머 콜리어였다.

경찰 인력이 가리키고 있는 것은, 만지면 모든 쓰레기가 넘어뜨려지는 이른바 '함정 상자' (AP)

형인 호머가 시신으로 발견된 뒤 경찰은 동생 랭글리를 찾는 데 매달렸다.

집을 뒤지고 밖에서도 수색이 이뤄졌으나 그는 어디에도 없었다.

심지어..

형의 장례식에도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신문에서는 랭글리가 이미 죽었을 가능성까지 거론하기 시작했다.

한편..

그 사이 형제의 집에서는 물건만 계속 나왔다. 그리고 그 광경 자체가 하나의 볼거리로 전락했다.

처음 경찰이 출동했을 때부터 현장에는 이미 수백 명의 구경꾼이 모였고, 수색이 길어질수록 콜리어 형제 저택은 사실상 공개된 미스터리 극장처럼 변해갔다. 사람들은 경찰이 창문과 문으로 물건을 꺼내는 모습을 지켜봤고, 신문은 그날그날 새로 발견된 물건과 랭글리의 행방을 경쟁적으로 전했다.

당시 언론 경쟁이 어느 수준이었느냐면, Daily News와 Daily Mirror가 랭글리의 발견으로 이어질 독점 정보를 얻기 위해 경쟁적으로 돈을 내걸 정도였다.

그렇게..

한쪽에서는 집이 톤 단위로 비워지고, 다른 한쪽에서는 전국에서 랭글리를 봤다는 전화가 빗발쳤다.

집 안에서는 1899년의 전기공학 잡지, 자동차 차체와 바퀴, 철조망, 낡은 라디오 캐비닛, 유모차, 부러진 양산, 기계식 감자 껍질 벗기는 장치 등 100년 가까운 가족의 흔적이 서로 뒤엉킨 채 바깥으로 쏟아졌다.

헌데..

집에서 끝내 나오지 않는 것이 하나 있었다.

그건 바로, 동생인 랭글리였다.

뉴욕 사람들은 결국 랭글리의 수소문을 집 밖에서 진행하기 시작했다.

뉴어크에서는 그가 냉동 커스터드를 먹고 있었다는 제보가 들어왔고, 노스캐롤라이나에서는 히치하이킹을 했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애디론댁에서 송어낚시를 했다거나 브루클린 지하철에서 봤다는 사람도 있었다.

이런 제보들은 결국 랭글리의 발견으로 이어지지 않았다.

당시 자료를 추적한 연구에 따르면, 수색 범위는 9개 주까지 확장됐다고 한다.

그렇게 전국적인 관심 속에서 본격적인 수색 작업이 있은 지 18일이 지났다.

1947년 4월 8일.

계속해서 집 안을 치워 나가던 사람들이 2층의 물건더미 안에서 무언가를 발견한다.

사람의 몸이었다.

랭글리 콜리어가 발견된 위치는 좀 이상했다.

지하실 깊숙한 곳도 아니고 아무도 몰랐던 비밀방도 아니었다.

좀.. 아니, 정말 이상하게도..

형인 호머가 발견된 곳에서 불과 3미터 떨어진 곳에서 발견됐다.

경찰이 18일 동안 집을 파헤쳤고 수색 범위는 다른 주들로 확장됐건만..

랭글리는 처음부터 형에게서 몇 걸음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었던 것이다.

랭글리의 시신이 발견되면서 사건의 순서도 뒤집혔다.

처음 경찰이 호머의 시신을 발견했을 때만 해도 자연스럽게 이런 그림이 그려졌었다.

호머는 죽었다. 랭글리는 사라졌다. 살아 있는 랭글리를 찾으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헌데..

시신의 상태와 부검 결과..

먼저 죽은 사람은 호머가 아닌 랭글리였다.

랭글리는 물건 더미 사이의 좁은 통로 안에서 잔해에 깔린 채 발견됐다. 당시 부검 보도와 이를 추적한 후대 전문 연구는, 그가 떨어진 물건에 의해 질식했을 것이 가장 유력하다고 정리한다.

여기서 유명한 가설이 나오는데, 랭글리가 호머에게 음식을 가져가던 중 침입자를 막기 위해 자신이 설치한 함정을 잘못 건드리며 물건 더미가 무너졌다는 것이 그것이다.

당시 현장과 형제의 생활 방식을 생각하면 설득력이 없지만은 않은 가설이다.

허나, 분명 정확하게 구분할 필요가 있다.

랭글리가 좁은 통로의 잔해 아래에서 발견됐고, 당시 부검이 떨어진 잔해에 의한 질식을 유력하게 봤다는 것은 사실이다. 반면, 형에게 음식을 가져가다가 자신이 만든 함정을 스스로 작동시켰다는 부분은 현장 상황을 바탕으로 한 경찰의 재구성 중 하나에 불과하다.

결국, 그 순간을 직접 목도한 사람은 없다.

그렇다면 호머는?

호머는 이미 앞을 볼 수 없었고 몸을 자유롭게 움직이기도 어려운 상태였다.

하여, 집 밖에서 음식과 물을 공수하고 외부 세계와 연결해 주는 사람은 사실상 랭글리 한 명뿐이었다.

그런 랭글리가 사망하고 말았다.

그것도 호머와 불과 몇 걸음 떨어진 곳에서.

부검 결과를 추적한 후대 연구에 따르면, 호머의 죽음을 기아에 따른 심부전으로 정리한다.

즉, 가장 강력한 사건의 재구성은 다음과 같겠다.

동생인 랭글리가 먼저 사망하면서 호머에게 음식과 외부 세계를 연결해 주던 유일한 통로가 끊겼고, 호머도 뒤이어 이른바 쇠약사에 이르게 됐다

다만 남겨진 미스터리는..

호머가 동생 랭글리의 사고 순간을 들었는지, 그리고 그 끔찍한 마지막 며칠을 정확히 어떻게 보냈는지에 대한 것이었다.

랭글리의 시신을 조사 중인 경찰 (AP)

형제 사이를 막고 있던 것은 '벽'이 아니었다.

둘 사이를 가로막고 있던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수십 년 동안 집 안에 남고 새로 들어 왔던 그들의 물건이었다.

그렇다면..

형제의 집에서는 실지로 어떤 물건들이 나왔을까?

잘 알려진 목록에 따르면..

14대의 피아노, 2만 5천 권의 책, Model T 차량, 초창기 엑스레이 장비, 총기, 말의 턱뼈, 병 속의 인체 장기, 그리고 140톤의 쓰레기가 있겠다.

우선 피아노 14대. 이건 단순한 인터넷 괴담이 아니다. 1947년 당시 보도에 실제 등장하며 후대 전문 연구에서도 반복 확인되는 품목이다.

책 역시 엄청난 양이었다. 후대 법률 및 문화사 연구에서는 약 2만 5천 권으로 집계하기도 한다.

차량도 있었다. 집 지하에는 오래된 Model T 차체와 부품이 남아 있었다. 랭글리는 생전 기자에게 차량이 아버지의 것이었다고 설명했다.

초기형 엑스레이 장비와 말의 턱뼈, 총기류 같은 기묘한 물건들도 후대에 당시 보도를 추적한 자료에서 확인된다.

그리고 가장 자극적으로 전파되던 것.

바로, 병 속의 인체 장기.

실제 기록 계보에 따르면 꽤나 구체적이다. 1947년 보도까지 출처를 역추적한 문화사 연구에서 확인되는 것은 포름알데히드계 보존액에 보존된 '머리가 두 개인 인간 태아 표본'이 든 병이다.

그러니까, 병 1개에 보존액과 인간 태아 표본 1구가 있었는데, 머리가 2개인 표본이었다는 것.

허면, 이는 두 머리를 지닌 결합쌍둥이 태아의 표본이었을까?

허나, 관련해 구체적인 추가 정보가 전해지고 있지 않다.

다만, 형제의 아버지가 의사였다는 점으로 미루어 그가 보유하던 의학 및 해부학적 표본이 아니었을까 추측될 뿐.

당시 의사나 의학 교육 및 병리학 환경에서 선천성 기형 태아를 액침 표본으로 보존하는 것 자체는 이상한 일이 아니었고, 집 안에는 형제 개인의 물건뿐 아니라 부모와 선대에서 내려온 물건들이 수십 년 동안 남아 있었다.

피아노를 옮기고 있는 인부들 (AP)

콜리어 형제 저택의 수색은 며칠짜리 작업이 아니었다.

물건은 서로 다른 날짜마다 계속해서 발견됐고, 경찰이 본 것과 기자가 현장에서 적은 것, 경매에 넘어간 것, 후대 연구자가 다시 합산한 것이 서로 다를 정도였다.

그래서 오늘날 인터넷에서 떠도는 거대한 목록은 실지론 서로 다른 시점의 기록을 후대에 합쳐놓은 것에 가깝다.

따라서 피아노 14대처럼 사실 지표가 강한 항목도 있지만, 물건 수량과 총중량을 모두 같은 수준의 확정값으로 취급할 수만은 없는 노릇이다.

무게도 마찬가지다.

1947년 6월 New Yorker는 당시 집이 100톤을 훨씬 넘는 물건으로 채워져 있었다고 표현한다. 후대 연구에는 120톤 이상, 130톤 등 서로 다른 집계가 나온다.

왜냐하면..

집계 시점이 서로 다를 수도 있고, 무엇을 junk에 포함했는지가 다를 수도 있으며, 후대 전재 과정에서 특정 숫자가 굳어졌을 가능성도 있기 때문.

따라서 현재로서는 다음의 표현이 가장 안전하겠다.

100톤을 훨씬 넘는 물건과 폐기물

그리고 한 가지 더!

그 모든 것을 '쓰레기'라고 부르는 것도 정확하지 않다.

부모 세대의 가구와 의료 관련 물품, 법률/의학/공학책, 악기와 가족의 유품, 오래된 생활용품, 랭글리가 밖에서 들여온 물건과 실제 폐기물이 한곳에 뒤섞여 있었으니까 말이다.

콜리어 저택은 쓰레기장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한 가족의 시간이 한 번도 제대로 빠져나가지 못한 집이기도 했다.

1947년 6월 진행된 경매 현장 (AP)

한편..

형제의 죽음 이후 일부 물건들이 경매에 나왔다.

후대 문화사 연구가 당시 경매 기록을 추적한 결과 14대의 피아노 가운데 실제 팔린 것은 네 대였고, 전체 경매 수익은 약 1,800달러에 불과했다고 한다.

또 42번가에서 박물관(정확하게는 기형 쇼 및 구경거리 박물관)인 Hubert's Dime Museum and Flea Circus를 운영하던 맥스 셰퍼는 카펫과 아기 침대, 커피 그라인더, 호머의 오래된 책상, 악기와 녹슨 총검 같은 물건들을 묶어 300달러어치를 구매했다. 그리니치 빌리지 지역의 골동품상 제이콥 루베트킨은 높이가 약 2.7미터에 이르는 거대한 음악 시계를 310달러에 구매했다.

이렇듯 구매자들은 낡고 망가진 물건에서 '콜리어 형제의 집에서 나온 물건'이라, 손님을 끌 법한 출처에 포커스를 뒀다.

죽고 나서도 형제의 물건들은 구경거리가 된 셈이다.

그렇게..

형제의 사망 이후 밖으로 쏟아져 나온 물건들은 일부는 버려지고 태워졌으며, 일부는 경매에 붙거나 구경거리가 됐다.

형제의 집도 오래가지 못했다.

수분을 먹은 종이가 위층 바닥에 과도한 하중을 주고 있었고 지붕과 벽, 굴뚝 등에도 손상이 확인됐다.

1947년 현장을 확인한 뉴욕시 건물국 검사관들은 부식된 금속 지붕과 갈라진 후벽 및 굴뚝, 새는 천장 바로 아래까지 쌓인 물 먹은 종이 더미를 확인했다.

당시 건물국이 해당 층에 안전하다고 보던 하중은 제곱피트당 약 40파운드(40 lb/ft² ≈ 195 kg/㎡ ≈ 1.92 kPa)였는데, 콜리어 형제 저택의 실제 적재하중 추정치는 그 두 배인 약 80파운드였다.

결론적으로, 콜리어 형제 저택에서는 종이 자체의 막대한 양에 더해 지붕 누수로 종이가 물까지 먹고 있었던 것.

결국, 형제의 저택은 철거가 이뤄진다.

콜리어 형제의 이야기는 여기서 끝이 아니다.

아직, 남은 질문이 있다.

그들은 정말 '호더'였을까?

사진만 보면 그렇게 부르고 싶어지는 것도 이해된다.

생활 공간 일체가 물건에 점령당했고 버려지지 않은 물건은 계속 늘어만 갔으며, 통로는 사람이 겨우 지날 정도로 좁아졌다. 그러다 결국 안전과 일상 기능까지 무너졌다.

현대 미국정신의학회(APA)가 설명하는 저장장애(Hoarding Disorder)의 핵심도 단순히 물건이 많다는 데 기준을 두지 않는다.

물건의 실제 가치와 관계없이 버리거나 소유권을 포기하는 데 지속적인 어려움을 겪고, 보관해야 한다는 필요감과 버릴 때 고통이 뒤따르며, 그 결과 생활 공간이 물건으로 막혀 원래의 용도로 사용하기 어려워지고 일상 기능이나 안전 등에 심각한 문제가 생기는 것이 핵심이다.

이러한 기준과 콜리어 형제 저택을 비교하면 겹치는 부분이 상당히 많다.

법정신의학자 케네스 와이스도 콜리어 형제를 현대 hoarding 논의의 대표적인 역사 사례로 검토했다.

그렇다면 진단 끝?

아니다.

현대 정신질환 진단은 비단 집 사진만 보고 붙여지는 것이 아니다. 당사자가 물건을 보관하려는 필요감과 버릴 때의 고통, 생활 공간의 기능 손상과 일상 기능 등을 함께 평가해야 한다.

콜리어 형제는 1947년에 사망했고 현대 기준의 임상 면담을 받은 적도 없다.

특히 주의할 점은, 물건을 직접 가져오고 신문 보관 이유를 설명하며 집의 장애물을 만든 행동 기록은 랭글리에게 훨씬 많이 집중돼 있다는 것. 형인 호머가 이 축적 행동에 어느 정도 직접 관여했는지는 분명 불분명하다.

따라서 특히 랭글리의 행동과 집의 최종 상태가 현대 저장장애와 강하게 겹친다고 말할 수는 있겠지만, 두 형제 모두에게 현대 DSM 진단을 소급해 확정하는 것은 자료가 허용하는 범위를 넘는다고 평할 수 있다.

더구나 집의 최종 상태는 하나의 원인으로만 만들어진 것도 아니었다. 부모에게서 물려받은 물건, 호머의 장애와 랭글리의 돌봄, 외부인의 침입을 막으려는 방어 목적, 사회적 고립과 계속되는 물건의 축적이 수십 년 동안 같은 집에서 겹쳐진 결과였다.

흥미로운 사실은,저장장애가 독립된 현대 진단으로 정립되기 훨씬 이전부터 콜리어 형제의 이름이 이미 하나의 유형을 뜻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현대의 'hoarder' 개념으로 콜리어 형제를 바라보는 것만이 아니라, 콜리어 형제라는 유명한 사건 자체가 훗날 사람들이 'hoarder'를 상상하는 방식에도 영향을 줬다는 것이다.

형제의 이름이 영향을 준 것은 또 있다.

그건 바로, 소방 현장이다.

'콜리어 저택'이라는 명칭이 그것인데, 뉴욕 소방 현장에서는 물건과 폐기물이 과도하게 쌓여 진입과 구조가 어려운 집을 가리켜 'Collyers' Mansion'이라고 부르는 용례가 실지로 있어 왔다.

2010년 소방 전문지 Fire Engineering에서는, 현장에서 'Collyers' Mansion'이라는 보고가 들어오면 대원들이 어떤 종류의 위험을 마주하게 될지 곧바로 이해한다고 설명한다.

또, 법률과 정신 건강 관련 문헌에서는 'Collyer Brothers Syndrome'이라는 표현이 사용된 사례도 있다.

물론 이는 DSM의 공식 진단명은 아니나, 형제의 이름이 극단적인 clutter와 저장 행동의 대명사처럼 사용돼왔다는 의미에 가깝겠다.

또한, 형제의 옛집이 있던 자리에는 지금 작은 공원이 들어섰다.

뉴욕시 공원국이 관리하는 이 공원의 이름은, Collyer Brothers Park이다.

호머와 랭글리.

콜리어 형제.

두 사람은 세상과 자신들 사이에 점점 더 많은 물건을 쌓았다. 가족의 유품과 책, 신문, 언젠가 쓸 수 있다고 생각한 물건들이 남고 또 들어왔다. 일부는 외부인을 막는 장벽이 됐고, 최후에는 그 물건들이 두 형제 사이까지 가로막았다.

수색 범위가 9개 주까지 확장됐던 랭글리는 형 호머에게서 고작 3미터 떨어진 곳에서 먼저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랭글리에게 의존하던 호머도 뒤이어 세상을 떠났다.

세상으로부터 자신들을 지키기 위해 점점 닫혀져가던 형제의 집은..

마지막에 이르러 세상이 두 사람에게 닿는 것까지도 막아버렸다.

그렇게..

콜리어 형제의 저택은 비워졌다.

참조

<A Cognitive-Behavioral Model of Compulsive Hoarding> Randy O. Frost & Thomas L. Hartl
<Cabinet/Buried Alive: At Home with the Collyer Brothers> Christopher Turner
<Collyer Curiosa: A Brief History of Hoarding> Scott Herring
<Columbia Daily Spectator> 1947년 3월 25일
<Diogenes Syndrome: A Clinical Study of Gross Neglect in Old Age> A. N. G. Clark & G. D. Mankikar & I. Gray
<Fire Engineering/First-Due Battalion Chief: Collyer’s Mansions> Daniel Sheridan
<Helen Worden Erskine papers, 1860–1984> Columbia University Rare Book & Manuscript Library
<Hoarding Disorder: A New Diagnosis for DSM-V?> David Mataix-Cols & Randy O Frost & Alberto <Pertusa & Lee Anna Clark & Sanjaya Saxena & James F Leckman & Dan J Stein & Hisato Matsunaga & Sabine Wilhelm
<Hoarding, Hermitage, and the Law: Why We Love the Collyer Brothers> Kenneth J. Weiss
<Measurement of Compulsive Hoarding: Saving Inventory-Revised> Randy O. Frost & Gail Steketee & Jessica Grisham
<Navigating the Goat Paths: Compulsive Hoarding, or Collyer Brothers Syndrome, and the Legal Reality of Clutter> Keith P. Ronan
<NYC Parks/Collyer Brothers Park> New York City Department of Parks & Recreation
<Possessed: A Cultural History of Hoarding / Introduction to Hoardiculture> Rebecca R. Falkoff
<Senile Breakdown in Standards of Personal and Environmental Cleanliness> Duncan Macmillan & Patricia ShawDuncan Macmillan & Patricia Shaw
<State of the Science: Hoarding Disorder and Its Treatment> David F. Tolin & Blaise L. Worden & Hannah C. Levy
<The Curious Legal Career of Homer L. Collyer> Robert M. Jarvis
<The Hoarding of Possessions> Randy O. Frost & Rachel C. Gross
<The New Yorker/Once in a Century>
<The New Yorker/The Talk of the Town> Eugene Kinkead & Brendan Gill
<What is Hoarding Disorder?> American Psychiatric Association

-끝-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