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의 콘택트렌즈를 찾아라

2005년 4월 26일, 미국 노스캐롤라이나주 더럼의 교외 지역.

이날 저녁, 25세 동갑내기 부부 레이븐 아바로아와 자넷에게 비극이 벌어진다.

남편인 레이븐이 축구를 하러 외출했다가 돌아오니 아내가 위층 방에서 피 웅덩이 위로 있었다. 그리고 옆방에는 부부의 돌도 안 된 아들 카이덴이 평화롭게 잠들어 있었다.

레이븐은 즉시 911에 전화를 걸었다.

"제 아내가 총 같은 거에 맞은 것 같아요! 사방에 피가 있어요! 숨을 쉬지 않아요!"

부검 결과 자넷은 목과 가슴 부위를 칼로 찔려 현장에서 즉사한 것으로 밝혀졌으며, 그녀의 몸 안엔 임신 중인 아이가 있었음이 확인됐다.

문화와 예술 그리고 교육과 의료의 도시로 유명한 더럼.

이곳 지역사회를 충격에 빠뜨린 '21세기 더럼 지역 최악의 살인사건'의 등장이었다.

레이븐과 자넷은 1998년경 버지니아주 사립 교양대인 서던 버지니아 대학교에서 만난 사이였다.

둘은 모르몬교 가정에서 자란 신자였으며(서던 버지니아 대학교가 모르몬교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곳이며 학생 다수가 신도임) 서로 대학의 동료 축구선수였다.

둘은 아주 빠르게 가까워졌으며 곧 깊은 관계가 됐다.

그리고 2년 후인 2000년 8월, 워싱턴 D.C.에 있는 모르몬교 사원에서 결혼식을 올리기에 이른다.

결혼식 직후 둘은 취업을 위해 더럼 지역에 보금자리를 마련했으며, 이곳의 스포츠 의류 회사에서 일하며 결혼생활을 시작한다.

그렇게 2004년 10월, 아들인 카이덴이 태어난다.

( Krista Christiansen)
(Britney Romito)
(Tim Dowd)

그리고..

문제의 2005년 4월 26일.

이날 저녁 8시경, 둘째를 임신한 상태였던 자넷은 언제나처럼 침대에 누워 TV를 보며 일찌감치 잠자리에 들 준비를 마친 상태였고 아들 카이덴은 이미 깊은 잠에 빠진 상태였다.

한편, 레이븐은 미리 약속돼 있던 친구들과의 축구 시합을 위해 집을 나와 2시간가량 외출을 한다.

이후 밤 10시가 넘어 집에 돌아왔을 때, 자넷은 끔찍한 모습으로 남편을 맞이하고 있었다.

(ABC News)
(ABC News)
(Durham Police Department)

평화롭던 더럼 지역에서 발생한 강력 사건.

이어진 경찰과 형사의 수사에서, 레이븐은 집 안의 노트북과 수집용 칼이 없어졌다고 증언했다.

낯선 침입자의 존재는 지역사회를 불안에 빠뜨리기에 충분했으므로, 더럼 경찰과 형사들은 몇 주간에 걸쳐 집중적인 수사를 펼쳤다.

허나..

이 낯선 침입자에 대한 물적 증거나 흔적은 일체 발견되지가 않는다. 일반적인 강도로 여기기에는 지나치게 프로페셔널적인 모습이었다.

그렇게..

몇 주는 몇 달이 되고, 몇 달은 또다시 몇 년이 돼버린다.

그리고..

2009년 말.

더럼 경찰은 해당 사건의 5번째 수석 형사로 베테랑인 찰스 솔 형사를 배정한다.

여기서, 솔 형사는 범죄 현장 사진들을 차분히 살펴보던 와중 형사 생활에 다시 없을 직감이 뇌리를 후림을 깨닫는다.

바로, 다음의 사진에서 말이다.

(ABC News)

위 사진은 사건 현장의 세면대를 촬영한 것이다.

과연..

이 사진에서 솔 형사가 직감적으로 알아차렸던 것은 무엇일까?

그건 바로..

'콘택트렌즈 케이스'였다.

사진을 보면, 가운데로 유명 콘택트렌즈 세척액인 리뉴사의 세척액과 그 옆으로 렌즈 케이스가 위치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헌데, 이 렌즈 케이스 뚜껑이 열려있는 상태이다.

그렇다.

누군가가 콘택트렌즈를 착용하고선 보관 케이스에 렌즈를 돌려놓지 않았다는 방증이다.

그리고..

이를 통해 솔 형사는 하나의 모순을 캐치하기에 이른다.

찰스 솔 형사 (ABC News)

집 안에 있던 콘택트렌즈 세척액과 렌즈 케이스는 무얼 시사하는가?

이는, 집 안의 누군가가 평소 콘택트렌즈를 사용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카이덴은 갓난아기이므로 당연히 배제.

남은 건 필연적으로 레이븐과 자넷.

레이븐의 것일까?

하지만 떠올려라.

레이븐은 사건 당시 친구들과 축구 경기를 하러 갔다. 즉, 집을 나와 외출했다는 의미이다. 그러니까, 렌즈 케이스 뚜껑을 열어둔 채 집 안에 방치할 일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럼, 자넷?

평소 집 안에서 렌즈를 끼고서 생활하는 방식이라면, 타성적으로 렌즈 케이스 뚜껑을 열어둔 채 방치하는 게 가능하다. 어차피 잘 때 렌즈 뚜껑을 세척하고서 새로 세척액을 받은 뒤 렌즈를 빼 보관해야하니까.

그렇다면, 렌즈는 자넷이 평소 착용하던 것으로 상정할 수가 있다.

그리고, 이럴 경우 지금까지의 사건 개요에서 강력한 모순 하나가 발생한다.

그건 바로, 외출 직전 '둘째를 임신한 상태였던 자넷은 언제나처럼 침대에 누워 TV를 보며 일찌감치 잠자리에 들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고 증언한 레이븐의 진술 말이다.

(ABC News)

솔 형사는 수사관들이 남긴 수사 기록물을 샅샅이 뒤지기 시작한다.

허나, 그 어느 것에서도 콘택트렌즈가 발견됐다는 세부 사항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잠자리에 들기 직전의 사람이 렌즈도 빼지 않고서 누워버린다?

솔 형사는 자신의 직감을 확인하고자 자넷의 친가 가족들 및 친구들에게 인터뷰를 요청한 끝에 다음의 증언을 얻을 수 있었다.

"자넷은 언제나 밤마다 잠자리에 들기 직전에 또는 TV를 보다가 잠들 때마다 먼저 렌즈를 빼는 게 일과였어요."

솔 형사가 렌즈는 시력 교정을 위한 도구가 아니라 살인 사건의 실마리를 비추는 도구였음을 확신하는 순간이었다.

사실, 그간의 수사 기록물에서도 레이븐에겐 용의점이 존재했었다.

부부 사이에선 심각한 문제가 존재했다.

자넷의 친자매들에 따르면, 언젠가 자신들을 찾아와 결혼 생활을 중단하고 싶다며 토로한 적이 있단다. 그 이유에 대해, 레이븐이 여러 여자와 바람을 피운 사실을 알게 되면서 별거 상태에 들어섰다는 것.

허나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자넷은 임신한 사실을 알게 되면서, 아이를 미혼모인 상태로 키우고 싶지 않다며 부부 관계의 회복을 꾀했다고 한다.

그렇게 레이븐은 더는 바람을 피우지 않겠다고 맹세하면서 부부는 2004년 10월 아들인 카이덴을 맞이하게 된다.

그런데..

2004년 12월.

레이븐은 자신이 일하던 스포츠용품 회사에서 고급 운동 장비들을 빼돌려 재판매하면서 9,600달러 상당의 횡령 혐의로 기소된 바가 있다. 이에 레이븐은 자신의 혐의를 인정했고, 같은 직장에 다니던 자넷은 실망감과 부끄러움으로 인해 자진사를 하고 만다.

비록 레인븐이 2년 간의 보호관찰 명령을 받으며 감옥신세를 면하긴 했으나 잠시간 꿰매지나 했던 둘의 관계는 급속도로 악화됐다.

그리고, 4개월 후인 2005년 4월에 자넷은 둘째 임신 상태에서 누군가에게 살해된 채로 발견된다.

그로 인해, 레이븐은 아내가 가입 중이었던 50만 달러짜리 생명 보험 혜택을 받을 수 있었다. 실직으로 인한 재정 문제로 임대료 지불에 차질이 있음에도 항상 제때 납부하던 생명 보험금을 말이다.

DNA나 침입 흔적과 같은 어떠한 물적 증거도 남기지 않고서 반항의 흔적도 발생하지 않도록 부지불식간에 살해하고는 연기처럼 사라진 살인자

결국 이러한 용의자상은, 남편인 레이븐의 증언 '외출 직전 아내가 잠자리에 들 준비를 마친 채였고 집에 돌아오니 살해당한 채였다'이 유효할 경우에만 가능한 것이었다.

초기 수사에서 물론 경찰은 레이븐에게도 용의점을 두었으나, 그의 알리바이에서 문제를 찾을 수가 없었으며 직접적인 범죄 연관 증거를 찾을 수 없었기에 그의 증언에 매몰된 채 제3의 범인을 쫓고 있었던 것이다.

솔 형사는 몇 차례의 연락 시도 끝에 사건 직후 유타주로 이주했던 레이븐과 통화할 수 있었고, 여기서 과거 자신이 했던 증언들과 상충되는 말들을 하는(집에 돌아왔을 때 불이 켜져 있었는지 꺼져 있었는지, 아들인 카이덴이 울고 있었는지 숙면 중이었는지 등) 그를 통해 마침내 확신하게 된다.

"레이븐 아바로아가 바로 아내를 죽인 범인이야!"

(ABC News)

솔 형사는 노스캐롤라이나주의 유명 안과 전문의였던 찰스 즈워링 박사에게, 5년 정도 된 시신을 꺼내 눈에서 콘택트렌즈 착용 여부를 알아낼 수 있느냐고 물었다.

그리고, 일반적으론 콘택트렌즈가 분해될 것이긴 하지만 절대라고는 말할 수 없다는 대답을 듣는다.

2010년 2월 1일.

사건으로부터 거의 5년이 흐른 이날, 경찰은 레이븐을 1급 살인 혐의로 체포 및 기소한다.

체포 당시 레이븐의 머그샷 (Montpelier Police Department)

허나..

어디까지나 많은 정황 증거들에 의한 혐의 및 기소였으며 여전히 결정적 증거가 부재했다.

이제..

마지막 결단은 자넷의 친가 가족들에게 돌려졌다.

그녀의 가족들은 이미 살해당한 자넷이 죽어서도 편히 쉬지 못한다는 것에 발굴을 고민했고, 고심 끝에 사건의 해결을 위해 시신 발굴 동의를 허락한다.

그렇게 2010년 7월.

자넷의 시신이 꺼내졌다.

그녀의 눈에선 누렇게 변색된 채 짓이겨진 콘택트렌즈 조각이 나왔다.

조사에 협력한 즈월링 박사가 조심스레 멸균수로 세척한 끝에 현미경을 통해 다음의 사항을 확인할 수 있었다.

실지 문제의 콘택트렌즈 (Charles Zwerling)

숫자 '123'.

유명 콘택트렌즈 브랜드이자 자넷이 사용하던 아큐브사의 특정 렌즈 모델에 새겨지던 ID 번호와 동일한 숫자였다.

자넷이 사건 당시 렌즈를 착용한 채 일과를 보내던 중 공격을 받았다는 방증이자, 레이븐의 알리바이를 뒷받침해 줬던 그의 증언이 무력화되는 순간이었다.

이후 3년에 걸친 지리한 과정 끝에..

2013년 3월, 마침내 레이븐이 아내 살해 혐의로 재판대에 세워진다.

실지 매장된 사람의 눈에서 콘택트렌즈가 분해되지 않은 채 발굴될 수 있다는 법정 증거 효력 여부를 위해, 즈월링 박사는 1년에 걸쳐 콘택트렌즈 착용 돼지 안구의 매장 및 발굴 실험을 진행했다. 여담으로, 법의학 계통에선 우리 인간과 가장 유사한 동물이 돼지이다 (Charles Zwerling)

수사 과정에서 레이븐이 남긴 많은 증언 불일치와 더불어 즈월링 박사가 콘택트렌즈 증거물을 배심원단에게 제시했다.

자넷의 친가 가족들의 증언(레이븐의 불성실한 결혼 생활 및 언어적 학대 사실 등)도 잇따랐다.

바네사 폰드의 증언 역시 배심원단에 영향을 끼쳤다.

레이븐은 자넷의 사망 직후 아들인 카이덴을 데리고서 유타주 솔트레이크시티로 이주했었다. 그리고 같은 보육 프로그램에 속해 있던 미혼모 폰드를 만나게 됐다.

폰드는 처음 레이븐을 성실한 싱글 파파로 여겨 급속도로 사이가 가까워졌다.

(Vanessa Pond)

이 과정에서 레이븐이 결백하다고 믿은 폰드는 2008년 여름경 결혼식을 올린다.

하지만 곧 얼마 지나지 않아 레이븐이 폭력적인 모습을 드러내며 물리적 충돌까지 발생했고, 결혼 4개월여 만에 신상의 불안에 빠진 폰드는 별거 후 결혼 무효를 하기에 이른다.

이렇듯 경찰 수사 기록에서 드러난 여러 불일치들과 의구심들 그리고 주변인들의 증언이 이어졌다.

관련 증인 수만 80명에 달했고, 제시된 정황증거가 500여 개에 달했다.

허나..

레이븐이 자넷을 살해했다는 직접적인 물적 증거는 여전히 부재했다.

검찰 측은, 레이븐이 축구를 하러 외출하기 전에 자넷을 칼로 찌르고는 그대로 죽어가는 아내와 함께 갓난아기를 남겨두고서 집을 나왔다고 주장했다.

레이븐의 변호인단은, 결론적으로 레이븐이 자넷을 살해했다는 물적 증거나 목격자가 없음을 강조했다.

결국, 검찰 측은 12명의 배심원단을 설득하는 데에 실패한다.

'모든 배심원단'을 설득하는 데에 말이다.

첫 번째 재판 결과, 배심원단은 11대 1로 레이븐의 유죄에 투표했다.

미국의 배심원단 형사 재판에선, 유죄 판결 평결 시 반드시 만장일치가 필요하다.

그렇게..

2개월여 간의 고등법원 재판 끝에 판사의 오심 선고를 통해 교착 상태가 유지되면서 기각이 선언된다.

재판 직후 변호인단과 레이븐의 모습 (Harry Lynch)
재판 직후 자넷의 모친과 친자매들의 모습 (Harry Lynch)

2014년 3월.

두 번째 재판을 불과 몇 주 앞두고서..

레이븐은 '앨포드 탄원'에 합의한다.

앨포드 탄원이란, 피고인이 자신의 행위와 혐의에 대해 무죄 주장을 유지하면서도 검찰 측의 증거 제시 및 유죄 주장을 받아들이며 형량을 합의해 재판 절차를 생략하는 미국 형사 재판 시스템이다.

그렇게 레이븐은 합의와 함께 다음과 같이 사유를 밝힌다.

"처음 재판도 공정하지 못했지만 두 번째 재판 역시 그럴 것 같다. 내가 저지르지도 않은 일로 남은 여생 동안 감옥에서 보낼 가능성을 감수하는 것은 가치가 없다고 생각한다. 그게 이 절차에 합의한 유일한 이유이며, 나는 내 아내를 죽이지 않았다."

한편..

자넷의 친가 가족들은 실망감을 표하기도 했으나, 레이븐이 마침내 자넷 살해에 대한 것을 인정한 것이라며 동시에 앞으로 지리하게 이어질 재판 스트레스를 우려해 탄원에 합의하기로 결정한다.

그렇게..

만약 2차 재판에서 하향 조정된 2급 살인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을 경우 19년에서 24년까지의 형을 선고받았을 레이븐은, 탄원 합의에 따른 형량 거래로 7년에서 10년까지의 형을 선고받는 상황이 된다.

그리고..

이미 재판 기간을 포함한 4년 간의 복역 기간을 인정받은 레이븐은..

2018년 크리스마스 날, 감옥에서 석방된다.

그는 석방 이후 유타주 거주하며 아들인 카이덴을 양육하고 있다고 전해진다.

과연..

2005년 4월 26일 밤..

그날밤 레이븐과 자넷에게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었던 것일까.

그 순간 자넷의 콘택트렌즈에는 어떤 모습이 새겨지고 있었던 것일까.

(Charles Zwerling)

참조

<ABC 20/20/The Secret in Her Eyes>
<ABC News/Contact lenses break cold case murder of Janet Abaroa wide open>
<ABC News/How contact lenses blew a 2005 murder case wide open and led to a husband serving prison time> Lauren Effron & Joseph Diaz & Denise Martinez-Ramundo
<The News&Observer/The Raven Abaroa murder trial in Durham, NC: A timeline of events> Brooke Cain

-끝-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