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범죄사에서 가장 미스터리한 미술품 도난 사건

* 본 글은 단순히 범죄사건과 관련한 호기심을 충족시키고자 오락적 목적을 추구하는 것이 아닌, 사건의 악랄한 범행성을 알림과 동시에 범죄의 연보年譜를 통한 교육에 그 목적을 두고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朝日新聞/1976.1.30)

1968년 11월 9일이었다.

일본의 교토 국립근대미술관에서, 프랑스의 대표적 인상파 화가였던 앙리 드 툴루즈 로트레크의 작품 전시회가 개최된다.

바로 이 전시회 마지막 날에 사건이 발생한다.

일본 범죄사에서 가장 미스터리한 미술품 도난 사건이.

1968년 11월 9일, 일본의 교토 국립근대미술관.

프랑스의 거장 화가 로트레크의 작품을 대규모로 다루는 전시회는 처음이었기에 회장은 연일 성황을 이룬다.

그렇게 전시회 마지막 날인 12월 25일까지 무려 7만 명이 넘는 입장객들이 몰리면서, 교토 국립근대미술관 측은 전시회를 이틀 연장하기로 한다.

잠시..

본격적으로 사건으로 들어가기 전에, 로트레크에 대해 아주 짧게나마 설명하고 넘어가겠다.

(Paul Sescau)

로트레크는 19세기 프랑스의 대표적인 화가였다.

명망 있는 백작 가문에서 태어난 그는, 유럽의 왕족 및 귀족 사회에서 성행했던 근친혼의 영향때문이었는 지( 선천적으로 병약한 데다 뼈가 약했다. 때문에 13살과 14살 무렵 넘어지면서 입은 타박상으로 좌우 대퇴골이 부러지고 말았고, 그대로 발육이 멈추면서 신장이 152cm에 머물게 됐다.

로트레크는 귀족 사회에 대해 반감을 지녔으며 도시 하층민의 생활 방식에 매료됐다. 그의 예술적 영감 중 하나는 매음굴의 여성들이었다.

생전 수백의 작품을 남긴 로트레크는 그저 인쇄물에 불과하던 포스터를 예술적 차원으로 승화시킨 대표적인 화가이며, 그러한 대표작으로 물랭 루주 포스터가 있다.

로트레크의 물랭 루주 포스터. 물랭 루주는 로트레크에게 빚을 졌고, 로트레크는 압생트에게 빚을 졌다고 할 수 있겠다. (Henri de Toulouse-Lautrec)
(Henri de Toulouse-Lautrec)

다시 돌아와..

그렇게 일본 교토에서 열린 로트레크의 작품 231점을 한곳에 모은 전시회.

그 화려했던 개막 때의 열기가 전시회 마지막 날 전까지 이어지며 이제 폐막만을 남겨두던 때였다.

그렇게 전시 마지막 날 12월 27일 아침, 개관을 준비하던 직원이 로트레크의 유화 <마르셀>이 감쪽같이 사라진 것을 알아챈다.

이에 직원들은 즉시 다른 작품들의 이상 유무를 확인했으나 사라진 건 오직 <마르셀> 1점뿐이었다.

단 하루 사이에 로트레크의 작품 1점이 홀연히 증발한 것이다.

해당 사건에는 이처럼 <마르셀>이 감쪽같이 사라졌던 것 외에도 이상한 점이 또 있었다.

당시 <마르셀>의 가치는 한화로 3,500만 원 정도였는데 반해, 바로 옆에 전시된 작품은 1억 원 이상이었다. 그럼에도 범인은 이 <마르셀>만을 특정해 훔쳐 갔던 것이다.

범인은 <마르셀>에 특별한 감정을 품고 있었음이 분명했다.

한편, 이러한 도난 사건에 교토 국립근대미술관은 물론 일본 정부까지도 발칵 뒤집어진다.

단순히 <마르셀>의 가치를 떠나, 당시 일본은 프랑스 문화청과 프랑스 정부의 협조를 받은 끝에 마침내 프랑스의 알비(Albi) 미술관과 공동으로 이 로트레크 작품 전시회를 주최할 수 있었던 것이었으니 말이다.

이러한 연유로, 해당 도난 사건은 단순히 미술작품 1점을 소실한 것이 아니라 프랑스 정부와의 관계를 소실하는 것을 의미했다.

하여, 일본 정부는 발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한다.

일본 문화청 장관의 긴급 담화가 열렸으며, 교토 국립근대미술관의 관장은 사임을 표명했고, 수사 협력자에게 1,000만 엔의 현상금을 건다는 전단지 5만 부가 뿌려졌다.

실제 당시 배부됐던 전단지 (Yahoo!オークション)

허나, <마르셀>의 행방은 이미 완전히 끊긴 상태였다.

사건 수사에 의해, <마르셀>은 12월 26일 폐관 후인 19시 50분부터 다음날 27일 개관 전인 9시 40분경 사이에 도난당한 것으로 추정됐다.

헌데, 26일 23시 53분경 한 수상한 남자가 목격되면서 경찰은 <마르셀>의 도난 시점을 26일 야간으로 무게를 둔다.

이 수상한 남자는 자정이 다 된 시간에 문제의 미술관으로부터 400m 떨어진 거리에서 택시에 탑승했으며, 신장은 160cm에 통통한 외형에 30-35세가량으로 보였다고 한다. 또, 계절과 시간대에 맞지 않게 셔츠와 카디건 차림새였다고.

이 남자는 1.5km 떨어진 교토 대학 근방에서 하차했다고 한다.

당시 신문에 실린 해당 남자의 몽타주 (読売新聞/1975.7.5)

한편 당시 <마르셀>이 전시되던 1층 전시실 주변과 및 사무실 유리창, 홈통, 화장실 등에서 범인의 것으로 추정되는 발자국들이 발견됐다.

또, 도난이 있은 지 4일 후인 12월 30일엔 교토 국립근대미술관에서 약 200m가량 떨어진 자전거 보관소 부근서 <마르셀>에 사용된 액자가 발견된 것이 소득의 전부였다.

설상가상으로, 사건이 미궁으로 빠질 낌새가 보이자 다음 해인 1969년 1월 4일에는 도난 당시 교토 국립근대미술관에서 당직 근무 중이였던 55세의 수위가 부담감과 책임감으로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일까지 벌어진다.

그렇게..

13,000명의 수사 인력 투입, 5,000여 명에 달하는 참고인을 포함한 수사 대상자가 있었으나 유력한 용의자 없이 공소시효 만료일인 1975년 12월 27일이 찾아온다.

헌데..

절도죄의 공소시효인 7년이 흐르고 다음 해인 1976년 1월, <마르셀>은 거짓말처럼 돌아온다. 오사카에 거주하는 한 중년의 회사원 부부가 난데없이 <마르셀>을 공개(?)한 것이다.

이러한 소식은 1976년 1월 30일 자 아사히 신문 등을 통해 대대적으로 알려졌고, <마르셀>은 도난으로부터 무려 7년 4개월이나 지난 시점인 2월 27일에서야 고향인 프랑스 알비 미술관으로 반환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이 부부는 어째서 도난 중인 마르셀을 가지고 있었던 것일까?

이들 부부가 바로 문제의 괴도였던 것일까?

이들 부부에 따르면, 자신들은 <마르셀> 도난과 직접적인 연관이 없다고 한다.

1973년 가을경에 지인이었던 당시 28세의 한 중학교 교사가 자신이 찾으러 올 때까지 보관을 부탁한다며, 설령 자신의 부모가 찾아와도 건네주지 말라는 당부와 함께 부인에게 보라색 보따리를 맡겼다고.

한편, 부인은 별다른 의심 없이 흔쾌히 물건을 맡았다고 한다. 이 교사가 어릴 적부터 자신들 집에 종종 놀러 오곤 했었던 사이였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물건을 맡아 내용물을 확인하지 않고서 그대로 벽장 속에 보관했다고 한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다음 해인 1974년 7월, 버스 정류소에서 우연히 그 중학교 교사를 만난 자리에서 맡긴 물건을 가져가라고 하나 그대로 더 맡아달라는 대답을 들었다고.

부인은 그로부터 얼마 후 해외여행을 준비하면서 남편에게 중학교 교사로부터 물건을 맡고 있었다며 보따리를 보여줬고, 거기서 부부는 처음으로 보따리 속 내용을 확인했다고 한다.

그때까지도, 부부는 단순히 일반적인 회화를 맡았구나라고 생각했단다.

시간이 흘러 1976년 1월 24일.

부부 중 남편 쪽이 일 관계로 외국의 회화 관련 책을 보던 중 문득 맡고 있던 회화가 떠오르면서 호기심에 정체를 조사해 보기 시작했단다. 여기서 그림 뒤편에 로트레크의 이름이 기입된 것을 확인하면서, 이게 단순한 회화가 아니라는 것을 처음 깨달았다고.

그렇게 28일경 관련하여 지인과 상담을 가진 끝에 자신들이 맡고 있던 회화가 바로 문제의 도난품 <마르셀>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서 즉각 아사히 신문사에 연락을 취했다고 한다.

한편 아사히 신문사는 비밀리에 사건 당시 교토 국립근대미술관에서 사업과장직을 맡았던 교토 대학의 이누이 요시아키 교수와, 고베 대학의 이케가미 타카하루 조교수에게 감정을 의뢰한다.

이러한 검증 과정 끝에, 부부가 맡고 있던 회화가 <마르셀>이 확실하다는 결론이 나온다.

무려 7년이 넘는 실종이었다.

로트레크의 <마르셀>이 거의 손상 없는 상태로 돌아오면서, 경찰은 비록 공소시효가 지난 시기였으나 해당 그림을 중년 부부에게 맡겼다던 중학교 교사를 찾아 사정청취를 실시한다.

허나, 이 중학교 교사는 자신 또한 어느 지인으로부터 보관을 부탁받았던 것뿐이라며 내용물이 무엇이었는지는 몰랐다고 주장한다.

이 중학교 교사는 <마르셀> 발견 보도가 나가던 1월 30일 오후 히라카타시 관공서 기자클럽에서도 취재진에 같은 내용의 주장을 펼친다. 자신도 무엇인지 모르던 상태로 물건 보관을 부탁받았던 것이며, 다른 사람이 보관을 부탁한 물건을 훔쳐보거나 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고 생각해 끝까지 물건의 정체를 몰랐다고 말이다.

이에 따르면, 1972년 가을경 지인으로부터 경찰의 수사 대상이 되는 물건이라는 설명과 함께 보관을 부탁받았다고 한다. 이 중학교 교사는 정치적 활동을 이어가던 중이었으며(1960년대는 일본에서 가장 과격한 시위 활동이 벌어지던 시기였음), 문제의 지인 역시 그러한 계통이었기에 전단물 정도로 생각해 의심 없이 보관을 맡았다고.

더불어 이 중학교 교사는 자신에게 물건 보관을 부탁했던 사람이 누구였는지 밝히기를 완강히 거부했는데, 절도에 대해서는 당연히 부정적이나 자신이 입을 열면 역시나 신조(시위 동료를 팔아넘기지 않는다는)와 신의에 어긋나는 행위라는 게 그 이유였다.

결국, 이 중학교 교사의 완고한 태도에 경찰은 공소시효가 이미 지난 사건이라는 연유로 더는 수사도 추궁도 하지 못한다.

그렇게, 한 명의 애꿎은 사망자를 낸 이 범인 없는 도난 사건은 찝찝하게 막이 내려지게 된다.

<마르셀>은 발견 당시 네 귀퉁이 부분에서 황색 얼룩이 발견되었을 뿐 전체적으론 손상이 없는 깨끗한 상태였다.

헌데 범인이 굳이 비싼 작품을 뒤로한 채 <마르셀>을 훔쳤을 정도로 특별한 감정을 품고 있었다면, 이러한 얼룩은 분명 범인에게 있어 재앙이었음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범인은 어째서 <마르셀>을 품에 두고서 아끼며 애정하지 않았으며, 미술품에 맞지 않는 방식으로 보관될 것이 뻔한데도 타인에게 보관을 맡겼느냐는 풀리지 않을 의문이 존재한다.

그렇게..

1968년 12월에 발생한 '<마르셀> 도난 사건'은, 같은 시기 발생한 '3억엔 사건'과 함께 일본 범죄사의 대표적인 미제사건으로 남게 된다.

지금까지도.

1893~1894년作 <마르셀>. 크기는 8호로 가로 29.5cm 세로 46.5cm였으며 후기 인상주의 초상화이다. (Henri de Toulouse-Lautrec)

참조

<京都新聞/1968.12.28>
<朝日新聞/1976.1.30>
<読売新聞/1975.7.5&1976.1.31>

-끝-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