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인슈타인이 불시착한 UFO를 방문했다"고 고백한 아인슈타인의 개인 조수

"전혀 할 말 없습니다."

- 1947년 7월, 로스웰 지역에서 미국 육군항공대가 UFO를 수거했다는 소식에 대해 논평을 요청하던 UP통신 특파원에게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이

2015년 7월 5일.

플로리다 마이애미 지역지 등에 부고가 실린다.

"셜리 라이트가 2015년 7월 1일 85세의 나이로 작고했습니다.

십대 시절 마이애미 비치에 부모님이 트로피케어 호텔을 건립했고, 이후 수년간 그녀가 운영하기도 했습니다.

그녀는 헌신적인 교사이자 과학자로 물리화학과 물상과학 박사학위를 취득했습니다. 50년 넘도록 마이애미 데이드 대학(주: 플로리다 최대 규모의 대학)에서 화학과 교수로 재직했습니다.

그녀는 프린스턴에서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박사의 제자였습니다.

그녀는 마이애미 대학교(주: 플로리다의 명문대)와 배리 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고, JMH 간호대학과 하이얼리어 고등학교에서도 강사로 활동했습니다.

그녀는 마이애미 데이드 대학 교수 평의원회의 첫 여성 회장직을 맡았는가 하면, 도미니카 수녀회에 소속되어 다수의 자선단체에 후원하는 한편 50년 넘도록 과학 분야 우수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기부하기도 했습니다."

(Stanfill Funeral)

셜리 라이트.

그녀는 당시 세계 최고의 대학 중 하나였던 프린스턴 대학에서 세계 최고 석학 중 하나였던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의 가르침을 받았다고 한다. (프린스턴 대학에서 한시적으로 주최한 영재 학생 선발 과정에서 선발됨)

더 자세히 소개하자면, 그녀는 아인슈타인이 총애하던 제자였다고. 개인 조수로 고용해 함께 일정을 소화할 정도로 말이다. 아주 아주 중요한 일정을.

(아인슈타인은 1933년 미국으로 망명한 이래 프린스턴 고등연구소에 적을 두며 프린스턴 대학에서 물리학 강의를 수행했다)

여기에 또 다른 인물이 등장한다.

(UFO Explorations)

MUFON 플로리다 지부 소속 UFO 연구가로 오랫동안 신뢰를 구축해 온 쉴라 프랭클린.

(MUFON은 미국 내의 비영리 UFO/외계인 케이스 기록 및 조사센터로, 미국 전역에 지부가 존재하는 역사상 가장 전통 있고 영향력 있는 UFO/외계인 케이스 기록 및 조사 기구)

1993년, 그녀는 어느 날 동료 연구가로부터 생각지도 못한 전화를 받는다. 동료 연구가의 말에 따르면, 한 대학의 교수 밑에 있던 학생으로부터 충격적인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는 것이다.

동료 연구가의 지기가 그 교수와 사회적 친분이 있었고, 지기의 아들이 바로 이 교수의 학생이기도 했다고. 이 학생은 교수님의 비밀 하나를 알게 됐다고 전해왔다.

바로, 다음과 같은.

"교수님은 아인슈타인 박사와 UFO를 직접 본 적이 있어요!"

UFO 연구가 프랭클린은 이러한 이야기를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64세로 미시시피 델타 커뮤니티 대학의 존경받는 교수이자 자선사업으로도 유명한 지역 명사의 입에서 나온 말이 아니던가.

이에 프랭클린은 1993년 7월경부터 이 라이트 교수와 접촉하며 십수 차례 유선상으로 연락과 인터뷰를 진행했다. 그리고 이러한 자료를 당시 미국의 유명 UFO 연구가였던 레너드 스트링필드에게 공유했다. 그렇게 스트링필드 역시 라이트 교수와 유선을 통해 접촉을 하게 된다.

11월경, 마침내 프랭클린은 라이트 교수가 재직하던 대학가(플로리다 마이애미) 근처 그녀의 단골 식당에서 직접 만남을 갖는다.

그리고 이 만남에서 동의를 구해 인터뷰를 녹음하기에 이른다.

라이트 교수는 이 자리에서 극히 태연하고 당당한 태도로 인터뷰에 임하며 깊은 인상을 줬다고 한다.

물론, 그녀가 말해준 일련의 이야기는 그보다 훨씬 더 깊은 인상을 남겼고 말이다.

다음은, 바로 이 문제의 라이트 교수가 전화 통화와 인터뷰 자리에서 발언한 내용을 종합한 것이다.

"1947년 여름이었다.

18세의 셜리 라이트는 과학에 관심이 많던 아주 똑똑하고 영리한 학생이었다.

당시 프린스턴에서는 하계 과정으로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휘하에서 AP물리학(Advanced Physics) 분야를 연구하고 공부할 영재 학생들을 선발했고, 라이트는 치열한 경쟁을 뚫고서 유일한 여자 학생으로 선발되면서 꿈을 이룬다.

여기서 선발된 29명의 학생은 하계 연구 교육 과정에서 필요한 보안 허가를 받게 됐다.

아인슈타인은 선발된 모든 학생에게 상냥하고 친절했다. 특히 라이트에게 더욱 그러했다. 아인슈타인은 영특한 라이트를 마음에 들어 했다.

프린스턴 대학에서 강의하던 아인슈타인의 모습 (Getty Images)

그해 7월 초순, 미국 남서부 또는 서부의 어떤 특정한 장소로 과학 및 군사 분야의 엘리트들이 긴급회동을 갖도록 미국 정부가 요청(소환)한다.

이러한 요청을 받은 아인슈타인은 일행 무리에 개인 조수로 라이트를 동행시킨다. 라이트는 수행원 자격으로 미국 정부의 특별 회의에 동참하게 된 것이다.

그렇게 상업용 여객기를 타고 프린스턴에서 시카고에 도착한 뒤, 일행들과 함께 다른 항공기를 타고서 어느 작은 민간 공항으로 향했다.

사실상 아인슈타인의 동행인에 불과해 따로 브리핑받지 못한 라이트는 최종적으로 도착한 지역이 어디인지 알지 못했다. 그저 착륙한 곳이 사막 지대였기에 뉴멕시코(로스웰이 있는) 또는 피닉스로 추정할 뿐이었다.

당시 우기를 맞아 착륙한 곳에서 비가 오고 있었는데, 아인슈타인 일행을 환영하고 맞이하고자 우비를 쓴 고위 장교가 대기하고 있었다. 군복 카라로 보이는 은색의 독수리로 미루어 해당 장교는 대령으로 유추됐다.

아인슈타인 일행은 군용 차량에 탑승 돼 약 80-120km를 이동한 끝에 군 기지에 도착했다. 기지 내에 머무는 동안 다른 일행들과 달리 라이트는 근방의 작은 모텔로 안내됐다고.

그래도 다행히 이 기간 동안 아인슈타인을 따라 격납고 안을 방문할 수 있었다. 외관이 오래된 대형 격납고는 삼엄한 경계가 이뤄지고 있었다고 한다.

안으로 들어서자 구석으로 UFO가 보관되고 있었다.

원반 모양이었으며 다소 높지 않은 오목한 형태를 띠고 있었고, 격납고의 4분의 1 정도를 차지하고 있었다.

가까이서 관찰하려는 기술자나 학자로 보이는 사람들과 군인들로(이 중 일부는 파일럿이었다고 함), 그리고 자신의 처지로 인해 UFO에 접근할 수가 없었던 라이트. 그래도 육안으로 UFO의 한쪽이 심하게 손상된 것을 볼 수 있었다고.

UFO의 표면(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은)은 멀리선 약간 반사되는 재질로 보였는데, 또 조금 접근했을 땐 약간 Dull(광택을 인위적으로 죽이는 화학 섬유)을 띄고 있었다고 한다. 지근 거리의 사람들은 UFO의 원 재질을 무척이나 궁금해하며 직접 손으로 만져보기도 했다고.

심지어 안에 들어간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라이트는 내부에 존재하는 많은 장비들이 아주 정갈한 배치로 구성됐다고 들었단다.

눈앞에서 외계인의 증거를 영접한 그녀. 그녀는 당시의 감상에 대해 '놀라움, 호기심 반과 두려움 반'이었다고 술회한다.

메인 디시(?)는 따로 있었다.

격납고의 다른 한편에선, 죽었는지 살아있는지 모를 외계인 여덟이 눕혀있었다.

신장은 약 150cm 정도로 보였고, 머리카락이 없었으며, 커다란 머리와 거대한 검은 눈을 하고 있었다.

날씬한 몸에 딱 맞는 수트를 착용하고 있었으며, 거의 외부로 노출되지 않은 피부는 약하게 초록빛이 도는 회색을 띠고 있었다.

코는 없었지만 그 부위에 마킹이 있었고, 눈썹도 없었으나 귀는 있었다. 또 이마가 아주 넓었다. 배꼽이나 생식기가 없다는 것을 주워듣기도 했다. 그들의 일체형(발까지 가려진 듯한) 수트는 평생 보거나 알던 어떤 옷감과도 매칭이 되지 않았다.

단추나 지퍼가 달리지 않은 수트 중앙으론 휘장과 같은 게 자리하고 있었다. 우리 인간이 측면에 휘장을 다는 것과 달리.

외계인들 중 하나의 콧구멍 부분에서 담즙과 같은 칙칙한 초록색 액체가 흘러나왔는데, 공기에 노출된 그 액이 점차 푸르스름해지기에 구리나 코발트 베이스의 물질로 생각됐다. 담낭과 같은 기관에 스며들었던 것일까하고 생각됐다.

기지에서 머물던 어느 날, 갑작스러운 사태가 벌어지며 일정이 변경됐다.

아인슈타인 일행은 캔버스탑이 달린 군용 수송차에 실린 채 군용 지프의 호위를 받으며 사막을 가로지르게 됐다. 그렇게 약 80km를 내달려 어느 외딴 건물로 안내됐다.

건물 주변으로 다수의 단층 건물이 있었으며 여러 대의 차량이 주차돼 있었다. 한눈에도 건물들 사이로 분주히 움직이는 사람들을 볼 수 있었다.

문 앞에 경비가 지키고 서있는 건물로 안내된 일행은 한 장교를 따라 의료진과 제복을 입은 사람이 모여있는 곳으로 향했다.

그곳엔 들것이 있었다. 라이트는 멀리 떨어져 있었음에도 쉬이 알아볼 수 있었다. 들것에 엎드린 채 몸을 일으키려 하며 괴이한 신음을 내뱉고 있는(말을 하는 모습은 볼 수 없었음).. 바로, 외계인이었다.

이 외계인은 이족보행체로 여겨졌으며, 그전에 격납고에서 봤던 외계인들보단 더욱 인간에 가깝게 보였다.

순간 외계인의 몸통 전체가 엄청나게 팽창하면서 기괴해 보였기에 의료진이 진정시키는 데에 어려움이 있어 보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일행은 현장에서 쫓겨나듯 건물을 나와야 했다.

이후 라이트는 이 부상입은 외계인이 살아남았다는 이야기를 접하게 됐다고 한다.

이렇듯 UFO에서 외계인에 이르기까지 일련의 상황을 직접 목도했던 아인슈타인은 어떤 반응을 보였었을까?

라이트에 따르면, 아인슈타인은 전혀 동요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외계인이 지구를 방문했다는 사실에 놀라지 않아 했다. 오히려, 우주에 대해 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는 희망을 품게 됐다는 취지의 감상을 전해왔다고 한다. 이러한 외계인과의 접촉은 양측 모두에게 이익이 될 수 있다고도 말했단다.

라이트는 아인슈타인이 가장 관심을 가졌던 것을 'UFO의 추진력'과 '우리가 아는 것보다 더 많은 우주에 대한 것들'이었다고 한다.

상기와 같이 아인슈타인 일행과의 생애 잊지 못할 9일 간의 여행에서, 라이트는 정식으로 상황을 브리핑받거나 참여하지 못한 채 직간접적인 체험을 했다.

이 UFO와 외계인들이 어디서 발견됐는지 명확하게 듣지는 못했다고 한다. 다만, 여행 도중 '로스웰'이라는 단어를 여러 사람이 사용한 것으로 미루어 추락 사고 지점을 추정할 수 있었다고.

한편, 처음부터 끝까지 라이트는 따로 기밀서약 서류 서명과 같은 것을 하질 않았다고 한다. 그저 수시로 구두로만 기밀서약을 다짐받았을 뿐이라고. 따로 서류를 남기는 것보다 오히려 효과적이라 여겼던 것일까?

라이트는 아인슈타인 일행의 9일 간의 잊지 못할 여행과 관련된 모든 기록물 및 증거물이 삭제 처리됐을 것이라고도 언급했다.

끝으로, 당시 UFO와 외계인들을 두고서 사진작가와 촬영기사로 보이는 이들이 자유롭게 사진과 영상을 찍는 모습이 인상에 남는다고.

그리고 놀랍게도!

아인슈타인 일행 중 한 구성원이 이렇게 촬영된 사진 세트를 보유하게 됐는데, 라이트를 신뢰하던 그 구성원이 48장의 사진을 건네줬다고 한다."

1993년경 UFO 연구가 프랭클린이 접촉했을 당시 라이트는 인생의 황혼기에 들어서고 있었다.

그녀는 역사 앞에 진실을 밝혀야겠다는 의무감을 느꼈다며 일련의 이야기를 털어놓았다고 한다.

프랭클린은 자신이 얻은 이 자료를 당시 미국의 유명 UFO 연구가였던 레너드 스트링필드에게 공유한다.

그리고 1994년, 지난 15년 넘도록 UFO 케이스 보고서를 공표해오던 스트링필드가 1994년 공개한 보고서에 라이트의 이야기를 싣는다.

단, 라이트의 본명을 가명으로 대체하고 아인슈타인을 '세계 최고의 과학자 중 하나'로 대체 표기한 채.

(UFO Crash/Retrievals: Search for Proof in a Hall of Mirrors)

세월이 흘러..

2021년, 유명 UFO 연구가 앤서니 브라갈리아가 스트링필드의 보고서에 관심을 갖게 된다.

세계 최고의 과학자와 그의 제자인 여성..

흥미를 느낀 브라갈리아는 추적 끝에 2015년 플로리다 마이애미 지역에서 발행된 부고란에 다다르기에 이른다. 그리고 마침내 다음의 대목과 마주하게 된다.

"셜리 라이트. 과학자이자 아인슈타인의 제자"

브라갈리아는 라이트가 보고서 속 주인공임을 직감한다.

더불어 그녀의 화려한 이력으로, 아인슈타인과의 일화가 진짜 신뢰할 수 있는 사람으로부터 나온 고백임을 굳게 믿게 된다.

그렇게 브라갈리아는 갖은 노력 끝에 라이트를 인터뷰했던 프랭클린과 연락이 닿는 데에 성공한다.

이후 끈질긴 설득으로 프랭클린으로부터 라이트 인터뷰 자료 일체(아쉽게도 녹음테이프는 일부가 소실)를 공유받고선 자신의 홈페이지에 일련의 이야기를 공개한다.

라이트가 이미 고인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자, 여기까지가 아인슈타인과 그의 조수 라이트의 기상천외한 여행록이다.

1947년 7월, 미국 정부는 기밀리에 아인슈타인을 비롯한 학자 및 군 관련자들에게 긴급회의 소집을 요청했던 것일까?

그해 여름, 정말 미국의 사막지대에 UFO와 외계인들이 불시착했던 것일까?

사건의 진위성 그리고 전말을 위해 두 인물을 추적해 보도록 하겠다.

(Getty Images)

먼저, 1947년 7월 초를 전후로 아인슈타인의 발자취를 확인할 필요가 있겠다.

이스라엘 예루살렘 히브리 대학교의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기록 보관소'에는 아인슈타인의 논문 및 개인 기록물 총 55,000개가 보관 중이다.

여기서 문제의 사건과 가장 가까운 개인 기록물은 아인슈타인의 동료가 보내온 서신이다. 이 7월 21일에 보내온 서신에선 아인슈타인에게 항해 여행을 권유하고 있다.

이에 아인슈타인은, 궤양 증상이 시작됐기에 그럴 수가 없다고 답장하고 있다.

또 아인슈타인의 역사적 자료물을 수집하는 EPP(Einstein Papers Project)에 따르면, 1947년 7월엔 언제나처럼 프린스턴에 머물고 있었다고 밝히고 있다.

그럼 라이트의 이야기 속 오류가 입증된 것일까?

허나, 처음부터 라이트는 미국 정부가 아인슈타인 일행의 여행과 관련된 모든 기록물 및 증거물을 삭제 처리됐을 것이라고 언급했었다.

지금과 같은 현대의 디지털 시스템이 구축되지 않았던 시대이기에, 정부 내 기밀 프로젝트 기관이 마음만 먹었다면 얼마든지 애초부터 기록물 생성 자체를 무마시켰을 가능성이 존재한다.

따라서..

라이트 이야기의 진위성 그리고 전말을 밝히기 위해서는 그녀라는 인물을 추적하는 게 유일한 방안이겠다.

"셜리 라이트가 2015년 7월 1일 85세의 나이로 작고했습니다.

십대 시절 마이애미 비치에 부모님이 트로피케어 호텔을 건립했고, 이후 수년간 그녀가 운영하기도 했습니다.

그녀는 헌신적인 교사이자 과학자로 물리화학과 물상과학 박사학위를 취득했습니다. 50년 넘도록 마이애미 데이드 대학(주: 플로리다 최대 규모의 대학)에서 화학과 교수로 재직했습니다.

그녀는 프린스턴에서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박사의 제자였습니다.

그녀는 마이애미 대학교(주: 플로리다의 명문대)와 배리 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고, JMH 간호대학과 하이얼리어 고등학교에서도 강사로 활동했습니다.

그녀는 마이애미 데이드 대학 교수 평의원회의 첫 여성 회장직을 맡았는가 하면, 도미니카 수녀회에 소속되어 다수의 자선단체에 후원하는 한편 50년 넘도록 과학 분야 우수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기부하기도 했습니다."

위는 라이트의 부고 소식에 사용된 그녀의 연혁이다.

그리고 지역지, 학보, 논문, 미국 연방 인구조사 기록 등을 통해 파악된 라이트의 연혁은 다음과 같다.

그녀의 법적 풀네임은 셜리 진 라이트, 1929년 8월 19일 미국 매사추세츠주 보스턴에서 태어났다.

유년 시절을 일리노이주 시카고에서 보냈으며, 이후 플로리다주 마이애미 비치로 이주해 성 패트릭 가톨릭 학교(수도원장과 도미니카 수녀들에 의해 처음 설립된)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1941년 12월 21일 자 트로피케어 호텔의 완공 예정 소식을 알리는 기사 (The Miami News)
1942년 당시의 라이트 (Ancestry)

우수한 성적을 유지하며(연례 지역 에세이 경진 대회에서도 수상) 고등학교를 졸업한 라이트는, 지역의 도미니카 수녀회 목사가 설립한(윌리엄 배리 수도원장이 지원) 배리 대학교에 장학금을 받고 입학한다.

대학에서 전공은 생물학이었으며 부전공은 화학이었으며, 대학 생활 내내 우수한 성적을 유지한다.

고등학교 시절 지역 에세이 경진 대회 수상 (The Miami Herald)
고등학교 시절 우수한 성적을 유지하며 대학 입학 장학금을 받음 (Barry University Student Newspaper)
수석 우등 졸업 대상자 선정, 하단 맨 우측이 라이트 (Barry University Student Newspaper)

라이트는 1952년엔 졸업 대신 학업의 길을 보다 걷기로 결심하면서, 전통 있던 여성 의학 대학인 펜실베이니아 여자 의과대학에서 1년간 공부를 한다.

(Barry University Student Newspaper)

이후 마이애미 대학교 대학원에 입학한 그녀는 지역의 잭슨 메모리얼 병원 간호학교에서 조교직을 맡기도 한다.

그리고 1955년, '메탄올-물 혼합물에서 브롬화부틸의 가용매 분해'를 주제로 한 논문을 발표하며 이학석사 학위를 수료한다.

(Department of Chemistry | University of Miami)

시간이 다소 흘러..

1962년 발행된 <플로리다 과학 아카데미 계간지>에서 화학 분야의 라이트가 새로이 합류됐음을 언급하고 있다.

동년에 마이애미에 위치한 하이얼리어 고등학교의 1962년 2월 27일 자 학보에서는 라이트가 과학 동아리의 후원자임을 명시하고 있다.

(​Quarterly Journal of the Florida Academy of Sciences)
(Hialeah High Record)

그리고 마지막으로, 1969년 마이애미 데이드 대학 화학과 교수진 사진에선 마흔에 접어든 라이트를 찾아볼 수가 있다.

이렇듯..

그녀의 부고에 기록된 사항들은 추적 결과 모두 사실과 부합했다.

그렇다면 1993년 당시 학자로서 이미 부와 명예를 구축했던 라이트가, 64세로 황혼기에 접어들면서 정말 그녀 자신의 말마따나 역사 앞에 진실을 밝혀야겠다는 의무감을 표출했던 것일까?

그간 자신이 쌓아 올렸던 모든 것이 무너질 수도 있는데 말이다.

하지만 말이다..

라이트의 이야기와 라이트 그녀 자신의 연혁 사이에서는 분명 몇몇 오류에 가까운 설정들이 존재한다.

첫째로, 그녀가 다니던 대학의 학보에는 대학과 관련된 것은 물론이고 학생들의 소소한 소식들 역시 실려있다. 이미 본 글에서도 첨부한 장학금 결과, 졸업생들의 자취와 같은 것들 말이다.

헌데, 이 학보에선 어째서인지 라이트가 프린스턴의 아인슈타인 휘하 하계 훈련생으로 선발됐다는 언급이 없다. 당시 전국에서 지원했을 과학 영재들을 제치고서 세계적 석학인 아인슈타인의 제자가 되는 뜻깊은 자리임에도 불구하고.

더불어 학보 외에 플로리다 마이애미 지역의 어느 신문에서도 라이트의 선발 소식은 찾아볼 수가 없다.

심지어 라이트가 작성한 박사 논문의 이력 부문에서도 말이다.

(Department of Chemistry | University of Miami)

라이트가 아인슈타인과 함께 등장하는 대목은 그녀의 부고에 짧게 한 줄 기록된 게 전부이다.

어째서일까?

과학자이자 교수로서 역사적 석학인 아인슈타인의 제자였다는 사실은 결코 이력에서 빼놓을 수 없는 사항이다.

이상한 점은 이게 끝이 아니다.

라이트가 훈련생으로 선발됐다는 소식은 물론이고 프린스턴에서 아인슈타인 휘하의 훈련생을 선발했다는 기록 자체가 존재하질 않는다.

아인슈타인이 미국으로 망명길에 오른 것은 1933년이다.

이후 뉴저지주 프린스턴에 기거하며 1939년까지 프린스턴 대학의 사무실을 사용했고, 죽을 때까지 프린스턴 고등연구소와 제휴 관계에 있었다. (이 과정에서 통일장 이론이 개발됨)

즉 아인슈타인은 세계적인 석학들이 첨단 학문 분야의 고등 연구를 수행할 수 있었던 프린스턴 고등연구소에서 양자역학과 상대성이론과 같은 연구를 진행했던 것이며, 그 과정에서 대학의 물리학 교수들과 교류하며 캠퍼스에서 이론 물리학 강의를 진행했던 것이다.

사실 아인슈타인의 본업은 어디까지나 연구였으며, 주로 1920-1930년대에 미국은 물론이고 세계 각지를 여행하며 이른바 순회강연을 펼쳐왔다.

어쩌면..

이러한 공개적인 강연 자리에 라이트가 참석한 적이 있을지 모르겠다.

허나 아인슈타인의 은퇴 시기가 1945년임을 고려했을 때, 강연에 참여했다고 가정할 시 라이트의 연령은 고작 10대 초중반에 불과하게 된다.

이렇듯 시기상으로도 맞지가 않으며, 이미 일선에서 은퇴한 지 2년이 지났으므로 프린스턴 대학 혹은 프린스턴 고등연구소(라이트가 '프린스턴'이라고만 명시했기에) 측에서 아인슈타인 휘하의 훈련생을 선발할 이유가 없다. 이미 아인슈타인의 연구 과업은 사실상 종결된 시기였으니까. 아인슈타인은 은퇴 후 1950년에 에세이 모음집을 발간한 것이 전부이다.

말인즉슨, 아인슈타인이 은퇴하던 1945년 당시에 라이트는 16살이었다는 것.

여담으로 프린스턴 고등연구소에서 아인슈타인의 조수로 일했던 에른스트 스트라우스, 존 케메니, 페터 바르그만 , 발렌티네 바르그만, 발터 마이어 모두 박사 학위를 보유했던 당대의 석학들이었다.

결론적으로, 은퇴 후 인생의 말년기에 접어든 아인슈타인이 뜬금없이 프린스턴 대학 또는 고등연구소와 협업해 자신의 연구 조수로 대학생을 선발했다는 가정은 이치에 맞지가 않다.

한편..

라이트는 UFO 연구가 프랭클린과의 인터뷰에서 자신이 아인슈타인의 선발된 훈련생이라고 주장했었는데, 부고에서는 'She was a student of Dr. Albert Einstein at Princeton'이라고 명시하고 있다.

이 'student'가 인터뷰의 연장선에 있는 것이라면 훈련생 내지 제자의 의미가 되겠고, 부고에 실린 문장으로만 바라봤을 때는 '프린스턴 대학에서 아인슈타인의 강의를  받던 학생'으로 해석될 수가 있겠다.

허나, 시기적으로나 정황상, 그저 라이트가 생전 유족 또는 주변에 과시 또는 너스레 성으로 말했을 가능성에 무게가 실린다.

참고로, 부고의 경우 생전의 본인 또는 유족이 준비한 연혁을 그대로 내보내는 것이므로 무조건적으로 신뢰할 수만은 없기도 하다.

'아인슈타인의 제자' 파트에서 또 납득이 쉬이 가지 않는 부분은, 바로 라이트의 전공과 커리어겠다.

상기에서 다뤘듯, 그녀의 전공은 화학이었으며 교수 재직 내내 화학과에 있었다. 또 물리화학 논문으로 이학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인터뷰 속 그녀의 주장에 따르면, 아인슈타인 휘하에서 AP물리학(Advanced Physics) 분야를 연구하고 공부할 영재 학생으로 선발됐다고 했다.

해당 분야를 떠나 생전 아인슈타인의 연구 과업 분야를 미루어 볼 때, 물리화학 분야에서 매칭이 되는 것은 양자화학 내지 핵화학이 있겠다.

허나, 라이트의 이학 석사 논문인 '메탄올-물 혼합물에서 브롬화부틸의 가용매 분해'는 아무래도 거리가 있는 게 사실이다.

그녀가 박사 논문에 대해 어디서 어떤 주제로 했는지를 밝힌 적이 없어 파악 불가, 현재 그녀의 이름을 색인으로 검색할 시 1973년 Florida Scientist의 지역 과학자 명부에서 찾아볼 수 있는 게 가장 최신으로 보다시피 박사(Dr.) 또는 박사학위(Ph.D.) 표기가 없는 것을 알 수 있음 (Florida Scientist)

이와 같이, 라이트의 인터뷰 속 내용에는 분명 설정 오류가 존재한다.

헌데..

아인슈타인의 발자취를 추적하던 파트에서처럼, 여기에도 미국 정부가 아인슈타인 일행의 여행과 관련된 모든 기록물 및 증거물을 삭제 처리했을 경우를 산정한다면?

그렇다 해도 여전히 다음의 치명적인 오류는 존재한다.

라이트는 1947년 하계 훈련생으로 선발됐다고 주장했다. 아인슈타인의 휘하에서 연구하고 공부하는 학생으로 말이다.

그렇다면 그러한 선발 과정은, UFO 추락 사건 및 미국 정부의 對 외계인 긴급회동이 애초에 시간상 그 이후에나 발생한 것이므로 상호 간 연관이 있을 수가 없다.

따라서 선발 과정과 관련한 뉴스도 존재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은퇴한 아인슈타인이 프린스턴과 협업해 새로운 프로젝트(또는 커리큘럼)를 진행하는 것이므로 오히려 대서특필 됐어야 한다.

이상한 점은 또 있다.

당시 설령 과학 영재 선발 과정이 있었다손 치더라도, 그러한 과정에서 29명에 들며 특히 아인슈타인으로부터 총애를 받았던 그녀가 어째서인지 이후 날개를 펼치지 못했다는 점이다.

17세 10개월이라는 나이로 일찌감치 세계 최고의 대학 및 연구기관 그리고 석학으로부터 인정을 받았다던 그녀.

허나 이후 배리 대학교를 졸업하고서 마이애미 대학교 대학원에 진학, 그리곤 마이애미 데이드 대학에서 화학과 교수로 평생을 보낸다.

시대상과 종교관으로 인해 당시 도미니크회 수녀회 휘하의 신생 사립 가톨릭 여대애 진학해 졸업까지 거쳤다고 치자. 이후 그녀의 교수 커리어는 처음부터 끝까지 마이애미 데이드 대학이었다.

라이트가 마이애미 데이드 대학에 한창 재직할 무렵 이곳은 커뮤니티 칼리지였다. 현재는 확장을 거듭하며 미국 전역에서도 규모로는 대표적인 대학교로 꼽히나, 미국 전체 대학 순위에서는 중위권을 기록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과학학과가 주목을 받은 역사가 없으며 보건간호가 강세인 곳이다.

또한, 라이트는 자신의 커리어 과정에서 어떤 특출난 과업이나 연구 논문을 발표한 적도 없다.

사실..

UFO 연구가 프랭클린이 수개월에 걸쳐 라이트를 인터뷰했을 무렵에도 다소 의아한 부분이 존재한다.

그건 바로, 이야기의 일부 디테일에서 변화가 있었다는 것이다.

다음과 같이 말이다.

"아인슈타인 휘하에서 AP물리학(Advanced Physics) 분야를 연구하고 공부할 영재 학생으로 선발됐다."

-> "프린스턴 대학에서 아인슈타인과 함께 핵화학 분야에서 일할 인재를 위해 전 세계에서 영재 학생들을 선발했다."

"도착지는 에드워즈 공군기지(주: Edwards AFB, 로스앤젤레스 사막 지역에 위치)이었다."

-> "사막 지대였는데 로스앤젤레스는 아니고 아마 뉴멕시코 또는 피닉스이었을 것이다."

"추락한 외계인의 수는 총 여섯이었다."

-> "총 아홉이었다."

이 밖에도 처음 라이트가 모호하고 전체적인 줄기 중심으로 이야기를 진행하자 프랭클린이 보다 세세한 디테일에 해당하는 질문을 던졌고, 이에 라이트는 예상 못 했다는 듯 고심하며 '왜 그걸 생각해 보지 않았을까요'나 '왜 그게 기억나지 않는지 이해가 안 돼요'라는 식의 반응을 보였다고.

이에 프랭클린은 라이트와의 인터뷰에 대해 '그녀가 정말로 기억을 떠올리는 것인지, 아니면 그냥 내가 듣고 싶은 말을 해주는지 궁금하다'라는 감상을 남긴다.

'외계인의 수'와 같이 가장 중요한 디테일에 있어서도 착각과 번복이 있었음을 고려할 때, 프랭클린의 이러한 감상평은 지극히 합리적이라 할 수 있겠다. 처음부터 명확한 디테일 설정을 준비하지 않아 이후 살을 덧붙이는 과정에서 혼동이 발생한 것일 수 있으니까 말이다.

여담으로, 1947년 당시 에드워즈 공군기지의 명칭은 뮤록(Muroc)이었다.

1930년 설립된 이래 1950년까지의 명칭이 뮤록이었으며 이후 제2차 세계 대전 참전용사 글랜 에드워즈 대령으로부터 딴 명칭으로 변경된 것이다.

이 에드워즈 공군기지는 UFO/외계인 음모론의 성지이다. 해당 공군기지가 관리하는 곳 중 하나가 바로 그 유명한 51구역이기 때문이다.

아마 라이트는 그러한 유명세를 빌려 해당 기지명을 댔던 것이 아닐까?

한편 그녀는 뮤록이라는 이름을 들어본 적이 있느냐는 질문에, '확실하진 않은데 아마 들어본 것 같아요'라고 대답했다.

여기까지..

아인슈타인과 라이트의 발자취를, 그리고 라이트의 인터뷰 속 주장을 추적해 봤다.

정황적으로나 드러난 물증으로나 라이트의 주장은 신빙성이 떨어지는 게 객관적 사실이다.

허나..

이러나저러나 결국 결정적인 증거, 즉 스모킹건이 하나만 있으면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아인슈타인의 말년 발자취에는 우리에게 미처 알려지지 않은 역사가 존재하는 것이고, 라이트의 커리어는 그녀의 소신과 라이프스타일로 인해 본인의 능력보다 소소했을 뿐인 것이 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스모킹건으로는, 바로 라이트가 인터뷰에서 언급한 '아인슈타인 일행 중 나를 신뢰하던 구성원 하나가 내게 UFO/외계인을 촬영한 48장의 사진을 건네줬다'가 있겠다.

라이트를 인터뷰하며 직접 만나기까지 했던 UFO 연구가 프랭클린.

인터뷰 당시 프랭클린 역시 라이트를 조금은 미심쩍어하는 속내가 있었으나, 그녀가 그 시절 건네받았다던 '48장의 사진'이 끝끝내 기대를 품게 했다.

그리고 그건 스프링필드 역시 마찬가지였다. 서두에서 언급했던, 프랭클린이 인터뷰 자료를 공유했었던 미국의 유명 UFO 연구가 스트링필드 말이다.

한편..

라이트는 사진 대부분이 보관된 서류 가방을 차량에 비치하고 있었는데, 그만 누군가에 의해 도난을 당했노라 설명했다.

그녀는 몇 년 사이 누군가가 자신을 감시한다는 기분을 느끼는가 하면 수 차례 집에서 도난 피해를 보았다고 토로했다. 아마 그로 인한 우려 때문인지 몰라도 그처럼 중요한 사진을 차량에 보관했던 것 같다.

그래도 다행히도, 라이트는 집안 어딘가에 나머지 사진들을 은닉하고 있었다고 했다.

이에 프랭클린과 스트링필드는 사진 원본을 잠시 빌리도록 간곡히 요청한다.

라이트가 우선취급우편물과 같은 발송으로 원본을 보내줄 것을 부탁했는데, 시간이 흘러도 우편이 오지 않아 라이트에게 전화를 걸자 다음과 같은 대답이 돌아온다.

"4일 전에 사진 두 장을 판지로 조심스럽게 포장해서 보냈어요. 두 장 중 하나는 괜찮은 클로즈업 사진이고요. 저는 당신이 사진을 잘 받았다고 말해주려고 연락한 줄 알았어요."

그렇게..

사진은 끝내 도착하지 않았고, 스트링필드는 마지막이란 심정으로 다음과 같은 계획을 세운다.

"라이트와 같은 주에 거주하는 프랭클린이 라이트가 일하는 대학이나 거주하는 집을 직접 방문해 원본을 복사해서 사본을 얻는다."

사진을 손에 넣을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었다.

허나 프랭클린과의 전화 통화에서 라이트는 바쁘다는 이유로 4일 후에 다시 통화하자며 시일을 미뤘고, 약속한 날에 전화가 없어 결국 그다음 날 프랭클린이 재차 전화를 걸기에 이른다.

결론적으로, 이게 프랭클린&스트링필드와 라이트 간의 마지막 연락이었다.

라이트는 원본 사진의 사본을 제공할 수 없는 갖가지 이유를 지리하게 늘어놓았다. 프랭클린과 스트링필드가 더는 일말의 기대도 해서는 안되겠다고 체념하기에 충분히 긴 변명이었다.

그렇게 라이트와 UFO 연구가들 간의 접촉은 종결이 났고, 남은 건 이 두 UFO 연구가의 인터뷰 자료뿐이었다.

그리고..

시간이 아주 많이 흘러..

그로부터 8년 후, 또 다른 UFO 연구가였던 브라갈리아가 이 문제의 인터뷰 자료를 자신의 웹사이트에 공개하면서 외신과 UFO/외계인 음모론자들에 의해 불이 지펴지기 시작한다.

그렇게..

'지역 사회의 명사이자 명망 있는 과학자 그리고 아인슈타인의 개인 조수였던 사람의 고백'이라는 플롯으로 인해 해당 인터뷰 내용은 UFO/외계인 음모론계에서 신뢰할 수 있는 대표적인 자료 중 하나로 손꼽히게 된다. (이 '신뢰할 수 있는' 수식어가 워낙 쉬이 붙여져서 문제긴 하지만)

여담으로, 아인슈타인은 현대사 특정 분야의 입진적인 인물이기에 해당 이야기 외에도 다수의 UFO/외계인 음모론에 즐겨 결부돼 왔다.

자, 이제 남은 의문은 하나이다.

라이트는 어찌하여 그같은 일을 벌였던 것일까?

훗날 그런 거짓말이 들통난다면, 자신이 평생 걸어온 학자로서의 길이 퇴색될 염려가 있는데 말이다.

인생의 노년기에 접어들면서 충동적으로 저지른 일탈?

풍족하고 평온했던 일생에 한 번 일렁이는 물결을 만들고팠던 것일까?

헌데, 그러기엔 너무도 엉뚱하고 명예 손실이라는 리스크가 존재했는데 말이다.

허나..

"헌데, 그러기엔 너무도 엉뚱하고 명예 손실이라는 리스크가 존재했는데 말이다."

이러한 관점은 지금 글을 읽고 있는 현시대를 기준으로 하는 것이다.

라이트의 고백(?)이 있었던 시기는 1993년이다.

당시는 전 세계적으로 미스터리 붐이 불면서 가장 인기 있는 대중 오락 및 컨텐츠의 자리를 꿰차던 시대였다. 70-80년대를 초자연현상&미스터리가 대중은 물론이고 학자들 사이에서도 꽤나 진지한 교양 분야로 여겨졌던 시기라 설명한다면, 90년대는 범대중적 오락거리이자 진실과 거짓이 뒤범벅된 채 무분별하게 수용되던 시기였다 할 수 있겠다.

특히, 90년대는 이러한 미스터리 분야 중 UFO/외계인 컨테츠가 절정의 인기를 구사하던 시기였다. 그리고 1993년은, 그 악명높은 '로스웰 UFO 사건'이 '완성되던' 시기였다.

처음 미스터리 팔이 작가 몇몇이 작당 모의를 통해 탄생했던 로스웰 UFO '신화'가 이후 얼마나 많은 사욕과 비즈니스에 얽혔는지 모른다. 무려 반세기 지난 지금까지도 진짜 음모론으로 대중 사이에 인식되며, 사건 직간접 관련자가 처음 둘 셋에서 수십으로 불어나기까지 했다.

로스웰 UFO 사건에 대한 이야기를 한번 시작하면 끝없이 길어지므로, 국내외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는 총망라된 이야기로 확인하려면 <세기의 음모론과 그 진실> 서적을 참조 바란다.

다시 돌아와..

1993년 초는 로스웰 UFO 사건이 완성되던 시기인 동시에, 1991년 설립된 로스웰 UFO 박물관 및 연구센터의 공동 설립자 월터 하우트와 글렌 데니스가 자신들이 로스웰 UFO 사건 당시 회수된 UFO 및 외계인 시신을 목격했다며 성명서를 발표하던 무렵이었다.

(하우트는 1947년 당시 로스웰 지역 509폭격부대 언론담당 공보장교로, 지휘관의 UFO 잔해물을 회수한 것 같다는 의견을 공식 보고서로 언론에 전달한 인물. 데니스는 1947년 당시 부대 근처 장의사였으며 이송되는 UFO 잔해를 목격했으며 친분이 있던 군 병원 간호사로부터 외계인 검시에 참여한 이야기를 들었다고 주장.)

그렇게..

당시 미국 내에선 그야말로 범대중적으로 '미국 정부가 1947년 로스웰 지역에 추락한 UFO(실은 100km 넘게 떨어진 코로나 지역에 비행 잔해물)와 외계인을 은폐해왔다'라는 음모론이 신빙성 있게 퍼져나가던 시절이었다. 여기에 사건 당시 군부대 관련자라는 인물들이 공개적으로 나서니 해가 갈수록 불길은 거세져만 갔다.

당시는 바로 이런 시대상이었다.

따라서 아인슈타인과 함께 1947년 불시착한 UFO와 외계인을 직접 목도했다는 스토리는 라이트에게 무척이나 매력적으로 다가옴은 물론, 그러한 음모론에 자신을 끼워 넣는 행위에도 생각만큼 우려나 리스크를 각오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오히려 일탈을 시도하던 그녀에게 있어 아주 안성맞춤인 재료였을 것이다.

한창 불 지펴지며 모두가 귀를 기울여주는데, 그 옛날 일에 끼워 맞춘 주장들을 누가 일일이 검증할 수 있겠는가? 작은 속임수가 큰 사기를 완성시키는 법이다.

허나, 이러한 방만은 20세기에나 통용될 수 있던 것이고..

이제 대중의 과학적 소양과 판단력이 발전하고 누구든 관심을 기울이면 디지털을 통해 못 찾을 자료가 없을 정도의 시대가 됐기에, 이렇듯 '라이트 인터뷰'와 같은 방만함의 부산물이 하나둘 그 신화가 깨져왔던 것이다.

(Accidental Truth: UFO Revelations)

여기까지가 '셜리 라이트의 기묘한 여행록'의 전말이었다.

어쩌면..

'지구에 불시착한 UFO와 외계인' 같은 것만이 비단 공포스러운 게 아닐 거다.

어쩌면..

타인의 저의가 불분명한 행위야말로 우리 각자에게 있어 가장 공포스러운 게 아닐까 싶다.

그리고..

어떠한 사안에 대해 혹여 진실이 밝혀지더라도 결국 애초의 믿음은 변하지 않는다는 것 또한.

참조

<UFO Crash/Retrievals: Search for Proof in a Hall of Mirrors: Status Report VII> Leonard H. Stringfield
<UFO Event Timeline Processing Tool and UAP Event Dataset> Rich Geldreich
<UFO Explorations/Einstein's Secret Trip to View Roswell UFO Revealed in Taped Confession> Anthony Bragalia

-끝-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