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
* 본 글은 단순히 범죄사건과 관련한 호기심을 충족시키고자 오락적 목적을 추구하는 것이 아닌, 사건의 악랄한 범행성을 알림과 동시에 범죄의 연보年譜를 통한 교육에 그 목적을 두고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오랜 세월 대중문화 속 범죄 이야기를 접한 우리는..
간혹..
자신이 그 범죄자가 된 공상을 하기도 한다.
혹은, 그 범죄자를 자신이 쫓는 공상을.
하여, 아라비안나이트의 세 개의 사과에서부터 근대 에드거 앨런 포를 거쳐 현재도 대표적인 스테디셀러 장르 중 하나가 바로 추리물이다.
오늘 이야기는 20세기 미국에서 발생했던..
그 시대 공상꾼들의 가슴에 거센 불을 지폈던 문제적 범죄에 관한 것이다.
1972년 4월 7일.
미국 상공을 날던 보잉 727 여객기 하나가 갑자기 항로를 틀었다.
기내에는 권총과 수류탄을 든 남자가 있었고, 그의 요구사항은 제법 구체적이었다. 현금 50만 달러. 낙하산 네 개. 그리고 자신이 지정하는 방식 그대로 비행할 것.
항공사는 요구를 받아들였다.
여객기는 샌프란시스코에 착륙했고, 돈과 낙하산이 실린 뒤 다시 밤하늘로 올라갔다.
그리고..
몇 시간 뒤, 범인은 유타 상공에서 낙하산을 메고 비행기 밖으로 사라졌다.
여기까지만 해도 충분히 영화 같은 이야기.
헌데..
이 남자의 이력을 들여다보면 이야기가 한층 흥미(?)로워진다.
남자는 베트남전에 참전한 헬기 조종사, 낙하산 강하 훈련과 폭파 관련 훈련까지 받은 군인, 전투비행으로 훈장까지 받은 준위, 대학에서는 경찰/법 집행 분야를 공부했고 교회에서는 주일학교를 가르쳤다. 아내와 어린 두 아이도 있었다.
남자는 결국 붙잡혔다.
45년형을 선고받았다.
허나, 이야기는 끝나지 않았다.
남자는 2년 뒤 감옥을 탈출했고, 다시 전국적인 수배망 속으로 모습을 감쳤으며, 마지막에는 FBI와 총격전을 벌였다.
남자의 이름은, 리처드 플로이드 맥코이 주니어였다.
맥코이의 일대기를 시간순으로 따라가 보도록 하겠다.
그러기 위해선 우선 이야기를 1972년의 그 비행기 안이 아니라 약 30년 전으로 돌릴 필요가 있겠다.
맥코이는 1942년 12월 7일 미국 노스캐롤라이나주 킨스턴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리처드 플로이드 맥코이 시니어는 직업군인이었다. 2차세계대전 당시 제7기갑사단에서 복무했고 이후 한국전쟁에도 참전했다. 때문에 맥코이 가족은 한곳에 오래 머물지 않았다. 맥코이는 어린 시절 뉴저지주의 사우스리버와 버몬트주의 벌링턴, 그리고 노스캐롤라이나 여러 지역의 학교를 옮겨 다녔다.
아버지가 한국에 나가 있던 1953-1954년에는 노스캐롤라이나 코브시티에 있는 할머니 윌리 스트라우드 맥코이의 농장에서 지냈다.
훗날 맥코이가 체포된 직후 그의 어머니가 기자에게 들려준 이야기에 따르면, 당시 어린 맥코이에게는 패치라는 이름의 조랑말이 있었단다. 맥코이는 맨발로 농장을 돌아다니며 말을 타고 보이스카우트 활동도 열심히 하던 아이였다고 한다.
그렇게 여러 곳을 옮겨 다니던 가족은 결국 롤리에 정착했다.
맥코이는 1961년 롤리의 니덤 브로턴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학교에서는 인쇄 기술을 배우고 밴드에서 트롬본을 연주했다.
헌데..
비교적 평범하게 보이는 이 어린 시절의 기록 사이에도 경찰이 등장하는 사건이 두 차례 있었다.
맥코이는 14세였던 1957년, 아버지의 스테이션왜건을 몰다가 경찰의 추격을 받았다. 차가 도랑에 빠지자 이번에는 차에서 내려 숲으로 달아났고, 경찰은 약 2마일(약 3.2km)을 쫓았지만 현장에서 맥코이를 잡을 순 없었다고 한다.
4년 뒤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고등학교 졸업을 앞둔 1961년, 이번에는 폭스바겐을 몰다가 다시 경찰과 추격전을 벌였다. 차량은 주차장에서 뒤집혔고 함께 타고 있던 십 대 친구는 팔이 부러졌다. 당시 보도에 따르면 맥코이는 난폭운전과 폭죽 소지 혐의를 받았다.
물론, 이 두 사건을 훗날의 범죄를 미리 보여주는 '징조'처럼 읽는 건 간단하다.
허나, 그건 결말을 이미 알고 있는 사람이 과거를 바라보는 방식이겠다.
한 십 대가 두 차례 위험한 운전과 도주 문제를 일으켰다는 것 까지가 확정된 사실이고, 그것이 11년 뒤 항공기 납치와 어떤 심리적/인과적 관계가 있었는지는 확인할 도리가 없겠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맥코이는 1961년 가을 유타주의 브리검 영 대학교(이하 BYU)에 입학한다.
이후 그의 20대 이력은 학교와 군대를 여러 차례 왕복한다.
FBI가 1974년 도주 중이던 맥코이의 신상을 정리하면서 만든 경력표를 보면 이렇다.
1961년 BYU 재학 -> 1962-1963년 육군 복무와 Airborne Special Forces 경력 -> 1964년부터 1965년 6월까지는 베트남 복무 -> 1965년 가을에는 다시 BYU로 복학 -> 1966년 1월에는 육군 헬기 조종학교 과정 -> 1967년 3월부터 1970년까지 다시 미 육군에서 복무 -> 1970년부터 1972년 봄까지 또다시 BYU에 재학
한마디로 학교를 다니다 군으로, 다시 학교로, 다시 군으로, 그리고 또 대학으로 돌아온 셈이었다.
TIME은 그가 베트남에서 두 차례 복무했으며 폭파 관련 임무와 조종사 경력을 지녔다고 보도했다. FBI의 경력자료 역시 그가 헬기 조종사였고 낙하산 강하와 폭파 관련 전문 훈련을 받았다고 기록한다.
그의 군 경력에는 실제 전투비행 기록도 남아 있다.
Military Times의 Hall of Valor에 전재된 Distinguished Flying Cross(수훈비행십자장) 표창문에 따르면, 1967년 11월 8일 새벽 맥코이는 미 육군 준위(WO-1)로 제11기갑기병연대의 공중기병중대에서 헬기를 조종하고 있었다.
장소는 남베트남 탄린에서 북서쪽으로 약 7마일(약 11.3km) 떨어진 싸 주이 껀(Xã Duy Cần) 부근.
당시 베트콩 대병력에 의해 남베트남 지방군 진지가 함락될 위기에 놓였다는 소식이 들어왔다. 지상에는 짙은 안개가 깔려 있었고 구름층까지 끼어 있었으며, 표창문에 따르면 맥코이에게는 해당 지역의 전술지도조차 없었다.
그는 계기와 무선에 의존해 진지를 찾아나섰다.
그리고 현장에 도착하자 자동화기와 소화기 사격을 받았다.
맥코이는 조명탄으로 표시된 진지와 예광탄으로 드러난 교전 지점을 확인한 뒤, 헬기로 반복적인 공격 비행을 하며 로켓을 발사했다. 탄약이 떨어질 때까지 공격이 계속됐고, 이 비행으로 인해 Distinguished Flying Cross(수훈비행십자장)를 받는다.
여기서 잠시..
맥코이의 군 경력은 확실하게 어디까지 증명됐을까?
맥코이에 관한 동시대 기사와 후대 자료에는 Green Beret(미 육군 특수부대), Purple Heart(전상장), 전쟁영웅 같은 표현이 자주 따라붙는다.
허나, 현재까지 확실하게 진위가 확인되는 것은 FBI 경력표의 헬기 조종/낙하산/폭파 관련 훈련, 베트남 복무, 그리고 Military Times가 원 General Orders(부대 공식 명령문) 번호와 함께 전재한 Distinguished Flying Cross(수훈비행십자장) 표창 내용이다.
따라서 실제 비행/강하 능력이 있었다는 판단은 자명하겠지만, 인터넷에서 반복 서술되는 군 경력의 모든 수식어까지 한꺼번에 사실로 묶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럼에도 적어도 한 가지는 분명하다.
사건이 있었던 1972년의 맥코이는 난생처음 비행기를 타보고 낙하산을 만져보는 사람이 아니었다는 것.
다시 돌아와..
군 복무 사이사이 그는 다시 학교와 가정으로 복귀했다.
맥코이는 결혼했고 두 아이의 아버지가 됐다.
1972년 항공기 납치 사건 직후 TIME이 주변인들을 취재한 기사에는 조금 뜻밖의 모습이 보여진다. 그는 독실한 몰몬교 신자로 알려져 있었고, 사건이 벌어지기 불과 한 달 전까지 주일학교를 가르쳤다. 집주인은 그를 좋은 사람이라고 평했고, 같은 교회의 사람들과 학교 주변인들 역시 그의 체포 사실을 쉬이 받아들이지 못했다.
한편, 대학에서는 범죄와 법 집행 분야에 관심이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FBI는 당시 맥코이를 BYU의 Police Science(경찰학) 전공생으로 정리했고, TIME은 그가 law enforcement(법집행 분야)를 공부하고 있었다고 보도했다. 한 동급생은 그가 조직범죄에 유난히 관심이 많았고 범죄 조직을 잡는 일을 하고 싶어 했다고 회고하기도.
즉, 그의 이력만 따로 떼어놓고 보면 꽤나 묘한 조합이 완성되는 것이다.
전투 헬기를 몰았고 낙하산 강하와 폭파 관련 훈련을 받았으며 대학에서는 경찰/법 집행 분야를 공부했다. 그러면서 교회에서는 주일학교를 가르치고 두 아이를 양육하는 아버지이기도 했다.
FBI는 훗날, 그가 당시 심각한 경제적 문제를 겪고 있었노라 정리한다. 허나 공개 자료에서 그의 정확한 재정 상태와 그것이 범행의 직접적인 동기였는지까지 독립적으로 확인된 적은 없다.
따라서, '돈이 필요해서 범행을 결심했다'고 성급하게 결론을 내릴 수도 없겠다.
당시 미국의 '상공'은 지금과는 꽤 달랐다.
1960년대 후반부터 미국에서는 항공기 납치가 늘어났다.
그러니까,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1972년 10월 FBI Law Enforcement Bulletin(법 집행 회보)이 정리한 통계에 따르면, 1968년 1월 1일부터 1972년 8월 25일까지 미국 항공기를 대상으로 한 납치 또는 납치 미수 사건은..
무려..
144건에 달했다.
1년에 평균 30건 이상씩 발생한 꼴이었다.
그중에는 거액의 돈을 요구하는 범인들도 있었고, 심지어 비행 중 낙하산으로 탈출을 시도하는 사건까지 등장했다.
그러니까..
맥코이의 사건이 있었던 1972년의 미국에서, '비행기를 납치한다, 낙하산으로 탈출!'은 발상 그 자체가 기상천외한 아이디어는 아니었던 것.
사건으로 들어가 보자.
1972년 4월 7일.
29세 리처드 플로이드 맥코이 주니어는 덴버에서 유나이티드 항공 855편에 올라탔다. 뉴저지주 뉴어크에서 출발해 로스앤젤레스까지 가는 보잉 727 여객기였다.
그날 비행기에는 승객 85명과 승무원 6명이 타고 있었다. 아직 그들 가운데 누구도, 몇 시간 뒤 비행 행선지가 완전히 달라지리라고는 알지 못했다.
그리고 맥코이가 기내에 들고 들어간 것들 가운데는..
단순한 여행 짐이 아닌 것들이 있었다.
맥코이는 자기 이름으로 표를 끊지 않았다. 당시에는 오늘날처럼 모든 승객이 일률적인 보안 검색을 받던 시대는 아니었다. 1972년 2월부터 선별 검색은 의무화돼 있었지만, 전 승객을 대상으로 한 금속탐지 검색은 이듬해부터 시행된다. 사건 직후 TIME은 승객 명부에 그의 이름이 'T. Johnson'으로 적혀 있었다고 보도했다.
한편, 비행기가 이륙하기도 전에 해프닝(?)이 발생한다.
승객 대기 구역에 마닐라 봉투 하나가 덩그러니 남겨진 것이 그것이었다.
모든 승객의 탑승이 끝난 뒤 직원이 봉투를 들고 기내로 들어와 주인을 찾았고, 뒤쪽에 있던 한 남자가 자기 것이라고 나섰다.
그 남자가 바로, 맥코이였다.
별것 아닌 분실물처럼 보였겠지만, 사실 그 안에는 조종사에게 전달할 항공기 납치 지시문이 들어 있었다. 맥코이가 납치에 사용할 지시문이 든 마닐라 봉투를 탑승 대기 구역에 두고 그만 비행기에 올랐던 것이다.
그러니까, 그야말로 헛웃음 나는 실수였던 것.
운 좋게도(?) 그렇게 맥코이는 분실했던 중요 봉투를 되찾는다.
맥코이는 기내 화장실에서 한참을 보냈다.
FBI가 모은 승객/승무원 진술에 따르면, 화장실에 들어갈 때와 나온 뒤의 모습이 눈에 띄게 달라져 있었다고. 들어갈 때 보였던 갈색 계열의 머리 대신 검은 가발을 쓴 것으로 보였고, 콧수염 역시 가짜처럼 보였다. 거울처럼 반사되는 선글라스와 눈에 띄는 옷차림도 목격자들의 기억에 남았을 정도였다.
한 승객은 맥코이가 자리로 돌아온 뒤 마닐라 봉투 안의 종이들을 뒤적이고 또 작은 사이즈의 검은 가방을 만지는 모습을 보았노라 진술했다.
당시 목격자들이 만들어낸 범인상은 꽤나 혼란스러웠다.
FBI가 종합한 묘사에는 20대 중후반에서 30대 중반, 키 약 173-178cm 정도의 백인 남성이라는 공통점도 있었지만, 짙은 화장과 가발 때문에 일부는 그를 스페인계/아랍계/그리스계/레바논계처럼 보았다고까지 진술했다.
여기서 잠시..
범죄 사건 이야기 속 목격자의 증언에선 심심찮게 상이한 묘사가 등장하곤 한다.
왜 그럴까?
목격자의 기억은 안타깝게도 사건을 그대로 저장한 영상 기록 매체가 아니다.
2014년 미국 National Research Council의 합의보고서에서는 시각 지각과 기억에는 원리적인 한계가 있고, 관찰 조건/정서 상태/식별 절차 같은 여러 변수가 정확도에 영향을 준다고 설명한다.
이 사건에서는 짧은 관찰 시간에 가발/콧수염/선글라스까지 더해졌다. 그렇다고 목격 진술 전체가 무가치하다는 의미는 아니다. 중요한 건, 뒤에 나올 목격자의 용의자 사진 식별에서 '적극적으로 맥코이를 지목한 사람'과 '식별하지 못한 사람'이 동시에 존재했다는 사실이겠다.
말인즉슨, 이 우스꽝스러운 변장은 비록 완벽하진 않았을지 몰라도 적어도 사람들의 기억을 흐리는 데는 어느 정도 성공한 셈이었던 것.
덴버에서 이륙한 지 약 20분.
오후 5시 18분경.
승객 하나가 맥코이의 손에 있는 수류탄을 목도한다.
승무원에게 해당 사실이 전달됐고, 기장은 마침 승객으로 타고 있던 비번 조종사에게 뒤쪽 상황을 조용히 확인해 달라고 부탁한다.
비번 조종사가 몰래 다가갔으나 이를 알아챈 맥코이가 권총을 꺼냈다.
그리고 봉투 하나를 건넸다. 겉에는 'hijack instructions', 즉 납치 지시라는 뜻의 문구가 적혀 있었다.
봉투는 승무원을 거쳐 조종실로 들어갔다. 이 순간에도 대부분의 승객은 자신들이 탄 비행기가 납치되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했다.
기장은 처음엔 인근의 그랜드정션에 착륙해 지상에서 도움을 받을 생각이었다. 그래서 승객들에게는 기체에 작은 기계적 문제가 발생해 예정에 없던 착륙을 하겠다고 방송했다.
헌데, 조종실에서 봉투가 개봉된 뒤 계획이 바뀐다.
안에는 2장 분량의 자세한 타자 지시문과 탄환 1발, 그리고 수류탄의 안전핀으로 보이는 물건이 동봉돼 있었다.
지시문은 단순히 '돈 내놔' 수준이 아니었다.
샌프란시스코 국제공항에 착륙할 것, 특정 활주로에 기체를 세울 것, 비행기 근처에 한 번에 접근할 수 있는 사람 수를 제한할 것, 연료 차량을 제외한 다른 차량은 일정 거리 밖에 둘 것, 현금 50만 달러와 낙하산 4개를 준비할 것, 그리고 비행 중 자신이 승무원에게 건넨 모든 서면 지시서를 다시 돌려줄 것.
더불어, 공항에 착륙한 뒤의 동선과 접근방법까지 미리 지정해 놓고 있었다.
기장은 그랜드정션 착륙 계획을 버리고서 승객들에게 다시 안내 방송을 내보낸다. 그랜드정션에서는 필요한 수리를 할 수 없으므로 샌프란시스코로 가겠다는 안내였다.
그렇게 Flight 855는 기존 목적지인 로스앤젤레스가 아니라 샌프란시스코로 향하게 된다.
한편, 이 무렵 조금씩 상황을 눈치챈 승객들이 생겨난다.
FBI 기록에서는 주변 승객들이 맥코이가 수류탄을 손으로 가리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는 진술, 여러 차례 쪽지가 승무원을 거쳐 조종실로 전달되는 모습을 보았다는 진술이 남아 있다.
맥코이는 자기 주변 좌석의 승객들을 앞쪽으로 옮기도록 지시하기도 했다.
기묘한 상황 하나 더는..
당시 해당 비행기에 교정 당국의 호송을 받으며 다른 시설로 이동 중이던 수감자도 타고 있었다는 것.
이 수감자와 뒤쪽 승객들은 맥코이가 화장실에 들어가기 전과 나온 뒤의 모습, 가발과 콧수염, 봉투와 가방을 만지는 행동 등을 비교적 가까이서 관찰할 수 있었다.
허나, 기내 전체가 즉시 공포에 빠진 것은 아니었다.
겉으로는 여전히 '기계적 문제 때문에 항로를 바꾼 비행기'였으며 일부 이변을 눈치챈 승객들 역시 무언가 확신을 할 상황은 아니었으니까.
이와 같은 기이한 이중상태는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할 때까지 한동안 이어졌다.
샌프란시스코 국제공항에 도착하자 유나이티드 항공은 납치범 맥코이의 요구를 받아들이기로 한다.
현금 50만 달러가 2개의 비행 가방에 담겨 기체로 들어갔고 낙하산 4개도 전달됐다. 맥코이는 자신의 수하물 표를 내주며 따로 맡겨둔 짐까지 기내로 가져오게 했다.
아, 그리고 연료도 채워졌다.
여기까지의 변수(?) 하나는, 시간이 꽤나 걸렸다는 것이다.
비행기는 공항에 세워진 채 한참을 대기했다.
헌데..
범인이 쓴 쪽지에는 계속해서 '우리'를 뜻하는 표현이 등장했고, 일부 승객과 승무원은 실제 범인이 하나가 아닐 수도 있다고 여겼다. 기내에 공범이 숨어 있는지, 또는 지상의 누군가와 연결돼 있는지는 당시로서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렇게 외부 대응 없이 착륙한 지 약 3시간이 지난 뒤..
승객 전원인 85명과 승무원 1명이 비행기에서 내린다. 맥코이는 남은 승무원들을 조종실 쪽으로 보내고는 자신은 뒤쪽 객실을 차지했다.
이제 Flight 855에는 일반 승객이 없었다.
허나..
사건은 여전히 끝이 아니었다.
오히려 맥코이에게는 이제부터가 본게임이었다.
비행기는 다시 이륙해 샌프란시스코에서 동쪽으로 향했다.
맥코이는 이번에는 손으로 쓴 쪽지를 승무원에게 계속 전달하며 조종사에게 비행 조건을 지시했다.
고도 약 16,000피트(약 4.9km), 속도 약 200마일(약 322km/h). 유타주의 여러 지점을 순서대로 통과하는 항로를 따르며 기내는 감압하도록 했고, 추적하는 비행기가 보이면 자신이 뛰어내린 뒤 숨겨둔 폭발물을 터뜨리겠다는 위협도 전달했다.
그는 풍속과 풍향, 대지 속도와 대기 속도, 고도계 설정, 하늘 상태 같은 비행 정보를 지속적으로 요구했다.
바로 이 대목에서 맥코이의 군 조종/낙하산 경력이 의미(?)를 갖는다.
그가 요구한 것은 단순한 방향 전환이 아니었다. 어떤 높이와 속도로, 어떤 지점을 지나며, 어떤 정보를 계속 자신에게 전달할 것인지까지를 철저하게 지정하던 것이다.
FBI가 나중에 정리한 기록에 따르면 맥코이는 조종실과 객실 사이의 작은 관찰구를 가렸고, 객실의 불을 꺼 자신이 지상을 보기 쉽도록 환경을 조성했다. 조종실 안에서는 문 아래의 좁은 틈을 통해 그가 점프슈트와 헬멧, 낙하산을 착용하는 모습이 일부 보였다.
여기서, 해당 비행기의 기종이 보잉 727이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727에는 동체 뒤쪽 아래로 내려가는 자체 계단이 존재했다. 당시에는 비행 중에도 이 후방 계단을 이용할 수가 있었는데, 맥코이는 바로 그곳으로 사라질 생각이었던 것.
FBI의 당시 전보 기록을 보면 재이륙한 Flight 855는 네바다를 지나 유타로 들어온 뒤 밀퍼드, 메리스베일, 페어필드, 프로보 일대의 여러 지점을 통과하도록 항로를 계속해서 바꿔갔다.
어두운 유타 상공을 낮은 속도로 비행하는 동안 맥코이는 여전히 후방에 있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쪽지가 끊겼고 승무원 하나가 조심스레 객실 쪽으로 향했다.
맥코이는 없었다.
후방 계단을 통해 이미 비행기 밖으로 뛰어내린 것이다.
다만 정확히 몇 시 몇 분, 지상의 어느 지점 위에서 몸을 던졌는지는 불분명하다.
당시 FBI/FAA(미국연방항공청) 기록은 항로와 레이더/조종사의 판단을 토대로 그가 유타 페어필드-프로보 일대에서 빠져나간 것으로 추정했다. FBI 전보에는 프로보 부근에서 밤 11시 12분 무렵 기체를 떠난 것으로 보는 기록이 남아 있지만, 이것 역시 누군가가 점프 순간을 직접 목격하고서 보고한 시각은 아니다.
Flight 855는 솔트레이크시티 공항으로 향했다.
그리고 착륙 뒤 기체를 수색한 FBI는 좌석과 안전 벨트, 껌 포장지, 담배꽁초, 기내 잡지, 범인이 두고 간 손 글씨 쪽지까지 닥치는 대로 수거했다.
허나 이미 맥코이는 50만 달러와 함께 밤속으로 사라졌다.
여기까지만 보면..
그의 계획은 성공한 것처럼만 보인다.
1972년 4월 8일 새벽 2시 무렵.
FBI 요원과 프로보 경찰, 유타 카운티 보안관 측 인력이 프로보 공항 주변 들판에 일정한 간격으로 늘어서 수색을 개시했다.
밤새 별다른 성과는 없었으나, 날이 밝고서 사건이 외부에 알려지자 뜻밖의전화 한 통이 걸려 왔다.
솔트레이크시티 FBI 사무소에 연락을 취해온 이 남자는, 자신이 아는 사람이 예전에 비행기를 납치하는 '완벽한 계획'에 관해 이야기한 적이 있노라 말했다.
그렇다.
이 남자의 지인이라는 사람이 바로 리처드 플로이드 맥코이 주니어였다.
맥코이는 베트남 참전 경력에 헬기 조종사였고, 숙련된 낙하산 강하 경험도 있었으며 경찰/법 집행을 공부하는 BYU 학생이었다. FBI 입장에서는 방금 일어난 사건과 묘하게 겹치는 조건들이었다.
요원들은 곧바로 맥코이를 찾아냈다.
물론, 맥코이는 범행 일체를 부인했다. 더불어 자신의 손 글씨 견본을 자발적으로 제시했다. 당시 FBI 전보에는 그의 아내도 함께 조사받았고 부부 모두 연루를 부인했다고 기록됐다.
여기서 잠시..
FBI가 맥코이를 처음 만났을 때 꽤나 눈에 띄는 특징이 하나 있었다고.
맥코이는 당시 심하게 절뚝이고 있었다.
밤중에 높은 곳에서 낙하산으로 뛰어내린 용의자가 다음 날 다리를 절뚝이고 있다니, 자연스럽게 점프 부상을 떠올릴 법했다.
허나..
그게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았다.
FBI 전보에 따르면 맥코이는 약 2주 전 스키를 타다 인대를 다쳐 다리에 깁스를 했노라 설명했고, BYU 쪽에서 치료를 받은 기록과 사건 전부터 그가 절뚝였다는 군 관계자의 설명도 확인됐다.
그래도, 대신 다른 증거들이 빠르게 쌓여갔다.
FBI는 기내에서 수거한 손 글씨 쪽지와 맥코이의 군 기록에 남아 있던 필적을 비교한다. FBI 문서감정관의 분석은, 맥코이가 문제의 쪽지를 썼다는 것으로 결론 났다.
또 범인의 좌석 부근에서 수거한 유나이티드 항공의 기내 잡지 Mainliner에서도 그의 잠재 지문이 발견됐고, FBI는 그것이 군 복무 당시 채취된 지문과 일치한다고 판단했다.
사진 식별도 진행됐다.
물론, 모든 목격자가 맥코이를 알아본 것은 아니다.
변장한 모습을 짧게 봤던 사람들 가운데에는 사진만으로 확인하기 어렵다고 한 이들도 있었다. FBI는 맥코이의 실제 사진에 범인의 가발/콧수염 특징을 합성한 사진까지 만들어 여러 목격자에게 다시 보여줬다.
반면, 적어도 한 승객은 사진 속 맥코이를 범인이라고 확신했다. 그리고 이러한 목격자 식별은 이틀 뒤 자택 수색영장을 발부받을 때 FBI가 제시한 근거 가운데 하나로도 들어갔다.
여기에다, 낙하 뒤의 이동 경로를 연결하는 진술까지 확보한다.
FBI에 따르면, 프로보 인근 도로변 햄버거 가게 직원이 맥코이의 사진을 보고서 사건 당일 밤 약 11시 30분경 자신이 그에게 밀크셰이크를 팔았다고 진술했다.
또, 한 청소년은 맥코이와 비슷한 남자가 5달러를 주고는 인근 마을까지 태워달라고 했다고 진술했다.
또한, 그로부터 불과 몇 시간 뒤 예정돼 있던 유타 주방위군 훈련에도 맥코이가 나타났다.
말인즉슨..
맥코이가 진범이었다면, 그는 야밤에 항공기에서 50만 달러와 함께 낙하산을 메고 뛰어내려 착륙 기념으로 달콤한 밀크셰이크를 들이켰다는 것.
정리하자면, 밤하늘에서 낙하산으로 사라졌던 범인은 완전범죄에 성공한 것이 아니었다.
필적과 지문, 엇갈리기는 했지만 일부 목격자의 식별, 차를 얻어 탄 정황, 그리고 범행 방식과 너무 잘 맞아떨어지는 맥코이의 경력까지.
덕분에 FBI의 수사망이 빠르게 좁혀졌고 범행 이틀 뒤인 4월 9일, 연방 당국은 맥코이를 항공기 납치와 승무원 업무 방해 혐의로 정식 고발하며 체포영장도 발부받는다. 이에 즉각 FBI 요원들은 프로보의 자택에서 그를 체포했으며 수색영장을 받아 집도 수색한다.
결과는 아주 유의미했다.
현금 499,970달러가 나왔다. 범인이 챙긴 몸값 50만 달러에서 정확히 30달러가 모자란 금액이었다. 여기에 낙하산과 하네스, 수류탄, 총과 탄약 등이 나왔다. FBI는 집에서 발견된 전동 타자기의 키 자국 역시 범행 때 사용된 타자 지시문과 연결된다고 판단했다.
불과 이틀 전만 해도..
한 남자가 비행기에서 50만 달러를 안고 밤하늘로 뛰어내려 사라졌다.
그리고 그 돈 거의 전부가 맥코이의 집에서 나왔다.
완벽해 보였던 그의 인질극과 탈츨극은 48시간을 채 버티지 못한 셈이었다.
이제 남자에게 남은 곳은 법정이었다.
1972년 4월 14일.
솔트레이크시티의 연방 대배심이 리처드 맥코이를 기소한다.
맥코이는 처음부터 일관되게 자신이 범인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허나 검찰이 들고 나온 증거가 만만치 않았다. 기내에서 수거한 손 글씨 쪽지와 맥코이의 군 기록에서 나온 필적, 범인의 좌석 부근에 있던 기내 잡지에서 발견된 지문, 그를 범인으로 지목한 목격자까지.
그리고 무엇보다..
맥코이의 집에서 발견된 499,970달러와 범행에 사용된 것으로 추정되는 낙하산과 하네스, 수류탄, 총과 탄약까지 말이다.
재판은 6월 말 열렸다. 사면초가에 빠진 맥코이 측이 재판에서 특히 문제 삼은 것은 '이 물건들이 발견된 자택 수색' 부분이었다. 수색영장 자체에 이상한 오류가 하나 있었다는 주장이었다.
당시 영장 발부를 요청하며 실지로 진술서를 낸 FBI 요원은 윌리엄 가이어먼이었다. 헌데, 판사가 서명한 수색영장에는 진술인의 이름이 다른 FBI 요원인 로트 키니 주니어로 적혀 있던 것.
게다가 가이어먼이 영장에 적은 내용 상당수는 그 자신이 직접 본 것이 아니라, 다른 FBI 요원들이 목격자와 관계자들에게 들은 것을 전달받아 정리한 정보였다.
쉽게 말해, 피고인 측은 이렇게 문제를 제기한 셈이다.
"영장에 사람 이름부터가 틀렸습니다. 중대한 오류죠. 근거라는 것도 몇 단계를 거쳐 전해 들은 이야기 아닙니까?"
이 문제는 재판에서 엄중하게 다뤄졌으나 동시에 법원은 증거 부분을 배제하지도 않았다.
1972년 6월 29일 밤.
배심원단은 맥코이에게 항공기 납치 혐의에 대해 유죄평결을 내린다.
그리고 7월 10일, 법원은 그에게 징역 45년을 선고한다.
29세에 받은 45년형이었으니 인생 대부분을 감옥에서 보내야 할 판이었다.
헌데..
선고가 내려진 지 얼마 지나지도 않아 맥코이는 벌써 다른 생각을 품고서 행동으로 옮기기까지 하고 있었다.
1972년 7월.
맥코이는 연방교도소로 보내지기 전 콜로라도주 애덤스 카운티 교도소에 일시적으로 수감된 상태였다.
그리고..
그는 법정으로 향하는 다른 수감자들 무리에 섞여 밖으로 나간 뒤 그대로 달아난다. 이번에는 비행기도 낙하산도 없었다. 그냥 두 다리로 뛴 것이다. 그리고 세 블록도 가지 못해 다시 붙잡혔다.
첫 번째 탈주 시도는 그렇게 싱겁게 끝났다.
FBI의 수감 기록에 따르면, 맥코이는 8월 초 펜실베이니아주의 루이스버그 연방교도소로 옮겨졌다. 이번에는 높은 벽과 철문 안에서 45년을 꼼짝없이 보내야 했다.
허나, 이번에도 맥코이는 포기하지 않았다.
1973년 2월 21일.
맥코이 사건이 제10연방항소법원에 올라갔다.
쟁점은 단순했다. 맥코이가 비행기를 납치했느냐를 처음부터 다시 따지는 재판은 아니었고, '맥코이의 집을 수색한 영장의 유효성'이 항소에서 제기된 유일한 쟁점이었다.
맥코이 측은 앞서 이야기한 두 문제를 집중적으로 공격했다.
첫째, 영장 신청 진술서가 직접 경험이 아니라 다른 FBI 요원과 목격자에게서 여러 단계로 전달된 정보에 해당한다. 즉 이중/삼중의 전언에 의존했다는 것.
둘째, 영장에 진술인의 이름이 실제 진술서를 낸 가이어먼이 아니라 키니로 잘못 적혔다는 것.
허나..
1973년 5월 7일, 제10연방항소법원은 이를 끝내 받아들이지 않는다.
법원은 여러 FBI 요원이 공동수사를 하면서 수집한 목격자 진술과 정보 역시 영장의 상당한 이유(probable cause)를 판단하는 근거가 될 수 있다고 판단한다.
추가로, 실제 진술서에 단순한 익명 제보만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기내 승객이 사진에서 맥코이를 범인으로 식별했다는 내용, 승무원이 받아온 범인의 손 글씨 쪽지를 FBI 감정관이 맥코이의 군 기록 필적과 연결했다는 내용, 맥코이와 함께 주 방위군에서 근무한 사람이 그가 스카이다이버였고 과거 항공기 납치에 관한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고 전한 내용 등이 들어 있었던 것.
분명, 이 정도면 판사가 판단을 내리기에 충분했다.
또한, 영장에 잘못 적힌 FBI 요원의 이름 건도 마찬가지였다.
절차상 오류가 있었던 것은 맞지만, 실제 진술서를 누가 냈는지는 확인 가능했고 재판 과정에서 당사자들을 직접 불러 그 경위까지 따졌다. 항소법원은 이 이름 오류가 맥코이의 실질적인 권리를 침해하지 않았다고 판단한다.
결론, 유죄판결 유지였다.
여기서 잠시..
해당 사건에서 실제 영장에는 FBI 요원의 이름이 잘못 적힌 절차상 오류가 있었다. 또 affidavit(선서 진술서)에는 다른 요원과 목격자를 거쳐 전달된 정보도 포함돼 있었다.
허나 미국 영장 절차에서 probable cause(상당한 이유)는 유죄를 입증하는 수준의 증명을 요구하지 않고, 전언 정보라고 해서 자동으로 배제되는 것도 아니다. 이 사건의 항소법원은 바로 그 문제를 검토한 뒤 선서 진술서 전체에 상당한 이유가 있었고 이름 오류도 피고인의 실질적 권리를 침해하지 않았다고 판단한 것이다.
다시 돌아와..
맥코이 측은 이러한 결과에도 포기하지 않고서 연방대법원에 사건을 심리해 달라고 요청한다.
그리고 1973년 10월 9일.
미 연방대법원은 사건번호 72-1636, Richard Floyd McCoy Jr. v. United States(리처드 플로이드 맥코이 주니어 대 미합중국)의 certiorari(상고 허가/사건심리 허가) 신청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이렇게 대법원이 그의 사건을 심리하지 않기로 결정하면서 45년형은 그대로 남게 된다.
약 10개월 뒤인 1974년 8월 10일.
이번에는 세 블록 만에 끝나지 않았다.
그러니까..
루이스버그 연방교도소에서 맥코이를 포함한 수감자 4명이 탈옥했다. FBI 기록에 따르면, 이들은 총기로 간수를 위협하며 교도소의 쓰레기 수거차를 장악했다고. 그리고 그 차를 몰아 그대로 교도소 뒤쪽 출입문을 들이받고서 빠져나갔다.
대낮의 탈옥이었다.
수거차는 교도소에서 약 15마일(약 24km) 떨어진 곳에 버려졌다.
탈옥수 4명은 여러 차량을 이용하며 남쪽으로 이동해갔다.
여담으로..
인터넷과 후대 기록들에선 맥코이가 교도소 치과실의 재료로 가짜 권총을 만들었다는 이야기가 아주 유명하다. 분명, 극적인 탈옥 이야기에서 빼놓을 수 없을 재미있는 소재긴 하다. 허나 현재까지 확인된 FBI 원자료에 따르면, 문제의 물건을 맥코이가 직접 만들어 탈옥에 사용됐다고 확정하긴 어렵다.
다시 돌아와..
45년형을 받고 갇힌 지 약 2년, 맥코이는 결국 연방교도소의 벽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사흘 뒤인 8월 13일, 노스캐롤라이나주 폴록스빌의 은행 Bank of North Carolina가 털리고 만다.
FBI 수사보고서에는, 총을 든 백인 남성 3명이 은행 안으로 들어 왔으며 4번째 남성이 도주차량을 운전했다고 기록한다.
여기서 강탈된 돈은 약 16,270달러였다.
FBI는 해당 사건을 루이스버그 탈옥수들과 연결해 추적을 벌인다.
도주차량은 버려진 채 발견됐고 뒤이은 경찰과의 총격전에서 결국 탈옥수 2명을 붙잡는 데 성공한다.
허나..
맥코이와 남은 1명은 현장에서 사라졌다. 맥코이와 함께 사라진 남자는 멜빈 데일 워커였다. 이제 맥코이에게는 항공기 납치범이라는 전력에다 연방교도소 탈옥수라는 신분까지 붙었다.
맥코이와 워커는 몇 달 동안은 수사망을 피해 움직일 수 있었다.
훗날 은신처와 차량에서 확보된 영수증과 자동차 정비기록, 각종 신분증과 메모 등을 보면 두 사람은 버지니아와 노스캐롤라이나뿐 아니라 인디애나, 테네시, 미주리, 조지아 등 여러 지역을 오간 흔적을 남겼다.
한편..
이 무렵 FBI는 멜빈 데일 워커를 공식적으로 Ten Most Wanted Fugitives(FBI 10대 지명수배자) 명단에 올린다. 참고로 인터넷에서는 맥코이 역시 FBI의 10대 지명수배자였다고 소개하는 글이 적지 않은데, FBI의 공식 역대 명단에는 그의 이름이 없다.
당시 명단에 오른 사람은 워커 혼자였다. 맥코이 역시 전국적으로 쫓기던 위험한 탈옥수였지만, FBI의 공식 Ten Most Wanted(FBI 10대 지명수배자) 중 한 명은 분명 아니었다.
8월이 지나고, 9월이 지나고, 10월도 지나갔다.
그리고 11월.
마침내 FBI가 버지니아주 버지니아비치에서 두 사람의 은신처를 찾아낸다.
두 사람이 사용하던 곳으로 수색 된 주소는 733 North Great Neck Road였으며, 당시 보도에 따르면 주변 사람들에게 두 남자는 딱히 눈에 띄는 이웃도 아니었단다. 그저, 조용한 남자들처럼 보였다고.
한편 FBI는 제보를 받고서 해당 자택을 이틀 동안 지켜보고 있었다.
1974년 11월 9일 토요일, 밤 11시가 넘은 시각.
맥코이와 워커가 집으로 돌아왔다. 워커는 차를 몰고 주변을 한 번 더 살펴보기 위해 자리를 떴고, 맥코이는 홀로 현관으로 향했다.
집 안에는 FBI 요원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맥코이가 문을 열고 들어오자 요원 하나 FBI임을 밝히며 맥코이에게 멈출 것을 명령한다.
그 순간, 맥코이는 권총을 뽑아 들고는 곧장 방아쇠를 당겼다.
총알은 요원을 비껴 지나갔고, 이어 요원의 대응 사격이 가해진다.
그렇게..
산탄총 한 발이었다.
총에 맞은 맥코이는 현관 밖으로 고꾸라진다.
사망 당시 맥코이의 나이는 31세였다.
한편..
워커는 총소리를 듣고서 차로 내달렸으나 몇 분 뒤 체포된다.
그 뒤 FBI는 두 사람이 사용한 집과 차량 등에서 여러 이름으로 된 신분증과 영수증, 자동차 정비 내역, 숙박/임대 관련 기록, 노트와 전화번호, 다수의 총기까지 수많은 물건을 확보할 수 있었다.
1972년 비행기에서 낙하산을 메고 밤하늘로 사라졌다가 이틀 만에 붙잡혔던 맥코이는, 1974년엔 연방교도소를 뚫고 나와 석 달 가까이 도망치지만 결국 FBI가 기다리고 있는 현관문을 열어젖히고서 운명을 달리하게 됐다.
그렇게 리처드 플로이드 맥코이 주니어의 생은 끝났다.
적어도..
당시에는 그렇게 보였다.
여기서 뭐 더 할 이야기가 있느냐고?
뭐, 맥코이가 부활했다는 이야기는 당연히 아니다.
다만, 그가 죽고 17년쯤 뒤..
이미 세상에 없는 맥코이의 이름이 다시 미국 언론 한복판으로 끌어내진다.
그가 실지로 저질렀던 Flight 855 사건 때문이 아니라, 전혀 다른 항공기 납치 사건으로 인해서.
문제의 항공기 납치사건은 1971년 11월 24일에 발생했다.
그러니까, 맥코이가 유나이티드 항공 855편을 납치하기 약 4개월 반 전의 일인 셈이다.
당시 한 남성이 오리건주 포틀랜드 공항에서 현금을 내고 노스웨스트 오리엔트 항공 305편의 편도 표를 구매한다.
표에 적힌 이름은 댄 쿠퍼였다.
아마, 범죄 이야기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다면 벌써 '아! 그 사람!'이라고 입 밖으로든 속으로든 외쳤을 것이다.
그렇다.
훗날 세상이 D.B. 쿠퍼라고 부르는 바로 그 사람 말이다.
참고로, 당시 범인이 사용한 이름은 'Dan Cooper'였다. 'D.B.'라는 이름은 언론 보도 과정에서 굳어진 것에 불과했지만 어쨌건 대중에게는 D.B. 쿠퍼라는 이름으로 통용되고 있다.
쿠퍼는 양복 차림의 조용한 중년 남자로만 보였다.
그는 비행기가 포틀랜드에서 시애틀로 향하던 중 승무원에게 쪽지를 건넸고, 가방 안에 폭탄이 있다고 말하며 전선과 붉은색 막대들이 든 가방을 보여준 뒤 현금 20만 달러와 낙하산 4개를 요구했다.
그렇게..
비행기가 시애틀에 착륙하자 승객 36명을 풀어주는 대신 돈과 낙하산을 받았다. 그리고 비행기는 다시 이륙해 지시에 따라 멕시코시티 방향으로 날아갔다.
한편..
밤 8시를 조금 넘긴 어느 순간.
쿠퍼는 비행기 뒤쪽 계단을 통해 돈과 함께 밤하늘로 뛰어내린다.
보잉 727, 후방 계단, 현금 몸값, 낙하산 4개, 승객을 풀어준 뒤 재이륙하고 비행 중 낙하산으로 탈출하는 방식.
분명히 아까까지 읽던..
여하튼지건, 너무 익숙하지 않은가?
1991년.
맥코이가 죽은 지 17년이 지나고서 한 권의 책이 출간된다.
아주 노골적인 제목의 책이.
책 제목은 D.B. Cooper: The Real McCoy였다. 저자는 버니 로즈와 러셀 칼라메였다.
로즈는 연방 보호관찰/가석방 업무를 했던 인물이고, 칼라메는 전직 FBI 요원으로 솔트레이크시티 FBI 책임자를 지냈으며 1972년 맥코이 사건 수사 당시 비교적 가까운 위치에 있던 인물이었다.
두 사람의 결론은 심플했다.
책 제목 그대로, 1971년의 D.B. 쿠퍼와 1972년의 리처드 맥코이가 같은 사람이라는 것이었다.
분명..
여기까지 글을 읽은 입장에선 해당 주장이 꽤나 솔깃할 것이다.
자, 두 사건을 나란히 놓아보자.
둘 다 보잉 727이었고 낙하산 4개를 요구했다. 승객들을 내려보낸 뒤 비행기를 다시 띄웠으며, 마지막에는 비행 중 727의 뒤쪽 계단을 이용해 낙하산으로 사라졌다.
거기에 맥코이는 실지로 낙하산 강하 경험이 풍부였고, 군에서 헬기를 조종했으며, D.B. 쿠퍼 사건으로부터 불과 몇 달 뒤 거의 동일한 구조의 범죄를 성공시켰다.
여기서 잠시..
이렇듯 범행 수법이 닮았다는 건 동일범 설에 대해 얼마나 강한 증거가 될 수 있는 걸까?
분명, 유사한 범행 수법은 동일인 가능성을 높이는 중요한 정황이 될 수 있다. 특히 727+낙하산 4개+승객 석방 후 재이륙+후방 계단 강하라는 조합의 중복은 눈에 밟힐 수밖에 없다.
허나, 범죄 사건에선 유사성만으로 동일범 취급이 성립되는 것은 아니다.
특히, 초반부에 언급했듯 당시 미국은 항공기 납치가 폭증하던 시기였다. FBI는 1968년 초부터 1972년 8월까지 납치/미수 사건 수를 144건으로 집계했다.
게다가, 유명 사건의 방식이 후속 범죄자에게 모방되는 이른바 카피캣 케이스도 고려해야 한다.
정리하자면, 두 사건의 유사성은 맥코이 동일범 설의 강한 출발점이 될 수는 있어도 분명하고 독립적인 연결 고리가 추가로 필요하겠다.
다시 돌아와..
1991년 책이 나오기 전부터 공동저자 로즈와 칼라메는 동일범 설을 유의미하게 받아들였다.
이미 1986년 보도를 보면, 로즈는 FBI 문서를 확보하기 위한 소송까지 벌이며 맥코이가 쿠퍼였다는 주장을 파고 있었다.
또한, 본격적으로 책을 준비하던 1991년엔 칼라메는 두 범행이 닮았을 뿐 아니라 맥코이의 2번째 범행이 1번째의 문제점을 개선한 것처럼 보인다고 주장했다.
예컨대 1991년 출간 전 인터뷰에서 둘은 맥코이가 쿠퍼 사건 약 2달 전 공인 스카이다이버 자격을 취득했으며, 두 비행기 납치 사건이 일어나기 정확히 일주일 전 각각 같은 항공편을 미리 타봤다는 사실을 찾아냈다고 주장했다.
또 쿠퍼가 비행기에 남긴 두 물건을 맥코이의 친척들이 보고 맥코이의 것으로 여겼다는 점도 밝혔다. 후대에 알려진 바에 따르면 문제의 물건은 쿠퍼가 좌석에 남긴 검은 넥타이와 자개 장식의 타이클립이었다고.
다만, 여기서부터는 혹하지 않게 주의가 필요하다.
이러한 물건들이 실제로 맥코이의 것이라는 주장은 오로지 로즈와 칼라메 측 조사와 더불어 맥코이 친척들의 감정에 크게 의존할 뿐이다. FBI나 수사기관에서 따로 독립적인 물증 감정을 통해 쿠퍼가 남긴 물건이 맥코이의 소유물이었다고 증명하거나 확인한 바가 없다.
한편, 맥코이의 1971년 추수감사절 행적도 논쟁거리였다.
쿠퍼 사건은 11월 24일에 벌어졌는데, 오랫동안 맥코이 동일인 설 배제 쪽에서는 그가 다음 날 유타에서 가족과 추수감사절을 보냈다는 이야기를 강조한다.
헌데, 후대에 공개된 FBI 자료를 보면 이 부분은 생각보다 깔끔하지가 않다.
2004년 FBI 내부 검토 문서에서는 맥코이가 11월 25일 솔트레이크시티에 있었다는 증거와 24일 BYU 수업에 참석했을 가능성을 언급하면서도, 동시에 그가 11월 24일 실지로 라스베이거스로 운전해 갔다는 증거도 있다고 적는다.
말인즉슨..
'맥코이는 그날 확실히 유타에 있었으니 쿠퍼일 수가 없다'라고 확정 내리기엔 기록 자체가 조금 복잡하다는 것.
물론, 이는 반대쪽도 마찬가지.
'라스베이거스에 갔으니 그곳에서 비행기를 타고 포틀랜드로 가 범행을 한 것'이 입증되는 것도 결코 아니다.
또한, 두 사건에는 닮은 점만큼이나 다른 점도 분명 존재한다.
가장 먼저, 외모가 그렇겠다.
D.B. 쿠퍼를 가장 오래 가까이에서 본 두 승무원은 사건 당일 서로 떨어진 장소에서 별도로 조사받았는데, FBI에 따르면 두 사람이 제공한 묘사는 거의 일치했다.
신장 약 178-183cm, 체중 약 77-82kg, 갈색 눈, 짙은색 머리, 그리고 나이는 40대 중반.
헌데, 1971년 당시 맥코이는 28세였다. 목격자의 나이 추정이 언제나 정확할 수는 없다손 치더라도, 지근 거리에서의 공통된 관찰에서 15살 이상 차이가 나는 건 분명 생각해 볼 문제겠다.
참고로 맥코이가 항공기 납치를 벌였을 당시 승무원들과 승객들은 그를 20대 중후반에서 30대 중반, 키 약 173-178cm 정도로 묘사했었다. 그리고 맥코이의 실제 모습은 178cm에 77kg, 갈색 머리, 그리고 파란색 눈이었다.
허나, 공동저자 칼라메는 이에 대해 오히려 자신 있게 반박을 내세운다.
자신은 수많은 사건에서 목격자들이 눈동자 색 같은 기본적인 특징까지 다르게 기억하는 것을 봤기 때문에 ,이런 관찰 차이가 결정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
현재 FBI의 공식 D.B. Cooper 페이지에서는 맥코이를 여전히 많은 사람이 선호하는 용의자라고 소개하면서도, 두 승무원의 목격 당시 인상착의와 부합하지 않고 '다른 이유들'도 있기에 맥코이 동일인 설을 배제했다고 명시한다.
맥코이는 여러 차례 강조했듯 숙련된 스카이다이버였다.
허나, FBI는 후일 쿠퍼를 숙련된 스카이다이버로 보지 않게 됐다.
범행 당시 쿠퍼가 선택한 주 낙하산은 조향이 불가능한 종류였고, 지상도 제대로 보이지 않는 밤중에 비와 강풍 속 산림지대로 뛰어내렸다. 게다가 로퍼와 트렌치코트 차림이었으며, 챙겨간 예비 낙하산 가운데 하나는 훈련용으로 봉제돼 실제 사용할 수 없는 상태였다는 사실도 알아채지 못한 것으로 FBI는 판단했다.
FBI는 이런 요소들을 종합해, 당시 숙련된 스카이다이버라면 하기 어려운 선택들의 연속이었다고 보는 것이다.
맥코이 동일인 설을 둘러싸고서 촌극도 벌어졌다.
D.B. Cooper: The Real McCoy가 출간되자 맥코이의 미망인이었던 캐런 맥코이가 저자들과 출판사 등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책이 자신과 남편에 관해 허위 사실을 적었다는 주장이었다.
1992년 2월.
유타주 제3지방법원에서 책의 추가 배포를 막아달라는 가처분 심리가 열렸다.
캐런은 처음에는 책이 자신을 1972년 Flight 855 사건의 공범으로 묘사한 게 거짓이라고 주장했다.
헌데 심리가 진행되면서..
그녀는 뜻밖의 사실을 인정한다.
1972년 4월 7일의 그 범행 당시, 자신이 낙하산을 구입한 사람이었노라 인정한 것이다.
또 남편의 변장을 준비하는 것을 도왔으며, 조종사에게 전달할 지시문을 타이핑했고, 그날 남편을 솔트레이크 국제공항까지 태워다 줬다는 것. 게다가 맥코이가 총과 수류탄을 갖고 비행기에 탈 것이라는 사실도 사전에 알고 있었단다.
그렇게 사건 다음 날 새벽 3시, 캐런은 남편과 함께 스프링빌 인근 들판으로 가 50만 달러를 회수해 숨겼다고 법정에서 인정한다.
왜?
어째서 캐런은 지난 20년 가까이 공개하지 않았던 범행 가담 사실을 법정에서 인정한 것일까?
실상은 이렇다.
약 20년 전..
유타주 프로보에서 활동하던 변호사 토머스 테일러는 캐런과 맥코이, 그 가족들을 여러 차례 인터뷰했고, 캐런과는 해당 사건을 별도의 책으로 만드는 문제까지 논의했다.
다만 실제 출판 계약까지 맺어졌던 것은 확인되지 않는다.
한편 캐런은 테일러가 당시 자신의 변호사였다고 주장했지만, 테일러는 자신은 캐런의 변호사도 문학 에이전트도 아니었다고 맞섰다.
이는 인터뷰 내용이 변호사-의뢰인 비밀유지특권으로 보호되는지, 그래서 테일러가 이를 저자들에게 넘긴 행위에 법적 책임이 있는지를 좌우할 수 있는 핵심 쟁점이었기 때문. (정확한 법률관계는 끝내 판결에서 확정되지 않음)
여하튼지건..
그 오래된 인터뷰에서 캐런은 자신도 1972년 항공기 납치에 가담했다고 언급했던 것.
왜 그런 사실까지 털어놓았는지는 현재 공개된 자료로 확인이 어렵겠다. 다만, 캐런은 훗날 그 대화가 변호사-의뢰인 관계에서 나온 비밀 정보였다는 주장을 유지한다.
그리고 문제는, 거의 20년 뒤 테일러가 약 200쪽에 이르는 그 인터뷰 메모를 D.B. Cooper: The Real McCoy의 저자 측에 넘겼다는 데 있었다.
캐런이 오래전 인터뷰에서 남긴 자신의 범행 가담 진술이, 전혀 다른 서적을 통해 세상 밖으로 나오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책의 추가적인 출판을 막아달라는 법정 심리에서 캐런은 이제 1972년 범행 가담 자체를 계속 부인하기가 어려운 상황이었다.
결국 그녀는 낙하산을 구입하고, 남편의 변장을 도왔으며, 조종사에게 전달할 지시문을 타이핑했다고 인정한다. 맥코이가 총과 수류탄을 갖고 비행기에 탈 것을 알면서도 그를 솔트레이크 국제공항까지 태워다 줬고, 사건 다음 날 새벽에는 남편과 함께 스프링빌 인근 들판으로 가 몸값 50만 달러를 회수해 숨겼다고도 인정했다.
자!
이쯤 되면 1972년 사건의 모습은 처음과 조금은 달라졌다.
기내에서 직접 항공기를 납치한 사람은 맥코이 혼자였다.
허나 범행을 준비하고, 그를 공항까지 데려다주고, 다음 날 몸값을 회수해 숨기는 과정에는 아내 캐런이 있었다. 다만, 캐런이 인정한 것은 어디까지나 1972년 Flight 855 납치 사건에 자신이 가담했다는 사실 뿐이다.
이것이 곧 그녀의 남편이 1971년의 D.B. 쿠퍼였다고 인정했다는 뜻은 아니다. 캐런 역시 쿠퍼=맥코이 동일인 설까지 인정한 것은 아니다.
한편..
법원은 책의 추가 출판을 막아달라는 preliminary injunction(예비적 금지명령) 신청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캐런이 스스로 연방 중범죄에 가담한 사실을 인정한 이상, 책의 출판으로 입을 수 있다고 주장한 명예의 손상보다 이미 인정한 범죄 가담 사실이 그녀의 평판에 더 치명적이라는 취지에서였다.
그렇다고 소송 전체가 여기서 끝난 것은 아니었다.
캐런은 이후에도 책에서 언급된 다른 주장들(자신이 남편의 탈옥을 도왔다거나, FBI에 남편의 위치를 알려 죽게 만들었다는 내용 등)을 두고서 계속해 법정 다툼을 이어갔다.
그렇게 소송은 결국 1994년 합의로 끝이 난다.
공개된 금액만 12만 달러를 넘었는데, 테일러가 10만 달러, 유타대학교 출판부가 2만 달러를 지급했고, 저자 로즈와 칼라메 측의 합의금은 공개되지 않았다.
아, 물론 해당 합의와 앞선 가처분 결정이 쿠퍼=맥코이 동일인 설의 진위를 판단한 것은 아니다. 그 부분은 법원의 사실판단으로 확정된 바가 없다.
그렇다면..
FBI의 입장은 어떠할까?
겉으로 보이는 FBI의 공식 입장은 명료하다.
리처드 맥코이는 D.B. 쿠퍼 용의자에서 배제됐다!
헌데..
2004년 7월 29일 자로 작성된 FBI 내부 검토문서 하나가 훗날 공개된다.
사건번호는 'SE 164A-81-DNA'였고, 문서에는 DNA 기술을 이용해 아직 해결되지 않은 용의자들을 재확인하려는 계획이 적혀 있었다.
그리고 그 목록의 3번째 인물이..
바로, 리처드 맥코이였다.
해당 FBI 문서에서는 먼저 맥코이가 쿠퍼가 아닐 가능성을 뒷받침하는 내용이 적혀있다.
두 범행의 방법에는 상당한 차이가 존재하고 맥코이가 주변에 자신이 쿠퍼라고 자처한 적도 물론 없다. 1971년 11월 25일 솔트레이크시티에 있었다는 증거도 있었고 24일 BYU 대학 수업에 참석했을 가능성도 있었다.
헌데, 바로 이 다음 문장부터 이야기가 조금 달라진다.
맥코이가 11월 24일 라스베이거스로 운전해 갔다는 일부 증거도 존재했다. 1972년 7월에는 선고 전 맥코이가 담당자에게 자신이 'another one', 즉 다른 한 건을 더 했다는 취지로 말했다는 전언도 있었다.
또 FBI는 두 범행 간의 스타일 차이가, 한 번의 경험 뒤 방법을 개선한 결과로 일부 설명될 수 있다는 가능성 여부까지도 적어놨다.
하여, 이어지는 내용엔 솔트레이크시티 사무소 앞으로 맥코이가 남긴 물품에서 DNA 표본을 은밀히 확보하라는 지시문까지 나온다.
아쉽게도..
현재 공개 자료만으로는 그때 실제로 맥코이의 DNA가 확보됐는지, 쿠퍼의 넥타이에서 얻은 표본과 유효하게 비교가 이뤄졌는지, 그래서 그 결과가 무엇이었는지까지는 확인되지가 않는다.
다만..
지금도 여전히 FBI의 '쿠퍼=맥코이 동일인 설 부정' 입장에는 공식적인 변화가 없다는 것이겠다.
2016년 7월.
FBI는 45년 동안 이어온 D.B. 쿠퍼 사건 수사에 더는 자원을 투입하지 않겠다고 발표한다.
오랜 수사와 수많은 제보, 과학수사기법을 적용했건만 범인을 법적으로 특정할 만큼의 증거를 얻지 못했다는 이유에서였다.
다만, FBI는 한 가지 문을 열어뒀다.
무언가 새로운 물증이 나타난다면..
언제든 제보를 바란다는 말과 함께.
그리고 비교적 최근인 2022년..
은퇴한 파일럿이자 유튜버인 댄 그라이더라가, 노스캐롤라이나의 맥코이 가족 관련 부지에서 낙하산을 발견했고 이것이 쿠퍼가 사용한 낙하산이라 주장한다.
이후 맥코이의 자녀들 역시 아버지가 D.B. 쿠퍼였다고 공개적으로 주장하며 논쟁(이슈)에 가세했다. 딸 샹테는 부모님(맥코이, 캐런)이 두 항공기의 납치를 모두 계획했었다는 이야기가 가족 내부의 오래된 비밀이었다는 취지의 주장까지 내놓는다.
다만..
이는 어디까지나 가족과 그라이더 측의 주장에 불과하다.
캐런이 1992년 법정에서 인정한 것은 어디까지나 1972년 Flight 855 납치 사건의 범행 가담이었지, 1971년 D.B. 쿠퍼 사건에 대한 공모를 언급한 사실은 없다.그래도, 새 증거라고 주장된 물품이 FBI 측에 전달됐다는 보도는 나왔다.
2023년 그라이더라와 맥코이의 아들이 낙하산과 하네스(낙하산 멜빵 장치), 스카이다이빙 로그북을 FBI 요원들에게 넘겼다고 보도됐다. 이후 FBI가 해당 물품들을 보관한 뒤 2025년 말 가족에게 반환했다는 후속보도도 나왔다.
허나 FBI는 그 낙하산을 쿠퍼 사건의 증거물이라고 공식 인증하거나, 맥코이에 관한 기존 입장을 변경하지는 않았다.
즉 새로운 증거 물품이 등장했고, 맥코이 가족까지 동일인 설을 공개적으로 지지하며 FBI의 검토도 이뤄졌으나, FBI의 공식 입장은 여전히 바뀌지 않았다는 것이다.
물론, 워낙 흥미로운 소재거리(?)이기에 맥코이는 지금도 D.B. 쿠퍼의 유명한 용의자 중 하나를 차지한다.
그럼..
리처드 맥코이는 정말 D.B. 쿠퍼였을까?
두 사건 사이에서 유사성은 분명 존재한다.
맥코이는 쿠퍼 사건 불과 몇 달 뒤 실지로 보잉 727을 납치했고, 4개의 낙하산과 거액의 몸값을 요구한 뒤 승객들을 내려보내고는 비행기를 다시 띄워 후방 계단으로 밤하늘에 뛰어내렸다.
반면 결정적인 연결고리는 존재하지가 않는다.
쿠퍼를 가까이서 본 승무원들의 인상착의는 당시 28세였던 맥코이와 특히 연령 부분에서 크게 달랐고, 두 범행의 세부 방식에도 분명 차이가 있었다. 쿠퍼 사건 당시에 맥코이가 포틀랜드에서 Flight 305에 탑승했다는 사실 또한 확인된 적이 없다.
1991년부터 제기됐던 물증(검은 넥타이와 자개 장식의 타이클립) 주장도..
그리고 비교적 최근 발견됐다는 낙하산 역시도 FBI의 공식 인증을 받지는 못했다.
돌이켜보면..
맥코이의 인생에는 유난히도 '탈출'이 많았다.
십 대 시절 경찰을 피해 차에서 내려 숲으로 달아났고, 1972년엔 50만 달러를 안고 비행기에서 뛰어내렸으며, 체포된 뒤에는 구치소에서 달아나려 했고, 결국은 연방교도소마저 빠져나왔다.
그렇게 그는 계속해서 어디론가 빠져나갔다.
허나..
마지막에는 그러지 못했다.
1974년 11월 9일 밤.
리처드 플로이드 맥코이 주니어가 마지막으로 열어젖힌 것은 출구가 아닌 입구였다.
참조
<Axios Seattle/Parachute discovery sparks new interest in D.B. Cooper case> Christine Clarridge
<Cowboy State Daily/Part 4: Who Is D.B. Cooper? FBI’s ‘One-In-A-Billion’ Parachute Returns> Jen Kocher
<D.B. Cooper: The Real McCoy> Bernie Rhodes & Russell P. Calame
<Deseret News/Hijacker's Widow to Gain $120,000> Marianne Funk
<Deseret News/McCoy's Widow Admits Helping in '72 Hijacking> Marianne Funk
<Deseret News/Were Provoan, D.B. Cooper Linked?> Kenneth S. Rogerson
<FBI Law Enforcement Bulletin/The Futility of Aircraft Hijacking> Federal Bureau of Investigation
<FBI Norfolk History> Federal Bureau of Investigation
<FBI Vault/Richard McCoy Part 01> Federal Bureau of Investigation
<FBI Vault/Richard McCoy Part 02> Federal Bureau of Investigation
<FBI/D.B. Cooper Hijacking> Federal Bureau of Investigation
<FBI/Richard Floyd McCoy, Jr.> Federal Bureau of Investigation
<FBI/Update on Investigation of 1971 Hijacking by D.B. Cooper> Federal Bureau of Investigation
<Hall of Valor/Richard McCoy> Military Times
<Identifying the Culprit: Assessing Eyewitness Identification> National Research Council
<News & Observer/Was D.B. Cooper, the legendary hijacker, really a Broughton grad from Raleigh?> Josh Shaffer
<Supreme Court Journal/October 9, 1973> Supreme Court of the United States
<TIME/CRIME: The Real McCoy> TIME
<United States v. Richard Floyd McCoy Jr., 478 F.2d 176> U.S. Court of Appeals for the Tenth Circui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