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족 영애였던 내가 남편을 잃고서 해적왕이 된 건에 대하여
역사상 유럽 전역이 가장 분주했던 14세기.
분주했던 이유는, 1337년부터 1453년에 이르기까지 잉글랜드 왕국과 프랑스 왕국이 왕위 계승 및 영토 문제로 대립하면서 이어진 '백년 전쟁' 때문이었다.
백년 전쟁은, 궁지에 몰렸던 프랑스가 신탁을 받았다고 주장한 농민의 딸 '잔 다르크'의 등장으로 전세를 뒤집었던 중세 유럽의 가장 대표적인 전쟁사이다.
헌데..
1429년 역사에 출현한 잔 다르크 이전, 또 한 명의 잔이 백년 전쟁 서막을 장식하고 있었다는 사실.
오늘 들려줄 이야기가, 바로 이 귀족 영애였던 잔에 대한 이야기이다.
1300년, 당시 프랑스와 잉글랜드 두 왕국 사이에서 전략적 위치를 고수하던 독립적 봉건 국가 브르타뉴 공국.
바로 이 브르타뉴 공국의 접경지역인 프랑스 서해안 지방 벨르비-쉬르-비에서, 오늘의 주인공인 귀족 영애 '잔 루이즈 드 벨빌'이 태어난다.
잔의 부모 모리스 4세 몽테귀와 레티스 드 파르트네는, 각각 브르타뉴 지역과 푸아투 지역의 유력 봉건 영주 가문 출신으로 가문의 영향력과 세력의 강화를 위해 결혼이 이뤄졌던 케이스이다.
이는 잔 또한 마찬가지였다.
당시 귀족 가문들 간의 전략적 동맹을 위한 수단은 결혼이었고, 12세였던 잔은 브르타뉴 지역 유력 귀족 가문인 샤토브리앙 가문의 19세 제프리 드 샤토브리앙과 가약을 맺는다.
허나..
이 첫 번째 결혼 생활은 그리 오래가지 않는다.
1326년, 남편인 제프리 드 샤토브리앙이 사망하면서 26세의 잔은 두 자녀를 둔 과부가 된다.
제프리 드 샤토브리앙은 당대의 귀족 가문 남자들이 으레 그랬듯 전투나 정치적 음모에 의해 사망한 것으로 전해진다. (잔의 아버지였던 몽테귀 역시 그녀가 4살이던 무렵 사망)
그리고..
당대의 귀족 가문 과부들이 으레 그랬듯, 잔 역시 1328년 브르타뉴 지역의 주요 귀족 가문 출신인 기 드 펭티에브르와 재혼한다.
기 드 펭티에브르는 브르타뉴 공국의 왕위 계승과 관련된 주요 인물 중 하나로, 당시 그의 가문은 브르타뉴의 정치적 세력에서 중요한 위치에 놓여 있었다.
헌데..
1330년, 이 펭티에브르 가문의 친인척들이 가문의 유산 보호를 목적으로 결혼을 무효화시키기에 이른다.
만약 이러한 결혼 무효가 없었더라도 잔의 두 번째 결혼생활은 조기에 끝이 났을 것이다. 기 드 펭티에브르가 다음 해인 1331년에 사망했으니까. (앞서 언급했듯, 당대의 귀족 가문 남자들은 전투나 정치적 음모에 의해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이하곤 함)
그렇게..
두 번의 결혼이 끝나고 30세이던 잔은, 클리쏘 가문의 올리비에 3세 드 클리쏘와 세 번째 결혼을 올린다.
올리비에는 브르타뉴의 주요 귀족 가문이자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난 고위 남작으로, 지역의 유능한 군 지휘관이기도 했다.
잔과 올리비에는 슬하에 5명의 자녀를 두고서 행복한 결혼생활을 이어갔다.
브르타뉴에서 왕위 계승 전쟁이 발발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프랑스와 잉글랜드 두 왕국 사이에서 전략적 위치를 고수하던 독립적 봉건 국가 브르타뉴 공국.
왕위 계승 전쟁이 발발하면서 지역의 고위 남작이었던 올리비에는, 프랑스와 잉글랜드 왕국으로부터 각각 지원과 동조를 받던 세력 중 하나에 동참해야 했다.
여기서 프랑스 왕조인 블루아 가문과 평소 긴밀한 관계가 있던 올리비에는, 가문의 일원이자 프랑스 국왕 필리프 6세의 사촌이었던 샤를 드 블루아의 군대에 합류하며 휘관 중 하나로 활약한다.
1342년, 올리비에는 잉글랜드군의 포위 공격을 네 차례나 방어한다.
허나..
이어지는 침공들에 끝내 패퇴하면서 샤를 드 블루아로부터 비난을 받는 신세가 되기에 이른다. 여기서 더 나아가, 샤를 드 블루아로부터 잉글랜드 측과 모종의 협약이 있었던 것이 아니냐는 의심의 눈초리까지 받는다.
결국, 입지가 불안해진 올리비에는 잉글랜드 측으로 망명하기까지 한다.
그리고..
1343년 여름, 프랑스 영토를 방문하던 올리비에는 체포되면서 파리로 이송 후 재판을 받는다.
여기서 올리비에의 친구이자 동료였던 샤를 드 블루아를 포함한 15명이 그에게 반역죄를 선고하면서, 1343년 8월 2일 프랑스 국왕인 필리프 6세의 명령에 따라 공개 참수형에 처해진다.
그렇게 참수당한 올리비에의 머리는, 본보기로 올리비에의 집이 있던 낭트 지역으로 보내져 성문 바깥 기둥에 전시되기에 이른다.
귀족 영애였던 잔이 복수의 화신으로 재탄생하는 순간이었다.
잔은 남편의 복수를 맹세한다.
맹세의 첫걸음으로, 자식들을 데리고서 올리비에의 유해가 전시되는 것을 함께 지켜봤다고 한다.
그렇게 처형 명령을 내린 프랑스 국왕 필리프 6세에게, 무엇보다도 남편을 사지를 내몬 샤를 드 블루아에게 복수를 다짐한다.
잔은 그해 즉각 실행에 돌입했다.
프랑스 왕실에 의해 압수되고 남은 남편의 유산인 영토, 그리고 자신의 보석 등을 팔아 군자금을 마련한 뒤 군함 3척을 마련한다.
잔은 이 군함 3척을 자신의 마음과 같은 검은색 페인트로 칠하고, 돛은 핏빛 어린 붉은색으로 염색한다.
또, 두 아들과 더불어 평소 프랑스 왕국에 불만을 품고 있던 하급 귀족들을 포함한 수백의 병력을 끌어 모은다.
그리하여..
'붉은 돛의 검은 함대'를 이끌고서 바다로 향한 잔은, 필리프 6세 추종자들의 배와 성을 사냥하고 파괴하기 시작한다.
이에 필리프 6세 국왕의 군대가 추적을 시도하지만, 오히려 잔의 악명을 드높여주는 꼴이 되고 만다.
잔은 언제나 적군의 선원들을 무자비하게 살해했으며, 동시에 선원 둘 셋을 살려보내 필리프 6세 앞으로 자신의 악의를 보내고 또 보낸다.
그렇게..
잔은 프랑스 국왕 군대의 표적에서 곧 두려움의 대상으로 변모했고..
사람들은 두려움과 경외심을 담아..
그녀를 '브르타뉴의 암사자'라고 칭송한다.
수년간 사략선을 이끌고 브르타뉴 지역을 넘어 영국 해협의 프랑스 군함들을 박멸하며 유럽 전역에서 공포의 해적이 된 잔.
이에 잉글랜드의 국왕 에드워드 3세가 지지를 보내기에 이른다.
잉글랜드 국왕 측은 잔에게 무기와 전함을 대여해주고, 잔은 언제나처럼 프랑스군을 습격하는 한편 잉글랜드군의 보급선 역할과 더불어 잉글랜드 해안을 보호해 주기도 한다.
1350년, 백년 전쟁을 이끈 첫 번째 프랑스 국왕이자 잔의 복수의 대상이었던 필리프 6세가 건강 악화로 사망한다.
허나, 잔의 복수는 끝나지 않았다.
계속해서 브르타뉴의 암사자로 활동하며 포획한 프랑스 귀족들을 직접 도끼로 참수하던 그녀.
그런 그녀의 복수가 끝난 것은, 해적 생활 13년 째인 1356년이었다.
프랑스군의 집중적인 포화로 인해 붉은 돛의 검은 함대가 마침내 침몰한 것이다.
그렇게 잔은 두 아들과 무려 5일간을 표류한 끝에 구출될 수 있었고, 여기서 기진맥진한 아들 하나가 끝내 사망하고 만다.
직후 잉글랜드로 피신한 잔은, 국왕 에드워드 3세의 배려로 궁정에서 생활하게 된다.
그리고..
그곳에서 국왕의 부관이었던 월터 벤틀리 경과 생애 네 번째 결혼을 올리기에 이른다.
허나..
그녀의 네 번째 결혼 역시 오래 지속되지는 않는다.
1359년 12월경 월터가 사망하고..
잔은 그로부터 몇 주 후 5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유럽 역사에서 길이 남을 백년 전쟁.
그곳에서 사자의 심장을 지닌 채 깊은 족적을 새긴 두 명의 잔.
나라를 구하겠다는 위국의 마음으로..
그리고 자기 사람의 명예와 복수를 위하는 마음으로..
그렇게 스스로의 숭고한 신념을 지키며 그를 행했던 둘.
이 두 잔은..
광기에 찬 한 개인의 목적의식이 때로는 역사를 이끈다는 것을 실증하는 사례일 것이다.
참조
<An Annotated Index of Medieval Women> Echols & Anne & Marty Williams
<h2g2/Jeanne de Clisson - the 'Lioness of Brittany'>
<Pirate Women: The Princesses, Prostitutes, and Privateers Who Ruled the Seven Seas> Duncombe, L. S.
<Women in Medieval Society> Bovey, A.