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몰랐을 역사 속 일화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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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morrow will be too late
고등학교 졸업 직후 근처 기계상가에서 일하던 청년이 있었다.
청년은 가수가 꿈이었다. 다음 해 전기 회사의 트럭 운전사로 취직됐으나 여전히 청년의 꿈은 가수였다. 일하는 와중에도 틈틈이 가사외 시를 쓰고 노래를 구상했다.
허나, 청년은 그즈음 이미 몇 차례 오디션에서 낙방한 상태였다.
그해 초여름, 청년은 한 프로밴드를 찾아가 오디션을 본다. 밴드의 멤버 하나가 청년의 친구였는데, 마침 보컬을 구하고 있으니 한번 오디션을 봐보라고 제안했던 것이다.
청년은 오디션에 참가해 떨리는 마음으로 어쿠스틱 기타를 연주하며 2곡을 불렀다.
밴드의 리더는 청년을 오디션에서 떨어뜨렸다.
다음과 같은 말과 함께.
"트럭 운전을 한다고요? 가수가 될 일 없을 테니 계속 트럭 모세요."
오디션에 떨어진 청년은 남자의 말대로 다시금 트럭을 몰았다.
가수의 꿈은 남겨둔 채로.
청년은 언제나처럼 자신의 꿈을 지켜나갔다.
그렇게 이 오디션으로부터 1년 반..
트럭 일을 할 무렵의 볼륨을 넣은 슬릭백 헤어스타일 그리고 그 무렵 만들었던 노래들로 데뷔와 동시에 대중을 사로잡은 청년.
이 청년은 훗날 '로큰롤의 제왕'이라 불리우며 세계를 열광시킨다.
Hero Begins
브라질 축구 대표팀, 하면 공통적으로 떠오르는 건 바로 노란색 유니폼이다.
헌데, 이러한 전통적인 유니폼 색 이면엔 비극이 자리하고 있다.
브라질에서 열린 1950년 제4회 피파 월드컵. 이 월드컵에서 첫 우승을 목표로 하던 브라질은 파죽지세의 기세로 결승리그에 선착한다(해당 월드컵은 토너먼트 방식이 아닌 전 경기 리그 방식으로 치러짐).
그리하여 스웨덴 및 스페인과 결승리그를 치른 브라질은 1위를 기록하며, 2위 우루과이와의 마지막 경기에서 우승팀의 향방이 가려지게 됐다.
한편 경기를 앞두고서 브라질 축구 연맹은 자국의 우승 메달, 우승 곡, 우승 연설 등을 미리 준비하기에 이른다. 이는 당시 전력이 신통치 않던 우루과이와 달리 브라질의 기세가 그야말로 공포스러울 정도였기 때문이다.
우루과이가 스페인과 스웨덴전에서 각각 2:2와 3:2로 분전한 반면, 브라질은 스웨덴전에서 7:1 그리고 스페인전에서도 6:1로 대승을 거뒀던 것.
그렇게 첫 우승을 자신하며 20만 명에 가까운 관중이 들어선 마라카낭 스타디움서 벌어진 월드컵 결승전.
비기기만 해도 우승이 확정되던 브라질은 후반 2분 선제골을 터뜨리며 우승에 한 발짝 다가선다.
그러나 후반 21분과 34분에 잇달아 우루과이가 골을 넣으면서, 브라질은 충격적인 패배와 함께 안방에서 우승 트로피를 우루과이에 넘겨주고 만다.
사건은 시합 종료와 함께 터졌다.
믿을 수 없는 패배에 스타디움 내 관중 2명이 그 자리에서 목숨을 끊었으며, 다른 2명은 쇼크사를 일으켰고 수십 명이 실신해 버린 것.
이 밖에 경기가 끝난 뒤에도 밤새도록 10만여 명의 관중이 그대로 스타디움 내에서 통곡을 하는가 하면, 브라질 전역에서 폭동을 일어나고 수십 명이 권총 자살을 하는 등 그야말로 나라가 혼란에 빠지고 만다.
이것이 브라질 역사에 비극으로 새겨진 '마라카낭의 비극'이다.
힌편 이러한 비극 이후 브라질 축구 연맹은 그때까지의 브라질 축구팀 유니폼이었던 상하의 흰색을 상의 노란색으로 교체함과 동시에 대표팀 유니폼에서 흰색을 금기시한다.
그리고..
2006년과 2010년 월드컵에서 유니폼 하의에 흰색을 사용했던 브라질은 모두 8강전에서 석패하면서 그렇게 영원한 우승 후보 브라질의 시대가 사실상 막이 내려지게 된다.
이에 굴하지 않고서 2014년 자국 월드컵에서도 하의에 흰색을 사용한 브라질은, 준결승전에서 독일에 1:7이라는 충격패를 당하면서 '미네이랑의 비극'을 자신들의 역사에 새기고 만다.
한편..
마라카낭의 비극이 벌어진 1950년 브라질 월드컵 결승전.
한 꼬마아이가 패배로 인해 비통해하던 자신의 아버지 다음과 같은 말로 위로한다.
"아빠, 슬퍼하지 마! 언젠가 내가 브라질을 월드컵에서 우승시켜 줄게!"
그로부터 8년 후.
17살의 나이로 1958년 스웨덴 월드컵에 선수로 참가한 이 아이는, 결승전 결승골을 비롯해 총 6골을 득점하며 브라질의 첫 월드컵 우승을 견인한다.
부자가 되고 싶니
16세기 무렵 이탈리아의 대표적인 천재였던 지롤라모 카르다노.
카르다노는 허수의 개념을 최초로 도입한 수학자이자 장티푸스를 최초로 언급한 의사였으며, 번호식 자물쇠와 조인트 등을 발명한 발명가이기도 하다.
이렇듯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더불어 동시대 이탈리아의 천재 중 하나였던 카르다노.
그리고 카르다노는..
그야말로 엄청난 도박광이었다.
그는 생애 전반에 걸쳐 도박중독 상태였고, 상금이 걸린 수학 경시대회에서의 입상과 내과의로 벌어들이는 돈들은 곧잘 도박에 사용되곤 했다.
이렇듯 도박, 그중에서도 체스와 주사위 도박에 미쳐있었던 그는 급기야 말년엔 주사위 도박에 대한 책을 저술하기까지 한다.
해당 책에서 그가 다룬 것이, 바로 최초의 체계적인 확률론이다.
이 카르다노가 생전 도박에서 가장 높은 승률을 기록하는 법에 대해 공개했으니..
바로 다음과 같다.
"도박을 하지 않는 것이 가장 높은 승률을 기록하는 방법임."
라스베가스에선 상상도 할 수 없는 일
대학을 졸업하고 베트남전 해병대에 지원했던 청년이 있다.
청년은 전장에서 숱한 총포 속에서도 다친 곳 없이 작전을 수행한 끝에 훈장들을 수여받으며 명예제대를 했다.
부유한 집안의 자식이었던 청년은 제대 직후 사업에 뛰어든다.
당시 미국에선 항공기 자투리 공간에 소형 화물을 싣는 수준의 항공운송이 막 시작되던 때였는데, 청년은 여기에 착안해 미국 인구 분포상의 중심지에다 운송물 집결지를 만들어 제트기로 배송하는 항공운송 서비스를 기획한다.
그렇게 27살 무렵, 어린 시절 상속받았던 유산과 각지에서 대출받은 돈으로 회사를 설립한다.
청년의 목표는 익일배송 특급운송 회사였다.
허나 하루 운송량은 고작 100여 개에 불과했고 설상가상 석윳값 폭등까지 벌어지면서..
설립 2년 만에 3,000만 달러에 가까운 손실이 발생했으며, 1975년엔 더는 출자를 내주는 곳도 없을 지경에 이르렀다.
이미 가족들 명의의 대출금도 사라지고 통장엔 5,000달러 만이 남은 상황. 그리고 당장 지불해야할 제트기 운용비는 24,000달러.
청년은..
통장에서 전액 인출한 뒤 비행기에 몸을 싣는다.
행선지는 라스베이거스였다.
그렇게 라스베이거스 카지노로 향한 청년은 블랙잭 테이블에 앉아 일생일대의 배팅에 나섰다.
이후 청년은 어떻게 됐을까?
27,000달러를 딴 청년은 회사로 날아가 제트기 운용비를 처리했고, 이후 전국을 돌며 출자를 받아 회사의 기반을 다지기에 이른다.
청년의 이름은 프레데릭 스미스.
세계 최대 규모 운송회사 페덱스의 창립자이다.
이론과 증명
오스트리아 태생의 스위스(1946년 미국 귀화) 이론물리학자로 1945년에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한 볼프강 파울리.
파울리는 상대성이론 전개, 양자론 체계화, 원자 구조론에 공헌했으며 특히 전자의 스핀을 해명하는 '파울리의 배타원리'를 도입한 현대물리학의 개척자 중 하나이다.
헌데..
이 파울리가 물리학계에 널리 퍼뜨린 이론은 정작 따로 있다.
그건 바로, '파울리 효과'이다.
파울리는 실험에 서툴렀다.
말인즉슨, 평소 실험 장비 및 기자재 등을 지나치게 많이 고장 냈다는 뜻이다. 어떠한 기계 및 전자 장치를 막론하고 그가 손을 대 멀쩡한 경우가 잘 없었다. 심지어 주변을 거닐었을 뿐인데도 망가지는 경우가 있었다.
1943년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인 오토 슈테른은 파울리의 친우였음에도 그를 자신의 실험실에 출입금지 시킨다.
또, 1922년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인 닐스 보어는 연구소에서 실험을 실패할 때면 '파울리!'라며 성을 냈다.
이렇듯 물리학자들은 '파울리 효과'를 경계하곤 했다.
놀라운 건, '파울리 효과'가 비단 기계 및 전자 장치에만 영향을 끼친 게 아니었다는 것이다.
독일 물리학의 기여자 중 하나로 꼽히는 월터 하이틀러가 학자들이 참석한 자리에서 한창 강의를 진행하던 때였다. 강의 내용에 불만을 품던 파울리가 강의가 끝남과 동시에 연단으로 달려 나갔다.
그러고는 하이틀러의 맞은편 의자에 앉아 거칠게 항의하던 순간, 갑작스레 하이틀러의 의자 등받이가 떨어져 나갔다.
이에 강의에 참가 중이던 천문학자 조지 가모(우주배경복사 존재를 예견했던)가 외쳤다.
"으하하! 파울리 효과!"
증명은 이게 다가 아니다.
함부르크 천문대를 입장한 순간 값비싼 굴절 망원경의 뚜껑 부분이 파열됐으며, 프린스턴에선 큰맘 먹고 구입한 신상 사이클로트론이 불에 타 잿더미가 돼버렸다.
취리히에서 있었던 융 연구소 리셉션에서의 파괴는 애교 수준이었다. 당시 파울리가 등장하자 뜬금없이 커다란 꽃병이 떨어지면서 주변 귀빈들의 의상에 물 자국을 남기는 데에 그쳤다.
독일 니더작센주의 괴팅겐 대학 물리학 실험실 일화도 빠뜨릴 수 없겠다.
고가의 측정 기기가 별다른 이유 없이 작동을 멈추자, 책임자였던 제임스 프랑크(1925년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중얼거린다.
"이상하네.. 볼프강은 지금 출장 때문에 취리히에 있는데.."
한편, 작동 중지가 있던 순간 파울리가 기차를 갈아타기 위해 괴팅겐역에 정차 중이었다는 게 이후 밝혀진다.
이와 같이 파울리 효과가 주변 동료들과 학자들 사이에 널리 퍼지면서, 물리학자 루돌프 파이얼스(맨해튼 프로젝트 참가자)가 주최한 리셉션에서 주최 측이 여흥을 위해 인위적으로 파울리 효과를 연출하고자 한다.
그 연출이란, 파울리가 입장하는 순간 샹들리에가 떨어지도록 장치를 해놓는 것.
허나 이 리셉션에서 샹들리에는 떨어지지 않았다.
파울리가 입장하자 그때까지 멀쩡했던 장치가 고장 났기 때문.
이러한 파울리 효과는 워낙 강력했던지라, 리처드 파인만(1965년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이 젊은 시절 프린스턴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준비하던 당시 진행 중이던 사이클로트론 실험에다 호기심 삼아 파울리 효과라 이름 붙이자 얼마 후 폭발을 일으킬 정도였다.
한편..
파울리는 두 번째 아내와의 신혼여행에서 운전하던 차량에 갑작스러운 고장이 발생했고, 수리기사는 끝내 원인을 찾지 못했다고 전해진다.
We'll always be here
20세기 미국의 대표적인 아동문학 작가 앤 패리시.
1929년 여름, 그녀가 기업가인 남편을 따라 파리에 머물던 때였다.
모처럼의 휴일을 맞아 부부는 센느강을 따라 산책하던 중, 길거리로 자리한 수백의 가판대들을 채운 오래된 중고 서적들과 마주하게 된다.
여기서 패리시의 눈에 잭 프스트가 나오는 동화책(Jack Frost and Other Stories)이 들어온다.
이 책은 잭 프로스트라는 영국의 유명 민간 전승 속 서리 요정이 나오는, 페리시가 어린아이 시절 아주 재미있게 봤던 책이었다.
한순간 동심에 휩싸이게 된 패리시는 주저 없이 1프랑을 지불하고서 해당 책을 구매한다.
한편, 책을 펼쳐보며 구경하던 패리시의 남편은 첫 장인 면지에 적힌 글을 보고는 의아한 표정을 짓는다.
"왜?"
"아니.. 여기에 이름이랑 주소가 적혀있는데.. 책 주인이었던 애가 당신이랑 이름이 똑같네. 성도 같고."
남편에게서 책을 건네받은 그녀.
이윽고 만면에 환한 미소를 담은 채로 말한다.
"'앤 패리시. 콜로라도 스프링스 노스 베버 209.' 여기 내가 어릴 적 살던 집 주소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