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상 가장 유명했던 마술사의 기적 같은 마술
역사상 가장 위대한 마술사는 누구였을까?
이 물음엔 다양한 대답이 존재한다.
허나, 가장 유명한 마술사는 누구였을까라는 물음엔 하나의 대답만이 나온다.
해리 후디니가 바로 그 대답의 주인공이다.
이 이야기는 역사상 가장 유명한 마술사 해리 후디니에 대한 이야기이다.
후디니는 1874년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태어났다. 4살 무렵엔 가족을 따라 미국으로 이주했는데, 다른 대다수 이민자처럼 형편이 넉넉지 않았다.
후디니는 어려서부터 운동 재능이 뛰어났다. 9살에 동네 서커스단에서 공중그네 공연을 할 정도였다.
허나 어린 후디니가 가장 관심을 기울였던 건, 바로 마술이었다.
어려서부터 마술사를 꿈꾼 후디니는 17살부터 여러 공연에 출연하며 커리어를 쌓아갔다. 이 무렵 그는 자신을 카드의 왕이라고 선전했다.
그렇게 카드 마술을 주로 선보였으나 대중의 평가는 냉랭했다. 설상가상 아버지마저 세상을 떠나면서 가정 형편은 더욱 나빠졌다.
하지만 나쁜 일만 있었던 건 아니었다.
후디니는 18살 무렵부턴 본격적인 공연 순회를 위해 홀로서기를 했다. 그러던 2년 후, 뉴욕 브루클린 남쪽 코니아일랜드에서 평생의 연인을 만난다.
그 여인은 브루클린 출신의 2살 연하였던 베스라는 여자였다. 베스는 당시 노래와 춤을 공연하던 동료 연기자였다.
둘은 서로에게 꼼짝 없이 반해버렸다. 그해 여름, 만난 지 3주 만에 결혼식을 올렸으니 말이다.
이후 베스는 후디니의 전담 조수가 된다. 무대 안팎으로 손발을 맞춘 시간이 무려 30년이나 된다. 말 그대로, 인생의 동반자였던 셈이다.
그러나 둘의 공연 생활 초기는 순탄치 않았다. 대중의 반응은 여전했고 흥행력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소극장 순회 7년 차 그리고 후디니의 나이 스물넷.
후디니는 지독한 절망감에 빠져 마술을 그만둘까 심각하게 고민하게 된다.
그러던 다음 해 1899년 봄이었다.
후디니는 한 남자와 만나게 된다. 훗날 후디니는 이 남자와의 만남이 자신의 인생을 뒤바꿨다고 술회한다.
남자의 이름은 마틴 벡이었다.
마틴 벡은 미국 엔터테인먼트 산업의 떠오르던 거물이었다. 벡은 미네소타 세인트폴을 여행하던 중 소규모 야외 공연장에서 후디니를 보게 된다.
처음 벡은 공연에 별 감흥을 느끼지 못했으나 수갑 탈출 마술을 보고는 깊은 인상을 받는다. 그리하여 다음날 다시 찾은 공연장에서 직접 준비한 수갑들을 전달하며 탈출 마술을 해보라고 요청한다.
여기서 후디니는 아주 손쉽게 탈출 마술에 성공한다.
며칠 후, 벡은 후디니에게 전보를 보내온다. 오마하 지역에 개장한 오르페움 극장에 시즌 내내 자리를 마련해 놓겠다는 내용이었다.
오르페움은 당시 유서 깊던 극장으로 미국 각 지역에 체인점을 확장하고 있었다.
에이전트 계약자가 된 벡은 후디니에게 탈출 마술에 집중하라는 조언을 한다. 그리고 후디니는 조언에 따라 다양한 탈출 마술 연출을 개발한다.
자신의 진짜 재능에 눈을 뜨는 순간이었다.
그렇게 후디니는 1년도 안 돼 깜짝 스타가 된다. 주급은 수십 배가 됐으며 전국에서 공연 요청이 쇄도했다. 1년 안에 업계 탑급이 될 거라던 벡의 호언장담이 실현되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1900년.
벡은 후디니를 유럽으로 진출시켜 본격적으로 이름을 날리고자 한다.
우여곡절 끝에 후디니는 런던의 유명 극장인 알함브라에서 공연을 갖는다.
헌데 공연이 시작되고 얼마 안 있어..
한 남자가 무대를 향해 소리친다.
남자는 서르녹이라는 베테랑 마술사로, 영국에서 아주 오래전부터 수갑 탈출 마술을 전문으로 선보이던 자였다. 서르녹은 자신이야말로 수갑 탈출 마술의 왕이라고 외쳐댔다.
이에 후디니는 서르녹을 무대로 초대하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 대결을 해봅시다. 당신이 이기면 500달러를 지불하죠."
후디니의 도발에 모두가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당시 500달러는 방 5개 달린 집을 4년간 빌릴 수 있는 돈이었기 때문이다.
호기롭게 제안을 받아들인 서르녹은 무대로 올라와 후디니와 마주했다. 이어 서르녹이 직접 체크한 수갑이 후디니의 손목에 채워졌다.
모두가 숨죽인 가운데 후디니가 평소처럼 수갑에서 빠져나왔고 관객들은 흥분해선 박수갈채를 보냈다.
서르녹은 웃음을 지어 보이며 가짜 수갑을 이용한 트릭이라고 주장했다. 허나 수갑을 건네받은 서르녹은 끝내 트릭을 발견할 수 없어 조용히 무대를 내려왔다.
서르녹과의 대결이 신문에 실리면서 영국에선 후디니의 인기가 날로 치솟았다.
이제 영국에서도 후디니를 수갑의 왕이라고 칭했다. 영국 전역에서 후디니의 공연마다 매진 사례가 이어졌다.
그러던 1904년, 후디니는 일생일대의 도전을 받는다.
도전자는 영국의 신문사 <데일리 미러>였다. <데일리 미러>는 자신들이 준비한 특수 제작된 수갑을 풀어보라며 도전했다.
이 수갑은 버밍엄의 대장장이가 무려 5년에 걸쳐 만든 것이었다. 대장장이는 이 수갑을 풀 수 있는 사람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자신했다.
실지로, 런던에서 제일가는 자물쇠 제조공이 이토록 훌륭하고 사악한 수갑은 처음 본다고 경탄했을 정도였다.
수갑을 푸는 마술에는 두 가지 방식이 존재한다.
하나는, 연출에 용이하도록 특수 제작된 수갑을 사용하는 것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수갑에 대한 메커니즘을 완벽히 파악하는 것이다.
후디니는 수갑들의 메커니즘을 완벽히 파악하고 있던 이 분야 마스터 레벨의 마술사였다. 허나 천하의 후디니조차도 <데일리 미러>의 도전을 거부할 수밖에 없었다. 미리 경험해 본 적이 없는 미지의 수갑인지라 메커니즘을 파악하는 게 불가능했기 때문.
누가 봐도 마술사에게 절대적으로 불리한 조건이었다. 그럼에도 <데일리 미러>의 거듭된 요청에, 결국 후디니는 도전을 받아들이기로 한다.
후디니는 자신의 30번째 생일을 일주일 앞두고서 일생일대의 대결에 나선다.
성공하면 영국에서 최고의 마술사라는 영광을, 실패하면 모든 걸 잃게 되는 가혹한 승부였다.
그렇게 후디니는 4천 명의 관객과 100명의 기자 앞에서 대결을 펼쳤다. 당시 금속가공 산업의 선두를 달리던 버밍엄에서 제작된 특수 수갑과의 대결을 말이다.
헌데..
1시간의 시도 끝에도 수갑은 풀릴 생각이 없었다.
후디니의 팬들은 물론이고 심지어 베스마저 절망감에 빠질 정도였다. 온몸이 땀으로 뒤덮인 후디니는 그러나 처음과 같은 표정으로 계속해서 탈출을 시도했다.
그렇게 대결 1시간 10분 후, 후디니가 풀린 수갑을 의기양양하게 들어 올렸고 관객은 모자를 위로 던지며 귀청이 터질 듯 환호성을 보냈다.
훗날 후디니는 <데일리 미러>와의 이 대결을 생애 가장 어려운 테스트 중 하나였다고 평가한다.
한편, 해당 수갑 탈출 마술은 마술 역사에서 최대 수수께끼로 남게 된다. 현실적으로 마술사에게 너무도 불리한 조건인 동시에 불가능에 가까운 미션이었기 때문이다.
때문에 <데일리 미러>와 후디니 간에 또는 수갑 제작자와 후디니 간에 비밀스러운 컨택이 있었다는 논쟁이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허나 모든 것이 연출이었다면, 어째서 1시간이나 무의미하고 특색 없이 無 대본 연출의 무대 진행으로 구성했느냐는 반론이 존재한다.
그렇게 이 수갑 탈출 마술의 해법은 여전히 수수께끼 상태이다.
여담으로, 이후 이 전설의 수갑은 또 하나의 20세기를 대표하는 마술사 데이비드 카퍼필드가 수집하게 된다.
후디니의 대표적인 전설은 하나가 더 있다.
<데일리 미러>와의 대결 1년 전, 유럽 순회를 통해 널리 이름을 알리던 때였다.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공연을 하던 후디니는, 어느 날 야외에서 공연 연습을 하다가 경찰에게 오해를 사는 일이 발생한다. 그리고 오해가 풀린 자리에서, 후디니는 경찰서장에게 당신네 감옥에서 탈출을 해봐도 되냐는 다분히 도전적인 요청을 한다.
재미있게도 경찰서장은 이러한 요청을 승낙한다.
다만 감옥의 자물쇠는 후디니에게 너무도 손쉬운 상대라 생각해, 바퀴 달린 금고라 불리우던 특수 제작 마차에서 탈출해 보라고 조건을 건다. 해당 마차는 당시 시베리아 감옥으로 죄수를 이송하던 수송 마차였다.
후디니는 이 조건에 동의한다.
그리고 해당 대결 과정 역시 대단히 험난했다.
경찰은 후디니를 발가벗긴 채 머리부터 발끝까지 세 차례나 수색을 진행했다. 그 뒤엔 알몸 상태로 손과 발이 족쇄 채워진 채 마차에 감금됐다. 마차엔 오직 작은 창살만이 존재했다.
그래도 후디니의 요청 하나가 받아들여졌다. 탈출하는 모습이 직접적으로 노출되지 않도록 마차를 담벼락 안쪽에 위치해달라는 요청이었다. 대신 경찰은 외부인이 후디니에게 접근하지 못하도록 마차 주위로 보초를 섰다.
경찰서장은 후디니에게, 마차의 자물쇠 열쇠는 시베리아 근처에 따로 보관하고 있으므로 탈출에 실패하면 21일 동안 마차 여행을 떠나야 한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결과는..
이번에도 후디니의 승리였다.
대결 시작으로부터 45분 후, 후디니가 비틀거리며 마차 바깥으로 걸어 나왔다. 추운 날씨임에도 불구하고 알몸의 후디니는 땀으로 흠뻑 젖어있었다.
놀란 경찰이 마차를 확인했는데, 자물쇠는 그대로였고 문 역시 닫혀진 상태였다. 마치 후디니가 연기로 변해 창살 사이로 빠져나온 것만 같았다.
그로부터 1년 후..
후디니는 신문 기사를 통해 탈출 방법을 공개한다.
작은 창살 바깥으로 80cm 정도 아래에 위치한 자물쇠를 사투 끝에 열 수 있었다는 것이었다. 다만, 어떤 도구를 이용했고 또 그러한 도구는 어떻게 반입할 수 있었는지는 밝히지 않았다.
그리하여, 이 대결 역시 <데일리 미러>와의 대결과 마찬가지로 마술 역사의 풀리지 않은 수수께끼로 남게 됐다.
1905년, 유럽에서 신드롬을 일으킨 후디니가 미국으로 금의환향한다.
그리고 삶에 안주하지 않고서 여러 탈출 마술들을 발굴하고 발전시키고 새로 개발하며 현대 탈출 마술의 모태를 세운다.
곧이어 후디니는 세계에서 가장 비싼 몸값과 유명세를 자랑하는 쇼비즈니스맨이 된다.
후디니는 실수 한 번이면 죽음에 이르게 되는 위험천만하고 기상천외한 탈출 마술들에 집중했고, 그가 야외에서 이러한 마술을 할 때면 수천수만의 구경꾼들이 몰려들었다.
그렇게 귀국 후 8년간 인생의 황금기를 맛보던 후디니에게 어느 날 갑자기 인생 최대의 시련이 찾아온다.
1913년 7월경, 그의 모친이 뇌졸으로 세상을 떠나고 만 것이다.
덴마크에서 공연을 마치고 전보를 읽은 후디니는 그 자리에서 졸도해 버린다. 평소 모친을 숭배하다시피 했던 후디니였기에, 그의 지인들은 그가 예전과는 결코 같은 사람이 될 수 없다고 할 정도였다.
후디니는 몇 달 간 모친의 묘지에서 시간을 보내고서야 겨우 일상으로 돌아와 마술사로서의 삶을 이어갈 수 있었다.
1차 세계 대전 종전 직후인 1920년.
영국을 여행 중이던 후디니에게 새로운 친구가 생긴다.
그 친구란, 셜록 홈즈의 아버지이자 세계적인 작가인 코난 도일이었다.
후디니는 셜록 홈즈 이야기를 좋아했고, 도일은 후디니의 신비로운 마술을 좋아했으므로 둘은 빠르게 우정을 쌓아갔다. 특히, 둘 모두 강신술이라는 공통된 관심사가 있었다.
영매를 통해 영혼과 의사소통을 한다는 강신술은 이 무렵 서구권에선 새로운 종교로 떠오를 정도였다. 전쟁으로 인해 소중한 사람을 잃은 이들이 넘쳐났기 때문이다.
다만, 둘은 서로 다른 유형의 관심을 지니고 있었다.
도일이 초자연현상에 푹 빠져 강신술을 신봉한다면, 후디니는 그러한 것들을 회의적인 방면으로 분석하는 입장이었다.
후디니는 어려서부터 영매들의 기술을 이미 파악하고 있었다. 당시 영매들은 마술에서 사용되던 기술들을 사용했다.
그래서 후디니는 마술사가 된 이후 공부의 일환으로 강신술을 연구하고 분석했다. 무명 시절엔 베스와 함께 강신술 컨셉의 공연을 한 적도 있었다.
세월이 흘러도 영매들은 계속해서 예전의 기술들을 사용했고, 후디니는 진짜 강신술이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여기게 된다.
반면, 도일은 초자연현상을 맹신했다.
특히나 아들을 전쟁으로 잃으면서 강신술을 신앙시 하게 된다. 심지어 강신술에 대한 강의를 하러다니면서 강신술 전파의 선봉장이 된다.
문제는 지나친 맹신이었다.
후디니의 탈출 마술이 마술로 위장한 초자연 능력이라고 여겼으며, 후디니가 장난스레 보여준 엄지손가락을 빼는 마술을 진짜로 손가락을 뗐다가 붙인 거라고 생각할 정도였다.
1922년 여름, 이런 후디니와 도일 사이에 웃지 못할 일이 벌어진다.
뉴저지 애틀랜틱시티 해변으로 휴가를 온 도일 부부는 주말을 같이 보내자며 후디니 부부를 초대한다.
여기서 도일 부부는 휴양지에 도착한 후디니 부부에게 난감한 제안을 한다.
도일의 아내가 영매 능력을 갖게 됐는데, 후디니의 모친이 후디니와 대화를 원한다며 함께 강신술을 하자는 것이었다.
베스는 내키지 않아 하며 후디니에게 제안을 거절하라고 한다. 허나 도일 부부의 성의를 무시할 수 없었던 후디니는 결국 제안에 응한다.
그렇게, 후디니의 모친을 불러들이는 강신술이 시작된다.
후디니가 도일 부부의 제안을 거절하지 않았던 데에는 모친에 대한 그리움이 혹시나 하는 마음을 일으켜서이기도 하다.
특히나, 강신술이 있기 전전날은 모친의 생일이었다.
강신술이 시작되고, 도일의 아내는 후디니 모친의 영혼과 접촉하며 종이에 말을 받아 적는다.
그리고 동시에 후디니는 착잡한 마음을 숨기려 애써야 했다.
유대인은 십자가 모양을 사용하지 않으며 대신 다윗의 별 모양을 사용하기 때문이었다. 무엇보다도, 그의 모친은 평생 영어를 쓰지도 듣지도 말하지도 못했었다.
후디니는 도일 부부에게 망신을 주거나 무례를 범하지 않고자 마음을 추스린 채 함께했다. 그렇게 강신술이 끝나고서도 부부에게 감사를 표하며 격식을 지켰다.
한편 종이에 적힌 내용은, 저승에서 행복하며 아들을 사랑하고 연락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준 도일 부부에게 감사하다는 내용이었다. 또, 세상 사람들이 강신술이 위대한 진리임을 알아야 한다고도 했다.
도일과의 우정을 위해 깜짝 강신술 사건을 조용히 넘긴 후디니. 하지만 후디니가 더는 넘어갈 수 없는 일이 벌어진다.
도일이 그날의 일을 언론에 밝히면서, 감명받은 후디니가 강신술을 믿게 됐다는 주장을 한 것이다. 더는 참을 수 없던 후디니는 공개적으로 반박하고 나서며 자신은 강신술에 대해 지극히 회의적이라고 밝힌다.
한편 후디니는 이 사건을 기점으로 전에 없던 행보를 시작한다.
전쟁으로 슬픔에 빠진 사람들에게 사기행각을 벌이고 그러한 영매들에게 지식인인 도일조차 꼼짝없이 넘어가는 것에 그 어느 때보다도 심각성을 통감해서일까?
후디니는 강신술과의 전면전을 결심한다.
1923년 4월경부터 후디니는 대중을 대상으로 강신술의 트릭을 고발하는 강연을 시작한다.
또한 도일이 지지하는 영매를 공개적으로 비난하는가 하면, 1924년 5월경엔 강신술의 허구성을 파헤치는 책을 내면서 후디니와 도일 사이의 우정은 끝이 나버린다.
이후에도 후디니는 영매들이 사용하는 속임수를 소개하는 팜플렛을 자비로 출판하기도 한다.
특히 1924년 가을 미국 전역을 2달 동안 돌아다니며 강신술을 고발하는 강연을 여는 것과 더불어, 인기 강령회들마다 침투해 영매의 속임수를 폭로하고 그들을 공격한다.
어찌나 열심이었는지, 후디니를 고발하는 영매들의 소송제기 액수 합산이 200만 달러에 달할 정도였다.
허나 후디니는 죽을 때까지 이러한 강신술에 대한 공격을 멈추지 않는다.
당시 그는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 중 하나였기에, 분명 대중이 강신술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되는 계기가 됐을 것이다.
후디니의 지인은 후디니가 이렇듯 강신술을 집요하게 공격하는 목적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전한다.
"저는 대중 사이에서 강신술이 성장하는 걸 막아야 한다는, 그런 깊은 의무감을 지니고 있습니다."
여담으로..
후디니는 이 무렵 1만 달러 챌린지를 열었다.
1만 달러 챌린지란, 누구든지 후디니의 앞에서 진짜 강신술을 보인다면 상금으로 1만 달러를 지불한다는 것이었다.
물론, 이 상금을 타간 사람은 없었다.
그리고 훗날..
초능력 사냥꾼이라 불리우는 마술사 제임스 랜디가, 누구든지 초자연 능력을 보인다면 상금으로 100만 달러를 지불한다는 백만 달러 챌린지를 수십 년간 진행한다.
물론 여기에서도 상금을 타간 사람은 없었다.
어느 순간 누구도 모르는 사이 약속도 없이 끝은 그렇게 시작됐다.
1926년 10월 22일, 캐나다 몬트리올에서 대학교 강의를 하던 때였다.
이날 후디니는 극장 탈의실로 대학생 그룹을 초대한다.
여기서 한 학생이 복부를 가격당해도 아프지 않는 게 정말이냐고 물어온다.
후디니는 스턴트 마술의 대가였기에 각종 차력이 겸비된 마술 연출을 섭력하고 있었다. 그중에는 복부에 펀치를 맞고도 멀쩡한 마술이 있었다.
후디니는 그 학생에게 그렇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대답과 동시에 그 학생이 후디니의 복부를 향해 몇 차례 주먹을 날렸다.
문제는, 이 마술의 경우 당연히 펀치력을 흡수하기 위한 최소한의 대비가 필요했다는 것이다. 그 대비란 자세와 위치였다.
허나 후디니는 주먹이 날아오는걸 모르는 상황이었고, 불행히도 10일 전 있었던 공연에서 발목을 다치며 소파에 어정쩡하게 기댄 상태였다.
때문에 무방비인 상태에서 가격당하며 충격을 전혀 흡수하지 못하고서 온전히 받아내야 했다.
그날 밤부터 후디니는 위경련과 복통 그리고 고열에 시달린다.
다음날, 간신히 야간 공연을 소화하고서 스케줄을 위해 디트로이트로 향하는 열차에 오른다. 의사들은 잇따라 맹장염을 의심하며 즉시 병원에 갈 것을 강건했다.
하지만 후디니는 고집을 부리며 끝끝내 스케줄대로 공연을 수행한다.
공연이 끝난 뒤에도 병원에 가지 않겠다고 버티던 후디니는, 마침내 사건 3일 후인 10월 25일에야 병원으로 이송돼 수술을 받는다.
그러나..
이미 후디니의 맹장은 터져 있었고 박테리아와 고름이 복강으로 침투하며 복막염인 상태였다.
이 시대는 아직 항생제가 발견되기 이전이었으므로, 복막염은 곧 죽음을 의미했다.
결국..
후디니는 1926년 할로윈날, 5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고 만다.
공식적인 사인은 맹장 파열로 인한 복막염이었다.
오랫동안 그의 직접적인 사망 원인으로 대학생으로부터 가격당한 펀치 탓이라는 이론이 채택됐었다. (관련한 음모론도 생겨났었다)
허나 최근엔 맹장염은 본디 세균 감염에 의해 발생하는 것이며 외부 충격과 맹장염은 인과 관계가 없는 데다, 외상성 맹장염의 케이스는 전무하다는 사실 때문에 이 이론은 거부당하고 있다.
결론적으로, 펀치 사건 이전부터 몸이 좋지 않았던 후디니에게 이미 맹장염이 진행 중이었다는 이론이 지지를 받고 있다.
후디니가 세상을 떠나자 영매들 중 일부는 자신들이 후디니의 죽음을 미리 예언했다고 주장하거나, 후디니의 복부를 가격한 대학생에게 그 순간 분노한 영혼이 씌인 것이라는 주장을 하기도 한다.
이때만 해도 영매들은, 후디니가 사라지면서 강신술에 대한 공격 또한 없어지는 것으로 여기고 있었다.
후디니를 떠나보낸 베스는 문자 그대로 세상에 홀로 남겨졌다.
베스는 월경을 해본 적이 없는 원발성 무월경이라는 질환을 가지고 있어 슬하에 자식이 없었다.
그녀는 생전 후디니의 유지를 이어 후디니의 영혼이 접촉해 오는 것을 증명해 내는 영매에게 상금으로 1만 달러를 지급하겠다고 선언한다.
또한, 후디니의 기일인 할로윈날마다 후디니의 영혼을 기다리는 강신회겸 추도식을 열었다.
평소 후디니와 마찬가지로 강신술에 대해 회의적인 그녀였으나, 영혼이 진짜로 존재해 후디니가 저승을 탈출하고선 접촉해오리란 희망을 품고 있던 것이다.
허나 당연하게도 후디니의 영혼을 증명해 내는 것에 성공한 영매는 없었다.
사실 후디니와 베스는 영혼이란 게 존재한다면 죽은 후에 서로에게 찾아가 진짜라는 증거로 미리 정한 비밀 단어를 말하기로 했었다.
이 비밀 단어란 독심술 마술이나 투시 마술을 할 때 부부가 사용하던 것으로, 일종의 모르스 부호와 같은 것이었다. 공연에서 이를 이용해 조수인 베스가 일상적인 대화문 속에 비밀 단어를 끼워 넣어 관객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후디니에게 정답을 알려주던 마술의 기술이었던 것이다.
때문에 부부간의 비밀을 알 리 없던 영매들은 강신술과 영매라는 것이 사기임을 베스 앞에서 친히 고해성사하는 셈이었다.
그렇다면, 후디니와 베스가 서로 간에 정해놨던 비밀 단어는 어떤 단어였을까?
둘은 비밀 단어로 다음의 단어 조합을 사용했다.
Rosabelle / answer / tell / pray-answer / look / tell / answer-answer / tell
로자벨 뒤의 단어 조합을, 둘만의 규칙에 따라 알파벳으로 치환하면, 빌리브라는 단어가 된다.
pray(1=a)
answer(2=b)
say(3=c)
now(4=d)
tell(5=e)
please(6=f)
speak(7=g)
quickly(8=h)
look(9=i)
be quick(10, 0=j)
answer(b) / tell(e) / pray(1)-answer(2) (12=l) / look(i) / tell(e) / answer(2)-answer(2) (22=v) / tell(5=e)
즉, 부부가 설정한 비밀 단어는 '로자벨 빌리브(Rosabelle believe)'였다.
그럼, 로자벨 빌리브는 부부에게 어떤 의미였기에 선택됐던 것일까?
빌리브는 단어 그대로 '믿다'라는 의미이다.
그리고 '로자벨'은 베스가 후디니와의 첫 공연에서 불렀던 노래의 제목이다.
그렇다.
두 사람의 추억이 후디니가 죽은 뒤에도 아내인 베스를 지킨 셈이었다.
세월이 흘러..
1936년 할로윈.
이날 밤 8시, 할리우드의 유명 호텔 옥상에 후디니 사망 10주기를 맞아 300명의 내빈이 모인다.
이날은 후디니의 영혼을 기다리는 마지막 강신회겸 추도식이었기에, 베스를 비롯한 내빈 모두 특별한 기대감을 품고 있었다. 후디니는 언제나 극적인 순간 탈출에 성공했었기 때문이다.
허나..
끝내 후디니의 영혼은 찾아오지 않았고, 베스는 다음과 같은 말로 끝을 알렸다.
"후디니는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제 마지막 희망이 사라졌습니다. 이제 그이가 돌아올 수 있다고 믿지 않습니다. 어떤 형태로든 영혼과의 소통은 불가능하다고 여기게 됐습니다. 저는 유령이나 영혼이 존재한다고 믿지 않습니다. 10년간의 기다림도 이제 끝이군요. 굿나잇, 해리."
그렇게 후디니를 다시 한번 떠나보낸 베스는, 7년 후인 1943년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난다. 그녀의 나이 67세였으며, 후디니와 사별 이후 평생 독신을 유지한 채였다.
한편..
후디니 사망 10주기가 끝나던 순간이었다.
베스와 내빈들이 옥상을 빠져나가려 하자 맑은 하늘에서 갑작스레 폭우가 쏟아졌다. 국지적인 폭우였으며, 폭우는 옥상의 사람들을 흠뻑 적시고서야 그쳤다.
남부 캘리포니아에서 이같은 국지적인 소나기성 폭우는 지난 수십년간 없던 일이었다.
로자벨 빌리브
참조
<American Experience/Houdini: The Man Behind the Myth> PBS
<PBS America/HOUDINI> PBS
<The Secret Life of Houdini: The Making of America's First Superhero By William Kalush> Larry Sloman
<Wild About Harry>
<Yale University Press/Did Houdini Really Die after Being Sucker Punched?> Adam Begle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