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속 실화! 미군 vs UFO 군단 '로스앤젤레스 전투'의 진실은?
* 본 글은 2014년 가을에 잡지 연재했던 것을 새로이 리마스터한 글입니다.
UFO 역사에 있어 기념비적인 사건을 하나 꼽으라면, '1942년 로스앤젤레스 UFO 전투'을 결코 빼놓을 수 없겠다.
해당 사건은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미군과 UFO 군단 사이에서 벌어졌던 전투를 의미한다.
역사 속 실재했던 미군과 외계인과의 전투..
과연, 그날 벌어졌던 일의 내막과 진실은 무엇이었을까?
제2차 세계 대전이 한창이던 1941년 12월 7일이었다.
미국의 태평양함대 사령부가 있던 하와이 진주만에 공습이 발생한다. 추축국 일본이 자국에 경제 제재 조치를 취하던 미국에 기습 폭격 작전을 감행한 것이다.
이날 아침 7시 48분경부터 시작된 일본의 공습에 진주만 기지는 그야말로 궤멸 직전에까지 이른다. 당시 미국 측은 함선 18척 및 항공기 300여 대가 파괴 또는 손상됐고, 사상자 또한 3,500여 명이 발생했을 정도였다.
한편, 이 기습이 직접적인 계기가 돼 미국은 본격적으로 제2차 세계 대전의 포화 속으로 뛰어든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으로..
당시 로스앤젤레스 지역은 항공기 생산 부문 미국 내 1위였으며, 조선 사업은 인력이 2년 사이 20배 넘게 증가했고, 도시의 산 페드로 만에는 막강한 해군 함대가 주둔하고 있었다.
이는 태평양으로 서부 해안(로스앤젤레스 캘리포니아)이 훤히 노출된 까닭이었다.
그처럼 로스앤젤레스 지역은 전쟁을 대비해 강력한 군사적 성장이 이뤄졌으나, 반면 지역 주민들은 자신들의 도시가 일본의 다음 목표일 것이라는 두려움을 항시 지닌 살아야 했다.
그렇게 1941년 12월 23일 일본군 잠수함이 캘리포니아 해안에서 유조선을 침몰시키는가 하면, 다음날엔 증기선을 공격한다.
여기서 더 나아가, 2개월 후인 1942년 2월 23일엔 일본군에 의한 최초의 미국 본토 포격이 발생한다.
이날 19시 5분경, 일본 해군 잠수함이 30분여에 걸쳐 캘리포니아 산타 바바라의 엘우드 석유 저장소에 20여 발의 포격을 가한다. 여기서 포격 대부분이 오조준으로 끝나면서 정유 시설에 큰 피해를 주지 못한 데다 미군 병사 1명에게 중상을 입히는 것에 그친다.
허나, 삼엄한 경계 태세 와중 본토에 보란 듯 포격을 가한 일본으로 인해 미 정부 및 군은 물론이고 일반 시민들 역시 커다란 패닉에 빠지게 된다. 일본군의 의도대로 심리적 공격이 성공한 것이다.
이로 인해 이날 캘리포니아에선 광범위하게 등화관제(전시 동안 군사 및 민간 시설의 조명을 제한해 적으로부터의 노출을 피하는 것)가 시행된다.
다음날인 1942년 2월 24일.
엘우드 석유 정유장에 포격을 가한 후 로스앤젤레스 방면으로 도주한 일본군의 잠수함으로부터 추가 공격의 가능성이 있다는 미 해군정보국의 경고에 따라, 19시 18분경 미국 서해안 일대에 경계경보가 발령된다.
그러나 공격에 대한 징조가 포착되지 않아, 약 3시간 후인 22시 23분경 경보가 일제히 해제된다.
이어서..
새벽 1시 44분경, 레이더 3개에서 미확인 비행 물체가 포착.
새벽 2시 15분경, 로스앤젤레스의 육군 방공 레이더망이 약 193km 떨어진 지점으로부터 미확인 비행 물체를 포착하면서 대공 부대에 경고가 발령된다.
새벽 2시 21분경, 로스앤젤레스 지역에 공습경보와 등화관제 명령이 떨어진다.
새벽 3시 6분경, 로스앤젤레스 남서부에 위치한 해안 도시 산타 모니카 상공에서 빨간 불빛이 목격되면서 포격이 발생한다.
새벽 3시 16분경, 육군 제37 해안 포병 여단의 대공포 포대 네 곳에서 상공을 서치라이트로 비춘 채 본격적인 대공사격을 실시한다. 쉴 틈 없는 사격이 20여 분간 이어졌다.
새벽 4시 14분경, 미확인 비행 물체들이 산타 모니카에서 롱비치 방향으로 약 25-40km를 유유히 이동하는 것이 목격된 뒤로 자취를 감춘다. 1시간여 동안 20-30여 개의 탐조등으로 서치라이트를 비추며 산발적으로 이어졌던 대공사격도 중단된다. 이러한 대공사격에서 50구경 기관총 및 12.8파운드 대공포 총 1,433여 발이 발포됐다. 지난 10여 년간 사격 훈련에서 사용된 것보다 더 많은 탄환이 발사된 것이었다.
그리고..
이와 같은 대대적인 사격에도 불구하고, 문제의 미확인 비행 물체들은 본체는 물론이고 파편 하나 떨구지 않는다.
오전 7시 20분경, 모든 경보 및 등화관제가 해제된다.
새벽 간 대공포 사격으로 발생한 약 8.5톤의 파편으로 다수의 건물 및 차량이 피해를 입었다. 또 5명의 시민이 목숨을 잃고 말았는데, 이 중 3명은 정전과 혼란 속에서 발생한 교통사고로 인한 것이었고 2명은 지속적인 공포 및 스트레스로 말미암은 심장마비였다.
또한, 등화관제 위반으로 100여 명의 시민이 체포됐다. 여기서 적지 않은 일본계 시민이 체포됐는데, 등화관제를 지키지 않은 게 일본의 항공기에 신호를 보내며 첩자 행위를 하려던 것이라는 괜한 의심을 받았기 때문이다.
사건 다음 날인 1942년 2월 26일, 육군참모총장인 조지 마셜이 대통령인 프랭클린 루스벨트 앞으로 다음과 같은 기밀 보고문을 올린다.
"다음은 어제 아침 로스앤젤레스 상공에서 발생한 항공 경보와 관련해 GHQ(주: 연합군 최고사령부)로부터 입수한 정보입니다.
- 미확인 항공기들은 우리 육군 및 해군의 것이 아닙니다. 이 항공기들은 아마도 로스앤젤레스 상공을 비행한 것 같으며, 제37 해안 포병 여단이 오전 3시 12분부터 4시 15분 사이에 총 1,430발의 탄약을 발포했습니다.
- 무려 15기에 달하는 미확인 항공기가 사건에 관여됐으며, 공식 보고에 의하면 저마다의 속도로 비행 중이었다고 합니다. 그 속도들은 매우 느린 속도에서부터 200MPH(주: 약 322km/h)에 달했으며, 고도는 9,000~18,000피트(주: 약 2.7~5.5km)였다고 합니다.
- 이 항공기들은 지상으로 폭격을 가하지 않았습니다.
- 우리 군에 사상자는 없습니다.
- 격추된 항공기는 없습니다.
- 우리 육군 및 해군의 항공기는 전투에 돌입하지 않았습니다.
현재 수사가 진행 중입니다. 이 미확인 항공기가 사건에 관여된 게 맞는다면, 그러한 항공기는 적국 공작원에 의한 것이라 보는 게 타당해 보입니다. 그들은 불안감을 퍼뜨리고 대공포의 위치를 파악하며 등화관제로 인한 생산성 저하를 꾀하고자 이러한 일을 벌였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저마다의 속도로 비행하며 지상으로 폭격을 가하지 않았다는 게 이를 뒷받침해 주고 있습니다."
한편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일본군의 기록이 공개됐는데, 사건 당일 현장 부근에선 일본 측의 비행체가 존재하지 않던 것으로 밝혀졌다.
'로스앤젤레스 전투 사건'은 여러모로 의미 있는 사건이라 할 수 있다. 최초의 공식적인 UFO 사건이자, 최초로 UFO에 대해 국가 차원에서 공격이 이뤄진 사건이니까.
해당 사건은 당시 관련 기사들이 세계 각국의 언론으로 퍼져나가며 사실상 UFO 역사의 시작을 알렸던 기념비적인 사건이라 볼 수 있다. 이로 인해 미국 내에선 로스웰 UFO 사건과 함께 가장 명망 높은 UFO 사건으로 꼽히기도 한다.
허나..
믿음의 양이 진실을 가리키는 것은 아닌 법.
사건의 내막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당시 현장에서 대공포 사격 포화를 받던 게 과연 진짜 비행체가 맞는지에 대해 의구심이 들 수밖에 없다.
이는 다음과 같은 이유들에서이다.
첫째, 다수의 서치라이트 빛들이 교차하고 있는 가운데 대량의 대공포가 발사된 점.
2개월 전 진주만에서 벌어졌던 일본군의 가미카제 공격, 그리고 사건 바로 전날 있었던 본토 포격. 이러한 심리적 배경에서 새벽녘 상공을 다수의 탐조등으로 그야말로 상공을 덮어버렸던 것 생각해 보자.
이 강력한 불빛 떼는 구름에 부딪히면서 반사 현상으로 입체적인 원형 발광체들을 만들어냈으며(밤하늘을 향해 손전등을 밝혔을 때를 떠오려 볼 것), 탐조등의 불빛들끼리 충돌하면서도 상공 여기저기에 빛 반사로 인한 원형의 불빛들이 끊임없이 생성되고 있었다.
또 이러한 불빛들이 상공으로 쏟아지던 대공포를 빛 반사 시키고 있었다.
말인즉슨, 사건 현장 상공은 빛의 클러스터 떼들이 사방팔방에서 폭죽 터지듯 출현하고 있었다는 것.
따라서 당시 지상에선 육안으로 숱한 원형의 발광체들이 목격됐을 게 자명하다.
공습 사이렌과 함께 현장으로 출동한 히스테리 상태의 병사들에게 있어 이처럼 시시각각 변하는 불빛들은 그야말로 악몽이었을 것이다. 게다가, 적군의 것으로 여겨지는 비행체가 현장을 비행 중이라는 상황 보고를 받고서 출동한 상태였다.
바로 이러한 현장 분위기와 상황 속에서 상공을 향해 대공포 위협사격이 무차별적으로 발포됐던 것이다. 당연히 지상의 대공포 포대원들은 조그마한 불빛에도 신경질적인 사격을 가했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추가로, 대공포로 인한 연기와 소음이 밤하늘을 자욱하게 뒤덮었기에 애초부터 조준사격이 아닌 지향 사격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훈련받은 군인들이 아무것도 없는 상공에 오인 사격을 했다는 게 쉬이 믿어지지 않는다고?
당시 현장의 대공포 포대원들에게 주어진 임무는, '적의 비행체를 격추시켜라'가 아니라 '미국 영토에 위협을 가할 우려가 있는 비행체들을 모두 무력화시켜라'였다. 때문에 현장의 병력은 하달된 상황 보고에 따라 상공을 향해 무자비한 위협사격을 가했던 것이다.
즉 당시의 상황은 엄밀히 말해 상공을 향한 오인사격이 아니라, 혹여 상공을 비행 중일지 모르는 적국의 비행체들에 위협사격을 가했던 것이라 할 수 있겠다.
그렇게 위협사격을 가해 적국의 비행체가 격추되면 잘 된 것이고, 그렇지 못하더라도 적국의 비행체가 미국 영공을 떠난다면 그건 그거대로 잘 된 것이었다.
여담으로, 지금과 같은 수준(지금도 완벽하진 않지만)의 레이더망이 아니었던 과거엔 군에서 발생하는 대표적인 오인사격 중 하나가 바로 야간 대공사격이었다. 참고로 사건 당시 사건 현장의 레이더들은 일본군에 대비해 막 도입되거나 한 초창기 시스템으로 그 숙련도 또한 수준 미달이었다.
둘째, 미확인 비행 물체들이 제각각의 속도로 비행했다는 점.
당시 미확인 비행 물체들이 적국의 비행체였든 외계의 비행선이었든, 편대비행에 있어서 기본적인 법칙을 무시했다는 것은 쉽사리 납득가지 않는 점이다.
물론, 이러한 모습은 대공포 사격이 가해졌을 당시의 모습이므로 비행체들이 굳이 서로 간 속도를 맞출 필요는 없었다.
허나 그렇기에 더더욱 이 목격담은 납득이 가지 않는다.
지상에서 대대적인 사격이 가해지고 있는 상황에서 공격을 받는 비행체들이 모두 322km/h 미만의 속도로(목격담을 기반으로 할 시 30분-1시간 동안 25-40km 이동) 비행한다?
속도도 속도지만 비행고도 또한 이상하다.
당시 현장 증언에 의하면(사실 새벽녘 정신없는 불빛들과 뒤덮인 연기 사이에서 상공을 육안으로 관측한 것이라 크게 의미는 없지만) 문제의 발광체들은 모두 고도 2.7~5.4km를 비행 중이었다고 한다.
헌데, 그 시대 일본군 정찰기의 경우 평균적으로 최고 속력 600km/h에 고도 10km를 비행 가능했다. 발광체들이 진짜 비행체였다면 어째서 그토록 비상식적인 비행을 감행했던 것일까? 또 사건 당시는 그야말로 맑은 밤하늘의 기상 조건으로, 정찰기를 띄우기에 아주 부적합한 조건이었다.
UFO/외계인 음모론자들의 단골 설명에서처럼, 지구 문명에 아무런 위협을 느끼지 못하는 외계인들의 발작적 유희?
어쨌건, 문제의 발광체들이 최소한 적국 또는 미국의 항공기는 아니었다는 게 현실적이다.
셋째, 비행체들이 대공포 사격을 감안하지 않는 듯한 경로로 이동한 점.
비행체들이 목격됐던 지점을 순차적으로 이으면, 일본군의 기습에 대비해 해안 경계 중이던 기지들 한가운데를 보란 듯이 통과하게 된다.
이는 비행체들이 구태여 가장 위험한 경로를, 그것도 관측되기 쉬운 속도와 고도로 비행했다는 의미가 된다.
게다가 대공포 집중포화 속에서도 일정한 항로를 따라 직선 이동을 하기까지 했다.
이 역시 외계인들이 외계 문명의 압도적인 힘을 상징하는 것일까?
헌데 그 정도로 압도적인 힘을 보유했다면, 차라리 지상의 탐조등과 대공포를 깔끔하게 작동 불능화시키거나 아니면 클로킹과 같은 공상과학적 기술을 통해 목적을 실현하는 게 보다 현실적이지 않을까?
첨언하자면, 성간 여행을 자유자재로 펼치며 우주여행을 하는 초문명이라면 그처럼 원시적인 방식으로 지구를 둘러볼 필요가 있을까?
그러한 행태는, 사실 지난 70년 간 이어진 UFO/외계인 컨텐츠를 통한 우리들의 지극히 인간 관점적인 사고방식과 상상력에 불과한 게 아닐까? (형형 색상의 조명등을 켜야지만이 비행이 가능한 UFO, 유기체가 직접 탑승한 채 성간여행을 하는 UFO, 관찰을 위해 굳이 지구를 직접 방문해 육안 관측이 가능한 고도에서 저속 비행을 하는 UFO 등등)
어쨌건, 이로써 문제의 발광체들이 최소한 지구상의 항공기는 아니었다는 게 확실시된다.
넷째, 대공포 사격이 비행체들에 명중해도 그대로 관통해 통과한 점.
해당 사건에서 가장 중요한 건, 당시 현장 목격자 중 상공에 떠다니던 문제의 비행체들에서 '공통적으로' 항공기의 특징을 본 이가 아무도 없다는 것이다.
비행체들은 대부분 발광체의 모습으로만 목격됐을 뿐이며 하나같이 어떠한 엔진음도 나지 않았다고 한다. (사실 대공포 사격으로 인해 상공은 천둥음이 지배하고 있었지만)
또, 당시 목격에 의하면 발광체에 명중한 대공포들이 그대로 통과해 지나갔다고도 한다.
여기까지의 것들을 두고서 '외계 문명의 비행선은 발광체로만 확인이 가능하며, 엔진음 없이 비행하는 이 비행선들은 포격이 가해져도 본체가 탄환을 통과시킨다'라고 추론하는 것이 합리적일까, 아니면 '대공포 포대원들이 자국 영공을 비행 중일지 모르는 적국의 항공기를 쫓아내고자 상공 이곳저곳과 반사된 불빛들을 향해 무차별적인 위협사격을 가했던 것'이라고 추론하는 것이 합리적일까?
다섯째, 비행체들이 육안으로만 목격되고 확인된 점.
가장 이상한 점은, 사건 당시 문제의 비행체들은 오로지 발광체로만 사람들에게 육안 목격됐다는 점이다.
뿐만 아니라, 발광체들은 대공포 사격을 받던 산타 모니카에서 롱비치 방향으로 약 20-30분에 걸쳐 유유히 이동했다고 전해지는데 그 이후의 목격담은 존재하질 않는다.
물론, 레이더망에도 말이다.
말인즉슨, 실지론 현장에서 포격이 가해질 당시 레이더망엔 목격담과 같이 편대 비행하는 항공기 무리는 잡힌 바가 없다는 말이다.
종합해 보자면 이렇다.
새벽 2시 15분경 로스앤젤레스의 육군 방공 레이더망에서 미확인 '비행 물체'가 포착됐다.
그리고 공습경보가 떨어진 이후 새벽 3시 6분경 산타 모니카 상공에서 빨간 불빛이 목격된다.
그 10분 후엔 적국의 항공기가 비행 중이라는 상황을 받은 제37 해안 포병 여단이 전방위로 본격적인 대공포 사격을 실시한다.
허나, 1시간여 동안 이어진 사격에서 실질적으로 적국의 항공기가 육안으로나 레이더망으로 그 모습을 명확히 드러낸 바가 없다.
제37 해안 포병 여단은 타겟이 산타 모니카 상공을 지나갈지 모른다는 보고를 하달받고서 단지 상공의 의심스러운 불빛들을 향해 무차별 사격을 가했을 뿐이다.
그렇다면, 해당 사건은 어째서 '명명백백한 UFO와의 전투 사건'으로 전해 내려왔던 것일까?
사실 사건 경위 자체만 놓고 보면 패닉으로 인한 대공포 오인&과잉 사격이라는 비교적 그 시대의 흔한 사건 중 하나로 볼 수도 있다.
허나 해당 사건은 UFO계에서 가장 공신력 있는 UFO/외계인 조우 사건으로 손꼽힌다.
어째서일까?
그 이유는 미 육군의 비난 회피와 체면 세우기 때문이다.
당시 대공포 사격으로 인명피해가 났으니 어마어마한 비난이 뒤따를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더욱이, 사건 전날에 경계 태세에도 불구하고 본토를 공격당했던 상태에서 벌어진 일이니 군의 입장이 얼마나 난처했을지를 생각해 보자.
그리하여..
사건 다음 날, 육군참모총장인 마셜이 대통령 앞으로 현장 상공에서 미확인 비행체들이 비행 중이었다는 사건 보고문(앞서 소개했던)을 올린다.
그리고 전쟁장관(지금의 육군장관)인 헨리 스팀슨이 이러한 보고문에 기반한 성명문을 발표한다.
"25일 있었던 사건은 실제상황이었으며 비행 물체는 분명히 존재했었습니다. 그 비행 물체는 모두 15기였으며, 2.7~5.4km 고도에서 상승과 하강을 반복하며 로스앤젤레스 상공을 1시간 동안 비행했습니다."
한편..
같은 날 이와 반대로 해군장관인 윌리엄 녹스는 다음과 같은 성명문을 발표한다.
"금일 새벽 간 있었던 사건은 잘못된 경계경보에 의해 벌어진 일이었습니다. 전쟁에 대한 불안감으로 인한 것이었죠. 일본의 항공기라 생각되는 비행 물체가 나타났다는 경계경보는 오보였으며, 우리 군이 공격받은 사실도 없었습니다."
이렇듯 해군 측이 선을 긋고서 육군의 잘못을 공식적으로 제기하고 나서면서, 이제 비난의 화살은 대공포 오인사격을 한 육군 측으로 집중됐다.
미 육군은 상황이 매우 난처해졌다.
더욱이, 그간 미 서해안 일대에서 일본군의 상륙 및 공습이 발생했다는 오보를 이미 몇 차례나 내며 빈축을 샀던 터였다.
이렇게..
사건 이틀 후부터 상황은 보다 복잡해지기 시작한다.
로스앤젤레스 지역 민방위 당국에선 해군장관의 발언을 두고서 민방위 사기가 크게 훼손됐다며 규탄에 나섰고, 언론은 연이은 헤드라인을 통해 사건 당일의 진상 파악을 촉구했다.
그렇게 의회 차원에서 '적습' 주장의 전쟁장관과 '오인경보' 주장의 해군장관을 소환해 규명을 요구한다.
그리고 여기서도 두 장관은 기존의 입장을 고수하면서 결론이 나지 않는다.
결국..
상공에 아무런 변고가 없었으면 수천의 군인과 시민들이 그처럼 반응했겠냐는 사실과 더불어 전쟁 중이라는 특수성으로 인해 해당 사건은 민간에 분명한 피해를 남겼음에도 유야무야 넘어가게 된다.
사건 직후 의회나 육군 및 해군은 미확인 물체에 대해 따로 공개적 차원의 후속 조사 및 감사를 진행하지 않았으며(현장에 투입됐던 문제의 제37 해안 포병 여단을 대상으로 사건 다음 날 보고서가 작성 바는 있음), 해당 사건에서 유일하게 피해를 입은 산타 모니카 측이 의회 차원의 조사를 요구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이후 제2차 세계 대전의 종전으로 일본 측의 군사 기록이 공개됐는데, 사건 당시 일본군은 현장 부근에 어떠한 항공기도 보내지 않은 것으로 드러났다.
과연, 그날 상공으로 비행 중이었다고 전해지는 물체는 무엇이었을까?
사건 당시 목격자들의 진술은, 그야말로 중구난방 가지각색이다.
먼저 언론을 통해 소개된 시민들의 항공기 목격담을 살펴보겠다.
"롱비치 상공에서 항공기 2기를 목격"
"현장 부근인 버몬트 애비뉴 근방에서 불상의 항공기가 격추됐다는 신고가 경찰에 접수"
"지역 주요 일간지 헤럴드 이그재미너 소속 기자인 피터 젠킨스는 머리 위로 약 25기의 은빛 항공기가 'V'자 편대로 느릿느릿 비행 중인 것을 목격"
"항공기의 수는 50여 기였으며 그중 3기가 바다 위에서 격추된 것을 목격"
"200여 기에 달하는 항공기가 현장 상공을 비행 중이었음"
보다시피, 어떤 명확한 공통된 관찰담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심지어 항공기가 격추됐다는 목격담도 있었다.
다음은, 현장에 투입됐던 문제의 제37 해안 포병 여단을 대상으로 사건 다음 날 작성 보고서 속 목격담이다.
"현장 부근인 77번가의 내근직 경사가 항공기 2기가 추락하는 것을 목격했다고 본부에 알려옴"
"한 경찰은 탐조등 서치라이트에 항공기 무리가 포착된 것을 목격"
"현장의 시내 호텔 옥상에서 한 중위가 상공 약 6km 고도를 240km/h 정도의 속도로 비행하는 20-30기의 항공기를 목격"
"제214 해안 포병대의 한 병장은 5기의 폭격기 형태 항공기가 상공 약 9km를 'T'자 대형으로 비행하는 것을 목격"
"제122 포병대대의 중위는 상공 약 2.7km에서 'V'자 대형으로 비행하는 항공기 3기를 목격, 또 다른 중위는 자신의 부하들이 높고 느리게 비행하는 14기의 항공기를 목격했다고 보고, 이 중 한 부하는 'V'자 대형을 이룬 5기의 항공기를 향해 포대가 사격을 가했다고 보고"
"맥도넬 더글라스 항공기 공장의 한 중위는 상공 약 6.1km에서 'V'자 대형으로 비행하는 항공기 3기를 목격"
"제3 해안 포병대 항만 방어 부대의 대위는 6기로 편대비행 하는 항공기 두 무리를 목격"
"제256 해안 포병대 항만 방어 부대의 대령은 3기의 항공기를 목격"
"몇몇 민간인은 새와 비슷한 모습의 항공기 7-8기가 높이 비행하는 모습을 목격"
"제6 및 제205 해안 포병대의 포격 과정에서 항공기 1기에 불을 붙였다는 보고"
"맥도넬 더글라스 항공기 공장 상공으로 25-30기의 중폭격이 비행 중이라는 보고"
이 밖에도 대동소이한 보고들이 다수 혼재된 모습으로 존재한다.
과연, 육안으로 관측된 목격담들이 무얼 의미하고 있는 걸까?
보다시피, 목격자들은 모두 현장에서 각기 다른 시각적 정보를 받고 있었다. 또, 위와 같이 항공기라 판단할 무언가를 관측한 사람도 있으나 그렇지 않은 사람이 다수인 것도 사실이다.
항공기를 목격했다고 보고한 사람들은 고도, 속도, 수량에서 가지각색을 하고 있다. 'V'자 대형으로 편대 비행을 했다는 부분만이 그나마 공통적이라 할 수 있겠는데, 이는 사방에서 쏘아지며 서로 가로질러지는 대공포의 불빛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겠다.
그처럼..
사건 현장 목격담 중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도 존재한다.
"롱비치 경찰서장은 시청 탑층인 7층에서 일행들과 현장 상공을 관찰하고 있었는데 여기서 한 해군이 9기의 은빛 항공기가 비행 중이라고 말했다고, 허나 같은 곳에서 관찰 중이던 자신은 이날 항공기를 목격하지 못했다고 증언"
"현장에 투입됐던 제37 해안 포병 여단의 여단장 대행은 처음 상공에서 10-15기의 항공기를 목격했다고 여겼으나 이후 최종적으로 대공포 연기가 떠다니던 것이었다고 판단."
"현장에서 포싯 부부는 탐조등 서치라이트로 15기 정도의 항공기가 비치는 것을 목격했으나, 이후 포격으로 인한 연기구름이 혼동을 준 것이라 결론 내림"
"산타 모니카에 거주하는 마가렛 스콧은 항공기 공장 감독관인 남편과 함께 현장 상공에서 깜빡이는 빨간색 불빛을 목격,"
"몇몇 장교들은 기상 관측용 풍선을 목격했다고 증언"
한편..
현장으로 직접 취재를 나섰던 <로스앤젤레스 타임스>의 리포터 겸 칼럼니스트였던 빌 헨리는 사건 이틀 후 실린 칼럼에서 다음과 같은 언급을 했다.
"'물체'가 정확하게 무엇인지 식별할 순 없으나, (신문에서처럼 탐조등이 집중 포착한) 그 물체에 대공포가 꽤 많이 직접적으로 명중시켰을 거라고 기꺼이 돈을 걸겠습니다.
적국의 항공기가 200기 있었다는 목격담도 있는데, 저는 그날 어떠한 항공기도 보지 못했습니다.
탐조등이 포착한 물체가 항공기라고도 생각하지 않습니다. 항공기는 사격 현장에서 그처럼 느릿하고 일정하게 움직이질 않습니다. 제가 보기엔, 강한 밤바람을 타고서 떠다니던 풍선 같습니다."
해당 사건은 전쟁통이라는 특수성을 인해 사후속 조사와 발표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그저 제37 해안 포병 여단을 대상으로 한 '군 자체적인' 사건 보고서만이 있었을 뿐이다.
1948년 이전까지는 말이다.
1942년 3월, 루즈벨트 대통령은 예산국(지금의 관리예산실) 국장 앞으로 정확하고 객관적인 설명으로 전쟁 역사를 기록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그리고 그 이후부터 육군 항공대는 기관을 설립해 전문 역사가와 같은 인사를 고용하기 시작했으며, 1945년 종전 후에는 이러한 역사서 편찬을 시카고 대학교 총장에게 맡기며 최고의 학문적 기준을 충족시켜달라고 당부한다.
그렇게 1948년부터 1958년에 걸쳐 총 7권의 역사서가 편찬되는데, 여기서 소령급 이상의 간부들이 편집인&조사인으로 활약한다.
한편, 이러한 편집인&조사인은 군사 기록에 대한 광범위한 액세스를 허가받는다. 육군 항공대 소령 출신인 윌리엄 고스도 그러한 조사인 중 하나였다.
고스는 다음과 같은 요지의 결론을 내린다.
"증거들을 면밀히 연구한 결과, 대부분의 혼란은 탐조등에 비진 대공포가 적국의 항공기로 오인된 것에서 비롯됐다. 새벽 3시 6분경 산타 모니카 상공에서 빨간 조명탄이 부착된 풍선이 관측됐는데, 이 기상 관측용 풍선 역시 현장의 혼란을 야기했다."
고스가 이러한 결론을 내린 데에는 합당한 이유가 있다.
앞서 사건과 관련한 공식적인 후속 조사 없이 '제37 해안 포병 여단을 대상으로 한 군 자체적인 사건 보고서'만이 존재한다고 언급했었는데, 바로 이 보고서에서 문제의 물체가 무엇이었는지 충분히 설명되고 있다.
다음과 같이 말이다.
"새벽 3시 6분경 산타 모니카 상공에서 빨간 조명탄이 부착된 풍선이 목격되면서 사격이 시작됐다."
"제203 해안 포병연대 지휘관인 레이 왓슨 대령은 새벽 3시경 상공에서 풍선을 목격했는데, 기상 관측용으로 날려진 것임을 파악하고서는 부대에 사격 불허 명령을 내렸다."
"로스앤젤레스 서부 해안의 제4공군 사령관이었던 소장 제이콥 피켈은, 표적이 된 물체의 정체가 헐리우드 근방 부대에서 날린 기상 관측용 풍선 2기라고 여겼다."
추가로, 사건 당시 우연찮게 문제의 제37 해안 포병 여단을 방문 중이었던 대령 존 머피가 1949년 여름경 <The Antiaircraft Journal> 92호에 다음의 보고문을 싣기도 했다.
해당 저널은 미 육군 해안 포병 측에서 펴내던 정기 간행물로, 여기서 머피는 오랜 시간이 흘러 마침내 진짜 이야기를 전할 수 있게 됐다고 소개했다.
다음의 이야기를.
"소장 제이콥 피켈과 대령 무엘 케프너 그리고 제가 당시 현장에 있었던 60여 명의 민간인 및 군인을 대상으로 조사를 진행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절반은 상공에서 항공기를 목격했다고 응답했으나 나머지 절반은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고 답했습니다. 스코프를 통해 같은 상공을 관측한 사람 간에도 의견이 갈렸습니다.
당시 전투기 사령부 작전실로 상공에 풍선이 비행 중이라는 신고가 들어왔고, 이에 한 어린 공군 관제사는 자연스레 독일이나 일본 측의 체펠린 비행선을 떠올렸습니다.
그리고, 자신에게 권한이 없음에도 급박한 상황이라 판단한 이 관제사는 곧바로 발포 명령을 하달했습니다.
사실은, 해안 포병 부대 한 곳에서 새벽 1시경 기상 관측용 풍선 2기를 띄웠는데 바로 이것이 포화의 시작이었던 것입니다.
당시 19시 18분경부터 22시 23분에까지 서해안 일대에 경계경보가 내려졌었기에, 경보 해제 후 혹여 발생할지 모를 공습에 대비하고자 기상 정보 데이터를 수집하기로 판단해 기상 관측용 풍선을 띄웠던 것이죠."
마찬가지로, 종전 후 시간이 흘러 <로스앤젤레스 데일리 뉴스>의 매트 와인스톡이 사건 당시 현장의 대공 포대 한곳에서 복무했었다는 사람과 인터뷰를 갖기도 한다.
"산타 모니카 근방 새로운 레이더 기지 중 한 곳에서 시스템 테스트가 필요했다. 따로 항공기로 테스트가 불가능했기에, 수소를 채운 풍선을 금속 와이어로 둘러 날려 보냈다. 풍선은 바람을 타고 비행하며 레이더 시스템에 정상적으로 나타났다.
그런데, 이 풍선이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으로 인해 남쪽 방향 도심지역을 향해 멀리 날아가기 시작했고, 이어 해안 지역 레이더가 금속 와이어를 포착하고서 항공기로 인식되면서 사격의 단초가 됐다."
마지막으로, 사건 당시의 보고서에는 다음과 같은 요지의 진술도 존재한다.
"새벽 3시경, 제203 해안 포병 연대에선 본부 및 경비 구역이었던 산타 모니카 내 맥도넬 더글러스 항공기 공장 부지에서 각각 기상 관측용 풍선을 1기씩 쏘아올림.
풍선은 은빛깔을 띠며, 야간에도 추적이 용이하도록 풍선 아래로 초가 설치된 유리를 부착함.
이러한 풍선은 일반적으로 고도 7.6km 이상으로도 비행이 가능하며, 추적이 가능하도록 빛을 잘 반사하도록 제작됨.
기상 작전 책임관의 감독하에 풍선이 발사됐고 곧장 상공 관제 센터에도 보고함.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고도를 타고서 바람 따라 해안가로 입성한 풍선으로 인해 경계경보가 강화되면서 탐조등이 켜지고 대공포 발사가 시작됨.
이에 기상 작전 책임관은 연대 지휘관인 레이 왓슨 대령에게 해당 사실을 보고.
하지만 상공 관제 센터에서 격추 명령이 하달됨."
더불어..
앞서 소개했던 다음의 목격담에서도 위의 진술들을 뒷받침해 주는 것들이 존재한다.
"산타 모니카에 거주하는 마가렛 스콧은 항공기 공장 감독관인 남편과 함께 현장 상공에서 깜빡이는 빨간색 불빛을 목격,"
"몇몇 장교들은 기상 관측용 풍선을 목격했다고 증언"
이제..
지금까지의 내용을 종합해 '1942년 로스앤젤레스 전투 사건'의 상황을 정리해 보겠다.
"일본군 본토 포격 다음 날인 2월 24일, 한밤 동안 서해안 일대에 일본군 경계경보가 발령됨.
이날 경보를 맞아 로스앤젤레스 지역의 10곳이 넘는 대공 연대들에서 사격을 위한 기상 정보 수집차 직경 1m 이상의 기상 관측용 풍선을 쏘아올리고 있었음.
이러한 기구는 추적 및 관측의 용이성을 위해 풍선 밑에 초를 설치하거나 빨간 조명탄을 부착해 지상에서도 반사된 빛을 육안으로 확인이 가능.
새벽 간 이러한 기상 관측용 풍선들은 레이더에 포착되면서 급기야 경보를 통한 사격에 이르게 함.
전쟁 히스테리 상태였던 군인, 민방위, 자원봉사자들은 탐조등의 서치라이트들로 파생되는 빛의 클러스터 무리와 반사된 대공포를 대상으로 신경질적인 무차별 사격을 지속.
이런 분위기 속에서, 지상에선 기상 관측용 기구를 정확히 감지해 낸 사람도 있으나 다수는 상공의 빛들에 적국의 항공기를 투영시킴.
그렇게 히스테리성 경보는 이날 동이 트고서야 중단됨."
여기서 하나 의문이 남는다.
사건 당시 어째서 서해안 일대의 부대들은 그처럼 자중지란을 저질렀던 것일까?
물론, 일본군에 의한 전쟁 히스테리 상태가 어느 정도 설명을 해주기는 한다.
허나, 여기엔 다른 이유도 존재한다.
당시 서해안 일대에선 진주만 직후 1941년 12월부터 1943년 9월까지 부대 및 인원에 지속적으로 다양한 변화가 발생했다. 지휘관의 교체와 함께 연대와 대대가 분리돼 파견되거나, 기존 부대의 자리를 새로운 부대가 파견 와 채우는 등이 그것이다.
또한, 진주만 공습으로 인해 서해안 일대에 긴급히 도입된 레이더 방공망 시스템은 아직 형성 단계에 있던 미완성이었다.
아마 이러한 부대 내 어수선함이 혼란의 시작과 가중에 어느 정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게다가 어찌 보면 당시는 본토 공습에 대비한 첫 경험 상태이기도 했고 말이다.
그렇다면 마지막 의문 하나.
<로스앤젤레스 타임스> 1면에 실린, 사건 당시 탐조등 서치라이트들이 포착한 비행접시형 비행 물체의 정체는?
사실, 이는 아주 간단히 설명이 된다.
당시 1940년대는 이미지를 원본 그대로 재현하기엔 신문 인쇄술이 뒤떨어졌다.
따라서, 신문사들마다 보다 원활한 가시성을 위해 이미지 리터칭 아티스트를 고용하는 게 필수였다.
그렇게..
<로스앤젤레스 타임스>의 리터칭 작업 과정으로 인해 마치 탐조등 서치라이트가 항공기를 포착하고 있는 것처럼 눈의 착시를 일으킨 것.
*
여기까지가, '1942년 로스앤젤레스 전투'의 민낯이었다.
사실, 이미 보고서 속 진술과 훗날 사건 관련자 및 조사자들의 고백으로 인해 일찌감치(뒤늦게나마) 그 진상을 파악할 수 있었던 사건이다.
허나..
전 세계적으로 UFO/외계인 붐이 일기 시작하던 1980-1990년대에 해당 사건은 'UFO와의 교전 사건'으로 탈바뀜된다.
그 과정을 설명하려면 필연적으로 '로스웰 UFO 사건'을 소개해야하는데..
그러면 책 1권 분량이 나오므로, 아주 아주 간략하게 요약하겠다.
1970년대 말, UFO 연구가 스탠튼 프리드먼이 1947년 로스웰 지역에서 화제가 됐었던 UFO 회수 사건에 관심을 갖는다.
하여, 그는 UFO 다큐멘터리에 해당 지역 주민의 목격담이라며 'UFO가 불시착하고 미군이 UFO와 외계인 시신을 회수하는 것을 직접 목격했다'라는 이야기를 소개한다.
이러한 목격담은 가짜였으나, 당시 본격화되던 UFO/외계인 붐을 타고서 로스웰 UFO 사건은 30년 만에 재탄생하기에 이른다.
해당 사건이 유명해지면서 로스웰 컨텐츠를 이용해 프리드먼은 빌 무어라는 또다른 UFO 연구가와 베스트셀러를 기록하며 한순간에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UFO 연구가가 된다.
허나 로스웰 UFO 사건 당시 불시착한 UFO는 공군 측의 對소련 첩보용 기상 관측용 풍선이었고, 당시 공군 특정 부대가 기밀리에 제한적으로 사용하던 신소재 풍선으로 인해 이를 알리 없던 육군이 UFO를 회수했다고 발표했던 것. 그 직후 사실을 알게 된 육군 측에서 정정 발표를 했다.
한편, 로스웰 UFO 사건으로 단박에 세계적 히트를 치게 된 프리드먼과 무어는 다음 작당을 꾸미는데..
그것이 바로 'MJ-12 문서'였다.
해당 문서는 익명의 제보자로부터 건네받았다던 미국의 기밀문서로, 1947년 로스웰 UFO 사건을 계기로 미국 대통령이 대통령 직속 對UFO/외계인 기관을 설립해 쭉 이어져 왔다는 내용이다.
문서는 해당 기관이 12명의 고위 관료로 구성됐으며, 로스웰에 추락한 UFO와 외계인 시신을 회수했다는 게 주요 내용이다.
물론, 해당 문서는 너무도 많은 고증 오류(?)가 존재해 공개와 거의 동시에 완벽하게 반박됐다.
허나..
MJ-12라는(아마 올림포스 12신, 12사도, 로마제국 12인 위원회에서 따왔을) 기막힌 컨셉과 배경 스토리로 인해 지금까지도 UFO/외계인 음모론자들에 의해 애용되고 있는 현실이다. 여담으로, 그 악명 높은 51구역 음모론 전파의 대표주자 밥 라자르 역시 이 MJ-12를 자신의 음모론에 끼워 넣은 바가 있다.
그렇게..
이 MJ-12가 로스웰 UFO 사건에 이어 또다시 대히트를 기록하면서 이에 동조하는(?) 가짜 UFO/외계인 기밀문서들이 탄생하기 시작한다.
대표적으로, 살아있는 외계인으로부터 1952년에 정보를 제공받았다는 내용이나 실은 예수가 지구를 처음으로 방문했던 외계인이었다고 암시하는 내용을 포함한 리처드 도티의 '물병자리 문서'가 유명하다.
바로 이 무렵 빌 쿠퍼라는 음모론자가 등장한다.
90년대에 각종 과격한 음모론(외계인이 일루미나티를 조종한다, 외계인의 지구 점령 야욕을 JFK가 폭로하려다 암살당했다, 에이즈는 특정 인종의 인구수를 줄이려는 인위적인 질병이다)을 주장하던 그는, 여기저기서 표절과 짜깁기한 내용을 가지고서 UFO/외계인 음모론을 펼친다.
그는 이러한 내용을 자신이 해군과 공군에서 복무하던 시절 액세스한 기밀문서들에서 본 것이라 주장했는데, 실은 해군의 말단 서기였던 것으로 드러났다.
하지만 90년대는 전 세계적으로 미스터리붐이었기에, 쿠퍼는 출판물과 강의 등으로 적지 않은 돈을 벌 수 있었다.
그리고..
당시 로스웰 UFO 사건처럼 1940년대에 실재했던 미확인 비행 물체 사건인 로스앤젤레스 전투가 슬슬 발굴돼 음모론 컨텐츠로 사용되던 무렵, 쿠퍼는 육군장관 마셜이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로스앤젤레스 전투에서 격추한 외계 기원의 UFO 2기를 회수했다고 보고한 기밀문서를 공개한다.
이 밖에도 그는 쿠퍼 버전의 MJ-12 자료들을 공개하기도 했는데..
한편..
이후 '1942년 로스앤젤레스 전투 사건'은 꾸준히 UFO 커뮤니티에 화자 되면서, 마침내 '역사상 가장 공신력 있고 신뢰할 수 있는 UFO 사건'으로 입방아에 오르내린다.
지금까지도.
('로스웰 UFO 사건'에 대해 국내외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는 총망라된 이야기로 확인하려면 <세기의 음모론과 그 진실> 서적을 참조, 'MJ-12'에 대한 자세한 내용 역시 해당 서적에서 다루고 있음, 'MJ-12'에 대한 개괄적인 이야기는 아래 링크에서 확인 가능)
이상한 옴니버스에서 UFO/외계인 이야기를 소개할 때면 늘상 강조했던 다음의 문구로 글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우주에서 생명체가 우리뿐이라면 그것은 엄청난 공간의 낭비이다.'라는 말에 적극 동의하나, '우주에 지적 생명체가 우리뿐일 것이라면 그것은 엄청난 공간의 낭비이다.'에도 동의합니다.
광활함과 유구함을 뽐내는 이 우주에서 티끌보다도 작은 변방 지구의 이 짧은 찰나 동안에 벌써 서로 다른 외계인들끼리 접촉이 있었다는 가정은, 분명 우주에 대한 오만이자 지구에 대한 자만이겠습니다.
이상한 옴니버스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현존하는 UFO와 외계인에 대한 콘텐츠가 거의 대부분 불가사의하고 오컬트적이며 초자연적인 것을 믿게 하는 비지니스, 완전히 말도 안 되는 이런 모든 것들, 이런 중세적 사고방식을 강요하는 데에 있다는 점입니다.
'전쟁이나 기아로 인해 죽어가는 아이들'과 같이 상징적인 것만이 비단 세상의 문제인 것은 아닙니다. '미스터리 팔이'와 같이 눈에 직접적으로 보이지는 않지만 인간 마음의 부패와 관련된 것도 분명 문제 인식이 이뤄져야 하는 분야인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문제에 대해서도 반드시 무언가 해야 합니다.
자연과학을 대중화하는 데 힘쓰며 끊임없이 우주와 지구 외 생명체에 대한 탐구심을 잃지 않는 천문학자들과 그들의 말에 쏟을 관심을, 광고주가 좋아하는 콘텐츠를 위해 뻔뻔스럽게도 말도 안 되는 모든 종류의 것들을 조장하는 일부 매체들 및 UFO 연구가를 자처하며 사욕 및 야욕을 채우고자 달콤하고 환상적인 말들을 쏟아내어 UFO/외계인 음모론 산업에 이바지하는 미스터리 팔이들에게 돌려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내가 어렸을 때 부모님에게 처음으로 도서관 카드를 받고서 85번가의 도서관으로 달려가 본 별에 관한 책에 따르면 별이 태양이라고 했다.
좋아, 그렇다면 다른 별들도 아직 우리가 알지 못하는 행성들을 거느리고 있지 않을까? 그리고 이러한 행성들 중 몇몇에는 생명이 살고 있지 않을까? 살지 말라는 법이 어디 있겠어!
그때부터 나는 천문학자가 되기로 결심했다"
-미국의 천문학자이자 외계 지적 생명체 탐사 계획의 후원자였던 칼 세이건>
참조
<Los Angeles Times/The Battle of L.A., 1942> Scott Harrison
<Skeptoid/The Battle of Los Angeles> Brian Dunning
<The Antiaircraft Journal Vol. 92>
<The Army Air Forces in World War II> Wesley Frank Craven & James Lea Cate
<Wartime Exile: The Exclusion of the Japanese Americans from theWest Coast>
<Word War II/Phantom Japanese Raid on Los Angeles During World War II> Donald J. You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