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법 역사에 다시 없을 대역전재판
* 본 글은 단순히 범죄사건과 관련한 호기심을 충족시키고자 오락적 목적을 추구하는 것이 아닌, 사건의 악랄한 범행성을 알림과 동시에 범죄의 연보年譜를 통한 교육에 그 목적을 두고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1985년 5월 11일 토요일, 어머니의 날을 하루 앞둔 날이었다. 사건은, 미국 노스캐롤라이나 컴벌랜드 카운티 소재 페이엣 빌에서 벌어졌다.
이날 처음으로 이변을 알아챈 것은 남편인 게리였다. 장교 훈련소에 머물고 있던 공군 대위인 게리는, 주말 아침을 맞아 언제나처럼 아내인 케이티에게 전화를 건다. 헌데 이상하게도 아무리 전화를 걸어도 받지를 않는다.
다음으로 이변을 알아챈 건 이스트번 가족네 집을 지나치던 이웃이었다.
여느 날과 달리 집 앞으로 수거하지 않은 신문 뭉치가 있었고, 차량 역시 같은 자리 같은 위치에 고정된 채였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초인종을 눌러보나, 안에선 아기가 우는 소리만이 들려올 뿐이었다.
신고를 받고 출동한 보안관이 방충망을 제거하고 침실로 들어선다. 그곳엔 22개월 된 막내딸이 침대에서 울고 있었다. 이어 침실을 나서자, 집안 전체를 지배하고 있던 불길한 내음이 모습을 드러낸다.
오후 1시경, 살인사건 부서의 비틀과 왓츠 형사가 현장에 도착한다.
케이티는 하반신이 벗겨진 채였다. 칼에 의한 자상이 열다섯 곳이나 됐다. 성폭행당한 흔적도 있었다.
담요로 덮여있던 다섯 살짜리 첫째 딸은, 가슴을 여러 차례 찔린 채였다. 세 살 난 둘째 딸은, 가슴과 등 부위에서 폭행의 흔적이 발견됐다. 케이티와 두 딸 모두 목이 베여진 상태였다. 목숨을 건진 건, 막내딸 하나뿐이었다.
비틀 형사는 사건 당시의 모습을 이렇게 설명했다.
"죽음은 냄새를 지니고 있습니다. 죽음이란 것엔 향이 존재해요. 그날 그곳에서 풍기던 냄새를, 저는 절대 잊지 못할 겁니다."
미국 법 역사상 다시 없을 대역전재판의 서막이었다.
사건이 벌어진 페이엣 빌은, 세계에서 가장 큰 군사시설 포트 브래그와 인접한 곳이기도 했다.
이스트번 가족은 바로 이 도시에 살고 있었다. 남편인 게리는 공군 대위였고, 아내인 케이티와의 사이에서 세 명의 아이가 있었다. 세 자매는 각각 다섯 살, 세 살, 22개월이었다.
사건 무렵, 게리의 전출로 인해 이스트번 가족은 영국으로의 이주를 준비 중이었다. 하여 가족이 기르던 딕시라는 이름의 개를 분양하고자 군인 커뮤니티 신문에 광고를 게시한다.
5월 7일, 광고를 본 한 남자가 개를 분양받겠다며 연락해 온다. 남자는, 지역 거주민인 육군 병장 티모시 헤니스였다. 27세의 헤니스는 아내와 갓 태어난 딸이 있었으며 스피츠를 기르고 있었다.
이날 밤 9시경, 헤니스는 이스트번 가족의 집에 방문한다. 게리는 장교 훈련소에 머물고 있었기에 집에는 케이티와 세 딸뿐이었다.
헤니스는 딕시를 마음에 들어 했다. 케이티 역시 헤니스가 분양을 받기에 적합한 사람이라고 여겼다. 헤니스는 그 자리에서 분양을 결정했고, 케이티는 딕시를 태우고 차를 몰고 떠나는 헤니스를 차도까지 나와 배웅했다.
그리고 4일 후인 5월 11일 토요일. 케이티와 어린 두 딸은 주검으로 발견된다.
사건 현장에서 범인의 것으로 보이는 지문과 머리카락이 발견됐다. 케이티의 몸에선 정액을 발견했다.
혈흔 반응검사인 루미놀 테스트 결과 욕실에서도 흔적들이 발견됐다. 범인이 자신에게 묻은 핏자국을 지우고자 한 것을 알 수 있었다.
조사 첫날, 수사팀은 목격자를 확보한다. 목격자는 수위 업무를 맡던 관리인이었다.
"5월 10일 금요일 새벽 3시 30분경이었습니다. 장신의 백인 남성이 쓰레기봉투를 메고서 이스트번 가족네 진입로로 나가는 것을 목격했어요. 흰색의 쉐보레 셰베트 차량을 타고서 사라졌죠."
수사팀은 목격자의 진술에 따라 몽타주 제작에 들어간다. 또 범인이 케이티의 현금과 ATM 카드, 그리고 비밀번호가 적힌 종이를 가져갔음을 밝혀낸다.
결론적으로, 5월 9일 목요일 밤 8시경부터 5월 10일 금요일 새벽 3시 사이에 범행이 이뤄졌음을 알 수 있었다.
5월 15일 수요일.
헤니스는 아내와 점심을 먹으며 TV를 보던 중, 사건에 대한 특별 방송을 접하고는 충격에 빠진다. 살인사건 피해자가, 바로 딕시의 이전 주인인 케이티였기 때문이다.
헤니스는 곧장 자진해서 지역 경찰서를 찾아갔고, 비틀과 왓츠 형사의 심문에 응했다.
"5월 7일에 개를 분양받았어요. 이틀 후인 5월 9일엔 케이티가 전화를 걸어왔고요. 개가 잘 적응하고 있는지 물어왔죠. 9일 밤에는 아내와 딸을 시댁까지 데려다주고서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이어 헤니스는 수사팀에 자신의 혈액과 타액, 머리카락, 그리고 지문을 제공했다.
한편, 몽타주와 헤니스의 생김새가 흡사했기에 두 형사는 심문을 7시간이나 이어간다.
목격자였던 관리인은 자신이 목격한 장신의 남성이 헤니스가 맞다고 증언한다. 게다가, 헤니스의 차량 역시 흰색의 셰베트였다.
허나, 당장은 영장이 없었기에 헤니스는 집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이날 밤늦게 영장이 발부되며 헤니스는 자택에서 수갑이 채워진 채 기소된다.
혐의는 3건의 살인과 1건의 강간 혐의였다. 헤니스는 육군 소속이었으나 사건은 소속 기지 밖에서 발생했으므로, 기소 주체는 컴벌랜드 카운티였다.
검사 측은 승리를 확신한다.
비록 사건 당시인 1985년은 세계적으로 법의학이 걸음마 수준이었으며, DNA 분석 기술 역시 법 집행에 제대로 채택되지 않던 시기였음에도 말이다. 왜냐하면, 목격자였던 관리인의 증언 외에도 많은 정황 증거가 헤니스를 범인으로 지목하고 있어서였다.
먼저 도난당한 ATM 카드에서 이틀에 걸쳐 150달러씩, 총 300달러가 인출됐다.
이후 헤니스는 연체 중이던 집세 300불을 집주인에게 지불했다.
ATM 카드를 통해 현금이 인출된 무렵엔, 근처에서 한 여성이 장신의 금발 백인을 목격했다.
사건이 있고서 수 시간 후에는 헤니스가 세탁소에 재킷을 맡긴다. 관리인에게 목격된 남성의 재킷과 동일한 형태 및 색상이었다.
사건 다음 날엔 헤니스가 마당에서 수 시간 동안 모닥불을 피웠다고 그의 이웃들이 증언했다.
무엇보다도, 헤니스의 사건 당일 알리바이에 의혹이 존재했다.
아내와 딸을 처가에 데려다주고는 곧장 집으로 복귀했다는 것과 달리, 전 여자친구의 집에 방문했던 게 드러난 것이다.
전 여자친구의 증언에 따르면, 헤니스가 이날 밤 자신의 집에 찾아와 아내와 헤어진 상태라는 식으로 말했다고. 하지만 전 여자친구는 그를 정중히 돌려보냈다고 한다.
결론적으로, 검사 측은 다음과 같이 추정했다.
"아내와 딸을 처가에 보내고서 다른 여성과의 성관계를 꾀했던 헤니스. 그러나 전 여자친구에게 거절당하면서, 얼마 전 방문했던 케이티를 떠올린다. 케이티의 남편 게리가 파견 중인 것을 알고 있었던 헤니스는 이스트번 가족네를 찾아간다. 하지만 케이티에게서도 거절을 당하자 좌절감과 분노에 휩싸이면서, 잠재돼 있던 폭력성이 사건을 일으킨 것이다."
은퇴한 IBM 임원 출신인 헤니스 부친은 아들을 위해 지역의 저명한 변호사 둘을 고용한다. 그리고 헤니스는 일관되게 무죄를 주장한다.
재판이 있기 전, 검사 측이 자백을 조건으로 사형 대신 종신형 가능성이 높도록 형량 거래를 제안한다. 이에 헤니스는, 자신이 하지 않은 일에 대해 유죄를 인정할 수는 없다며 단칼에 거절한다.
재판은 1년 후인 1986년 여름에 열린다.
검사 측은 정석적이고 효과적인 방식으로 헤니스를 공격한다.
목격자였던 관리인의 증언을 전면에 내세웠으며, 배심원들에게 끔찍한 현장 사진들을 보여주는 동시에, 아이들과 어머니의 죽음에 대해 책임이 있는 헤니스가 같은 공기를 마시고 있어서는 안 된다며 호소했다.
배심원단은 10시간 동안의 숙고 끝에, 1급살인 3건과 강간 1건에 대해 유죄 평결을 내린다.
그렇게 헤니스에게 사형이 선고된다.
한편, 선고 직후 감옥으로 옮겨진 헤니스에게 익명의 누군가가 다음의 편지를 보내온다. 이 편지는 보안관 사무소에도 보내졌다.
"친애하는 헤니스씨에게. 제가 범죄를 저질렀습니다. 이스트번 가족들을 살해했죠. 죄송해요. 당신이 이걸 읽을 때쯤이면, 저는 무사히 노스캐롤라이나를 떠났을 겁니다. 고마워요. - 미스터 X가"
이야기는 여기서 끝이 아니다.
2년 후인 1988년, 헤니스의 변호사 측은 항소를 신청한다.
재판 당시 검사 측이 배심원단에게 보여준 자극적인 현장 사진들을 통해 감정적인 판단을 내리도록 유도했다는 사유에서였다.
이러한 항소가 받아들여지면서, 1989년 4월에 재심이 열리게 된다.
참고로, 노스캐롤라이나에서 사형을 선고받은 죄수에게 항소심이 받아들여진 것은 이게 최초였다.
3년의 세월 동안 헤니스의 변호인 측은 철저한 반격을 준비했다. 첫 재판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했던 관리인(목격자)에 대한 공격이 그것이었다.
변호인 측은 관리인을 도둑이자 거짓말쟁이라고 매도한다.
관리인의 첫 재판 당시부터, 도난당한 ATM 카드를 사용하는가 하면, 공공장소에서 술에 취해 경찰에게 행패를 부렸고, 만료 상태의 면허증을 갱신하지 않고 운전했으며, 음주운전을 한 적도 있었다.
그럴 때마다 관리인은, 자신이 경찰과 검사 측에 도움을 주고 있는 증인이라며 거드름을 피웠다. 실지로 그는 아무런 제재도 받지 않았으며, 특히 음주운전 당시엔 사건 담당 형사 중 하나였던 왓츠가 눈감아준 적도 있었다.
이어서 변호인 측은 관리인이 했던 증언 자체에도 문제를 삼는다.
헤니스를 현장에서 목격했을 당시는 날씨가 맑았기에 새벽임에도 명확히 구분할 수 있었다는 게 관리인의 증언이었다. 허나 변호인 측이 참고인으로 내세운 기상학자와 헬리콥터 조종사는, 사건 당시 날씨가 무척 흐렸기에 아주 어두운 상태였다고 증언한다.
또 ATM 기계 근처에서 장신의 금발 백인을 목격했다던 여성의 경우에도, 최초 수사팀에 진술을 할 당시엔 헤니스를 목격한 적이 없다고 진술했음을 지적한다.
변호인 측이 준비한 무기는 이게 다가 아니었다.
변호인 측은 두 명의 새로운 증인을 내세운다.
한 명은 매일마다 신문을 배달하던 여성이었다. 그녀는 사건 당일 새벽 1시 45분경, 이스트번 가족네 앞을 지나가는 차량을 목격했다고 증언한다. 운전자는 장발의 헤어스타일을 한 남자였다는 증언도 덧붙인다.
다른 증인은, 이스트번 가족의 이웃이었던 남성이었다.
이 남성이 법정에 들어서자 일순 주위가 조용해진다. 남성이 헤니스와 아주 흡사한 외향을 하고 있어서였다.
남성은 사건 무렵 불면증에 시달리고 있어 새벽마다 산책을 나갔는데, 사건 당일에도 새벽 3시경부터 산책 중이었다고 증언한다.
또 산책을 나갈 때면 비니와 재킷을 주로 착용했다고도 했다. 이는, 관리인이 사건 당시 목격했다던 남성의 외향과도 일치했다.
마지막으로, 변호인 측은 현장에서 발견된 증거물들이 헤니스를 지목하지 않는다고 변호한다.
집 마당으로 발견된 발자국은 헤니스의 발 사이즈보다 훨씬 작았다.
욕실 수건에 묻어있던 혈액은 헤니스의 혈액형과 일치하지 않았다.
현장에서 발견된 머리카락들도 헤니스의 것이 아니었다.
헤니스가 사건 당시 세탁소에 맡겼던 재킷에선 혈액이 검출되지 않았다.
3주 동안의 재판에서 변호인 측은 맹공격을 퍼부었다. 반면, 검사 측은 별반 성과를 내지 못했다.
그렇게 재판과 함께 이틀간의 심의가 이어진 끝에, 배심원단은 헤니스의 모든 혐의에 대해 무죄를 평결한다.
노스캐롤라이나 역사에서, 사형수가 원심을 뒤집은 최초의 역전재판이었다.
사형수로 800일 넘게 복역해야 했던 헤니스. 그는 자유의 몸이 되어 법정을 나선 자리에서 어느새 4살이 된 딸아이를 번쩍 안아 올린다. 그리고 그 순간 찍힌 사진이 언론의 1면을 차지한다.
이후 5년 뒤인 1993년엔 헤니스의 이야기가 담긴 책이 출간된대 이어, 그 3년 뒤엔 ABC 방송사에서 TV 미니시리즈로 만들어지기까지 한다.
한편 헤니스는 무죄판결 이후 다시 군대로 복귀할 수 있었다.
군에서는 3년간 체불된 임금을 지불함과 동시에 하사로 진급을 시켜줬다. 그렇게 재복무하게 된 헤니스는, 중동으로 파병을 다녀오기도 하면서 23년간 모범적인 군 생활을 보냈다는 평가와 함께 2004년 상사로 전역한다.
그렇다면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남는다.
그날 이스트번네 가족을 무참히 살해했던 자는 도대체 누구였던 것일까?
사건 초기부터 헤니스를 단독 용의자로 두고서 수사가 진행됐기에, 다시 재개된 이스트번 가족 살인사건은 난항의 연속이었다.
결국, 세기가 바뀌어 21세기가 됐음에도 뚜렷한 용의자 하나 잡아내지 못한다.
허나 그러는 동안 법의학 분야에선 혁명과도 같은 발전들이 시작된다. 특히, DNA 분석기술 분야에서 그랬다.
80년대까지만 해도 범죄 현장의 DNA를 제대로 분석하는 게 불가능했다. 하지만 90년대부터 폭발적인 발전을 이뤄낸 끝에, 2000년대 들어와선 이러한 범죄 현장의 DNA들이 가장 강력한 직접증거로 채택되기에 이른다.
그리하여, 사건 당시 케이티의 몸 안에서 채취했던 정액을 분석하는 게 마침내 가능해진다.
그렇게 2006년 여름.
1년간의 DNA 분석이 해답을 내놓는다. 그리고 결과를 전해 들은 비틀 형사는, 그 즉시 케이티의 남편이었던 게리에게 전화를 건다.
"게리, 드디어 DNA 분석 결과가 나왔어요. 헤니스였습니다. 헤니스가 범인이었어요."
이렇듯 DNA 분석이 20년에 걸친 사건의 내막을 들춰낸다.
한편, 컴벌랜드 카운티 검찰과 노스캐롤라이나 주 정부는 깊은 고뇌에 빠지게 된다. 그 이유는, 로마 시대 때부터 유래되어 현대에까지 뿌리가 내려지고 있는 '일사부재리' 때문이었다.
이미 최종적으로 확정판결이 난 사건에 대해 거듭 재판을 열지 않는다는 원칙의 일사부재리는, 미국에서도 '이중 위험금지'라는 법으로 헌법에 존재한다.
하지만 이중위험금지에도 맹점이 존재했다.
미국의 법은 기본적으로 주 정부의 법률을 연방 정부의 법률과는 별개의 것으로 간주하기 때문이었다.
미국은 각 주마다 자체적인 법률이 존재한다. 따라서 주 정부에서 최종적으로 확정판결이 난 헤니스를, 연방 정부의 법원에서는 재판에 올릴 수가 있는 것이다.
다만 문제는, 개인을 대상으로 한 케이스는 미국 역사에서 손에 꼽을 만큼만 존재할 정도로 무척이나 꺼려지고 터부시됐다는 점이다. 실제 케이스 역시, 과거 20세기에 민권과 관련한 사안에서나 존재할 정도.
또 하나의 맹점이 존재하긴 했다.
미국의 군법은, 민간 법원에서 재판이 이뤄진 군인의 경우에도 군사재판에 회부하는 게 가능하다.
하지만 마찬가지로 그러한 케이스가 손에 꼽을 정도로 금기시됐다. 실제 케이스 역시, 여죄를 추가로 묻는 형식이었지 헤니스처럼 판결을 뒤엎기 위한 케이스는 전무했다.
무엇보다도, 헤니스는 이미 2년 전에 전역한 상태였다.
컴벌랜드 지방검사와 노스캐롤라이나 포트브래그 군기지 변호사들이 머리를 맞대고 회의한 끝에 묘안을 도출해 낸다.
그건 바로, 간부로 전역한 헤니스를 군법에 따라 예비역 소환을 해서 다시 현역으로 재복무시키는 것이었다. 현역으로 소환된다면 군사재판에 회부하는 것도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2006년, 육군 장관의 명에 따라 헤니스는 현역으로 소환된다.
이후 헤니스는 4년간 계속해서 군사재판 회부 결정에 항소하나 모두 기각되면서, 결국 2010년 3월 군사재판이 시작된다.
헤니스는 강간혐의에 대한 시효가 만료됐기에 3건의 살인혐의로 기소된다.
여기서도 헤니스는 당시 군인 관련 재판에서 가장 유명하던 변호사를 선임한다. 이렇게 이른바 스타 변호사로 꾸려진 헤니스의 변호인단은 맹공격을 펼친다.
먼저 현장에서 발견된 족적과 혈액, 그리고 머리카락과 지문이 헤니스의 것이 아니었음을 강조한다.
또 케이티의 시신 부검 결과 정액은 살해 이전 그녀의 몸에 들어간 것이며, 성폭행 피해자에게서 나타나는 신체적 상해가 발견되지 않았다는 점을 지적한다.
결론적으로 변호인 측의 논거는, 정액의 DNA 분석 결과가 헤니스와 케이티의 간통을 증명할 수는 있어도 살인을 증명하는 직접적인 증거가 될 수 없다는 것이었다.
허나, 변호인단의 논거에는 분명 반박도 존재했다.
부검 결과 정액이 케이티의 몸에 들어간 시점은 살해 직전이었다. 그리고 성폭행 피해자 10명 중 7명은 신체적 상해를 입지 않는다는 연구 결과가 존재했던 것이다.
그러나 변호인단의 논거 그 자체에는 오류가 없었다.
결론적으로, 원했든 원치 않았든 헤니스와 케이티 사이에서 성적 접촉이 있었던 건 DNA가 증명한다. 하지만 정황증거 외에 살인을 직접적으로 증명하는 추가적인 물증이 없었던 것이다. 최소한 정황증거를 위해선, 둘의 성관계가 강압적으로 이뤄졌음이 증빙돼야만 했다.
그렇게 3주간 지속된 군사재판에서, 당초 치열한 법적공방이 예상됐으나 예상치 못했던 의외의 상황이 발생한다.
변호인 측의 논거 핵심은, 어디까지나 헤니스와 케이티 사이에서 간통이 있었다는 것이었다. 헌데, 헤니스는 이와 관련한 진술에서 개를 분양받은 이후 직접적인 접촉이 없었다며 일관되게 관계를 부인한 것이다.
2010년 4월 8일.
3시간의 심의 끝에, 배심원단은 만장일치로 의견을 모은다. 배심원단의 판단은 유죄였다.
그렇게 헤니스에게 사형이 선고된다.
한 번의 무죄와 두 번의 사형. 미국 역사상 두 번 다시 없을 대역전 재판이었다.
최종 선고 이후 헤니스는 군으로부터 사병 강등, 급여 및 수당 박탈, 그리고 불명예제대 처리된다.
헤니스와 그의 변호인 측은 두 번째 사형 선고가 이중위험금지에 위배된다며, 이후 10년간 항소와 사법 검토를 제기한다.
허나, 대법원에서까지 모든 제기가 기각된다.
비록 사형이 선고됐으나, 미국의 마지막 군사 사형은 1961년이었으므로 헤니스는 종신형을 살 가능성이 높다.
케이티의 남편이었던 게리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3번의 선고 과정에서 저는 충분히 시련을 겪었습니다. 이제 교수형이든 총살이든 됐어요. 그냥 그가 감옥에서 썩었으면 합니다."
한편 헤니스가 무죄로 풀려났을 당시 그의 이야기를 주제로 한 책이 20만 부 가까이 팔리며 히트를 쳤는데, 사건의 담당 형사였던 비틀 형사는 그 책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고 한다.
비틀 형사는 그 이유에 대해 이렇게 대답했다.
"저는 원래 소설은 읽지 않아요."
참조
<CNN, Triple murder suspect goes from guilty to innocent and back to guilty> Thom Patterson
<Death Row Stories: Double Jeopardy> CNN
<The New Yorker/Three Trials for Murder> Nicholas Schmid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