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고의 공포영화 <엑소시스트>는 실화였다!

(The Exorcist)

1973년 개봉한 영화 <엑소시스트>는 영화사에 길이 남을 입지적인 공포영화이다. 누구도 반론할 수 없을 만큼.

70년대 당시에만 흥행수익 2억 달러를 기록했으며, 아카데미 최우수 작품상 후보에 오른 최초의 공포영화이자 10개 부문 후보라는 전무후무한 기록을 낳았고, 상영 당시 실신하거나 구토를 하는 관객으로 인해 구급차가 대기하는(바이럴성 홍보 문구가 아닌 진짜로) 영화였다.

문학적 측면에서 장르적 특성상 한계에 봉착할 수밖에 없는 공포영화이면서도, 미국 국립영화등기부가 의회도서관에 문학적&역사적&미학적으로 중요하다며 보존하도록 선정한 영화이기도 하다.

이렇듯 영화사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공포영화로 꼽히는 <엑소시스트>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영화 출연으로 인해 워싱턴 D.C. 조지타운의 호화로운 집을 임대 중이던 여배우 크리스 맥닐. 남편과 별거 중인 그녀는 12살 난 딸 리건과 함께 살고 있다.

어느 날 딸 리건에게 악령이 씌이면서 폭력적으로 변하고 각종 폴터가이스트 현상이 발생하는가 하면 반종교적인 행위들을 일삼는다.

이에 크리스 맥닐은 근처의 젊은 신부 캐러스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상황을 확인한 캐러스 신부는 예수회의 고위 신부에게 구마 의식을 청원하면서 베테랑인 메린 신부가 찾아온다.

그렇게, 메린 신부와 캐러스 신부는 악령에 씌인 리건을 대상으로 엑소시즘을 거행한다."

(The Exorcist)

이처럼 두 신부와 악령 간의 엑소시즘 과정을 연출한 해당 영화는, 반세기 이전의 영화이면서도 지금 기준으로 더없는 작품성과 세련미를 자랑한다.

헌데..

이 영화 <엑소시스트>가..

실은 실지로 있었던 일을 스크린으로 옮긴 것이라면?

(The Exrcist)

영화 <엑소시스트는>, 1971년 동명의 소설인 <The Exorcist>를 기반으로 한다.

해당 소설은 미국의 작가 윌리엄 블래티가 집필한 것으로, 출간과 동시에 큰 화제를 모으며 17주 동안 베스트셀러 1위를 기록한 작품이다.

그리고 헐리우드로부터 영화화 제안을 받은 블래티가 각본을 맡고서 각색한 것이 바로 영화판 <엑소시스트>인 것이다.

한편..

블래티는 <엑소시스트>의 '원안'을 대학생 시절에 접했다.

1949년 여름, 그가 워싱턴 조지타운 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하던 21세 무렵 <워싱턴 포스트>에서 흥미로운 기사를 접하게 된다.

기사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The Washington Post)

"사제가 악마의 손아귀에 붙들려있던 소년을 구출하다

마운트 레이니어(주: 워싱턴주에 인접한 활화산 레이니어산 아니라 메릴랜드주 워싱턴 D.C. 인근의 도시 지명임) 에 사는 14세 소년이 악마에게 사로잡힌 상태에서 가톨릭 사제에 의해 구출됐다고 가톨릭 소식통이 전해왔다. 이는 역사상 가장 놀라운 사건 중 하나로 꼽히겠다.

이곳 워싱턴과 세인트루이스에서 고대의 구마 의식을 20-30차례나 수행한 끝에 악마가 소년에게서 쫓겨났다고 한다.

마지막을 제외하고 모든 구마 의식에서, 사제가 의식의 절정에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나는 너를 쫓아내노라'라고 외칠 때때마다 소년은 비명을 지르고 저주를 퍼부으며 공부한 적 없던 라틴어를 외치고는 격렬하게 울음을 터뜨렸다고 한다.

사제는 2달 동안 소년과 함께 지내며 임무에 헌신했으며, 그 과정에서 소년이 자고 있던 침대가 갑자기 방을 가로질러 움직이는 등의 현상을 직접 목격했다고 전한다.

워싱턴의 한 개신교 목사도, 소년이 누워있던 매트가 천천히 미끄러져 움직이며 소년의 머리가 침대에 부딪혀 깨어나는 등 유사한 현상을 직접 목격한 바가 있다고 전해온다.

이 목사의 또 다른 목격담에선, 소년이 무릎을 턱 밑으로 끌어당겨 앉아 있던 무거운 안락의자가 천천히 한쪽으로 기울어져 넘어지면서 소년을 바닥에 내던지기도 했다고.

악마가 소년의 몸에서 쫓겨난 마지막 엑소시즘 구마 의식은 지난 5월에 일어났다고 전해진다.

한 사제는, 해당 케이스가 적어도 이 지역의 지난 한 세기 가톨릭 역사상&지역 교회의 전체 역사에서 의식을 통해 악마를 쫓아낸 최초의 사례일 것이라고 언급했다.

소년은 조지타운 대학교 병원과 세인트루이스 대학 병원에 입원했었다. 두 병원 모두 예수회 기관이다.

그러나 두 가톨릭 병원 모두 자연적인 방법으로는 소년을 치료할 수 없다고 여기면서, 세인트루이스의 예수회 소속 50대 사제가 기도와 단식을 통해 해당 임무에 집전하 시작됐다.

해당 의식은 세인트루이스에서 시작과 끝이 이뤄졌다.

2달 동안 이 사제는 기차로 오가며 소년과 함께 집에서 지내며 때로는 같은 방에서 자기도 했다.

하지만 이러한 엑소시즘 의식을 통해서도 소년은 결코 쉬이 치료되지 않았다.

의식 때마다 '내가 너를 쫓아내노라'라는 말을 할 때면, 소년은 저주와 욕설 그리고 비명을 지르며 라틴어 문구를 외치는 등 격렬한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소년은 한 번은 성 미카엘이 악마를 쫓아내는 환영을 봤다고 전해진다.

마침내 마지막 구마에서 소년은 조용해졌다.

그리고 그 이후로 지난 모든 현상이 사라졌다고 전해진다."

'엑소시스트 이야기'를 전 세계에 퍼뜨린 당사자 윌리엄 블래티 (The New York Times)

1949년 8월 20일 자 해당 기사로부터 크나큰 인상을 받은 블래티.

이후 블래티는 자신이 다니던 조지타운 대학(미국에서 설립된 가장 오래된 가톨릭 및 예수회 대학임)의 교수였던 유진 갤러거가, 사건 당시 엑소시즘에 참여했던 여러 신부 중 한 사람의 16페이지짜리 일기를 소장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에 블래티는 갤러거 교수에게 끈질기게 해당 일기를 요구하며 집착을 보였다고 전해진다.

한편 갤러거 교수는 학장인 다른 신부에게 이 일기를 대여해주고서 훗날 7페이지 분량이 사라졌다고 하는데, 블래티가 어떤 방법으로 이를 손에 넣게 됐는지는 미스터리라고 한다.

그리고 시간은 흘러..

대학을 졸업한 후 10년 넘도록 꾸준히 책을 내며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둔 작가 반열에 오른 블래티.

1969년, 그런 블래티가 마침내 오래도록 가슴에 품고 있던 이야기를 소설화하고자 집필에 들어선다.

이를 위해 블래티는 과거 소년의 엑소시즘에 직접 참여했던 사제와 접촉하며, 당시의 기록을 담은 일기를 열람하고자 각고의 노력을 꾀한다.

블래티의 주장에 따르면, 이러한 기록이 담긴 일기의 사본 총 5권이 소년을 돌보던 이들과 소년이 머물렀던 공립시립병원 그리고 대교구 기록 보관소에 보관되고 있었다고.

블래티는 이러한 사본을 어떻게 열람했는지는 밝히지 않았으나, 소설판과 영화판의 이야기 모두 해당 기록물에 기반을 두고 있다고 설명했다.

다만 원칙적으로 엑소시즘을 받은 사람들에 대한 신상 보호를 철저하게 고수했던 가톨릭과 사제의 입장으로 인해, 블래티는 기록물 열람 과정에서 사건의 배경과 소년의 성별 그리고 기타 세세한 항목들에 변경을 주겠다고 설득했단다.

그렇게 <엑소시스트>가 소설 및 영화판으로 모두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면서, 미국 내의 수많은 기자들은 실제 모델인 소년의 정체에 대해 추적을 시작한다.

이러한 추적을 통한 기사 중 가장 심층적이고 흥미로웠던 기사는, 단연코 <Fate> 1975년 1월호에 실린 스티브 에드만의 특집 기사였다. (<Fate>는 1948년 창립 이후 20세기 가장 대표적인 초자연현상&미스터리 전문 잡지였음)

다음은, 에드만이 사건 직접 관련자들의 일기 및 증언 기록물을 토대로 작성했다는 해당 특집 기사의 요약이다.

"사건은 메릴랜드주 내 워싱턴 D.C. 교외 개발 지역에 거주하던 한 집안에서 벌어졌다.

(The Exorcist)

1949년 1월, 소년은 평소 심령술에 심취해 있던 틸리 이모로부터 위자보드를 선물로 받는다. 이를 기점으로 소년을 중심으로 괴현상이 일어나게 된다.

1월 15일, 외할머니 침실에서 물방울이 떨어지는 듯한 소리를 듣는 게 시작이었다. 이어 벽에 걸린 예수의 그림이 흔들리고, 장판 아래에선 무언가가 긁어대는 소리가 들렸다.

이날 밤부터 열흘간 매일 저녁 7시에서 자정까지 장판 긁는 소리가 들려왔다.

또 그로부터 3일 후에는, 6일 연속해 소년의 침대에서 삐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1월 26일, 소년의 이모인 틸리가 병으로 사망한다.

소년의 어머니는 집에서 벌어지는 괴현상과 틸리의 죽음이 위자보드로부터 기인했다고 여기게 된다.

이후 소년과 소년의 어머니 그리고 외할머니가 함께 있던 도중 언제나처럼 괴현상이 발생했고, 소년의 어머니는 '혹시 틸리라면 3번 노크를 해.'라고 말한다.

그러자 바닥에서 3번의 노크 소리가 발생했고, 재차 4번의 노크를 요구하자 노크와 함께 침대 매트리스에서 긁어대는 소리가 들려온다.

이에 소년의 어머니는, 틸리의 영혼이 찾아온 것이거나 혹은 그전부터 위자보드를 통해 온 악령이 흉내를 내고 있는 것이라 믿게 된다.

(The Exorcist)

2월 17일, 괴현상에 내내 시달리던 소년의 어머니의 간청으로 현지 루터교 목사인 슐츠가 나선다.

슐츠는 소년을 목사관(교회가 제공하는 주택)에서 하룻밤 보내도록 주선한다. 이날 밤 9시 20분경 목사관에 도착한 소년은 다음 날 아침 9시 20분까지 머무른다.

여기서 슐츠 목사는, 소년이 머무는 침대에서 진동이 발생하고 의자가 넘어가는가 하면, 바닥 부분에서 무언가가 긁어대는 소리 그리고 소년이 앉았던 담요가 움직이는 것을 목격한다.

(The Exorcist)

2월 26일, 이날 밤부터 4일 내내 소년의 몸에 긁힌 자국이 나타난다. 자국이 나타난 지 넷째 날 밤부터는 마치 발톱으로 긁힌 듯 두꺼운 자국들이 단어를 나타낸다.

부인의 증언이라고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보다 다양한 폴가이스트 현상이 나타났다고 전해진다.

빗과 과일 그리고 코트와 옷걸이가 날아다니고, 음식들이 식탁에서 떨어지고, 식탁이 뒤집어지며, 소년이 앉았던 흔들의자가 빙빙 도는가 하면, 성경이 갑자기 소년의 발로 떨어지기도 했단다.

무엇보다도, 학교에서 소년이 앉아 있는 책상이 계속해서 움직이며 결국 퇴학을 당하기까지 했다고 한다.

괴현상이 벌어지면서, 소년의 어머니는 성수 한 병을 구해 집안 곳곳에다 뿌렸다고 한다. 헌데, 그 뒤 병을 선반 위에 올려놓자 저절로 날기 시작했다고.

또 어느 날 밤에는, 소년과 소년의 어머니가 침대에 있을 때 침대 전체가 움직이기 시작했단다.

3월 9일, 세인트루이스 대학(조지타운에 이어 예수회가 설립한 2번째로 오래된 미국 대학)의 레이먼드 비숍 신부가 방문한 자리에서 소년이 있는 매트리스가 움직이고 소년의 몸에서 긁힌 자국이 나타나는 것을 목격한다.

3월 11일, 비숍 신부와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초기 예수회의 대표적인 신부였음) 교회의 윌리엄 바우든 신부가 소년의 집을 방문한다.

밤 11시경 소년이 잠에 들자, 바우든 신부는 기도문을 읽고서 성유물(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의 팔뚝 뼛조각)이 박혀진 십자가로 축성을 하고는 그 십자가를 소년의 베개 아래에도 고정시킨다.

이후 비숍 신부와 바우든 신부가 소년의 집을 떠나고서, 갑자기 소년의 방에서 큰 소리가 들려오더니 커다란 책장이 움직이고 의자가 뒤엎져있으며 십자가가 침대 가장자리로 옮겨져 있는 게 발견된다.

소년이 누워있는 매트리스가 흔들리는 것을 보고 일가친척들이 '틸리 이모, 그만해요!'라고 외치고서야 사태가 멈췄다고.

3월 16일, 세인트루이스의 조셉 리터 대주교가 바우든 신부에게 구마 의식를 시행하도록 허락한다.

그리고 이날 밤부터, 바우든 신부는 비숍 신부와 예수회 학자 월터 할로란을 동반하고서 임무에 들어선다.

3월-4월에 걸쳐 소년은 친척집과 사제관 그리고 병원을 왕래하며 구마 의식을 받는다.

구마 의식의 지침은 로마 기독교 구마 의식 방식에 따라 진행됐다. 신부들이 역할에 따라 권위적인 목소리로 다음의 명령을 내리는 것이다. '내가 너, 더러운 영을 쫓아내노라. 악한 적과 모든 유령 그리고 악마의 군단이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이 하느님의 피조물에게서 떠나 사라지거라'

이러한 구마 의식이 펼쳐지는 동안, 소년에게선 갖가지 기괴한 현상이 일어났다고 전해진다.

소년의 몸에선 반복해서 단어나 표식 등이 나타났고, 격렬한 저주성 욕설과 반종교적인 언행, 구토, 배뇨, 라틴어 구사 등이 뒤따랐다.

한 번은, 소년이 침대 장식 부분을 맨손으로 부러뜨리고는 신부의 팔을 찔렀다고도 한다.

또, 가톨릭 기도 모임 과정에서 갑자기 머리 위로 손을 올리더니 그곳에서 거미줄이 뻗어 나왔다고 한다. 더불어 종아리 부위에 3cm 크기의 뿔이 있는 악마 형상이 짙은 빨간색으로 나타났다고도 한다.

언젠가는 갑자기 광분하더니 바우든 신부의 고환을 가격하며, '이게 호두까기지, 안 그래?'라고 외치며 조롱했다고.

(The Exorcist)

4월 18일,

구마 의식 동안, 바우든 신부는 소년에게 묵주 목걸이를 하고 손에는 십자가를 들도록 했다.

본디 폭력적이고 격렬했던 소년의 태도가 바뀌었다. 소년은 차분한 태도로, 신부가 행하는 라틴어 기도의 의미에 대해 물어왔다.

바우든은 개의치 않고서 의식을 계속하며 소년을 향해 안에 깃든 악마의 정체 그리고 언제 소년의 몸에서 떠날지를 답하라며 요구했다.

이어 소년이 분개하더니 자신은 타락한 천사 중 하나라고 외쳤다.

바우든은 계속해서 밤 11시까지 기도 낭송을 이어갔다.

그러던 중, 소년이 중간에 끼어들며 처음 듣는 남자의 목소리로 외쳤다.

'사탄아! 사탄아! 나는 성 미카엘이다! 내가 너, 사탄 그리고 다른 악령들에게 도미누스(주: 라틴어로 주님을 의미)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즉시 이 몸을 떠나거라! 당장! 당장! 당장!'

이후 소년은 경련을 일으키더니, 이어 '그가 떠났어요'라고 말한다.

후에 소년은 바우든 신부에게, 성 미카엘이 불타는 검을 들고 있는 환영을 봤다고 말한다.

그로부터 12일 후, 소년은 고향인 메릴랜드로 돌아간다.

전 세계적인 <엑소시스트> 열풍으로 인해, 소년에 대한 추적은 10년 간이나 이어졌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기자 및 작가들은 다음과 같은 증언 및 정보들을 수집한다.

소년의 집은 메릴랜드주 워싱턴 D.C. 인근 도시인 마운트 레이니어 내 벙커 힐 로드 3210에 위치했음.

마운트 레이니어 내 세인트 제임스 교회의 31세 에드워드 휴즈 신부가 최초로 소년에게 구마 의식을 수행했던 사제였음. (마지막에 구마 의식으로 소년의 몸에 깃든 악령을 쫓아냈다는 사제는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교회의 52세 바우든 신부와 세인트루이스 대학의 43세 비숍 신부)

조지타운 대학 병원의 정신과 의사들이 별반 도움을 주지 못하면서 휴즈 신부가 구마 의식 요청을 받아 최초로 나섰던 것.

구마 의식 과정에서 소년이 침대 스프링을 뜯어내고는 휴즈 신부의 팔을 베어버림.

구마 의식은 휴즈 신부에게 크나큰 충격을 선사했고, 도중에 구마 의식을 중단한 후론 은둔 생활에 들어섰다고 함.

에드워드 휴즈 신부(Edward Hughes)
윌리엄 바우든 신부 (William Bowdern)
레이먼드 비숍 신부 (Raymond Bishop)
'엑소시스트 이야기'의 진실을 파헤친 작가 마크 옵사스닉 (The Washington Post)

이렇듯 10년 넘도록 소년에 대한 추적이 이어졌으나..

사실상 '이야기의 전체에서 제대로 된 정보를 선별 취합해 공개한' 사람은, 마크 옵사스닉이었다.

옵사스닉은 워싱턴 D.C. 지역의 문화 및 음악을 소재로 책을 펴내며 해당 분야에서 호평을 받던 작가였다.

이런 옵사스닉이 흥미를 지니던 분야가 있었으니..

그건 바로, 초자연현상&미스터리였다.

이에 옵사스닉은 메릴랜드주에서 초자연현상&미스터리를 전문으로 다루던 유명 계간지 <Strange Magazine>에 글을 기고하기도 한다.

그의 방식은 직접 현장 취재를 통해 정보를 선별 및 취합하는 것이었고, 그런 그의  <Strange Magazine>첫 기고문은 메릴랜드 지역의 빅풋 목격담에 대한 것이었다.

여담으로 <Strange Magazine>은 1988년 첫 출간 이래 2000년까지 명맥을 유지하며 초자연현상&미스터리 전문 계간지로 마니아들 사이에서 유명하며, 옵사스닉은 무려 18년 간이나 이곳에 글을 기고했다.

그리고..

이러한 <Strange Magazine>의 마지막 '잡지판'이라 할 수 있는 1999년 20호에서, 옵사스닉은 혼신을 다한 르포 취재의 결과물을 특집으로 선보인다.

(Strange Magazine)

바로 다음이, 옵사스닉의 취재물인 '코티지 시티의 유령 소년: 엑소시스트에 영감을 준 이야기 뒤로 숨겨진 냉혹한 사실들' 중 핵심을 요약 및 재구성한 것이다.

"지금껏 소년에 대한 많은 신문 및 잡지 기사, 서적, TV 프로그램, 다큐멘터리가 등장했으나 대부분은 제대로 된 연구가 없어 모순되고 또 잘못된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이러한 것들의 상수는 각자의 목적에 부합하도록 이야기를 편향되게 수정했다는 것이다.

이들 중 어느 누구도 실제로 소년과 이야기를 나눈 적이 없으며, 소년의 가족 또는 가깝게 지낸 사람을 인터뷰한 바가 없다.

이 엑소시스트 이야기에 대한 나의 관심은 1992-1996년 사이에 점차 커지면서, 나는 사건의 배경으로 일컬어진 메릴랜드주 마운트 레이니어 도시를 조사하는 데 많은 시간을 쏟았다.

세간에 소년의 집으로 알려졌던 벙커 힐 로드 (Strange Magazine)

엑소시스트 이야기가 유명해지면서, 80년대 초반부터 10대들이 사건 배경으로 소문난 마운트 레이니어 벙커 힐 로드로 모여들었다.

그리곤 밤새도록 탐사를 하고 술을 마시고 고함이나 비명을 지르며 즐겨대느라 지역 경찰이 매번 그들을 쫓아내야 했다. 몇몇 신문 기사에서 촉발된 소년의 집 주소로 인해 도시 전설이 탄생한 것이다.

나는 마운트 레이니어 내 소년의 마을을 방문해 그곳에서 오랫동안 거주했다던 나이 지긋한 많은 주민과 수백 시간 동안 대화를 나눴다.

여기서 나는 아주 이상한 사실을 알게 됐다.

누구나가 해당 마을을 소년의 거주지였던 곳으로 인정하는데, 정작 주민들은 소년이 과거 이곳에 살았던 적이 없다고 입을 모으는 것이다.

또, 소년과 소년의 가족들에 대해 이름과 같은 기본적인 사항조차 아는 이가 아무도 없었다.

몇몇 주민은 소년의 거주지가 마운트 레이니어가 아니라 근방의 외딴 마을 코티지 시티였다는 소문을 들었노라 귀띔해 줬다.

특히, 평생 마운트 레이니어에 거주했다던 70세의 주민 딘 랜돌트씨로부터 다음의 말을 들었을 때 나는 마침내 진실을 찾았노라 느꼈다.

'당시 나와 내 친동생은 휴즈 신부님(주: 최초 소년에게 구마 의식을 했다던)과 아주 좋은 친구 관계였네.

신부님이 두 가지를 말씀해 주셨는데, 하나는 그 소년이 코티지 시티에 산다는 거였어. 다른 하나는 소년이 사건 이후 곤자가 고등학교(주: 워싱턴 D.C.의 전통 있는 가톨릭 신학교)를 졸업하고 잘 자랐다는 거였고.'

그간 신문 기사를 통해 소년의 거주지가 마운트 레이니어 지역으로 언급됐으며, 일부 기사에서는 프랭크 보버 신부(휴즈 신부와 소년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던)가 기자에게 '휴즈 신부가 정확한 주소는 말한 적 없으나 사건에 대해 잘 안다는 마운트 레이니어 지역 거주자가 확인시켜 줬다'라고 언급했다는 대목이 있다. 그러나 조사 결과, 보버 신부에게 확인시켜 줬다던 사람이 진짜 마운트 레이니어 지역 주민인지 확인할 수 없었다.

(주: 결국, 부정확한 제자의 언급으로 인해 소년의 거주지가 와전됐던 것으로 사료. 실지로 신부들의 사건 당시 기록한 일기에도 마운트 레이니어 거주라는 언급은 없었으며, 오로지 신문 기사들에서만 언급. 아마, 처음 마운트 레이니어이 등장했던 연유는, 최초 구마 의식을 했던 휴즈 신부가 마운트 레이니어 내 세인트 제임스 교회 소속이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음)

그럼에도 어째서 지금껏 소년에 대한 제대로 된 정보가 나오지 않았는지 나는 깨닫게 됐다.

결정적으로, 나는 공공 도서관에서 1950년에 출판된 마운트 레이니어 지역 주민 명부(모든 주민의 주소와 전화번호가 기록된) 및 마이크로필름 신문 기사들을 확인한 끝에 문제의 '마운트 레이니어 벙커 힐 로드 3210'은 1926년부터 1950년 이후로도 전혀 다른 사람이 거주했던 것을 알 수 있었다.

더 나아가, 나는 해당 거주지와 왕래가 있었던 이웃 주민을 찾아내 그곳엔 노부부가 거주했었다는 증언을 얻을 수 있었다.

이 주민은 이렇게 말했다.

'영화가 개봉하고서 동창회에 갔더니 신문 기사에서 내 옆집에 구마 의식이 있었다고들 물어왔어요. 나는 그럴 리가 없다고 했죠. 그랬더니 사진이 실린 기사를 보여주는데, 배경으로 우리 집이 찍혀 있더군요. 믿을 수가 없었죠. 그들이 틀렸어요!'

이 밖에도 과거 레니어산 지역에 거주했다던 성공한 변호사 로버트 랜돌트에게 중요한 증언을 얻을 수 있었다.

랜돌트는 이렇게 증언했다.

'제 아버지와 삼촌은 휴즈 신부와 아주 좋은 친구 관계였습니다. 저도 아버지와 삼촌을 통해 사건을 알게 됐죠. 저는 소년이 코티지 시티 출신이며 본래 루터교인이었다가 가톨릭으로 개종한 것이라는 말을 전해 들었어요. 휴즈 신부님이 말씀하시길, 그 소년은 워싱턴 D.C. 지역의 사립 가톨릭 학교인 곤자가 고등학교를 졸업했대요.'

또한, 마운트 레이니어에 거주한 다른 주민들도 문제의 거주지엔 노부부만이 살았다고 일치된 증언을 내놓았다. 오히려 주민들에게는 엑소시스트 이야기의 배경이 그 노부부의 집이란 것을 농담거리로 여겨졌다고 한다.

(주: 소방 기록이나 기타 주민들의 세세한 증언들까지 분량이 너무 많아 해당 부분은 여기서 중략하겠음. 핵심은, 1949년 당시 소년의 거주지가 마운트 레이니어라고 와전됐던 것에 이어 1981년 2월 4일 메릴랜드주 지역신문 <Prince George's Sentinel>에 문제의 세부 주소가 언급된 것을 기점으로 도시 전설화가 시작)

그리하여, 1997년 10월부터 나는 본격적으로 코티지 시티 지역과 소년을 조사하며 연구를 시작했다.

먼저, 기자들은 소년이 13세 또는 14세였다고 주장해왔는데, <Fate> 1975년 1월호에 실린 스티브 에드만의 특집 기사에서는 소년이 1935년 6월 1일생으로 구마 의식이 종결됐을 무렵이 13세였다.

소년은 조지타운 대학 병원에서 지역 사제인 에드워드 휴즈 신부의 지휘 아래 최초의 구마 의식이 거행됐으며, 이후 1949년 봄 미주리주 세인트루이스에 있는 알렉시안 브라더스 병원에서 윌리엄 바우든 신부들에게 최종적으로 구마 의식을 통한 퇴마가 있었다.

처음 1949년 8월 10일에 소년의 이야기가 <워싱턴 포스트>를 통해 세간에 알려졌는데, 해당 이야기의 기원은 워싱턴 D.C. 북서부 마운트 플레전트 지역 도서관에서 열렸던 초심리학회 지역회의에서 한 익명의 목사가 한 연설에서였다고 한다.

목사의 말에 따르면, 메릴랜드 교외 지역에 거주하던 소년의 가족이 1월 18일경부터 폴터가이스트 현상들(집 벽에서 긁는 소리, 소년이 누운 침대가 심하게 흔들림, 과일이나 그림과 같은 물건들이 바닥으로 떨어짐)을 호소해 왔다고.

이에 목사가 2월 17일 밤 소년의 거주지를 직접 방문했는데, 소년이 잠에 든 침대에서 진동과 벽을 긁는 소리가 들리는 것을 체험했다고 한다. 또, 소년이 앉아 있었던 안락의자가 스스로 넘어지는가 하면 소년이 덮고 있는 담요가 바닥을 이동하기도 했단다.

이에 목사는 소년에게 '자, 이제 그만하렴'이라고 훈계하고는, 가정의학과 의사를 부르도록 했으며 페노바비탈(주: 가장 오래된 대표적인 어린이 항경련제로, 수면 및 불안 장애에도 사용됨)이 처방됐다고 한다.

바로 이 이야기가 엑소시스트 이야기의 시작이었다.

연설 당시 목사는 웃음을 띠고 있었으며, <워싱턴 포스트>의 기자 역시 가벼운 기삿거리 정도로 작성했다.

(주: 소년의 폴터가이스트 현상을 직접 목격한 목사는, 모든 게 악령이 아닌 소년의 자의적인 행동이라고 여겼다는 의미)

그런데 듀크 대학의 초심리학 연구소 및 뉴욕에 본부를 둔 초심리학 재단에서는 소년의 이야기를 심각하게 받아들이며 진짜 폴터가이스트 현상으로 취급했다.

(주: 당시 해당 업계의 시대상은, 미국을 중심으로 영적 능력&사이킥과 같은 심령술 관련->초감각적 지각과 같은 초능력으로 메타가 변하던 시절이었음)

그러한 기류에서 다른 신문사들이 소년의 이야기를 내보내며 화제를 모았고, 이에 최초 기사를 냈던 <워싱턴 포스트>의 기사는 8월 20일 새로운 기조로 기사를 내보낸다.

(주: 본문 초반에 소개했던, 엑소시스트 이야기를 소설과 영화화 각색을 했던 블래터가 접했었다는 기사가 바로 이것)

나는 마운트 레이니어 지역 주민들을 인터뷰하는 과정에서, 휴즈 신부가 소년이 코티지 시티 지역 출신이며 워싱턴 D.C.의 사립 가톨릭 학교 곤자가 고등학교를 졸업했다고 언급했다는 증언을 얻었었다.

또,  <Fate> 1975년 1월호에 실린 스티브 에드만의 특집 기사에서 소년이 1935년 6월 1일생이라는 언급이 있었다.

이에 따라 나는 소년이 사건 무렵인 1948-1949년 당시 학업 과정에서 누락이 있었을 경우를 산정해, 소년이 곤자가 고등학교를 1954년에 졸업했을 것이라 추정했다.

어렵사리 해당연도의 졸업앨범 사본을 구한 나는, 메릴랜드 마운트 레이니어의 세인트 제임스 교회 교인이었던 학생을 추려냈다.

그러자 5명의 학생이 나왔고, 이중 코티지 시티 출신은 2명이었다.

이후 메릴랜드주의 다양한 공공정보시스템을 통해 생년월일을 확인한 결과, 1935년 6월 1일생인 학생이 나왔다.

(Strange Magazine)

소년의 집 주소는 메릴랜드주 코티지 시티 4번가 3807번지였다.

나는 과거 메릴랜드 교외 지역 전화번호가 모두 소장 중인 워싱턴 D.C. 마틴 루터 킹 기념 도서관으로 향했다.

조사를 통해, 소년의 가족은 1939년 해당 주소로 이사를 와 이후 1958년까지 거주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나는 코티지 시티의 작은 지역사회 특성상(약 1,200명 주민이 거주) 소년의 가족을 기억할 과거 주민들이 존재하리라 확신했다.

(주: 지역사회 칼럼지를 통한 가족들의 세세한 연혁 및 가족사들에 대한 이야기는 분량상 중략하겠음)

그리하여 나는 문제의 장소를 직접 방문했다. 1997년 소년과 관련된 다큐멘터리 <In the Grip of Evil>에서 비숍 신부가 기록했던 구마 의식 일기를 통해 입수한 소년의 거주지 전경을 공개한 바가 있는데, 직접 방문한 결과 영상 속 그곳인 것을 알 수 있었다.

(주: 해당 다큐멘터리가 유일하게 진짜 기록인 구마 의식 일기 속 언급을 통해 진짜 거주지를 공개했던 것인데, 물론 전경으로만 막하게 공개하고 주소지는 외부에 공개한 바가 없었음)

코티지 시티에서 나는 주민 102명을 개인 인터뷰했으며, 과거 문제의 40번가 3800 단지에 거주했던 17곳 가족 중 5명을 찾아내 인터뷰했다.

이러한 인터뷰 인원 중 소년의 친구들도 다수 있었으며 많은 수가 소년과 같은 초등학교 및 중학교를 다녔었다.

소년은 1947년 블래던스버그 중학교에 입학했으며, 1949년 1월경 퇴학을 당하고서 이후 동 중학교에 다시 재입학했다. 그리고 1950년 가을부터 1954년 6월까지 4년을 곤자가 고등학교에서 보냈다.

소년을 안다던 수십의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눈 결과, 엑소시스트 이야기의 모델이 소년이라는 사실을 인지하는 부류와 그렇지 않은 부류로 나뉘었다.

1919년부터 코티지 시티 거주민이었으며 평생 지역 소방국의 일원이었던 노인은 이렇게 말했다.

'그 소년은 40번가 3807에 살았지. 당시엔 소년에게 무슨 일이 있었다는 걸 몰랐어. 나중에야 많은 이야기가 나와서 듣게 된 거지. '

조사 과정에서 나는 지역 관련 자료 더미들을 뒤지던 중, 소년의 가족과 종종 왕래하던 몇 안 되는 어느 가족에 대해 알게 됐다. 이 가족의 아들인 앨빈 케이지씨는 현재 치과 의사가 됐으며, 나와의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흥미롭고 통찰력 있는 증언을 공개했다.

'제가 그를 본지 아마 45년 정도 됐을 겁니다. 하지만 여전히 그를 친구라고 여기므로 그러한 마음을 배신하고 싶지 않다는 말로 시작하죠.

그는 저보다 한 살 어렸고 코티지 시티 초등학교 시절 한 학년 아래였어요. 그에게 물론 친구가 있긴 했지만, 어떤 의미에선 외톨이라고 할 수 있었어요. 이보다 더 적절한 표현이 없을 것 같네요. 그는 부모님과 마찬가지로 다소 조용했어요. 스포츠에도 관심이 없었던 것 같아요.

내가 그와 친분을 맺은 건 부모님끼리 매주 토요일 밤마다 각자의 집에서 당시 유행 중이던 카드놀이를 하면서였죠.

어느 시점에선가 그가 아프다며 그와 그의 어머니가 치료차 세인트루이스를 갔었어요. 루터교 신자였던 그의 집안이 가톨릭으로 개종했고요.

당시 그의 아버지가 제 아버지에게 그가 이상하게 행동한다고 말했던 게 기억나요. 하지만 빙의에 걸렸다든지 그런 말은 하지 않았었어요.

영화가 나오고서 주변에서 영화 봤느냐고, 그게 마운트 레이니어 지역에서 실제로 있었던 일이라고 말하더라고요. 저는 속으로 생각했죠. 마운트 레이니어 아니라 코티지 시티에서 있었던 거라고.

아버지에게 이야기를 하니까, 당시 엑소시스트를 본 적이 없음에도 아버지가 제 친구 이야기라고 말씀하시더군요.'

이어진 조사에서 점진적으로 더 많은 귀중한 자료들을 얻을 수 있었는데, 특히 한 가족에 대한 것이 그랬다.

이 가족의 세 형제 중 둘이, 10대 시절 소년과 가장 친한 친구로 지냈다는 것이었다.

나는 이 둘로부터 익명을 보장하겠다는 조건으로 다음의 인터뷰를 가질 수 있었다.

두 형제 중 형인 JC의 증언

'엑소시스트 이야기 알고 있죠. 그 이야기의 당사자들도 알고 있습니다. 당시엔 사건 자체에 대해 아는 사람이 거의 없었어요.

그와 제 남동생이 아주 친했어요. 동년배에 비해 아주 조숙했기에 외톨이였던 둘은 서로가 떼려야 뗄 수 없는 짝이 됐죠. 둘이서 꽤나 친밀한 관계가 됐고 많은 장난을 치곤 했죠.

둘의 장난은 계속해서 발전해 갔고 저는 그러한 걸 직접 목격했어요.

후에 <In the Grip of Evil>를 본 적이 있는데 너무 과장했더군요. 거기서 소년이 침을 쏘아 뱉는 것을 (증상으로) 강조하던데, 실은 둘의 장난 중 하나가 침을 뱉는 거였어요.

당시 둘은 침을 뱉는 법을 연구한 끝에 3m 높이까지 정확하게 뱉는 법을 개발했어요. 입을 다물고서 입술을 들어 올려 뱉는 건데, 저는 둘이서 늘상 그러는 걸 봐왔죠.

다른 또 하나는 침대가 움직이는 장면이죠.

당시 침대엔 철제 와이어 스프링이 달려있고 바퀴가 있어서 침대를 움직이거나 몸을 튕기는 게 전혀 어렵지 않았어요. 오히려 움직이지 않게 고정시키는 게 더 어려웠죠.

이처럼 엑소시스트 이야기는 많은 것들을 스토리를 위해 꾸며내고 과장했던 거예요.

소년이 실제로 악마에 사로잡혔다고 생각하느냐고요?

아니요. 걔는 빙의된 적이 없었을 거예요. 실제 빙의나 그런 게 아니고 심리적인 문제였던 것 같아요.

소년네 가족은 독일 루터교도였고, 소년은 외동아들이었어요. 그 집에 함께 살던 외할머니가 가족의 중심이었고 때문에 모든 사건 과정에서 크게 영향력 있는 역할을 했던 것으로 압니다. 외할머니와 어머니 모두 구시대적 종교 미신에 사로잡혀있었죠.

소년의 아버지는 그냥 뒤에서 방관했어요. 내 생각에, 아마 진짜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알았던 것 같아요. 그래서 이야기에선 언급이 안 되는 거고요.

제 생각엔 말이죠. 당시 이 두 장난꾸러기는 자신들보다 약하다고 여겨지는 사람을 이용해먹으려는 경향이 강했어요. 둘은 한 쌍의 공모자였고 또 치밀하게 행동했죠. 이런 관계에선 항상 서로 경쟁하고 관계 유지를 위해 계속해서 무언가를 하곤 하죠. 그리고 이 무언가란 어떤 형태로든 장난을 치는 것이겠고요. 둘은 서로를 이겨 먹으려고 애썼어요.'

JC의 남동생 BC의 증언

옵사스닉이 방문하기 직전 촬영한 BC의 거주지 (Strange Magazine)

'영화가 나온 이후로 저는 누구 앞에서도 그 친구의 이름을 말한 적이 없어요. 심지어 제 아내에게도요.

우리는 놀이 친구이자 동급생이었어요. 제가 어릴 때 이사 온 이후로 함께 놀았고, 40년대엔 코티지 시티 초등학교서부터 블랜던스버그 중학교까지 함께 다녔죠.

친구는 항상 40번가 3807번지에 살았어요. 마운트 레이니어 이야기는 어디서 나온 건질 모르겠네요.

그 시절 친구가 어땠는지 물어보신다면, 결코 평범한 아이라 할 수 없었다고 말해주겠네요. 그는 외동이었고 좀 버릇도 없었으며 못되먹은 게 있었죠. 우리는 항상 함께였어도 매번 싸우곤 했어요.

하나 아직도 제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는 일이 있습니다.

저희가 48-49년도 8학년 때였어요. 우리는 중학교 같은 반이었죠.

친구의 팔걸이가 붙은 책상이 아주 빠르게 진동하며 심하게 흔들렸어요. 친구가 흔드는 것 같았죠. 선생님은 그만하라고 소리쳤고요.

그랬더니 친구는 내가 하는 거 아니에요! 라고 소리쳤고 수업 중 쫓겨나게 됐죠.

이게 제가 학교에서 마지막으로 본 친구의 모습이었어요.

책상은 엑소시스트 소설에서처럼 움직이고 날아다닌 게 아니라 그냥 흔들린 거였어요.

한동안 친구를 보지 못해 무슨 일이 있는 건지 무척이나 궁금했습니다. 친구의 아버지를 간혹 보곤 했어요. 집에 찾아가 봤더니, 독일인인 외할머니가 나와선 거의 할 줄 모르는 영어로 친척을 만나러 세인트루이스에 갔기 때문에 잠시간 그곳에 있을 거라고 하더군요.

친구는 학교에 오지 않았고 저는 뭔지는 자세히 모르겠으나 무언가 이상한 일이 일어나고 있구나 싶었죠.

그해 여름에 <워싱턴 포스트>에 기사가 나왔을 때 저는 기사 속 소년이 친구인 것을 알았어요. 하지만 당시 커티지 시티의 다른 사람들은 아무도 그걸 몰랐죠. 동네가 아주 폐쇄적인 곳이었으니까요.

1년 정도 후에야 친구의 어머니가 지역 여성 모임에서 누군가에게 말해주며 이후 마치 확성기 마냥 소문이 퍼져나간 것이었죠. 그렇게 잠시간 코티지 시티 지역에 소문이 퍼져나갔으나 그마저 얼마 지나지 않아 사그라들었습니다.

친구의 캐릭터에 대해 이야기 해주자면,

그때 동네를 활보하던 개가 있었어요. 반은 코커 스패니얼이고 반은 차우처럼 보였죠. 그 개는 심술궂고 주인이 누군지 몰랐어요. 그냥 갑자기 나타난 거예요.

친구가 그 개의 주인 행세를 했어요. 친구는 그 개에게 밥을 주고 또 집에 데려가곤 했어요. 친구의 가장 친한 친구는 제가 아니라 그 개였죠. 그 개는 모든 사람과 모든 것들을 싫어해 눈에 보이는 사람을 물어댔지만 친구는 아니었어요. 그 개는 친구를 사랑했죠.

언제는 친구가 집으로 불렀는데, 친구 놈은 교활한 데다 정말 못된 구석이 있어서 믿음이 가지 않았죠. 집에 찾아가니까 지하실 창문으로 밖을 내다보고 있더라고요.

친구 집에 들어서니 현관문이 닫히는 소리가 났습니다. 친구가 그 개를 풀어놓고서 그랬다는 걸 바로 알아챘죠. 예전에 다른 애들에게도 여러 번 했었던 짓이거든요. 저는 개를 피해 미친 듯이 도망치다가 제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친구가 전화를 걸어와 웃어대더군요.

이게 바로 친구가 어떤 애였는지 보여주는 일화입니다. 이런 이야기라면 셀 수 없이 많이 해줄 수가 있을 정도죠.

영화가 나오고서 지인이 마운트 레이니어 벙커 힐 로드의 집으로 저를 데려가서는 엑소시스트 이야기가 일어난 곳이라고 말하더군요. 저는 멍청한 척하면서 놀란 듯 정말 흥미롭다고 대꾸했죠. 그리고 속으론 아무도 진짜 이야기를 몰라서 다행이라고 생각했어요.'

이렇듯 JC와 BC, 그리고 소년의 정체에 대해 아는 이들은 엑소시스트 이야기가 유명해지고서 누구에게도 진실을 말하지 않으며 소년을 보호해 왔다.

당시 소년과 가장 가까웠던 친구인 BC에 의하면, 소년은 결코 평범한 어린 시절을 보내지 않았다고 한다.

강박적으로 종교에 집착하는 외할머니와 어머니에게 억눌려 자랐으며, 가족과 몇 안 되던 친구들에게 성질을 부리거나 폭력적인 행동을 보이며 또래 무리로부터 소외받았다고 한다.

또 때로는 다른 아이들이나 동물들을 대상으로 가학적인 행동을 보인 적도 있다고 한다.

이를 두고 소위 빙의로 인한 요소들이라고 할 수도 있겠으나, 현대의 정신과 의사들 입장에선 소년의 가정 환경과 양육 방식에 있어서 기능 장애가 있는 것이라 할 것이다.

나는 조사를 하면서 엑소시스트 이야기 그리고 소년과 그의 가족들과 가까운 이들이 해준 증언들 사이의 불일치로 인해 실망스럽기까지 할 정도였다.

마지막으로 구마 의식에 참여했었던 비숍 신부의 경우 소년의 가족 구성원에 대해서와 소년의 초기 증상들에 대해 파악하지 못했다.

그가 기록한 일기 기록은 대부분 소문을 전달하는 식이었으며, 그러한 소문의 근원지인 소년이 사기 행각을 벌인 것은 아닌지 자세히 행동을 관찰하거나 조사한 적도 없다. 소년의 심인성 질환과 같은 심리적 문제일 가능성에 대해서도 논의되지 않았다.

또 소년의 어머니와 외할머니(종교적 미신에 대한 믿음이 굳센)와 달리 소년의 아버지의 경우 지인들에게 공공연히 아들이 악령이 들렸다고 믿지 않는다고 했었다.

바로 이러한 일기 기록문을 기반으로 작가 블래티는 엑소시스트 이야기를 쓴 것이다.

나는 소년에게 최초로 구마 의식을 행했다던 세인트 제임스 교회의 휴즈 신부에 대해 심층적인 조사에 나섰다.

결론적으로,

휴즈 신부는 조지타운 대학 병원에서 최초로 구마 의식을 거행한 적도(세간엔 휴즈 신부가 병원에다 소년의 구속을 지시한 뒤 구마에 나섰다고 알려짐), 소년의 집을 방문한 적도, 소년이 침대 장식이나 스프링을 뽑아 들어 내던지며 팔에 영구적인 손상을 가한 적도(세간엔 이로 인해 다시는 다친 손을 위로 올릴 수 없었다고 알려짐) 없었다는 것을 확인했다.

소년은 1949년 2월 28일 오전에 조지타운 대학 병원에 입원해 3월 3일 정오에 퇴원했다. 그 과정에서 휴즈 신부가 병원 내에서 구마 의식을 행한 적도 없으며, 이후 소년의 집을 방문한 기록도 없다.

소년의 어머니가 상담차 소년을 데리고서 마운트 레이니어 내 세인트 제임스 교회를 1회 방문했다는 기록이 전부였다.

소년을 구마 의식했다던 바우든 신부와 비숍 신부의 일기 기록에서도 휴즈 신부가 앞서서 구마 의식을 했다지의 언급은 존재하질 않는다.

세간의 휴즈 신부가 구마 의식 도중 영구적인 부상과 충격을 입어 이후 은둔하다시피 했다던 이야기도 모순됐다.

1949년 봄 내내 신부를 목격했다던 세인트 제임스 중학생들은, 남학생 야구 코치이자 체육 교사였던 휴즈 신부가 언제나처럼 운동에 같이 참여했으며 어떠한 상처나 부상도 없었다고 인터뷰했다.

(주: 이밖에 각종 모임 및 활동 내역을 통해 세간의 이야기가 맞지 않는다는 증빙을 세세히 다루고 있으므로 분량상 중략)

휴즈 신부는 1980년 10월에 사망할 때까지 2,712번의 세례, 486번의 결혼 주례, 251번의 개종자 세례, 247번의 장례식 미사를 집행했다고 기록돼 있다.

프랭크 보버 신부 (Strange Magazine)

휴즈 신부의 구마 의식 일화와 더불어 소년이 마운트 레이니어에 거주한다고 언론인들에게 소스를 제공한 이는, 바로 지역의 성직자였던 프랭크 보버 신부였다.

보버 신부는 휴즈 신부가 생전에 자신에게 소년에 대한 이야기를 털어놨다고 주장하며, 친언론인적인 행보를 이어가 엑소시스트 전설의 매우 신뢰할 만한 정보원 역할을 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나는 워싱턴 D.C. 지역에서 안식년을 즐기고 있던 보버 신부를 만나러 직접 만나봤다.

보버 신부는 아주 친절하고 협조적으로 엑소시스트 이야기에 대해 말해줬다.

보버 신부는 소년이 마운트 레이니어 벙커 힐 로드에 거주했으며, 소년의 방 안에서의 냉기, 전화기가 스스로 움직이던 일, 소년이 자기가 익힌 적 없던 라틴어를 쓰던 일, 휴즈 신부의 팔을 베어 다치게 했던 일 등을 말이다.

여기서 내가 소년이 마운트 레이니어에 거주하지 않았다는 증거를 제시하자 보버 신부는 다소 방어적인 태도로 변했다.

보버 신부는 말했다.

'제가 직접 심층 조사를 한 적은 없습니다. 그저 휴즈 신부께서 말해주셨던 것을 그대로 받아들였을 뿐이죠. 제가 말씀드릴 수 있는 건, 휴즈 신부께서 제게 특정한 정보를 줬고 그러한 정보를 제가 언론과 대교구 등에 전달한 것뿐이라는 겁니다. 저는 사건 당시인 1949년엔 해당 지역에 있지 않았아요. 저는 1980년부터 1985년에까지 세인트 제임스 교회에 있었죠. 저는 인터뷰할 때마다 제가 아는 것만 말했을 뿐입니다.'

이어진 보버 신부와의 인터뷰를 통해 한 가지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그때까지의 내 조사를 통해 밝혀낸 소년의 어머니가 교회와 접촉을 시작했으며 휴즈 신부는 실제론 소년의 집을 방문한 적이 없었다는 사실을 보버 신부에게 확인시켰다. 보버 신부는 이에 동조하며 휴즈 신부는 한 번도 소년의 집을 방문한 바가 없고, 먼저 소년을 데려온 이가 소년의 어머니였으며, 휴즈 신부에게 모든 상황 및 정보를 전달한 이는 소년의 어머니였다고 말했다.

더불어, 보버 신부는 소년의 어머니가 신원 보호를 위해 거주지를 마운트 레이니어라고 둘러댔거나 혹은 교회 차원에서 비밀 유지를 위해 그리했을 수 있겠다고 말했다.

나는 소년의 구마 의식 당시 실제로 직접 참여했던 관계자와의 인터뷰를 시도했다.

휴즈 신부, 바우든 신부, 비숍 신부 모두 이미 세상을 떠난 지 오래였으나 월터 할로란 신부는 생존해 있었다.

할로란 신부는 바우든 신부 및 비숍 신부의 요청에 따라 소년의 구마 의식에 동반했던 핵심 인물이다. 당시 그는 세인트 루이스 대학교에서 석사 학위 과정을 밟던 26세의 예수회 학도였다.

할로란 신부는 네브래스카주 오마하의 크레이튼 대학교 병원에서 사제직으로 근무하고 있었고, 전화 통화를 통해 인터뷰를 할 수 있었다.

월터 할로란 신부 (AP)

질: 소년이 당시 악령 들렸었다고 생각하시는지 아닌지를 기록화할 의향이 없나요?

답: 없습니다. 저는 자격이 없으니까요. 저는 관련 현상이나 그러한 것들을 연구한 적이 없었거든요.

질: 소년이 영어가 아닌 다른 언어로 말하던가요?

답: 그냥 라틴어였어요.

질: 소년이 자신이 하는 라틴어를 이해하고서 말하는 것 같던가요?

답: 우리가 하는 걸 흉내 내서 말하는 것 같더군요. (주: 가톨릭은 일관된 의미의 전달을 위해 고대 언어인 라틴어를 공식어로 사용함)

질: 소년의 목소리에 변화가 있다든지 그러진 않았나요?

답: 그러지 않았어요.

질: 소년이 선생님의 코를 가격한 적이 있다고 하던데요, 소년이 엄청난 괴력을 발휘했던가요?

답: 글쎄요, 생각해 본 적이 없어서. 타이슨이 때림 직한 거나 그런 건 아니었으니까요.

질: 구마 의식 당시 목격하셨던 것 중에 설명할 수 없을 만한 것들 말씀해 주실 수 있을까요?

답: 음.. 서랍장에서 병이 미끄러지던 거나 침대가 움직이던 거요.

질: 그 침대가 고정된 형태였나요 아니면 롤러가 달려있던 거였나요? (주: 조사 과정에서 당시 침대들이 롤러가 달려있어 손쉽게 흔들리고 움직이게 만들 수 있었다는 사실을 알아냈기에)

답: 다른 침대들처럼 롤러가 달린 거였죠.

질: 소년이 구마 의식 도중 침을 뱉고, 소변을 보고, 구토를 하는 등 여러 격렬한 행위를 했다고 하던데요.

답: 침은 자주 뱉었는데.. 그렇게 심각한 건 아니었어요. 구토나 소변을 보던 기억은 없네요. (주: 조사 과정에서 소년이 평소 습관적인 장난의 일환으로 침을 높게 멀리 뱉는 행위를 즐겼다고 함)

질: 소년의 아버지를 만나 뵌 적이 있는지요. 구마 의식 과정에서 소년의 아버지도 함께했나요?

답: 한 번 만난 것 같네요. 소년의 아버지는 대부분 일하러 나가 있어서 이 일엔 전혀 관여하지 않으셨죠.

질: 소년의 몸에 갑자기 표식이나 낙인이 나타났다고들 하는데 직접 보셨나요? 다른 작가들이 펴낸 이야기에 따르면 숫자나 문자 및 단어였다고 하던데요.

답: 저는 그것들을.. 네, 피부 표변으로 바로 봤어요. 그게 어떤 명확한 표식이나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는 정말 구분하기가 어렵네요.

질: 그 자국들에서 피가 흘러내리던가요?

답: 그보단 립스틱에 가까웠어요. 아주 선명한 마크가 좀 있었죠.

질: 혹시 소년의 손톱에 살점이나 피가 묻어 있는지 확인해 본 적은 없으신가요?

답: 음.. 당시 우리는 확인하지 않았어요.

생존해 있는 유일한 엑소시스트 이야기의 핵심 관련자를 인터뷰하고서, 나는 조사의 끝에서 사건 당사자인 소년에게 접촉해 인터뷰를 하고자 했다.

소년의 실명을 통해 코티지 시티 지역 소식통의 도움을 받아 소년이 현재 거주하는 주소와 전화번호를 입수할 수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전화를 걸어 소년과 통화할 수 있었다. (주: 이 전화 통화 당시 소년은 환갑 무렵의 노인이었음)

우리의 대화는 짧고 직설적이었다.

소년은 매우 깊고 거친 목소리로 퉁명스레 말했다.

그는 자신이 마운트 레이니어에 거주한 적이 없으며 코티지 시티에서 자랐음을 인정했다.

또한, 영화 <엑소시시트>를 보긴 했으나 영화에 대한 자신의 견해는 밝히지 않았다.

그는 내가 연락을 해왔다는 사실 자체에 굉장히 놀라워했으며, 어떠한 협조도 하지 않겠으며 자신이 사건의 당사자인 그 소년이었는지도 확인해 주지 않았다.

그는 다시는 자신에게 전화하지 말라고 단호히 말했다.

그의 반응은, 먼 과거의 어떠한 창피한 사건을 떠올리고 싶어 하지 않는 사람의 전형적인 모습이었다.

옵사스닉이 찾아낸 소년의 고등학교 졸업사진. 신원 보호를 위해 실명을 밝히지 않았으며 사진 또한 모자이크 상태로 공개했다 (Strange Magazine)

모험이 모두 끝났다.

우리는 이제 그 소년이 누구인지, 실제로 어디에 거주했는지, 학교에 다녔는지, 친구는 누구였는지, 가정생활은 어떠했는지, 그리고 소년의 본래 행동과 성격 특성도 알게 됐다.

세간에 알려진 일기 기록에 따른 엑소시스트 이야기들의 신뢰성에도 의문이 제기됐다.

사건의 핵심 참여자인 할로란 신부는 소년으로부터 어떠한 초자연현상도 목격한 바가 없으며 라틴어 구사나 목소리의 변화도 없었다고 증언했다. 또 소년은 괴력을 지니지도, 이야기에서처럼 과도한 구토나 소변 행위도 없었다. 소년의 몸에 나타났다는 표식이나 낙인도 불분명했다.

조사의 끝에서, 나는 개인적으로 소년이 악령에게 깃들였다고 믿지 않는다.

소년은 가정생활에서 심각한 정서적 문제를 겪었음을 시사하는 증거들이 너무 많았다. 소년을 지나치게 과잉보호하는 어머니와 냉담한 아버지를 둔 철없고 버릇없는 불안한 심리의 외동아이였음을 시사한다.

나는 소년의 당시 행동을, 무리로부터 소외당하던 청소년이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그 지역을 떠나 세인트루이스 지역으로 이사하고 싶었으며 관심을 끌고 싶은 나머지 끝내 화를 분출하는 것이었다고 본다.

(주: 세간의 이야기 중 소년의 흉곽에서 'LOUIS'라는 단어가 나타나기에, 이를 계시로 여긴 가족이 세인트루이스 대학에 다니던 친척 집에서 잠시간 머무르며 구마 의식을 받았다고 함)

그러한 노력의 일환으로, 소년은 자신이 설계한 게임을 시작했던 것이다.

그로 인해 뜻하지 않게 구마 의식 경험이 없는 사제들이 모여 소년을 침대에다 묶는 결과가 나온다.

이에 대한 소년의 반응은 여느 평범한 또래들과 마찬가지였다. 소년은 분노로 반응했고 속박에서 벗어나기를 원했다.

심인성 질환의 역학을 탐구하지 않더라도, 구마 의식 이전의 소년에게 무언가 문제가 있었다는 점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당시의 사건은, 사실 현대 정신의학이 가장 잘 다룰 수 있었던 문제였다.

소년은 그저 여타 평범한 10대 소년에서 벗어났던 것뿐이다.

엑소시스트 이야기는 기사와 소설 그리고 영화의 여파로 세간에 널리 알려졌음에도 불구하고, 나 이전에 누구도 해당 사건을 실제로 조사한 사람이 없다.

소년의 신원을 확인한 적도, 인터뷰한 적도 없다. 어떠한 이도 소년의 친구나 동네 사람들과 인터뷰를 한 적이 없다. 애초에, 정확한 거주지를 파악한 언론인조차 없다.

소년은 자각하지 못했겠으나, 1949년 1월과 4월 사이 코티지 시티의 말썽꾸러기 10대 소년을 중심으로 벌어진 사건이 훗날 전 세계 사람들에게 깊은 영향을 미쳤다.

엑소시스트 이야기의 영감을 준 해당 사건은 역사적 초자연현상의 가장 중요한 사례 중 하나로 언급된다.

해당 사건은 전 세계적으로 수백의 모방 사건에 영향을 미치며 이에 따른 엑소시즘으로 말미암아 폭행, 신체 절단, 심지어 사망까지 초래하게 됐다.

이번 조사를 통해 이제 신원 불명이었던 소년에 대해 밝혀졌으며 이전에 없던 풍부한 정보가 확보됐다.

향후 해당 사건에 대한 조사들에서는 신화, 거짓 단서, 이기적인 선전으로 이뤄진 혼란스러운 미로에서 벗어나 문제의 핵심에서 시작이 있기를 바란다.

이렇듯..

엑소시스트 이야기에는 실로 놀랍고 흥미로운 사실들이 숨겨져 있었다.

어쩌면..

소설과 영화판 이야기보다도 더 말이다.

정리하자면..

이해하기쉽게 지금으로 따지자면,

이른바 외부 환경으로 인해 '금쪽이'였던 소년에 대해 집안에서 영향력이 셌던 외할머니와 모친(종교적 미신에 대한 믿음이 강했던)으로 인해 모친이 지역의 루터교(이 무렵 가족은 루터교 신자였음) 목사였던 루터 슐츠 목사에게 악령이 깃든 것 같다며 상담을 했고,

슐츠 목사는 그러한 일은 가톨릭 사제들이 대응책을 알고 있을 터이니 가톨릭 신부를 찾아가라 말했으며,

이후 슐츠 목사가 워싱턴 D.C. 지역 초심리학회 지부 회의에서 소년의 장난이었다는 뉘앙스로 가벼이 연설을 한다.

허나 초심리학회는 이를 진지하게 여기며 전파를 실시하면서 곧 언론이 달려들기에 이른다.

한편 소년의 가족은 지역의 휴즈 신부를 찾아가 상담을 했으나 성수 한 병만을 건네받는다.

그리고 소년의 가족친지로부터 이야기를 전해 들은 세인트 루이스 대학의 비숍 신부가 친분이 있던 바우든 신부와 논의 끝에 대주교로부터 구마 의식 거행을 허락받는다.

여기에 당시 신학자였던 할로란 신부가 참여하면서 3인이 1달 넘도록 구마 의식에 매달린다.

소년은 낮이면 멀쩡하다가도 밤만 되면 난폭해졌으나, 결국은 스스로 악령이 자신의 몸을 떠났다고 말한 뒤로 얌전해졌다고 한다.

비록 사제들의 의도나 목적이 어긋나있었다고손치더라도..

제2차 세계 대전 참전 용사 출신의 강인한 신부였던 바우든 신부를 중심으로 1달 넘도록 구속과 함께 소년의 악바리에도 끄떡 않는 대응이 이어지면서..

금쪽이였던 소년이 완전히 치료가 된 것이었다.

그리고..

소년은 이후 다시 학교에 재입학하면서 무사히 고등학교까지 졸업한 것을 끝으로 소식이 끊긴다.

그렇다면..

정말 소년은 완전히 치료가 된 것이며..

이후 어떠한 삶을 살았던 것일까?

지난 2020년, 메릴랜드 지역의 로날드 에드윈 훈켈러라는 85세 노인이 뇌졸중으로 세상을 떠난다.

그렇다.

그가 바로, '소년'이었다.

소년의 신상을 알고 있던 소수의 가족친지, 언론인, 예수회 사람들 모두 비밀을 유지하면서 그를 지켜주고 있었다.

헌데, 이제 그가 세상을 떠나면서 언론 기사로 '소년'의 죽음 소식과 함께 그의 연혁이 밝혀지게 된다.

평생 메릴랜드 지역에서 살았던 소년, 로날드.

그는 40년 넘게 NASA에서 엔지니어로 일하며 1960년대 아폴로 임무에 기여했다.

그는 우주 왕복선 패널이 받는 과도한 열기를 견딜 수 있는 기술 개발에 공헌하며 해당 물질에 대한 특허에도 관여됐다.

한편..

소년, 아니, 로날드의 가까운 지인에 따르면..

로날드는 늘상 자신이 엑소시스트 이야기의 모델이라는 것을 남들에게 들킬까 봐 극도로 두려워했다고 한다.

혹시나 NASA의 직장 동료들 사이에 퍼지게 될까 봐, 그리고 할로윈 날마다 자신의 집에 사람들이 찾아오리란 걱정에 말이다.

그렇다!

그는 정말 완전하게 금쪽이 치료가 된 것이었다!

전 세계에 엑소시스트 이야기를 퍼트리게 되는 이야기 속 주인공이자 엑소시즘의 아이콘이었던 소년이, 이후 본격적인 인류 문명의 우주 탐사 첫발에 헌신하게 됐으니까!

로날드 훈켈러의 고등학교 졸업사진 (Troy Taylor)
로날드 훈켈러의 고등학교 졸업사진
로날드 훈켈러의 고등학교 졸업사진 (Troy Taylor)

'엑소시스트 이야기'의 진실을 파헤쳤던 작가 마크 옵사스닉.

그는 그러한 기고문의 말미를 다음과 같이 마무리 지었다.

"이 엑소시스트 이야기에서 각자가 자신의 관점으로 해당 사건에 접근했다.

정신과 의사에게 있어 소년은 정신질환을 앓는 환자였다. 사제들에게는 소년의 몸에 악령이 깃든 일이었다. 작가와 영화 제작자에게 있어서는 비즈니스적인 훌륭한 스토리였다.

각자가 진실을 보고 있다고 여겼지만, 실제로는 자신의 의도에 맞는 정보만을 강조했던 사건이었다."

그렇다.

'엑소시스트 이야기'를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바로 다음이 가장 적합할 것이다.

"In here, with Us(이 안에, 우리와 함께)"

이는 영화 <엑소시스트>의 대표적인 명대사로 꼽히며, 극 중 카라스 신부가 처음으로 악령 들린 리건(소녀) 만난 자리에서 '리건은 어디 있지'라고 묻자 돌아온 대답이다.

이 명대사처럼, 정말 '엑소시스트 이야기' 속 로날드(소년)는 각자의 '우리'와 함께 했던 것이다.

참조

<The Guardian/Boy whose case inspired The Exorcist is named by US magazine> Maya Yang
<The Washington Post/Priest Frees Mt. Rainier Boy Reported Held in Devil's Grip> Bill Brinkley
<Saint Louis University Articles&Archive/Exorcism Exposé>
<Strange Magazine/The Haunted Boy of Cottage City: The Cold Hard Facts Behind the Story That Inspired "The Exorcist"> Mark Opsasnick

-끝-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