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에서 벌어진 프로파일러 vs 미치광이 폭파범

* 본 글은 단순히 범죄사건과 관련한 호기심을 충족시키고자 오락적 목적을 추구하는 것이 아닌, 사건의 악랄한 범행성을 알림과 동시에 범죄의 연보年譜를 통한 교육에 그 목적을 두고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 본 글은 2014년 겨울에 잡지 연재했던 것을 새로이 리마스터한 글입니다.

처음 미치광이의 폭파는 1940년 11월 16일 불발로 시작됐다.

뉴욕 맨해튼 웨스트 64번가 '콘에디슨(1823년 모체 설립, 현재 미국을 대표하는 에너지 기업으로 뉴욕의 전력을 담당)' 빌딩.

이날 빌딩 청소부는 창틀에서 못 보던 나무상자를 발견한다.

나무상자 안에는, 정자正字로 작성된 메시지가 동봉돼 있었다.

"콘에디슨 사기꾼놈들아. 너희한테 보내는 거다. - F. P."

상자 안에는 조그마한 폭발물 들어있었고 이에 청소부는 즉각 폭발물 처리반에 신고한다.

폭발물은 황동 파이프에 화약을 가득 채워놓은 '파이프 폭탄(사제 폭발물의 대명사, 심플한 구성원리에 운반이 쉬워 현대에 와서 테러에 애용)'으로 불발된 상태였다. 설탕과 손전등용 배터리로 구성된 기폭장치, 한눈에 봐도 조잡해 보이는 불발탄이었다.

허나 겉면에 메시지를 남긴 사실을 볼 때, 이러한 불발은 애초 계획된 것으로 보였다. 폭탄이 터질 거라면 구태여 겉면에 메시지를 남길 이유가 없었을 테니 말이다.

말인즉슨, 이 불발건은 콘에디슨을 향한 협박의 신호탄이었던 셈이다.

미 육군이 훈련용으로 사용하는 파이프 폭탄. 모든 구성품을 주변에서 어렵지 않게 구할 수 있어 수제 급조 폭발 장치로 악용되기도 하며, 1886년 미국 시카고 헤이마켓 사건 당시 테러용으로 사용됐을 정도로 오랜 역사가 있다. (DOD Defense Visual Information Center)

한편, 곧바로 이어진 범인 추적은 흐지부지 상태가 되고 만다. 원체 폭탄이 조잡한 까닭에 범인을 쉬이 특징지을 수도 없거니와, 지문을 검출하는 데에도 끝내 실패했기 때문.

무엇보다 당시는 제2차 세계 대전이 한창 시작된 시기로, 미국이 언제 전화戰火로 뛰어들지 모르는 시국이었다.

그렇게 이 불발탄 협박건은 지역 신문에서조차 다루지 않는 일종의 해프닝 취급을 받는다.

불발탄 사건으로부터 10개월 후인 1941년 9월.

유사한 폭발물이 처음 현장과 다섯 블록 떨어진 콘에디슨 빌딩 길가에서 발견된다. 폭탄은 오래된 모직 양말로 감싸져 있었으며 이번에도 불발탄이었다.

경찰은 폭탄에 퓨즈가 설치되지 않은 점으로부터, 목적지 부근까지 접근한 범인이 어떤 연유로 범행을 도중에 중단한 이후 폭탄을 아무렇게나 거리에 유기한 것으로 추정한다.

1941년 12월.

12월 7일, 진주만 공격이 벌어지면서 미국이 참전을 결심한다.

그리고 이즈음 맨해튼 경찰 본부는 범인으로부터 대문자로 작성된 범행성명서를 받는다.

"전쟁 동안엔 폭탄을 만들지 않겠다. 내 애국심이 그같은 결정을 내리게 했지. 전쟁 후 콘에디슨에 심판을 내리겠다. 놈들은 비열한 행위에 대한 대가를 치르게 될 거야. - F. P."

범인은 약속을 지켰다. 전쟁이 끝날 때까지 폭탄테러는 발생하지 않았다.

대신 범임은 뉴욕 경찰, 신문사, 그리고 콘에디슨 등 앞으로 십수 통의 편지를 보내왔다.

편지는 타이핑 또는 신문 및 간행물에서 잘라낸 글자들로 구성됐거나 수기로 보내온 것도 있었다. 이러한 편지들 모두 콘에디슨이 비열한 행위를 했다며 비난과 위협을 하는 내용이었다. 또, 항상 네 귀퉁이와 말미에 'F. P.'라는 서명이 기입 있었다.

(Bettmann Archive)

수기로 작성된 편지는 필적 조사를 통해 몇 가지 특징을 포착할 수 있었다.

먼저, 수기들은 모두 깔끔하고 정자로 작성됐다.

그리고 'G'와 'Y'의 경우 이지적인 필체 버릇이 나오고 있었는데, 이는 주로 유럽에서 교육받은 이들에게 나타나는 특징이었다.

또 왜인지 모르겠지만, 'W'의 경우 다른 글자들이 정자로 작성된 것과 달리 마치 'U'를 두 개 이은 듯한 기묘한 필체 버릇(UU)으로 일부가 작성돼 있었다.

(Bettmann Archive)

1951년 3월 29일.

세계에서 가장 큰 역인 뉴욕 그랜드 센트럴 터미널.

이날 이곳 1층 레베스토랑 오이스터 바 근처에 비치된 재떨이에서 폭발이 일어난다. 통근 중이던 시민들 모두 크게 놀랐으나 다행히 피해자는 없었다.

F. P.가 설치한 폭탄이었다.

이번엔 불발탄이 아니었다.

전과 같이 심플한 구성으로 제작된 사제품이었으나, 그 파괴력은 더욱 강력해져 있었다. 그동안 폭탄에 대한 지식을 키워왔던 것이다.

뉴욕 그랜드 센트럴 터미널 내 오이스터 바 (Library of Congress)

이게 끝이 아니었다.

4월과 8월, 뉴욕 공립도서관 및 뉴욕 그랜드 센트럴 터미널 내 전화부스에서 연이어 폭탄이 터진다.

F. P.의 소행이었다.

이번에도 다행히 피해자는 발생하지 않았다.

이후 F. P.는 콘에디슨 빌딩 전화부스에다가도 폭탄을 터뜨리나 다행히 피해자는 발생하지 않았다. 또 이즈음 콘에디슨에 우편으로 불발탄을 보내기도 한다.

1948년 당시의 뉴욕 공립도서관 (New York Public Library)

10월 22일, F. P.가 <뉴욕 헤럴드 트리뷴> 신문사에 다음과 같은 내용의 수기 편지를 보내온다.

"콘에디슨이 내게 했던 비열한 행위에 대해 심판받을 때까지 폭발은 계속될 것이다."

11월 28일, 뉴욕 지하철 14번가 역 코인 로커에서 폭탄이 터진다. 피해자는 없었다.

12월, <뉴욕 헤럴드 트리뷴>으로 또다시 F. P.의 편지가 도착한다.

"콘에디슨이 자신들의 비열한 행위에 대해 후회하도록 만들 것이다."

1952년 3월 19일.

맨해튼의 버스 터미널인 포트 오소리티 버스 터미널 전화부스에서 폭탄이 터진다. 피해자는 없었다.

12월, 맨해튼 대로변 렉싱턴 가에 위치한 로우 극장에서 폭탄이 터진다.

이 폭발로 1명이 부상을 입으면서 최초의 피해자가 발생한다.

이즈음 F. P.는 언론으로부터 '미치광이 폭파범Mad Bomber'으로 불리기 시작한다.

1953년.

세계 최대 규모 음악 공연장인 라디오 시티 뮤직홀, 세계 최대 규모 극장인 캐피털 극장, 그리고 뉴욕 그랜드 센트럴 터미널 내 오이스터 바 근처 코인 로커들에서 폭탄이 터진다. 피해자는 없었다.

(Bettmann Archive)

경찰은 F. P.를 매스컴의 관심을 받으려고 사제 폭탄을 설치하는 자라고 발표한다.

5월 6일, 뉴욕 펜실베이니아역 사물함에서 불발탄이 발견된다.

1954년 3월 16일, 뉴욕 그랜드 센트럴 터미널 내 남자 화장실에서 폭탄이 터지며 3명이 부상을 입는다.

(Bettmann Archive)

이후에도 포트 오소리티 버스 터미널 전화부스에서 폭탄이 터진다. 피해자는 없었다. 같은 시기, 펜실베이니아역 전화부스에서도 폭탄이 발견된다.

11월 7일, 라디오 시티 뮤직홀에서 6천여 명이 영화를 관람하던 중 폭탄이 터진다. 폭탄은 좌석 쿠션 밑에 설치되어 있었으며 4명이 부상을 입는다.

첫 불발탄 사건으로부터 15년이 흐른 1955년.

브루클린 지하철역 플랫폼에서 폭탄이 터진다. 피해자는 없었다.

펜실베이니아역 전화부스 및 사물함에서 폭탄이 터진다. 피해자는 없었다.

펜실베이니아역 사물함 폭발 현장 (New York City Municipal Archives)

8월 11일, 세계 최대 규모 극장인 록시 극장에서 폭탄이 발견된다.

10월 9일, 유명 극장이었던 파라마운트 극장에서 폭탄이 터진다. 피해자는 없었으며, F. P.의 것으로 보이는 주머니칼이 발견된다.

12월 1일, 뉴욕 그랜드 센트럴 터미널에서 폭탄이 터진다. 피해자는 없었다.

1956년 2월 21일.

펜실베이니아역 화장실에서 폭탄이 터지며 74세 노인이 심각한 부상을 입는다. 여기서 F. P.의 것으로 보이는 모직 양말이 발견된다.

7월 24일, 세계 최대 규모 백화점인 메이시스 백화점에서 폭탄이 터진다. 피해자는 없었다.

8월 4일, 맨해튼 록펠러 센터 내 초고층 빌딩인 GE 빌딩 전화부스에서 경비원이 폭탄을 발견한다. 또 다른 경비원도 폭탄을 발견하나, 폭탄인지 모르고 집에 가져갔다가 다음날 부엌에서 폭발하고 만다. 다행히 피해는 없었다.

12월 2일, 파라마운트 극장에서 폭탄이 터진다. 1,500여 명의 관객이 영화를 관람 중이었으며, 6명이 폭발로 부상을 입는다.

이 사건을 기점으로 여론은 걷잡을 수 없이 악화된다. 그동안 별다른 단서도 확보 못한 경찰에 대해 비난 여론이 들끓었으며, 특히 당시 대표적인 문화생활이었던 극장 관람 중에 벌어진 일인지라 뉴욕 시민들의 불안은 최고조에 다다른다. 이에 뉴욕시 경찰국장인 스티븐 케네디는 경찰에 다음과 같은 명령을 하달한다.

"경찰 역사상 가장 큰 범인 수색작업을 펼치오!"

1956년 12월 24일 뉴욕 공립도서관 공중전화 부스에서 폭탄이 발견된다. 도서관 직원이 전화를 이용하려다 동전을 떨어뜨려 몸을 숙였다가 선반 밑면에 설치된 폭탄을 발견하고서, 다른 직원들과 협의 끝에 창문 밖으로 던졌다. 사진은 뉴욕 경찰이 지문을 채취하고 있는 모습. (Bettmann Archive)
1956년 12월 28일 뉴욕 경찰 폭탄처리반이 파라마운트 극장에 설치된 폭탄을 운반하고 있다 (Bettmann Archive)

허나, 여전히 수사는 풀릴 기미조차 보이질 않았다.

F. P.의 범행 스타일은 당시로는 생소했던, 철저한 무차별 범죄였기 때문이다.

결국 뉴욕시 경찰서장 존 크로닌은 현장 조사와 주변인 탐문과 같은 전통적인 수사법으론 한계가 있다고 판단, 친구인 심리학자 제임스 브뤼셀에게 조언을 구하기로 한다.

자신의 유명 저서를 들고 있는 제임스 브뤼셀 (Bettmann Archive)

당시 브뤼셀은 FBI 방첩부서 근무 경험이 있던 저명한 심리학자였다.

물론, 경찰 내부는 썩 달가워하지 않았다.

지금이야 범죄학의 발달과 전파로 인해 각계의 전문가들이 범죄 수사에 고문역을 맡기도 하지만, 당시만 해도 현장 조사를 최우선으로 삼는 경찰 및 형사들에게 있어 그러한 전문가들의 조언은 뜬구름 잡는 소리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첨언하자면, 당시 범죄학은 아직 초기 단계인지라 자칭 전문가라는 자들의 전문성이 떨어졌던 점 역시 이와 같은 현실에 일정부분 기인했음을 부인할 수 없겠다.

다시 돌아와..

크로닌의 명령에 따라 뉴욕 경찰국 범죄연구실 책임자인 하워드 피니가 형사 둘을 대동해선 브뤼셀의 사무실을 방문한다.

그들 역시 다른 형사들과 마찬가지로 이를 달가워하지 않았다. 오죽했으면, 브뤼셀이 훗날 회고록을 통해 당시 이들의 싸늘한 표정을 잊을 수가 없다고 언급했을 정도.

한편, 이들로부터 한 무더기의 수사 관련 자료를 건네받은 브뤼셀은 다음과 같은 추리를 내놓는다.

기념비적인 프로파일링의 순간이었다.

- 역사적으로 폭범은 거의 모두 남자였으므로 범인 또한 남성일 가능성이 높다.

- 범인은 콘에디슨으로부터 비열한 행위를 당했다는 생각에 16년 간이나 사로잡혀 있다. 따라서 편집증 환자임이 분명하다. 그런데 편집증이라는 것은 주로 30대 이전까진 뚜렷한 모습을 나타내지 않는 병이므로, 1940년부터 시작된 범인의 행위를 미루어 볼 때 그는 현재 40-50세이다. 그는 자신의 비난 여론에 굉장히 민감하게 반응하는 모습을 보였는데, 이 역시 편집증의 대표적인 증상이다.

- 범인이 보내온 수기 편지 속 글씨는 모두 꼼꼼한 글씨체의 정자였다. 또 그가 설치한 폭탄들 모두 세심함이 엿보였다. 따라서 그는 외견상 반듯하며 성격은 신중할 것이다. 편지 속 어휘 수준을 미루어 볼 때 대학 수준의 교육을 이수했을 것이다.

- 외국인일 것이다. 편지에서 그는 콘에디슨을 다른 뉴요커들처럼 'Con Edison'이라고 표기하지 않고 'the'를 붙여 'the Con Edison'이라 표기했다. 또 그가 자주 사용한 '비열한 행위dastardly deeds'라는 문구는 옛날 소설에서나 쓰일법한 것으로, 현지 미국인들이 실생활에서 사용할 법한 문구가 아니다. 그는 극장 좌석에다 폭탄을 설치할 시 나이프로 좌석 밑을 자른 다음 폭탄을 설치했다. 나이프와 폭탄을 무기로 사용하는 것은 동유럽의 전통적인 특징이기도 하다. 게다가 그가 보낸 편지 중 발신지 일부는 웨스트체스터 카운티였다. 이 웨스트체스터 카운티는 뉴욕과 코네티컷 주를 잇는 지역으로, 코네티컷 주 남동부에는 많은 동유럽인들이 거주한다.

(New York Daily News)

- 그의 필체 중 대표적인 특징은, 모두 정자로 또박또박 쓰여진 가운데 'W'만이 유독 'UU' 형태로 표기됐다는 점이다. 이 'UU'는 여성의 유방을 무의식적으로 나타내는 것이다. 그가 극장 좌석에 폭탄을 설치한 방식 또한 좌석 밑을 나이프로 자른 뒤 그 구멍 속으로 폭탄을 밀어 넣는 식이다. 이는 남성 성기의 거세 또는 여성과의 성행위를 상징한다. 이로 미루어 그는 오이디푸스기를 벗어나지 못한 외로운 미혼 남성이다. 따라서 연인이나 아내가 아닌, 어머니 역을 대행해 줄 여성과 함께 살고 있을 것이다(주: 해당 파트와 같은 스타일의 추정은, 브뤼셀이 다름 아닌 프로이드 학파였기 때문).

끝으로, 브뤼셀은 피니들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덧붙였다.

"범인을 체포하면, 그는 분명 더블브레스트(단추가 두 줄로 된) 정장을 입고 있을 겁니다. 단추를 모두 채운 채로 말이죠."

이는 범인의 연령대, 꼼꼼함과 단정한 성격, 전통적인 스타일의 성격을 미루어 체포될 시 으레 점잖을 떠느라 클래식 스타일의 정장으로 갈아입을 거라는 예상에서였다.

한편, 이를 알 리 없던 피니들은 아연한 표정을 지은 채 '말도 안 돼'라고 중얼거리며 그대로 사무실을 나갔다.

(Bettmann Archive)

1957년 1월 21일 자정 직전.

수색영장을 발부받은 뉴욕 형사 4명이 미치광이 폭파범 용의자 조지 메테스키의 집을 방문한다.

브뤼셀의 예측처럼 메테스키는 54세로 중년의 미혼남에 편집적 정신분열증 환자였으며, 동유럽 계통 슬라브인으로 2명의 친누나와 함께 코네티컷 주에서 거주하고 있었다.

"조지 메테스키씨 맞습니까?"

"그렇소."

"뉴욕 경찰입니다."

"당신네들이 왜 여기 왔는지 알겠군. 내가 미치광이 폭파범이라고 생각하는 거지."

(New York Daily News)

메테스키의 집을 수색하던 형사들은 곧 차고 작업장에서 그가 범인임을 가리키는 증거물들을 발견한다.

메테스키는 자신이 미치광이 폭파범임을 순순히 시인했다.

지난 16년간 뉴욕 공공장소에 최소 32개의 폭탄을 설치하며 시민을 공포에 빠트렸던 미치광이 폭파범이 정체를 드러내는 순간이었다.

발견된 증거품들 (New York Daily News)
(New York Daily News)

형사들은 안도와 환희의 감정을 애써 숨긴 채 그에게 말했다.

"조지 메테스키씨. 당신을 폭탄을 이용한 건물 손상, 악의적 협박, 뉴욕주에서 법으로 금지하는 무기에 의한 살인미수 혐의로 체포합니다. 저희와 동행해야 하니 옷을 갈아입으시죠."

한편, 형사들의 말을 묵묵히 듣던 메테스키는 걸치고 있는 샤워 가운을 갈아입으로 갔다.

잠시 후 그가 다시 형사들 앞에 모습을 드러냈을 때 그는 잘 빗어넘긴 머리, 광을 낸 구두, 그리고 정장 차림을 한 채였다.

여기서 놀랍게도, 그가 입은 정장 상의가 바로 더블브레스트였다. 단추를 모두 채운.

범죄 프로파일링 역사에 첫 전설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실제 조지 메테스키가 체포돼 수감되던 당시의 모습 (Bettmann Archive)
유치장에서의 모습 (New York Daily News)
법정으로 향하는 길에서 (New York Daily News)

체포 후 메테스키는 범행 이유에 대해 콘에디슨 산하 회사에서 기계공으로 근무할 당시 보일러 가스 사고로 독성 가스를 흡입하며 결핵에 걸렸으나, 콘에디슨 측이 제대로 보상을 하지 않아 이를 알릴 목적으로 폭탄을 설치한 것이라 주장했다.

그의 주장인즉슨, 이때의 사고로 걸린 폐렴이 훗날 결핵으로 발전했다는 것.

실지로 메테스키는 1931년 있었던 보일러 가스 폭발 사고에서 연기에 노출되며 26주간 병가 급여를 받기도 했으나, 회복된 그를 회사는 해고로 맞이했다.

메테스키는 직장 복귀 요구와 동시에 작업장 환경으로 인한 추가 보상안을 요구하나, 회사 측은 산업재해 보상신청기간 동안 신청을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반려한다.

메테스키는 이에 대해 자신의 정신이 온전치 못했으며 권리행사에 대한 지식이 없었다고 주장하나, 세 차례의 항소에서도 그의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이에 메테스키는 회사가 악의적으로 자신에게 돈을 지불하지 않고자 자신의 동료들에게 위증을 하도록 수작을 부렸다고 생각하며 증오심에 빠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렇게..

총 47개 혐의로 법정에 기소된 메테스키는 32번의 폭탄 설치 혐의를 인정했으며, 뉴욕 최고의 병원이었던 벨레뷰 병에서 검사를 받은 결과 편집적 정신분열증 환자라는 사실이 밝혀진다.

벨레뷰 병원으로 이동 중인 메테스키 (New York Daily News)

그리하여, 1957년에 4월경 정신이상 범죄자들을 수용하는 뉴욕 피시킬 교정 시설에 수감된다. 수감 과정에서 결핵이 도지며 중증 상태에 빠지기도 했던 그는 1년 반의 치료 끝에 건강을 되찾기도 한다.

1973년, 위험성이 더는 없다고 판단되면서 뉴욕 내의 크리드무어 정신의학 센터로 옮겨진다.

그리고 1973년 12월 13일, 25년 형기의 3분의 2를 채운 그는 의사로부터 무해하다는 판단을 받고서 거주지 근처 정신 위생 클리닉을 정기방문하는 것을 조건으로 석방된다.

석방 직후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메테스키는 자신의 범행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시장, 경찰청장, 신문사에 콘에디슨의 행위를 고발하는 900통의 편지를 썼었습니다. 하지만 답장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신문사 광고 지면에 실으려고 했는데 모두 거절당했습니다. 결국 이로 인해 제 이야기를 대중에게 알리기 위해 그같은 일을 하게 됐던 겁니다."

그리고 석방된 지 21년째인 1994년 5월 23일, 메테스키는 자택에서 90세의 나이로 사망한다.

해당 사건 이후 언론 매체 등의 소개로 인해 브뤼셀의 범죄 프로파일링은 전설로 남게 된다.

허나, 그 내면엔 불편한 진실이 존재한다.

그건 바로, 당시 브뤼셀의 프로파일링 중 빗나간 항목 또한 많다는 것.

첫째, 그는 처음 범인의 거주지를 잘못 예측하면서 폭발물 처리반이 헛걸음을 해야 했다.

둘째, 범인을 얼굴에 흉터가 있는 40-50세의 무기 전문가라고 예측했다. 허나 메테스키는 무기 전문가와는 거리가 멀었다.

셋째, 범인을 동유럽인으로 독일에서 태어나고 교육받은 자라고 프로파일링했으나, 메테스키는 동유럽 계통 슬라브인일 뿐 미국 코네티컷에서 태어나고 사망했다.

이렇듯 브뤼셀의 프로파일링에는 분명 오류도 다수 존재했으며, 이로 인해 엄한 사람들이 용의선상에 올라 곤욕을 치기도 했다.

그렇다면 메테스키는 어떻게 해서 잡히게 된 것이었을까?

이 미치광이 폭파범을 추적하는 데에 가장 큰 역할을 한 사람은, 바로 콘에디슨에서 근무하던 앨리스 켈리라는 여성이었다.

사건 말에 경찰은 범인이 콘에디슨에 뿌리 깊은 증오심을 지닌 현재 또는 이전 직원으로 숙된 기계공일 것이라며 언론을 통해 일반에 경고를 보내왔다.

또 체포 직전 메테스키가 보내온 편지 중에는 콘에디슨에서 사고를 당했으며 회사가 근로자 보상 소송을 막았다는 언급이 있었다.

이러한 공개서한이 언론에 실리면서, 콘에디슨의 사무원이었던 켈리는 이전 사원들의 인사 기록을 찾아보기로 결심한다.

그렇게 며칠을 꼬박 새며 산재 보상 관련 파일을 샅샅이 뒤지던 그녀는, 1957년 1월 18일 금요일 오후 마침내 유레카를 외치게 된다.

그녀가 찾은 파일엔 메테스키가 1931년 9월 5일 공장에서 사고로 부상을 당했다는 내용과 메테스키가 직접 작성한 사고 경위서가 있었다.

또 파일엔 메테스키가 보내온 협박 편지들도 보관 중이었는데, 여기서 바로 '비열한 행위', '내 손으로 정의를 이룰 것이다'라는 표현을 찾아낸 것이다. 이는 미치광이 폭파범이 협박문에서 사용하던 표현과 동일한 것이었다.

하여, 이날 켈리로부터 해당 사실을 신고받은 경찰은 메테스키의 신상을 확인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그 사흘 후 메테스키는 주거지에서 체포된다.

콘에디슨의 선임 사무 보조원이었던 앨리스 켈리. 처음 경찰은 뉴욕 경찰 형사가 문제의 파일을 발견한 것으로 발표했다가, 그 직후 발견이 아닌 수집이었다며 오해가 있었다는 설명과 함께 파일의 원 발견자가 켈리였다고 정정한다. 한편, 켈리는 당시 미치광이 폭파범 체포 보상금이었던 26,000달러에 대해 자신이 마땅히 할 일을 한 것뿐이라며 보상금 신청을 거부한다. 여담으로, 이미 2년 전부터 경찰이 직원 파일을 요청했으나 콘에디슨은 1940년 이전 근무자들의 기록이 파기됐다고 주장했다고. 그러다 켈리의 제보를 받은 경찰이 사실을 기록이 존재함을 알게 됐던 것. (New York Daily News)

이렇듯 사건 해결의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해낸 것이 켈리였으나..

사건 당시엔 이미 메테스키 체포 전부터 이례적으로 브뤼셀의 프로파일링이 언론으로부터 조명되는가 하면, 사건 이후엔 브뤼셀의 회고록을 통해 과장이 이루어지면서 '전설의 프로파일링' 스토리가 형성된 것.

여하튼 지건, 이러한 일련의 사건으로 말미암아 범죄 프로파일링 및 범죄학이 탈사이비화 되는 계기가 될 수 있었다.

이처럼 분명 당시 브뤼셀의 업적(?)이, 현재 범죄 수사에 있어 빼놓을 수 없는 '범죄 프로파일링'을 수사 현장에 도입시키게끔 첫 다리 역할을 했다고 치하할 수 있겠다.

여담으로, '본격적인 범죄 프로파일링의 수사 현장 도입' 계기가 된 사건은 '새크라멘토 흡혈 살인마' 사건을 통해서였다.

바로, 다음과 같은.

[이상한 옴니버스] 최초의 프로파일링이 붙잡은 흡혈 살인마

체포 당시 경찰이 메테스키에게 물었다.

"이봐, 자네는 조지 메테스키잖아. 그런데 어째서 서명을 'G. M.'이 아닌 'F. P.'를 사용한 거지? 이 'F. P.'는 도대체 무슨 의미야?"

그러자 메테스키는 미소를 짓고는 답했다.

"F. P.는 페어플레이라는 뜻이지."

(New York Daily News)

참조

<what the dog saw and other adventures> Malcolm Gladwell
<Crime Library/GEORGE METESKY: NEW YORK's MAD BOMBER> Melissa Ann Madden
<Casebook of a Crime Psychiatrist> James Arnold Brussel
<The New York Times> 1951-03-30, 04-25, 11-07, 1953-05-07, 1954-03-17, 11-08, 1955-08-12, 10-19, 12-02, 1956-02-22, 08-05, 12-03, 12-04, 12-25, 1957-01-31, 04-19,05-30, 1973-09-26, 12-13

-끝-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