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명의 노인이 수집한 미스터리한 사진들
* 본 컨텐츠는 이상한 옴니버스(이상한옴니버스닷컴)이 해외의 미스터리 관련 컨텐츠를 번역한 것입니다.
이러한 컨텐츠 모두 親 미스터리 성향임을 알려드립니다.
- 주: 영어권 익명 기반 스레드 커뮤 중 가장 잘 알려진 4chan에 올라온 게시글임.
게시자는 자신을 미국 내의 작은 독립 출판사 에디터로 소개함. 지역 기반의 오래된 소규모 출판사이기에, 종종 지역 주민들이 출판을 의뢰해 온다고 설명. 그러나 대부분은 출판 가치가 없는 것들.
그러던 어느 날, 익명의 한 노인이 자신이 수집한 사진집 출판을 의뢰함. 사진들 대부분은 20세기 전반의 것으로, 모두 범상치 않았으며 사진과 함께 작성된 캡션들도 흥미로웠음.
그렇게 출판물 작업이 3분의 1정도 진행됐을 때 일이 틀어지고 맘. 누군가가 이 노인에게, 출판 취소와 더불어 사진들이 일반에 공개되지 않는 것을 조건으로 거액을 제시함. 노인은 변호사를 고용해 계약 무효화 및 소송제기를 빌미로 협박해 왔고, 해당 로펌에서 나온 IT 담당자로 인해 게시자가 수개월 동안 매달렸던 작업물도 삭제 처리를 앞두게 됨.
이에 분개한 게시자는, 개인용 컴퓨터에 있던 저해상도용 스캔본 PDF 파일에서 이미지를 추출해 업로드 하기에 이름.
바로 다음이, '문제의 사진과 캡션' 중 일부라고 함.
찰리 누난의 마지막 인터뷰
찰리 누난은 20세기 초 미국 남부와 남서부 전역을 여행하며, 초자연적인 이야기와 설화를 수집하던 아마추어 민속학자였다.
그의 아내 엘리에 의하면 이렇다.
찰리는 어느 날 오클라호마의 한 농부로부터, 팬핸들 지역의 외딴곳에 홀로 사는 한 이상한 여인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고 한다.
농부는 여인이 분명 여성이 아니라 주장했다. 여인은 스카프로 얼굴을 감싸고는 언제나 커다란 개를 곁에 데리고 다니며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 있는 무언가 다른 존재라고 했다.
누난은 이에 호기심을 느껴, 연구차 일정이 잡혀있던 여행길에서 해당 여성을 찾아보고자 결심한다. 그리고, 이후로 다시는 그를 볼 수 없었다.
훗날 털사 지역의 한 전당포 업자가 엘리에게 연락을 취해온다. 업자는 어느 떠돌이로부터 카메라를 들여오게 됐는데, 카메라에 새겨진 이름이 신문에서 본 실종자 기사 속 남자의 이름임을 알게 됐던 것이다.
업자에게 카메라를 건네받은 엘리는 남편의 행방에 대한 단서를 찾고자 필름을 현상하기로 한다. 그리고 이 사진이 필름 롤에 기록된 유일한 사진이었다.
안타깝게도, 찰리의 노트엔 해당 여인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준 농부의 이름이나 여인의 거주지에 대한 게 기록되어 있지 않았다.
그랜드 동굴의 괴생명체
(주: 그랜드 동굴은 미국 버지니아의 석회 동굴이자 최초의 관광 동굴)
이 사진은 1895년에 아마추어 동굴 탐험가 겸 사진작가인 오렌 제프리스가, 그랜드 동굴 내의 지도에도 표시되지 않은 구간을 탐험하던 중 찍은 사진이다. 제프리스는 빛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 동굴의 어둠 구간에서 과연 무엇을 포착할 수 있을지를 알아보고자, 카메라의 장노출을 사용하는 실험에 돌입한다.
그는 평평한 지면에 자리를 잡고서 랜턴을 끄고는, 직접 만든 박스 카메라(상자형 사진)의 렌즈를 열고선 어둠을 견딜 수 있을 만큼 최대한 오랫동안 촬영에 임하고자 한다. 그리고 이러한 실험 도중 동굴의 보다 깊은 곳에서 무언가가 다가오는 소리를 듣는다.
겁에 질린 제프리스는 실험을 포기하기로 하고는 야간 촬영용 플래시를 터뜨려 사진을 촬영한다.
훗날 그가 지역 신문사에 제공한 보고서에 따르면, 그는 그림자 안에서 세 마리의 인간형 생명체가 자신을 쳐다보는 것을 보고는 반대 방향으로 내달려 동굴의 정상에 다다를 때까지 멈추지 않았다고 한다.
그로부터 며칠 후, 그는 다른 세 명의 남자와 함께 박스 카메라를 되찾고자 현장을 다시 방문했다. 그리고 이 사진이 필름 내부에 기록돼 있었다.
소렌슨家의 비극
소렌슨 가족은 1905-1906년 사이에 걸쳐 미국으로 이민 온 덴마크인 가족이다.
처음엔 장남 안데르스(당나귀 위의)를 동반해 미주리주의 한 농가에 정착했다. 곧이어 세 자녀 시몬, 프리케, 마틸드(차례로 가운데, 우측, 좌측 아래에 작은 마차를 탄)가 합류한다. 1916년에 촬영된 이 사진은, 비극이 벌어지기 몇 주 전 네 아이의 모습을 담고 있다.
막내를 제외한 세 아이는 건초 헛간에서 소꿉놀이하다 잠이 들었던 것 같다. 이를 몰랐던 아빠 니클라스는 Hay sweep(주: 1900년대 초 개발된 건초 청소기. 목제 프레임에 뾰족한 강철 기둥이 박혀있으며, 트랙터에 부착해 건초 더미에 꽂아 옮기는 방식.)을 건초 더미로 꽂아 넣었다.
세 아이 모두 그 자리에서 사망했다. 사진에서 결함으로 인해 흰색 줄이 나 있는 부분에 해당하는 신체 부위가 잘리듯 훼손되어. 당시 막내였던 마틸드는 엄마와 함께 집 안에 있어 화를 면했다.
훗날 이웃의 증언에 따르면, 사진 속 당나귀는 사건 이후 철조망 울타리에 머리가 끼인 상황에서 빠져나오고자 발버둥 치다가 목이 거의 베어지는 끔찍한 방식으로 죽었다고 한다.
릴리 파머의 눈
릴리 파머가 네 살이 채 되지 않았을 무렵 일어난 일이다.
릴리는 훗날 의사들이 '급성 감각 환각증'이라 부르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1952년 할로윈 밤에.
이 사진은 릴리의 엄마인 아넷이 그날 밤 찍은 사진으로, 릴리의 환각증이 막 시작되던 순간과 맞물리고 있다. 릴리는 필리핀인 유모와 함께 사탕을 받으러 나가던 중, 갑작스레 비명을 지르더니 눈을 할켜대기 시작했다.
릴리가 말을 할 수 있을 만큼 진정이 되기까지는 시간이 좀 걸렸다. 릴리는 무엇을 보았길래 그랬냐는 질문에, '눈을 기어다니는 것들'에 대해 반복해서 이야기했다.
며칠 후, 릴리는 아무도 없는 침실에서 엄마의 뜨개질바늘로 자신의 두 눈을 찔렀다.
치료가 있은 후, 릴리는 신경-정신질환 유효성 평가를 받고는 입원 치료를 시작했다. 처음엔 맨해튼 동쪽의 벨뷰 정신의학센터에서였다. 그리고 그 후에는 오렌지버그에 있는 록랜드 정신의학센터에서 치료를 받았다.
그렇게 릴리는 2001년 3월 심장마비로 사망할 때까지 평생을 시설에 머물렀다. 록랜드의 전 간병인 중 한 명은, 릴리가 평생 동안 직원들에게 다음과 같이 애원하는 것을 들어왔다고 증언했다.
"눈에서 이것들 좀 빼줘!"
뉴올리언스의 도끼 살인마
(주: 1918년 5월부터 1919년 10월까지 미국 뉴올리언스에서 벌어진 영구미제 연쇄살인사건. 범인은 도끼를 들고 가정집에 침입하는 방식으로 6명을 살해하고 6명을 다치게 함.)
에두아르 마르텔은 프랑스의 사진작가이자 발명가였다.
그는 20세기 초반 20년 동안 미국 전역을 여행했다. 코닥사의 인기 접이식 카메라였던 브라우니 모델에다 타이머와 자동 노출 기능을 추가하고는, 그 장치에 투자할 투자자를 모을 심산이었다. 하지만 그의 이런 목표는 끝내 실패로 마무리됐다.
그는 여행 동안 테스트 및 기능 개선 목적으로 수천에 달하는 자동 촬영을 수행했다.
그는 여행 중 종종 아침 일찍 일어나 사람들 눈에 잘 띄지 않는 곳에 아무도 모르게 카메라를 설치하고는, 거리의 일상적이고 꾸밈없는 모습을 찍곤 했다. 여행의 추억을 기억할 수 있도록.
1924년, 이러한 사진 중 엄선된 작품들이 파리에서 열린 개인 전시회에 출품됐다. 마르텔의 생애 유일한 갤러리 전시였다.
1955년, 안타깝게도 마르텔은 무일푼으로 생을 마감했고, 딸인 잔느는 그가 남긴 사진 박스들을 분류해 보관할 것과 버려야 할 것을 구분해야 했다. 이 과정에서 그녀는 1919년 10월 28일 아침 뉴올리언스에서의 사진을 발견한다. 당시 마르텔이 증기선을 타고 프랑스로 귀국하기 불과 몇 시간 전에 찍힌 것이었다.
마르텔은 모션 블러된 사진을 싫어했다. 렌즈 메커니즘의 속도와 정확성에 나쁜 영향을 준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이러한 그의 편견이, 자신의 생애에서 찍은 사진 중 가장 중요한 사진이 무엇인지를 놓치게 만들었다.
해당 사진이 특별한 이유가 무엇일까?
사진이 찍히기 전날 밤, '뉴올리언스의 도끼 살인마'의 범행이 있었다. 살인마는 페피톤 부부의 집에 침입해 남편 쪽을 살해했고, 아내 쪽이 시신을 발견하는 순간 현장에서 빠져나왔다.
사진 속 모습은 이 살인마가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던 순간인 걸까?
(주: 해당 사건이 이 살인마의 마지막 범행이었으며 이후 그는 영영 자취를 감춘다. 당시 페피톤 부인이 현장을 떠나던 살인마를 목격한 게, 살아남은 사람 중 가장 명확히 범인을 목격한 케이스다. 부인은 범인을 두고서, '커다란 남자'라고 묘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